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도행전 7장에 있는 스데반의 순교가 계기가 되어 일어난 박해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제외한 많은 기독교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갔습니다. 그러나 그냥 도망쳐 간 게 아니라 말씀을 전파하면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도망쳐 간 것입니다. 그 도망친 곳 중 하나가 바로 안디옥이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거기는 이방인의 세계입니다. 19절에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지난 주 함께 읽었던 성경 말씀 중 18절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의 이야기이기에 이방인이 이방인 그대로 인체 구원받는 것을 아직 믿지 못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안디옥에는 구브로와 그레네에서 온 성도들이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에 뜨는 섬이며 그리스인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또 그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원래 이방인 세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기독교 성도들은 그리스 말을 말하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 자체에는 저항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디옥에 왔을 때에 그리스 말을 말하는 사람들(여기서는 그리스 말을 말하는 유대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즉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셔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서 성장해 가는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바나바를 파견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이 두 교회를 연결시키는 일을 한 키 퍼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도 구브로 출신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위로의 아들”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파견되어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23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23절)
바나바는 기쁨으로 가득 차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권했습니다. 교회 사람들의 신앙을 격려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었던 것 처럼 지금 우리교회에도 바나바와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2000년 전부터 같은 것을 해 왔습니다. 물론 바뀌어야 하는 곳은 바뀌어졌습니다. 바뀌면 안 되는 곳은 쭉 그대로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교회 사람들을 격려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23절) 라고 바나바는 말했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아가자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은 하나님을 떠나 버릴 때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안디옥 교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이나 2000년 전이나 그런 부분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격려의 말을 거는 사람이 언제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란 그런 곳입니다.
그렇게 해서 안디옥 교회는 더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 데려온 것입니다. 요컨대 성도가 많아져서 목회자가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오래간만에 사울이 등장합니다. 9장 30절에서 사울이 출신지인 다소에 돌아간지 한 10년이 지났습니다. 바나바는 왜 사울을 구했을까요? 그것은 사울이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며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리스도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이 하늘에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죄받고 구원을 받은 산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에서 일 년간 전도와 목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로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지방은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성도들이 “각각 그 힘대로” 구원 물자를 모아 바나바와 사울에게 맡겨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가 아주 커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쳐 나온 유대인들만이 주요 멤버였더라면 아마도 자기들 생활을 추스리는게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그런 여유가 없었을 것입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주요한 멤버가 되어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경제적으로도 조금은 여유가 있었고, 그러기에 경제적인 지원이 가능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방인 중심의 교회와 유대인 중심의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나바의 큰 활약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쁨도 괴로움도 함께 나누려고 하는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가 두 교회의 가교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실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교회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 자연히 그리스도인이 태어났습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6절)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며 따라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이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크리스천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된 말은 그리스 말로는 “크리스티아노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공손하게 번역하면 “그리스도에 속하는 자” 라든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이 됩니다.
이 호칭은 자기들이 붙인 게 아닙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이른바 별명입니다. 별명이라는 것이 늘 좋은 뜻으로만 붙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야유의 의미로 불리워질 때도 있습니다. 아마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도 야유적으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저 녀석들은 항상 “그리스도, 그리스도”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애 못 박히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어 주셨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도 기꺼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사람”, 우리 기독교 성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기독교 성도는 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는 방법에 공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의 주의 주장, 또는 기독교의 사상에 공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 역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해 주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사탄의 노예이며 죄의 노예였는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예수의 것으로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항상 격려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곳입니다. 최초의 교회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히로시마 교회는 과연 몇번째나 될까요? 설령 몇번째가 된다 하더라도 히로시마 교회 역시 성스러운 공동의 교회임엔 틀림없을 줄 압니다. 예루살렘 교회와도 안디옥 교회와도 함께 통하는 신앙이 여기 우리 교회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과 같은 위로와 격려가 지금 여기에도 여러분과 함께 있을 줄 믿습니다. 아멘.
【 2020年 10月 1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キリスト者の誕生」使徒言行録11章 19~30節
使徒言行録7章にありますステファノの殉教を引き金に起こった迫害によって、使徒たちを除く多くのキリスト信徒たちがエルサレムから逃げていきました。でも、ただ逃げていったのではなく、御言葉を語りつつ、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を語り伝えつつ逃げていったのです。その逃げた先の一つがアンティオキアでした。
ユダヤ人から見れば、そこは異邦人世界です。19節に、「ユダヤ人以外のだれにも御言葉を語らなかった」とあります。この時はまだ、先週御一緒に読みました18節の「それでは神は、異邦人をも悔い改めさせ、命を与えてくださったのだ」という結論の前ですから、異邦人が異邦人のままで救われるということがまだ信じられていない時のことです。
しかし、アンティオキアには、キプロス島やキレネから来た信徒たちがいたと書かれています。キプロス島は、地中海に浮かぶ島でギリシャ人が多く住んでいます。またキレネは、北アフリカのエジプトの西、今のチュニジアのあたりです。
元々異邦人世界に住んでいたユダヤ人キリスト信徒たちは、ギリシア語を話し、異邦人にキリストの福音を語り伝えること自体には抵抗感もなかったようです。それで、彼らはアンティオキアに来た時に、ギリシャ語を話す人々(ここではギリシア語を話すユダヤ人という意味ではなく)、すなわち異邦人にキリストの福音を語りました。そうすると、主なる神さまが彼らを用いて、多くの異邦人たちが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に至ったのです。
それでエルサレム教会は、アンティオキアで成長していく教会を支えるために、バルナバを派遣しました。
エルサレム教会とアンティオキア教会、この二つの教会を結び合わせる働きをしていたキーパーソンとも言える人物がバルナバです。バルナバも元々はキプロス島生まれです。彼は人々から「慰めの子」と呼ばれていました。
そのバルナバがアンティオキア教会に派遣されて、どんなことをしたのかと言いますと、23節にこうあります。「バルナバはそこに到着すると、神の恵みが与えられた有様を見て喜び、そして、固い決意をもって主から離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と、皆に勧めた。」(23節)
バルナバは喜びに溢れ、そしてアンティオキア教会の人たちに勧めをしました。教会の人たちの信仰を励ましたのです。初代教会にこのような人がいたわけですが、今の私たちにとっても、バルナバのような人物が必要です。
教会は2000年前から同じことをしてきました。勿論、変わるべきところはもちろん変わってきましたが、変わるべきでないところは、ずっとそのまま2000年も続けられてきました。その一つのことが、教会の人たちを励ます人がいたということです。「主から離れることのないように」(23節)と、バルナバは言っています。この言葉は、直訳すると「主と共に留まるように」となります。つまり、主イエス・キリストと一緒に歩みなさいとの励ましているのです。
私たちもすぐに神から離れてしまうようなところがありますが、それはアンティオキア教会の人たちも同じだったのです。今も2000年前も変わるところがありません。ですから、その私たちを励ますために、主イエス・キリストと一緒に留まりなさいという励ましの言葉をかける者がいつでもいたのです。教会とはそういうところです。
そうして、ますますアンティオキアの教会は成長して行きました。それでバルナバは、サウロを捜して連れてきたのです。要するに信徒が多くなったので、牧師不足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ここに久しぶりにサウロが再び登場いたします。9章30節でサウロが出身地のタルソスに帰ってから、およそ10年が経っていました。バルナバはなぜサウロを求めたのか。それはサウロが生けるキリストの証人であり、またキリストの福音をよく理解している人だからです。元はキリスト教会を迫害していたサウロが、天から現れた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キリストを信じる者となった。そのサウロ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罪が赦されて救われることの生き証人だったからです。
バルナバとサウロは、アンティオキアで丸一年間伝道・牧会をしました。そして、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異邦人を中心とする教会として、大きく成長したのです。
ところがその頃、大飢饉が起きました。中でもエルサレムを含むユダヤ地方はひどかったようです。そこでアンティオキアの教会は、信徒たちが「それぞれの力に応じて」救援の物資を募り、バルナバとサウロに持たせて届けさせたのです。
これはアンティオキアの教会がたいへん大きくなったことを示しています。迫害を逃れたきたユダヤ人たちが主要メンバーであったなら、自分たちの生活で精一杯のはずです。経済的にもそんな余裕がなかったでしょう。それが異邦人たちが主要なメンバーとなっていた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経済的にも少し余裕があり、経済的支援が可能だったわけです。そしてこのことを通して、異邦人中心の教会と、ユダヤ人中心の教会が一つとなったのです。このこともバルナバの大きな働きがあったのでしょう。喜びも苦しみも分かち合おうとする「慰めの子」バルナバが二つの教会の架け橋となりました。アンティオキア教会はまさに聖霊に満たされた教会となりました。
そのような教会の営みがなされるところに、自然とキリスト者が生まれました。26節をご覧下さい。「このアンティオキアで、弟子たちが初めてキリスト者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のである。」
弟子と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者のことであり、従う者のことです。それがここで「キリスト者」と呼ばれるようになったと言います。英語で言えばクリスチャンです。この「キリスト者」と日本語に訳されている言葉は、ギリシャ語では「クリスティアノス」という言葉です。この言葉を丁寧に日本語にすると、「キリストに所属する者」とか「キリストの人」というようなものになります。
この呼び名は自分たちがつけ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周りの人々がそう呼んだのです。言わばあだ名です。あだ名はというのは、良い意味でつけられるだけではありません。時には揶揄してそう呼ぶこともあります。恐らく、この「キリスト者」というあだ名も揶揄して、そう呼んだのでしょう。
あいつらはいつも「キリスト、キリスト」と言っている。「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ってくださった」、「イエス・キリストが復活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が救い主になってくださった」、キリスト、キリストととばかり言っている。だから「キリスト者」と呼んだのだと思います。そう呼ばれた方も、喜んでそのように呼ばれることを受け入れました。自分たちのことを「キリスト者」と呼ぶようになったのです
「キリスト者」「キリストの者」、私たちキリスト教信徒は、キリスト者です。すなわち、キリストの者なのです。キリスト教信徒は、何かイエス・キリストの生き方に共鳴して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教の主義主張、あるいはキリスト教の思想に共鳴してキリスト者になったというのでもありません。
私たちは、キリストのものとしていただいたのです。それまで悪魔の奴隷であり、罪の奴隷であったのに、それをイエスさまが救ってくださって、イエスさまのものと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だからキリスト者なのです。
教会はキリスト者が生まれるところです。そしてキリスト者が留まるところです。主イエス・キリストと共に歩むことができるところです。たえず励ましがあり、慰めが与えられるところです。最初の教会としてエルサレム教会が誕生しました。二つ目の教会がアンティオキア教会です。私たちの広島教会は何番目になるのでしょうか。たとえ何番目であろうとも、広島教会も聖なる公同の教会です。エルサレム教会とアンティオキア教会に通じる信仰があります。そして、この同じ慰め、励ましが皆さまと共にあることを信じます。アーメン。
【2020년 10월18일 주일예배(요약판)】
“그리스도인의 탄생” 사도행전 11장 19~30절
사도행전 7장에 있는 스데반의 순교가 계기가 되어 일어난 박해로 말미암아 사도들을 제외한 많은 기독교 성도들은 예루살렘에서 도망쳐 갔습니다. 그러나 그냥 도망쳐 간 게 아니라 말씀을 전파하면서,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면서 도망쳐 간 것입니다. 그 도망친 곳 중 하나가 바로 안디옥이었습니다.
유대인 입장에서 보면 거기는 이방인의 세계입니다. 19절에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 때는 아직 지난 주 함께 읽었던 성경 말씀 중 18절의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방인에게도 생명 얻는 회개를 주셨도다” 라는 결론에 도달하기 전의 이야기이기에 이방인이 이방인 그대로 인체 구원받는 것을 아직 믿지 못할 때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안디옥에는 구브로와 그레네에서 온 성도들이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 구브로는 지중해에 뜨는 섬이며 그리스인이 많이 살고 있었습니다. 또 그레네는 북아프리카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원래 이방인 세계에 살고 있었던 유대인 기독교 성도들은 그리스 말을 말하고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 자체에는 저항감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안디옥에 왔을 때에 그리스 말을 말하는 사람들(여기서는 그리스 말을 말하는 유대인이라는 뜻이 아니라) 즉 이방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그들을 쓰셔서 많은 이방인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루살렘 교회는 안디옥에서 성장해 가는 교회를 지원하기 위해 바나바를 파견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 이 두 교회를 연결시키는 일을 한 키 퍼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물이 바로 바나바입니다. 바나바도 구브로 출신이었습니다. 사도들은 그를 “위로의 아들”이라고 일컬었습니다.
그 바나바가 안디옥 교회에 파견되어 어떤 일을 했느냐 하면, 23절에 이렇게 쓰여 있습니다.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23절)
바나바는 기쁨으로 가득 차 안디옥 교회 사람들에게 권했습니다. 교회 사람들의 신앙을 격려한 것입니다. 초대교회에 이런 사람이 있었던 것 처럼 지금 우리교회에도 바나바와 같은 인물이 필요합니다.
교회는 2000년 전부터 같은 것을 해 왔습니다. 물론 바뀌어야 하는 곳은 바뀌어졌습니다. 바뀌면 안 되는 곳은 쭉 그대로 2000년 동안 계속되어 왔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교회 사람들을 격려하는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23절) 라고 바나바는 말했습니다. 즉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아가자고 격려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도 가끔은 하나님을 떠나 버릴 때가 있습니다만 그것은 안디옥 교회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금이나 2000년 전이나 그런 부분은 변함이 없습니다. 그래서 그런 우리들을 격려하기 위하여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고 격려의 말을 거는 사람이 언제나 있었던 것입니다. 교회란 그런 곳입니다.
그렇게 해서 안디옥 교회는 더 성장해 나갔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사울을 찾아 데려온 것입니다. 요컨대 성도가 많아져서 목회자가 부족하게 된 것입니다.
여기에 오래간만에 사울이 등장합니다. 9장 30절에서 사울이 출신지인 다소에 돌아간지 한 10년이 지났습니다. 바나바는 왜 사울을 구했을까요? 그것은 사울이 그리스도의 산 증인이며 또 그리스도의 복음을 잘 이해한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그리스도 교회를 박해했던 사울이 하늘에서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사울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속죄받고 구원을 받은 산 증인이었기 때문입니다.
바나바와 사울은 안디옥에서 일 년간 전도와 목회를 했습니다. 그리고 안디옥 교회는 이방인을 중심으로 한 교회로 크게 성장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 때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 가운데서도 예루살렘을 포함한 유대 지방은 심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안디옥 교회는 성도들이 “각각 그 힘대로” 구원 물자를 모아 바나바와 사울에게 맡겨 보낸 것입니다.
이것은 안디옥 교회가 아주 커졌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박해를 피해 도망쳐 나온 유대인들만이 주요 멤버였더라면 아마도 자기들 생활을 추스리는게 고작이었을 것입니다. 경제적으로 그런 여유가 없었을 것입이다. 그러나 이방인들이 주요한 멤버가 되어 있었던 안디옥 교회는 경제적으로도 조금은 여유가 있었고, 그러기에 경제적인 지원이 가능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통해서 이방인 중심의 교회와 유대인 중심의 교회가 하나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바나바의 큰 활약이 있었던 것입니다. 기쁨도 괴로움도 함께 나누려고 하는 “위로의 아들”인 바나바가 두 교회의 가교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안디옥 교회는 실로 성령이 충만한 교회가 되었습니다.
그러한 교회의 행위가 이루어지는 곳에 자연히 그리스도인이 태어났습니다. 2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서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26절)
제자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며 따라가는 사람을 말합니다. 그것이 여기서 “그리스도인”이라고 일컬음을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영어로 말하면 크리스천입니다. 이 “그리스도인”이라고 번역된 말은 그리스 말로는 “크리스티아노스”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을 공손하게 번역하면 “그리스도에 속하는 자” 라든가 “그리스도의 사람”이라는 것이 됩니다.
이 호칭은 자기들이 붙인 게 아닙니다. 주변의 사람들이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이른바 별명입니다. 별명이라는 것이 늘 좋은 뜻으로만 붙여지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는 야유의 의미로 불리워질 때도 있습니다. 아마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별명도 야유적으로 그렇게 부른 것입니다.
저 녀석들은 항상 “그리스도, 그리스도”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애 못 박히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구세주가 되어 주셨다”, 그리스도 그리스도라고만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렀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불리는 사람들도 기꺼이 그렇게 불리는 것을 받아들였습니다. 자기들을 “그리스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사람”, 우리 기독교 성도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기독교 성도는 뭔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는 방법에 공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게 아닙니다. 기독교의 주의 주장, 또는 기독교의 사상에 공감해서 그리스도인이 된 것 역시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그리스도의 것으로 해 주신 것입니다. 그 때까지 사탄의 노예이며 죄의 노예였는데 그것을 예수님께서 구원해 주셔서 예수의 것으로 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인이 태어나는 곳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머무르는 곳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곳입니다. 항상 격려가 있고 위로가 주어지는 곳입니다. 최초의 교회로서 예루살렘 교회가 생겼습니다. 그리고 두번째 교회가 안디옥 교회였습니다. 그렇다면 우리 히로시마 교회는 과연 몇번째나 될까요? 설령 몇번째가 된다 하더라도 히로시마 교회 역시 성스러운 공동의 교회임엔 틀림없을 줄 압니다. 예루살렘 교회와도 안디옥 교회와도 함께 통하는 신앙이 여기 우리 교회에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곳과 같은 위로와 격려가 지금 여기에도 여러분과 함께 있을 줄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