요한복음 4장 1절에서 42절까지의 내용은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성의 만남”의 이야기입니다만, 이 이야기에는 한 사람의 인인의 신앙이 성장해가는 과정이 쓰여져 있습니다. 처음은 구원을 구하는 “구도”, 다음에 예수님을 믿는 “신앙”, 그리고 예수님을 전파하는 “전도”이라는 것입니다. 구도로부터 신앙으로, 신앙으로부터 전도로, 세 단계의 성장 과정이 쓰여져 있습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은 제1단계의 “구도”입니다.
이 구도 과정에서의 키 워드가 되는 것이 15절에 있는 “그런 물을 내게 주세요” 라는 소원입니다. 예수님께 “물을 내게 주세요” 라고 바라는, 구원을 바라는 마음으로부터 구도생활은 시작합니다. 그런데 “물을 주달라”고 맨 처음에 부탁한 것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여행의 피로와 목의 마름을 느끼신 예수님께서 우물에 푸러 온 여성에게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다. 거기서부터 이 여성의 구도가 시작했습니다. 우리는 뭔가 이유가 있어서 구도생활을 시작합니다. 특별한 이유가 없는 사람도 뭔가의 계기가 있어서 구도생활을 시작합니다. 하여튼 누구나 자신의 생각으로 교회에 다니게 됩니다. 어렸을 때 어머니를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된 사람도 신앙이나 교회나 그런 것을 의식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자신의 생각으로 구도 생활이 시작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오늘의 셩경말씀에 있듯이 예수님의 “물을 좀 달라”고 원하신 것을로부터 사마리아 여성의 구도생활이 시작한 것 같이 우리도 자신의 생각으로 구도생활을 시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불러 주신 것입니다.요한계시록 3장 20절에 에수님께서 사람의 마음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모습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노크 소리를 알아차려서 누군가 왔느냐고 문을 열러 현관에 향하는 “도중”, 예를 들면 그것이 우리의 구도생활일지도 모릅니다. 예수님의 소원, 예수님의 부르심으로부터 우리의 구도 생활은 시작합니다. 그러나 물론 우리에게는 처음부터 그렇게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으로 구도생활을 시작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나중에에서야 그것을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받아들여 기쁨을 가지고 괴로움도 슬픔도 극복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감사하면서 살게 되어 나서 거기서 되돌아보았을 때에 자신의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예수님의 소원으로 시작한 신앙생활이었다고 이해하는 것입니다. 그 때, 우리는 자신의 힘으로 살아 있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나를 살게 해 주신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물을 좀 달라”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성에게 부탁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9절) 라고 불신감을 가지고 거절적인 대답을 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이 견원지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부터 예수님과 사마리아 여성의 불가사의한 문답이 시작합니다. 예수님의 말과 그 여성의 말은 잘 일치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째서” 라고 묻는 여성의 물음에 직접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이 여성의 태도를 섭섭해지시고 자못 자기가 “특별한 사람”인 것 같이 암지하셔서 이 여성의 관심을 끌어내려고 하셨습니다.
한 편, 이 말을 들었던 이 여성도 흥미를 가졌던 것 같습니다. 물을 푸는 것을 갖고 있지 않는데 이 사람은 “어디서 당신이 그 생수를 얻겠사옵나이까”(11절). 이 사람은 자못 위대한 인물이리고 하는데 하나님의 축복을 약석받은 우리 사마리아인의 조상 야고보 보다 위대하냐?” 그런 의문을 예수님께 던졌습니다. 그러나 “생수”(10, 11절)에 대한 이해가 예수님과 이 여성은 전혀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14절)는 물입니다. 즉 그 사람의 영혼을 축복하여 마음의 갈증을 푸는 것입니다. 사람의 내쪽에 위로와 격려, 소망과 안심을 터져 나오게 하는 “생수”입니다.
그런데 이 여성이 생각하고 있는 물은 마시는 물이며, 목의 갈증을 푸는 물입니다. 그러니까 처음부터 이 사람의 회화는 일치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 여성은 예수님의 말씀을 몇 번이나 들어도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15절) 라고 이 여성은 여전히 그것을 마시는 물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내쪽인 영혼을 문제로 삼고 있는데 이 여성은 현실적인 이익을 생각해서 구하고 있는 곳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큰 결정적인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이 여성이 “그 물을 주옵소서” 라고 구하게 된 것입니다. 처음은 예수님께서 이 여성에게 “물을 좀 주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것이 일치하지 않는 회화였습니다만 예수님과 교제 가운데 마침내 이 여성이 “물을 내게 주세요” 라고 원했던 것입니다. 이 여성은 구하는 자로 바꿨습니다. 구도의 인생이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아직도 세상적인 이익을 구하는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처음은 어떤 소원이든 예수님께 뭔가를 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성경을 통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을 때에는 우리도 뭐가 뭔지 잘 모르고 납득하지 못하는 내용이 많은 게 아닐까요? 이런 것으로 믿을 수 있게 될까봐 불안하게 되신 분들도 계실지도 모릅니다.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말슴하시는 내용과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까요? 그러나 사마리아 여성과 예수님의 대화를 보면 처음은 그것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자신의 생각이나 가치관을 가지고 살아온 우리가 그렇게 쉽게 예수님게서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들었던 말씀을 모르는 채로 마음에 받아들인다,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듣고 나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느냐고 생각한다.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는 아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했는데 마리아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 자리에서 부정하지 않고 거절하지도 않고 마음에 둔 것(눅 2:51) 같은 마음의 작업이 우리에게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우리의 생각이나 사는 태도 위에 하나님의 마음을 덮어쓰기 하는 것입니다. 덮어쓰기에는 그 사람 나름대로 시간이 걸립니다. 그러나 그 덮어쓰기가 끝나고 우리 마음이 신앙적인 생각, 사는 태도로 고쳐쓰여질 때가 옵니다. 그 때, 예수님의 말씀이 우리 마음에 들어옵니다. 납득할 수 있습니다. 그 때까지 그 물을 주달라고 계속 구하는 것, 그것이 구도생활에서 중요한 자세입니다. 14절,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14잘). 예수님께서 주시는 물이란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그 말씀을 예배에서 또 매일의 생활에서 계속 읽고 물사하여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무엇을 말씀하시는지를 생각하는 것이 구도 생활입니다. 그 말씀을 토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느기면서 받아들일 수 있었을 때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 속에서 은혜가 넘쳐 나가는 영혼의 샘, “영혼의 우물”로 됩니다. 거기서부터 우리의 신앙이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예수님의 말씀을 묵상하여 받아들인다는 뜻으로서는 다음의 단계인 신앙(생활)에 들어가도 또 다음의 전도(생활)에 들어가도 이 “구도(생활)”은 일생 동안 계속합니다.그것은 자기 속에 있는 영혼의 우물을 깊이 파고드는 작업입니다. 우물의 물은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맑은 물이 나옵니다. 우리는 구도 생활을 일생 동안 하면서 맑고 깊은 하나님의 은혜와 만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하고 계십니다. 그 주님의 목소리를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다음은 우리에게서 예수님을 구하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 구도 생활을 더욱 더 깊이 파고들면서 맑고 깊은 하나님의 은혜와 만나시기 바랍니다.
18.04.08主日(韓国語)「命の水をください」ヨハネ4章1~15節
ヨハネによる福音書4章1節から42節に記されている内容は、「イエスさまとサマリアの女性の出会い」の話ではありますが、この話には、一人の人間の信仰が成長していく過程が描かれております。最初は、救いを求める“求道”、次にイエスさまを信じる“信仰”、そしてイエスさまを宣べ伝える“伝道”というものです。求道から信仰へ、信仰から伝道へ、3段階の成長過程が描かれております。今日お読みしました聖書箇所は、第1段階の“求道”です。この求道の過程でのキーワードとなるのが、15節の「その水をください」という願いです。イエスさまに「水をください」と願う、救いを願う思いから求道生活は始まります。
けれども、最初に「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頼んだのは、イエスさまの方でした。旅に疲れ、のどの渇きを覚えたイエスさまが、井戸に水を汲みに来た女性に、「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頼んだのです。そこから、この女性の求道が始まりました。私たちは、何かしら理由があって求道生活を始めます。特別な理由がない人だって、何らかのきっかけがあって求道生活を始めるわけですね。何であれ自分の意思で教会に通うようになります。子どもの頃、親に教会に連れて来られていた人であっても、信仰とか教会といったものを意識するようになって初めて、自分の意思による求道生活が始まる、と言ってよいでしょう。
でも、本当は今日の御言葉にあるように、イエスさまの「水を飲ませて下さい」と願われたことからサマリアの女性の求道(生活)が始まったように、私たちも自分の意思で求道を始める前に、神さまが、私たちを求めておられたのです。私たちの人生の見えないところで、イエスさまが私たち一人ひとりを招いておられたのだと思うのです。ヨハネの黙示録3章20節に、イエスさまが、人の心の戸口に立って、戸を叩いている姿が描かれています。そのノックの音に気づいて、誰かが来たのかとドアを開けに玄関に向かう“途中”、たとえて言えばそれが、私たちの求道生活なのかも知れません。
イエスさまの願い、イエスさまの呼びかけから、私たちの求道生活は始まります。しかし、もちろん私たちには最初からそのようには理解出来ません。自分の意志で求道生活を始めるものだと思います。それが分かるのはだいぶ後になってからでしょう。イエスさまを受け入れて、喜びを持って、苦しみ悲しみを乗り越えて、導き支えを感謝して生きるようになって、そこで振り返って見た時に、自分の意思ではなく、神さまの招きによって、イエスさまの願いによって始まった信仰生活だったのだと理解するのだろうと思います。その時、私たちは改めて、自分の力で生きている自分ではなく、“生かされている自分”というものを感じることができます。
「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渇きを覚えたイエスさまが、サマリアの女性に頼みました。けれども、すんなりとはいきません。彼女は、「ユダヤ人のあなたがサマリアの女のわたしに、どうして水を飲ませてほしいと頼むのですか」(9節)と不信感をにおわせ、なかば拒絶的な返事をします。それは、先ほどお話したように、ユダヤ人とサマリア人が犬猿の仲だったからです。
ところが、ここからイエスさまとサマリアの女性の不思議な“珍問答”が始まります。イエスさまの言葉とこの女性の言葉はなかなかかみ合いません。イエスさまは、「どうして」と尋ねる女性の問いかけに、まともに答えません。むしろ、女性の態度を残念がり、自分のことを、さも“何者か”であるかのように暗示し、女性の関心を引き出そうとしています。一方、その言葉を聞いたこの女性も興味を引かれたようです。汲むものをもっていないのに、この人は「どこからその生きた水を手にお入れに」(11節)なるのだろう?自分のことを、さも偉大な人物であるかのように匂わせたけれど、あなたは、神の祝福の約束を受け継いだ私たちサマリア人の先祖ヤコブよりも偉いのか?そんな疑問をイエスさまに問いかけます。
けれども、「生きた水」(10, 11節)についての理解が、イエスさまとこの女性では全く違っておりました。イエスさまが言われる水は、「その人の内で泉となる」(14節)ような水であり、つまり、その人の魂を潤し、心の渇きをいやすものです。人の内側に、慰めと励まし、希望と安心を湧き上がらせるような“何か”です。けれども、この女性が考えている水は、飲む水であり、のどの渇きをいやす水であり、普通の水のことです。ですから、初めから二人の会話はかみ合っていないのです。
この女性はイエスさまの言葉を繰り返し聞いても、「主よ、渇くことがないように、また、ここにくみに来なくてもいいように、その水をください」(15節)と、女性はそれを飲む水だと思い込んでい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人の内なる魂を問題にしているのに対して、この女性は、現実的な利益を考え、求めてるところに大きな食い違いがあります。
けれども、一つ、大きな、決定的な変化がありました。それは、女性の方が「その水をください」と、求め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最初は、イエスさまの方が女性に対して、「水を飲ませてください」と頼みました。それが、かみ合わない会話ですけども、イエスさまとの交わりの中で、ついにこの女性の方から「水をください」と願ったのです。この女性は求める者に変わりました。求道の人生が始まったのです。それは、まだこの世的な利益を求めるものだったかも知れません。けれども、最初はどんな願いであれ、イエスさまに何かを求めることから始まるのです。
聖書を通して、イエスさまの言葉を聞き始めた当初は、何だかよく分からない、ピンッと来ない、納得できないという内容が多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こんなことで信じられるようになるのだろうか?と不安を抱くかも知れません。仕方ありません。だって、イエスさまの語る内容と、自分が考えていることがかみ合わないわけですから。けれども、サマリアの女性とイエスさまの対話を見ますならば、最初はそれでいいんだろうなと思います。自分の考えや価値観を持って生きて来た私たちが、そんなに簡単に、イエスさまが語られる神さまの御心なんて理解出来るはずもありません。けれども、聞いた言葉を分からないなりに心に納める。繰り返し聞いて、自分に何を言おうとしているのだろう?と思い巡らす。
イエスさまの母マリアが、わけの分からない息子イエスさまの言葉を、その場で否定せず、拒絶せず、心に納めて思い巡らし続けた(ルカ2章51節)ような心の作業が、私たちにも必要なのです。それはちょうど、私たちの考え方や生き方の上に、神さまの御心を上書きしているようなものです。上書きには、その人なりに時間がかかります。けれども、きっと上書きが終わり、私たちの心が、信仰の考え方、生き方に書き換えられる時が来ます。その時、私たちの心に、イエスさまが語られる御言葉が、スーッと入って来る、納得できるようになるのです。その時まで、「その水をください」と求め続けること、それが求道の大切な姿勢です。14節、「わたしが与える水はその人の内で泉となり、永遠の命に至る水が湧きでる」(14節)。イエスさまが与える水とは、イエスさまの御言葉です。その御言葉を、礼拝で、また毎日の生活で読み続け、黙想し、イエスさまが自分に何を語りかけておられるのかを考え続けるのが求道生活です。その御言葉が語りかける恵みを感じ取り、受け取ることができた時、イエスさまの御言葉は、私たちの内側で、恵みがあふれ出す魂の泉、“魂の井戸”となります。そこから、私たちの信仰が始まるのです。
とは言っても、イエスさまの御言葉を黙想し、受け取るという意味では、仮に次の段階の信仰(生活)に入っても、またその次の伝道(生活)に入っても、この“求道”の歩みは生涯、続きます。それは、自分の内にある魂の井戸を深く、深く掘り下げる作業なのです。井戸の水は深く掘り下げるほど、清い水が出て来ます。私たちは、求道の歩みを生涯続けながら、清く深い神さまの恵みと出会うのです。どうぞ皆さん、今日もイエスさまは私たちに語りかけて下さっています。イエスさまが私たちを求めておられます。その主の御声をお聞き下さい。そして、今度は私たちの方からイエスさまに求める者になって下さい。この求道の歩みをもっともっと深く掘り下げながら、清く深い神さまの恵みと出会って下さ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