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에 등장하는 니고데모는 바리세인의 교사이며 산헤드린의 의원이었습니다. 유대교에는 몇 개의 종파가 있고 그 가운데 바리세인은 하나님의 규칙인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고 있었습니다. 니고데모는 율법 교사이며 의원의 한 사람이었으니까 사회적 지의도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그런 니고데모가 “밤”에 남몰래 예수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선생”(2절)이라고 인정하여 예수님의 언행에 찬동의 뜻을 표시했습니다. 어쩌면 니고데모는 제사들을 중심으로 성전에서 행하여지고 있는 장사나 돈 바꾸는 것에 대해서 마음이 괴로워하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분명히 비판하거나 하는 행동을 취하는 것은 못했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셔서 성전의 부패에 대해서 “내 아버지의 집으로 장사하는 집을 만들지 말라”(요 2:16)고 분명하게 심판을 내리셨으니까 니고데모는 감동하여 그 행동을 인간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할 수 없다”(요 3:2)고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바리새인의 교사이며 의원이기도 하는 입장상, 예수님에 대한 칭찬을 분명하게 나타나면 어떤 비난을 받을지 모릅니다. 그것을 두려워하여 니고데모는 밤에 남몰래 예수님을 찾아온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뜻밖인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칭찬하기 위해 온 니고데모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 대한 새 결단을 강요당했던 것입니다. 3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3절) 예수님께서는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3절) 라고 하셨습니다. 너희에게 칭찬받았다고 하더라도 나는 너희들 바리새인에 대한 비난을 삼킬 수 없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너희들은 자기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하니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하지만, 지금의 상태 그대로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뜻밖인 예수님의 말씀에 니고데모는 당황했을 것입니다. 엉겁결에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이싸옵니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 라고 대답해 버린 것입니다.
물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은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바리새인들이 자부하는 신앙을 고치라고, 자기들이 “이것이 옳다”고 믿고 있는 것을 다시 한 번 제검토해 보라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율법을 지킨다는 “행함”을 하나님께서는 기뻐해 주신다고 너희들은 생각하고 있지만, “자신의 힘”으로서는 결코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 게다가 너희들은 자칫하면 자신의 행함과 힘을 자랑하고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깔보고 그런 인간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심판하고 있다. 그런 태도를 하나님께서는 기뻐하실 리가 없찮아. 하나님 나라란 우리의 힘이나 행함에 관계없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셔서 주시는 “은혜의 선물”인 것이다. 그 은혜를 깨달아 참된 의미로 겸손하게 되어야 한다. 겸손히 되어 은혜에 감사하여 행하는 “사랑의 행함”이야말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진짜 행함이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렇게 신앙을 고치는 것, 사는 자세를 고치는 것, 그것이 “거듭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식 전환을 예수님께서는 “물과 성령으로 난다”(5절)는 말로 나타내셨습니다.“물”이라는 것은 세례 요한이 회개의 칭표로서 행했던 세례를 의미하고 있습니다. 세례는 자신의 인생과 생활에 의식 전환이 필요하다고 인정한 사람의 결의의 칭표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물론 중요한 것은 “성령”에 인한 의식 전환, “성령”에 인한 내쪽의 변화입니다.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6절), “육”의 생각으로 즉 자기 자신의 인간적인 생각이나 상식으로 살아온 사람이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6절), 영적으로 생가하게 되는 것, 하나님의 마음으로 생각하여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전환되어 변화된 삶을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거듭난다”고 표현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영으로 태어난다는 의식 전환을 예수님께서는 더 하나, 아주 유니크한 말씀으로 표현하셨습니다. 8절입니다. “바람이 임의로 불매 네가 그 소리는 들어도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나니 성령으로 난 사람도 다 그러하니라.”(8절) 어째서 갑자기 “바람”의 이야기로 되는지 이유가 모릅니다. 마치 “수수께끼” 같은 말입니다. 하나만 분명한 것은 그리스 말로 “영”과 “바람”은 같은 “부뉴마” 라는 말이라는 것입니다. 나뭇가지가 흔들리는 소리나 바람이 가르는 소리를 들으면 바람이 불어 있는 것이 압니다. 그렇게 바람이 지상을 부는 것 같이 하나님의 영이라는 바람도 우리 내쪽을 눈에 보이지 않아도 지나가고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아마 예수님을 만나기까지는 다른 바리새인들과 마찬가지로 “이것이 옳다”고 자신을 정당화시켜 독선적으로 살아 자신을 고치는 여지도 없는 사람(마음의 여유가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거듭나야 하겠다”는 회개를 강요하는 말씀으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아야 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율법의 교사이지만 과연 율법을 올바르게 이해하고 지켜 있을까? 과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 있을까?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 묻고 물음 받는다는 틈새기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 틈새기에서 그는 예수님의 “거듭나야 하겠다”는 말씀을 맛보는 자가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의 마음 속에 틈새기를 만들어 그 틈새기를 지나가는 것 같이 일하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이후에 니고데모가 등장하는 것은 요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을 옹호하는 장면과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내려놓고 매장하는 수배를 한 장면에 나올 뿐입니다. 성경에는 없습니다만, 틀림없이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었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거듭났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 내쪽에 틈새기를 만들어 그 틈새기를 자유롭게 지나가십니다. 그 바람에 흔들려서 우리 인생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여러분, 우리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것으로 우리 내쪽에 틈새기를 가지는 사람이 됩시다. 예수님이시라는 바람이 우리 마음 속에서 불고 있습니다. 여러분, “성령으로 거듭난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18.01.21主日「心に霊の風が吹く」ヨハネによる福音書3章1~15節
今日の聖書箇所に登場するニコデモは、ファリサイ派に属する教師であり、サンヘリドン(72人の議員によって構成される最高法院)の議員でした。ユダヤ教にはいくつかの宗派があり、その中でファリサイ派は、神さまの掟である律法を厳格に守守ることで、神さまに喜ばれ、神の国に入ることができると信じておりました。ニコデモは、律法の教師であり、議員の一人でしたから社会的な地位もある人物でした。
そんな彼が、「ある夜」(2節)ひっそりとイエスさまを訪ねて来たのです。そして、イエスさまのことを、「神のもとから来られた教師」(2節)であると認め、その言動に賛同の意を表しました。もしかしたらニコデモは、祭司たちを中心にして神殿で行われていた商売や両替を心苦しく思っていたのかも知れません。けれども、はっきりとした批判や思い切った行動はなかなか取れなかったのでしょう。ところが、そこにイエスさまが現れて、神殿の腐敗ぶりに、「わたしの父の家を商売の家としてはならない」(2章16節)と明らかな裁きを下したわけですから、ニコデモとしては、感動して、その行動を人間業ではなく「神のもとから来られた」と認めずにはおられなかったのです。
けれども、ファリサイ派の教師であり、議員でもある立場上、イエスさまに対する称賛を明らかに表すと、周りからどんな目で見られ、どんな非難を受けるか分かりません。それを恐れて、ニコデモは夜、こっそりとイエスさまのもとを訪れたのでした。ところが、ここで思いがけない事が起こります。イエスさまを賞賛するために来たニコデモ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ニコデモに対して新たな決断を迫られたのです。3節、「人は、新たに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3節)
イエスさまは「はっきり言っておく」(3節)と言います。あなたにほめられたからと言って、私は、あなたがたファリサイ派に対する非難を飲みこむことはできないよ、と言われるのです。あなたがたは、自分たちは神の国を見ることができる、神の国に入ることができると思っている。けれども、今のままでは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新たに生ま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よ、とイエスさまは言われるのです。思いがけないイエスさまの言葉にニコデモは戸惑ったに違いありません。思わず、「年をとった者が、‥‥もう一度母親の胎内に入っ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4節)と、トンチンカンな答えを返してしまうのです。
もちろん、イエスさまが言っているのは、そん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ファリサイ派が自負している信仰を改めなさいと、自分が“これで良い”“これが正しい”と思いこんでいるものを、もう一度見直してみなさい、と指摘しておられるのです。律法を守るという“行い”を神さまは喜んでくださると、あなたがたは思っているが、“自分の力”では、決して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しかも、あなたがたはともすれば、自分の行いと力を誇り、律法を守れない人々を見下し、そのような人間は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と裁いている。そのような態度を、神さまが喜ばれるはずがないではないか。神の国とは、私たちの力や行いに関係なく、神さまが私たちを愛して、与えてくださる“恵みのプレゼント”なのだよ。その恵みに気づいて、本当の意味で謙遜になりなさい。謙遜になって、恵みに感謝して行う“愛の行い”こそ、神さまに喜ばれる本物の行いなのだ、とイエスさまは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そのように信仰を改めること、生きる姿勢を改めること、それが「新たに生まれる」ということに他なりません。このような意識転換を、イエスさまは、「水と霊によって生まれる」(5節)という言葉で表わされました。「水」と言うのは、バプテスマのヨハネが悔い改めのしるしとして行っていたと、洗礼を意味しております。自分の人生と生活に意識転換が必要であることを認めた人の決意のしるしでもあるわけです。そして、もちろん大切なのは、「霊」による意識転換、「霊」による内側の変化です。「肉から生まれ」(6節)、「肉」の思いで、つまり自分自身の人間的な考え方や常識で生きて来た人が、「霊から生まれ」(6節)、霊的に考えるようになること、神さまの心で考え、生きるようになることです。そのように転換され、変化した生き方を、イエスさまは、“霊によって新たに生まれる”と表現したのです。
このように、霊によって生まれるという意識転換を、イエスさまはもう一つ、とてもユニークな、不思議な言葉で表わされました。8節です。「風は思いのままに吹く。あなたはその音を聞いても、それがどこから来て、どこへ行くかを知らない。霊から生まれた者も皆そのとりである。」(8節) どうして、いきなり「風」の話になるのか、わけが分かりません。まるで“謎々”のような言葉です。ただ一つ、はっきりしているのは、新約聖書は元々ギリシア語で書き記されましたが、そのギリシア語で、「霊」と「風」は同じ“プニューマ”という言葉だということです。
木の枝が揺れる音や風切り音を聞くと、風が吹い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す。けれども、それは目には見えず、私たちの意思とは関係なく、思いのままに吹きます。そのように風が地上を吹くように、神の霊という風も、私たちの内側を、目には見えずとも自由に吹き抜け、私たちを、自分でも考えていなかった方向へ、生き方へ導いて行く、という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
ニコデモは、きっとイエスさまと出会うまでは、他のファリサイ派の人たちと同じように、“これが正しいのだ”と自分を正当化して、独善的に生きていて、自分を見直す余地を持たない人(心に隙間のない人)であっ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それが、イエスさまの「新たに生まれる」という悔い改めを迫る言葉によって、自分自身を問い直さなければならなくなりました。自分は果たして、神さまの思いに沿って生きているのだろうか?自分は律法の教師だけれども、果たして、律法を正しく理解し守っているのだろうか?と。彼の心の中に、問いつ問われつという間ができたのです。そしてその間で、彼はイエスの「新たに生まれなければ」という、言葉を味わい続けるものとな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ニコデモの心の中に間をつくり、その間を吹き抜けるように働いておられただろうと思います。聖書の中では、この後、ニコデモが登場するのは、ヨハネによる福音書7章でイエスさまを擁護する場面とイエスさまを十字架から下ろし埋葬する手配をした場面に出てくるだけです。聖書にはありませんが、きっとイエスさまを救い主として信じ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
イエスさまは、御言葉によって私たちの内側に隙間をつくり、その隙間を自由に吹きぬけて行かれます。その風に揺らされて、私たちの人生に変化が起こります。皆さん、私たちも、イエスさまの御言葉を聞くことによって、内側に“隙間(間)”を持つ人、「霊から生まれた者」に変えていただきましょう。そして、イエスさまの御言葉に、イエスさまご自身に、心の内側を吹き抜けていただきながら、自分を見直す人間として生きていき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