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본문 23절에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 라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믿음은 “표적”을 보고 믿었던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어떤 “표적”을 하셨는지 여기에는 쓰여져 있지 않습니다. 그러나 병을 고치시거나 거기에 하나님의 힘이 나타나 있다고 사람들이 믿는 것 같은 기적을 예수님께서는 하셨을 것입니다. 그것을 보고 사람들은 이 사람이 하나님의 사람이시며 자기들을 구원하시는 구세주라고 믿은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그의 몸을 그들에게 의탁하지 아니하셨다”(24절)고 써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신용하지 않으셨습니다. 그것은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표적”을 보고 믿는 신앙이란, 반대로 말하면, 표적을 보이지 않으면 믿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표적”이란, 사람의 힘을 초월한 것이며 하나님의 힘이 일하신다고 증명하는 것이라고 말씀 드렸습니다만, 더 한 마디 가하면 사람의 힘을 초월한 하나님의 힘으로 자신의 원망을 이루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 준다면 구세주라고 믿는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며, 이루어 주지 않으면 하나님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 믿지 않는다는 자세가 그 마음 속에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원했던 것이 모두 다 마음대로 이루어질 리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는 신앙은 실은 우리 인생에 걸맞지 않습니다. 신앙이 그렇게 편리한 것이라면 모든 사람이 신앙을 가지죠. 물론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는 마음, 괴로움, 고통의 깊음은 누구나 압니다. 경험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소원의 해결을 신앙에 찾으려고 하는 것은 자기를 중심으로서 신앙을 생각하는 자기중심성의 나타남이며 자기 마음대로 하나님을 움직이려고 하는 죄의 나타남입니다. 그러한 자기중심성이 사람들의 마음 속에 보이기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을 신용하지 않으셨습니다. 언젠가 떠나 가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 신용받는 신앙이란 어떤 신앙일까요? 신앙이란 우리의 소원을 하나님께 강요하는 신앙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소리를, 하나님께서 무엇을 구하고 계시는지를 듣고자 하는 것입니다. 즉 가지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의 신앙입니다. 듣는 신앙이며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신앙,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입니다. 그러한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신용하시는 것입니다. 구약성서에 다니엘이 있습니다만, 다니엘과 함께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라는 두터운 신앙을 가지는 세 사람이 나옵니다. 어떨 때,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자신의 권력의 상징으로서 거대한 금 신상을 만들어 모든 사람에게 이 신상을 절하라고 강제했습니다. 그리고 절하지 않으면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저 넣음을 당하리라고 정했습니다. 그런데,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의 세 사람은 금 신상을 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이 세 사람을 질투하는 바벨론의 관리들이 왕에게 고자질하여 이 세 사람은 타는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이 세 사람이 왕에게 말한 것이 다음의 말씀입니다.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라.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다니엘 3장 16-18절) 그렇게 해서 세 사람은 풀무불 가운데 던져 넣음을 당했는데, 하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구원해 주셨습니다.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구원받는다, 그것은 바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의 힘의 증명인 “표적”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과”에 불과합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렇게 되지 않는 것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런 결과가 되었기 때문에 하나님을 맏었던 게 아닙니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타는 풀무불 속에서 멸망하여도 그들은 하나님을 믿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결과에, 현실에 좌우되지 않는 신념이며 자기 인생의 사는 태도, 신앙에 의거하는 사는 태도였습니다.
물론, 하나님에 대해서 소원을 가지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원하고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우리 인간의 괴로움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자신의 함에 절망하여 하나님께 의지할 수 밖에 없는 현실이 있습니다. 거기서 기도하고 원하는 것에 무슨 사양함도 필요없습니다. 단 중요한 것은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자기가 원한대로 항상 이루어지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자기가 원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많지요.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믿는다. 자기가 원한대로 되지 않아도 하나님께서 최선으로 해 주신다고 믿는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시고 지켜 인도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믿는다. 그런 신앙이 있는 데에 소망과 평화가 생깁니다. 그리고 그렇게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신앙,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는 신앙을 예수님께서는 신용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라는 신앙을 가지는 것은 쉬운 것이 아닙니다. 항상 시련이 있고 갈등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그때, 자기 마음 속에 있는 자기중심성을 즉 자기 마음데로 하지 못하면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제멋대로의 마음을 다시 한번 생각할 것이 필요합니다. 그렇게 자기 자신을 다시 돌아보고 자신의 마음 속에 있는 것을 깨달아 인정하지 않으면 우리는 참된 의미로 하나님을 믿는 것도 하나님께 신뢰받는 것도 못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죄를 안고 있습니다. 그것은 추한 생각이거나 은밀한 욕망이거나 누구에게나 말하지 못하는 마음의 비밀이라는 것을 안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것 같은 관념이나 사상이나 도덕이라는 곳에서는 인간은 아무도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부모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친구에게도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자기 혼자 괴로워하는 그곳에 밖에 인간은 하나님을 만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런 “마음의 무거운 짐”을 갖고 있습니다. 그것을 인정하여 하나님 앞에 털어놓는다. 하나님 앞에서 알몸이 된다. 그 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서 “나”를 받아들여 주시는 분이시라고 알 것입니다. 나를 인정하여 사랑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아는 것입니다. 나를 신뢰해 주시는 분이시라고 압니다. 그리고 거기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의 마음을 따르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이 생겨 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마음의 교제를 하여 예수님께 신뢰받는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미숙하고 불안한 걸음걸이라도 우리는 열의를 가지고 예수님께 신뢰받는 신앙을 향하여 걸어갑시다. 기도드리겠습니다.
18.01.14主日「人の心の中にあるもの」ヨハネによる福音書2章23~25節
23節に「イエスは過越祭の間エルサレムにおられたが、そのなさったしるしを見て、多くの人がイエスの名を信じた」とあります。人々はイエスさまを信じました。でも、その信仰とは、「しるし」を見て信じる信仰でした。イエスさまがエルサレムで、どんな「しるし」をなさったか、ここには書かれていません。けれども、病の癒しなど、そこに神さまの力が働いていると人々が信じるような奇跡の業を、イエスさまはなさったのでしょう。それを見て、人々は、この人は神の人であり、自分たちを救う救世主だと信じたのです。
けれども、イエスさまは「彼らを信用されなかった」(24節)と記されています。彼らの信仰を信用しなかったのです。それは、「何が人間の心の中にあるかをよく知っておられた」(25節)からです。「しるし」を見て信じる信仰とは、逆に言えば、しるしを見せなければ信じない、ということです。ところで、「しるし」とは、人の力を越えた奇跡的な出来事であり、神さまの力が働いていると証明するような出来事だと言いました。もう一言加えるならば、人の力を越えた神の力によって、自分の願望を叶えてくれる出来事です。だから、自分の願いが叶えられるなら、救い主と信じる。神さまと信じる。しかし、叶えられないならば、神さまとは認めない、神さまとは信じない、という姿勢が、その心の中にあるのです。
けれども、願ったことがすべて自分の思うように叶えられるはずがありません。そして、そのように信じることほど、人生にそぐわない信仰はありません。信仰がそんなに便利なものであるならば、まさにすべての人が信仰を持つでしょう。もちろん、人がそのように願う気持、切なさ、苦しみの深さは、だれしも分かります。経験しています。けれども、その願いの解決を信仰に求めようとすることは、自分を中心に信仰も定めようとする自己中心性の現れ、自分の意のままに神さまを動かそうとする罪の現れです。そのような自己中心性が人の心の中に垣間見えるために、イエスさまは、人々を信用されなかったのです。いつか離れ去っていくことを知っていたのです。
では、イエスさまから信用される信仰とは、どんな信仰でしょうか。信仰とは、私たちの願いを神さまに押し付ける信仰ではなく、神の声を、神さまが何を求めておられるかを聞こうとすることです。つまり、自己中心ではなく、神さま中心の信仰です。聞く信仰であり、神の御心に従う信仰、神さまに仕える信仰です。そのような信仰を、イエスさまは信用されるのです。
旧約聖書のダニエル書がありますが、ダニエルと共に、シャドラク、メシャク、アベドネゴという篤い信仰を持つ、3人が出て来ます。ある時、バビロニアの王ネブカドネツァルは、自分の権力の象徴として巨大な金の像を造り、すべての人にこの像を神として礼拝せよ、と強制します。そして、礼拝しない者は、燃え盛る火の炉に投げ込まれると定めるのです。ところが、シャドラク、メシャク、アベドネゴの3人は金の像を拝みませんでした。そこで、3人を妬むバビロニアの役人たちが王に告げ口し、3人は燃える炉の中に投げ込まれます。しかし、その時、3人が王に向かって答えたのが次の言葉です。「わたしたちのお仕えする神は、その燃え盛る炉や王様の手からわたしたちを救うことができますし、必ず救ってくださいます。そうでなくとも、ご承知ください。わたしたちは王様の神々に仕えることも、お建てになった金の像を拝むことも、決していたしません」(ダニエル書3章16~18節)。
そのように言って、3人は炉の中に投げ込まれるのですが、神さまは燃える炉の中から3人を救い出されたのです。燃える炉の中に投げ込まれて、救われる。それは奇跡です。神の力の証明である「しるし」です。けれども、それは“結果”に過ぎません。結果的にそうなっただけです。そうならないことだって、あるわけです。そして3人は、そういう結果になったから、自分たちの願った通り、都合の良い結果になったから、神さまを信じたのではありません。「そうでなくとも」彼らは神さまを信じていたのです。たとえ燃える炉の中で滅びようとも、彼らは神を信じることをやめませんでした。それは、結果に、現実に左右されることのない信念であり、人生の土台である曲げられない生き方なのです。
もちろん、神さまに対して願いを持つこと自体が悪いのではありません。そのように願い、祈らざるを得ない人間の気持、切なさ、苦悩の深さを、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自分の力に絶望し、途方に暮れ、神さまに頼る以外にない現実があります。そこで祈り願うことに、何の差支えも、遠慮もいりません。ただ、大切なのは、「そうでなくても」という心の姿勢です。自分が祈り願ったことが、常に叶えられ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自分の願い通りにはならないことの方が多いでしょう。「そうでなくても」信じる。自分が願ったようにいかなくても、神さまが最善にしてくださったと信じる。神さまは、自分を愛し、支え、導いてくださる方だと信じる。そういう信仰があるところに、希望と平和が生まれます。そして、そのような「そうでなくても」という信仰、神さまに聞き、従う信仰を、イエスさまは信用してくださるのです。
もちろん、「そうでなくても」という信仰を持つことは、簡単ではありません。絶えず試練があり、葛藤が起こります。でも、その時、自分の心の中にある自己中心性を、人生は自分の思うようにならなければ受け入れられない、という身勝手さを、改めて見つめ直すことが必要なのです。そのように、自分を見つめ直し、自分の心の中にあるものに気づき、認めるのでなければ、私たちは、本当の意味で、神さまを信じることも、神さまに信用されることもできないからです。神さまと出会うことができないからです。
私たち人間は、誰もが罪を抱えております。それは、醜い考えであったり、密かな欲望であったり、誰にも言えない心の秘密というものを抱えております。私たちが誰にでも言えるような、観念や思想や道徳と言ったところでは、人間は誰も神さまに会うことはできません。親にも言えず、先生にも言えず、誰にも言えないで自分だけで(一人で)悩んでいる、また恥じている、そこでしか人間は神さまに会うことはできないのかもしれません。
人間は、誰しもこのような“心の重荷”を持っています。それを見つめ、認め、神さまの前に明かす。神さまの前に裸になる。そこで初めて、私たちは、神さまが“私”を受け入れてくださる方だと知るのです。自分のことを認め、赦し、愛してくださる方だと知ります。自分を信頼してくださる方だと知ります。そして、そこにこそ、神さまの御言葉を聞き、神さまの御心に従い、神さまに仕える信仰が生まれてくるのです。皆さん、神さまと心の交流をし、イエスさまに信頼される信仰を持ちたいと思うのです。たどたどしくても、至らない者であっても、私たちは、熱意を持って、イエスさまに信頼される信仰を目指してい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