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들은 할례를 행합니다. 그것이 하나님께 선택받는다는 칭표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본래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기 때문에 세례를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세례가 필요한 것은 하나님께 선택받지 않는 이방인들이라고 유대인들은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세례 요한 밑으로 세례를 받으러 왔습니다. 그것은 많은 유대인들이 “나는 이것으로 좋을까?” “이대로 좋은 것일까?” 라고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지요.
예수님도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습니다. 예수님도 인간으로서의 자기에게 괴로워하시면서 거듭나고 싶다고 원하셔서 세례를 받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에게서 세례를 받으시고 잠시 동안 요한과 행동을 같이 하셨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요한이 스승(선생)이며 예수님은 제자라는 관계입니다. 그 후,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떠나서 독자적인 선교 활동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운동은 이어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제자들에게서 보면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보살핌을 받았는데 요한 선생님을 배신하는 것 같은 짓을 했어. 그뿐이라면 또 모르되, 요한 선생님은 예수를 칭찬하여 구세주다,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이로다”(요 1:29) 라고 간증하시니까 많은 사람들이 예수 밑으로 가 버렸어. 도대체 요한 선생님은 무엇을 생각하고 있을까? 요한의 제자들의 그런 의문과 조바심이 26절의 말에 담기고 있습니다.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26절)
요한의 제자들에게서 보면 배신자 예수가 성공하고 있는 것 같이 보였지요. 그것은 일종의 질투였습니다. 우리는 자기와 남을 비교합니다. 자기가 잘 되지 않는데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또는 나보다 남이 뛰어난 것을 보면 그 사람에게 질투를 느낍니다. 물론 그 감정을 표면에 내는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남과 비교해서 질투를 느끼는 것은 마음의 추함이라고 모리 속에서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터져 나오는 그 질투심을 자기 스스로서는 어쩔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남과 비교하는 죄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생애를 통해서 들러붙어야 하는 과제의 하나입니다. 예수님의 용서하심을 기도하면서 들러붙어야 하는 인생의 과제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의 물음에 대답하는 요한의 말 속에는 그런 질투심이 조금도 느끼지 못합니다. 오히려 기뻐했습니다. 자기를 떠나갔던 예수님의 상황을 알아 “기쁨으로 충만하였다”(29절)고 하고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쉬하여야 하리라”(27절) 라고도 했습니다. 어쩨서 이렇게 생각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는 27절에 있습니다. “만일 하늘에서 주신 바 아니면 사람이 아무 것도 받을 수 없느니라.”(27절) 이 한 마디에 요한의 마음을 담고 있습니다.
요한의 제자들은 요한에게 오는 사람이 줄어지고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이 늘어가는 것에 조바심하여 질투심을 품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에게 오는 사람도 예수님에게 가는 사람도 “하늘에세 주신 바”라고 요한은 생각했습니다. 자신의 실력이라든지 인기라든지 그런 문제가 아니라 하늘이 즉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들을 나에게 주시고 예수님에게 주신다. 즉 이 현실의 배후에는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이 있다고 요한은 받아들였습니다.
요한은 요한으로 자기가 해야하는 일에 전력을 다했지요. 그 결과 자기가 쇠해가도 그것은 헛된 일이 아니다,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의미 있는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목적은 사람을 구원하는 것이다. 그러기 위한 계획 가운데 나는 쓰여져 왔다. 그리고 사람을 구원한다는 목적의 배턴을 예수님께 넘겼다. 앵커로서 달리는 자는 예수님이시고 내가 아니다. 그런 마음으로 넘긴 배턴을 잡아 이 세계의 구원이라는 골로 향하여 달리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보고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로 요한은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을 꿰뚫어 보는 신앙의 눈이 성숙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조바심하지 않습니다. 질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선교 활동 가운데 하나님의 계획이 실현한 것을 받아들여 기뻐하고 있는 것입니다. 기쁨으로 충만했습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쇠해가는 자기를 그렇게 간단이 받아들이지 못하지요. 분해하거나 한탄하거나 조바심하거나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여 힘껏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 쇠함이나 실패가 무의미도 헛됨도 아니고 그것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이 세상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시점을 가질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획을 믿는 신앙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에는 받드시 하나님의 계획이 있습니다. 모든 것을 의미있는 것으로 하는 모든 것이 하나님의 영광으로 이어지는 계획이 있습니다. 그것을 믿고 그것을 내다보는 신앙의 눈을 가져야 합니다. 그 눈이 있으면 우리는 낙심이나 조바심으로부터 해방될 수 있습니다. 감사와 기쁨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계획에 있어서 요한은 결혼식에 비유했습니다. 예수님이야말로 주역의 “신랑”(29절)이며 자기는 “서서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29절)라고요. 자기는 신랑의 친구이기 때문에 신랑 곁에 신부가 오는 것을 기뻐하고 축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신랑의 음성을 듣는 친구”, 여기서 친구라고 번역된 말은 그리스 말로 휘로수라는 말입니다. 원례 사랑이라는 뜻입니다. 사랑이 있는 친구, 아니면 사랑하는 친구라는 뜻이 됩니다. 요한은 스승의 입장이 아니라 예수님을 사랑하는 친구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말씀이 있습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사람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리면 이보다 더 큰 사랑이 없나니, 너희는 내가 명하는 대로 행하면 곧 나의 친구라. 이제부터는 너희를 종이라 하지 아니하리니...”(요 15:12-15)
여기에게도 같은 휘로수라는 말이 쓰여져 있습니다. 예수님의 친구란 예수님의 계명, 예수님께서 명하신 것을 행하는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명하신 계명이란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 사랑받은 것 같이 사람을 사랑하여 서로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사랑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로서 “버린다”는 것입니다. 진짜 사랑이란 또 진짜 친구란 이 사람과 사귀면 손해를 보는지 득을 보는지 라는 계산을 버릴 수 있는 사람입니다. 살대방을 생각하여 자신의 주장이나 구애됨을 버려서 상대를 맏아들이는 사람입니다. 그것과 반대로 때로는 상대와의 평온한 관계를 버려서 말하기 어려운 것도 말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서로 용서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그 궁극이 “친구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지요. 요한은 예수님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번영을 버리는 친구의 각오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크리스천은 예수님의 마음을 묻고 따라가는 종입니다. 예수님의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종입니다. 그러나 그런 우리들을 예수님께서는 “친구”라고 불어주십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여 사람을 사랑하는 길을 함께 걷는 “친구”라고 인정해 주십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사랑이 밫나도록, 번영하도록, 사람에게 전할 수 있도록 우리도 좋은 친구가 되어 성실하게 걸어갑시다. 기도드리겠습니다.
18.02.04主日「喜びで満たされている」ヨハネによる福音書3章22~30節
ユダヤ人たちは割礼を施します。それが神さまに選ばれているしるしです。ですから、洗礼を受ける必要はないわけです。要なのは、神さまに選ばれていない異邦人たちだとユダヤ人たちは考えておりました。なのに、多くの人がバプテスマのヨハネのもとに洗礼を受けに行ったのです。それは、自分はこれでいいのだろうか?このままでいいのだろうか?‥‥ユダヤ人の多くが、そのように感じていたからでしょう。
イエスさまもヨハネのもとに来て、洗礼をお受けになりました。イエスさまもきっと、人間としての自分に苦しみながら、変わりたい、新たに生まれたいと願って、洗礼をお受けになったのであろう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は、ヨハネから洗礼を受け、しばらくヨハネと行動を共にしたようです。人間的に見れば、ヨハネが師(先生)であり、イエスさまは弟子という関係です。その後、イエスさまは、ヨハネから離れて、独自の宣教活動を始めます。けれども、洗礼運動は受け継ぎました。
ところが、ヨハネの弟子たちにしてみれば、それが気に入らないわけです。あんなに目をかけてもらったのに、師匠を裏切るようなマネをしやがって。それだけならまだしも、うちの師匠があいつのことをほめて、救世主だ、「世の罪を取り除く神の小羊」(1章29節)だ、などと証しするものだから、かなりの人があいつの方に流れている。いったいうちの師匠は何を考えているのか?ヨハネの弟子たちの、そんな疑問と苛立ちが26節の言葉に込められていると思われます。「ラビ、ヨルダン川の向こう側であなたと一緒にいた人、あなたが証しされたあの人が、洗礼を授けています。みんながあの人の方へ行っています」(26節)。
ヨハネの弟子たちにしてみれば、裏切り者のイエスが成功しているように見えたのでしょう。それは一種の妬みでありました。私たちは、自分と人を比べます。自分はうまく行っていないのに、人がうまく行っているのを見ると、あるいは自分よりも人の方が優れているのを見ると、その人が妬ましくなります。もちろん、その感情を表面に出すことはありません。そんなことは恥ずかしいことですし、人と比べてそんなことに妬みを感じるのは心の醜さだと頭では分かっていました。けれども、湧き上がるその妬み心を、自分ではどう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私たちは、比較の罪からなかなか逃れることができません。それは、生涯をかけて取り組まなければならない課題の一つです。イエスさまの赦しを祈り、仰ぎながら、取り組んでいくべき人生の課題です。
けれども、弟子たちの問いかけに応えるヨハネの言葉の中には、そのような妬みが微塵も感じられません。むしろ喜んでいる。自分のもとから巣立っていったイエスさまの様子を知って、「喜びで満たされている」(29節)と言い、「あの方は栄え、わたしは衰えねばならない」(30節)とさえ語っています。どうしてこのように考えることができるのでしょうか?その理由は27節にあります。
「天から与えられなければ、人は何も受けることができない」(27節)。この一言に、ヨハネの思いのすべてが込められています。
ヨハネの弟子たちは、ヨハネのもとに来る人が減り、イエスさまの方へ行く人が増えて来たことにいら立って、妬みを感じています。けれども、自分のもとに来る人も、イエスさまのもとに行く人も、“天から与えられたもの”だとヨハネは考えているのです。ただ単に、自分の実力とか人気とか、そういった問題ではなく、天が、すなわち神さまが、これらの人々を自分に与え、イエスさまに与えている。つまり、この現実の背後には、神さまの御心、ご計画が働いていると、ヨハネは受け止めているのです。
ヨハネはヨハネで、自分のなすべきことに全力を注いだでしょう。その結果、自分が衰えていくとしても、それは無駄ではない、神さまのご計画の中で意味のあることだと信じているのです。神さまの目的は、人を救うことである。そのためのご計画の中で、自分は用いられてきた。そして、人を救うという目的のバトンを、イエスさまに手渡した。アンカーとして走るのはイエスさまであって、自分ではない。そんな思いで、つないだバトンを握って、人の救い、この世界の救いというゴールに向かって走る、勝利のゴールに向かって走るイエスさまの姿を見て、喜んで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そういう意味で、ヨハネは、神さまの御心、ご計画を見通す信仰の目が成熟しています。確固としています。だから、苛立たない。妬まない。落ち着いている。そして、イエスさまの宣教活動の中に、神さまのご計画が実現したことを受け止めて喜んでいるのです。喜びで満たされているのです。とは言え、私たちは、衰えていく自分をそう簡単に受け入れることはできないでしょう。悔しがったり、嘆いたり、苛立ったりするかも知れません。けれども、そのままでは自分の人生を受け入れて、精一杯生きることができなくな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その衰えや失敗が無意味でも無駄でもなく、ポジティブに受け止めるためには、この世の目ではなく、神さまの視点が必要です。神さまのご計画を信じる信仰が必要です。
私たちの人生には、きっと神さまのご計画があります。すべてを意味あるものとする、すべてが神の栄光に結びつく計画があります。それを信じて、それを見通す信仰の目を養われたいのです。その目があれば、私たちは落ち込みや苛立ちから解放され、落ち着くことができます。感謝と喜びに復帰することができます。
さて、そのような神の御心、ご計画において、ヨハネは結婚式にたとえております。イエスさまこそ主役の「花婿」(29節)であり、自分は「花婿の介添人」(29節)だと。自分は花婿の介添え人だから、花婿のもとに花嫁がやって来ることを喜び、祝福できるのです。
ところで、この「介添え人」という言葉では、ギリシャ語でフィロスと言う言葉です。“友”と訳される言葉です。愛という意味とも関連があって、さしずめ“愛のある友”というところでしょう。ヨハネは、自分のことを花婿の友人、イエスさまの友だと見ているのです。師匠などと上から目線ではない、イエスさまを愛する友だと自認しているのです。そこで思い出されるのが、同じヨハネ福音書15章で、イエスさまが弟子たちに語られた言葉です。「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これがわたしの掟である。友のために自分の命を捨てること、これ以上に大きな愛はない。わたしの命じることを行うならば、あなたがたはわたしの友である。もはや、わたしはあなたがたを僕とは呼ばない」(12~13節)。
ここでも、同じフィロス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ます。イエスさまの「友」とは、イエスさまの掟、イエスさまの命じることを行う人のことです。イエスさまの命じる掟とは、互いに愛し合う、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さまに愛されたように、人を愛し、互いに愛し合うことです。そして、愛するとは、ある意味で「捨てる」ことです。本物の愛とは、本当の友だちとは、この人と付き合ったら損か得かという計算を捨てられる人です。相手のことを考え、自分の主張やこだわりを捨てて、相手を受け入れられる人です。それとは逆に、時には相手との平穏な関係を捨てて、時には言いづらいことを言える人です。でも、赦し合える人です。その究極が、「友のために自分の命を捨てること」でしょう。ヨハネは、イエスさまを生かすために、自分の栄えを捨てる友の覚悟があ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私たちクリスチャンは、イエスさまの御心を尋ね、従う僕です。イエスさまの掟を守ろうと志す僕です。けれども、そんな私たちを、イエスさまは「友」と呼んでくださいます。神さまを愛し、人を愛する道を共に歩む「友」と認めてくださいます。イエスさまの愛が輝くように、栄えるように、人に伝わるように、私たちも、良き友となって誠実に歩みましょ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