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말한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특히 이탈리아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저항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넬료를 만났습니다. 또 고넬료도 하나님의 사자의 인도하심으로 그 때까지 몰랐던 베드로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이렇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인 이탈리아인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5절)
각 나라 중‥‥, 어떤 나라 사람이라도‥‥. 이것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아주 굉장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 나라와 좋은 관계에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러나 상대방 나라와 전쟁이라도 하게 되었을 경우, 게다가 이쪽이 엄청 심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상대 나라의 사람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순순히 생각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상대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미워해야 하는 로마에 속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마음대로 짓밟는 적국의 인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러한 인간적인 사상이나 감정을 극복하여 적절하게 고넬료가 “하나님 앞에”(33절) 라고 말한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들어야 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적국에 대한 노여움이나 미움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편견도 선입관도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인간은 외모를 봅니다. 편견으로 사람을 봅니다. 인종으로 사람을 봅니다. 민족이나 국적,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학력이나 직업으로 사람을 봅니다. 그렇게 인간은 삶을 겉보기나 외모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모두 다 같다고 보십니다. 단지, 하나님을 구하는지 아닌지, 구원을 구하는지 아닌지를 보실 뿐입니다.
고넬료는 그 때까지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오직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더 하나님의 구원을 구해 왔습니다. 그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드로가 그 때 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고넬료에게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37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로서 베드로는 어려운 공부라도 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들도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또 고넬료를 비롯하여 일반 사람들도 보고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이시야말로 “기름 부어진 자” 즉 그리스도(메시아)이신 것,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것,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종말의 심판자이신 것,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는 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은 크리스천이라면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어떤 믿는 자가 우리의 마음 속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그 구멍을 채우려고 여러 가지를 구해 보지만 결코 그것을 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멍은 하나님의 모양을 해서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서는 채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대로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에 구멍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구멍은 예수님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 부분이 채워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고넬료와 고넬료와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어째서 성령이 내려온 것을 알았는가 하면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은 고낼료들이 순순히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보통 성령께서는 세례와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세례에 앞서서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앞질러 가신 것 같습니다. 자, 이 사람들, 이방인인 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유대인 이외의 이방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즉 교회가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하나님께서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먼저 빌립이 성령께 인도받아 에디오피아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교회 전체에 널리 알려진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베드로는 사도입니다.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으로 정식으로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교회에 가입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서서히 그리스도의 새로운 은혜가 밝혀져 갑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계속 구하며 구원을 계속 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밑으로 인도하셔서 교회에 가입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구도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구도자란 아직 신자가 되지 않는 사람을 말하기 보다 오히려 더 먼저 간 사람,승려가 되어서도 더욱더 도를 닦아 터득하려고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것 같습니다. 이것은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교회에서도 사실대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도자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세례를 받고 나서 진실한 구도가 시작한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빌립보서 3잘 12절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이미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 그 내가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 이것은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들리지만 신앙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굉장함을 더 알고 싶다.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더욱더 알고 싶다. 그렇게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는 영원히 구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구도자입니다. 하나님을 구합니다. 성령님을 구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구합니다. 자기가 몰랐던 성령의 역사하심을 계속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아멘.
【 2020年 10月 4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コルネリウス物語②」使徒言行録10章34~48節
今日の聖書箇所は、ペトロがコルネリウスの家で福音を語った場面です。ペトロは異邦人、特にイタリア人に対して福音を語ることに抵抗がありました。異邦人が神さまの祝福を受け、救われるということが信じられないのです。しかし、信じざるを得ません。ペトロは幻と神の言葉によって、コルネリオと出会いました。コルネリオもまた、神さまの御使いの導きによって、それまで知らなかったペトロを家に招きました。これでは信じざるを得ません。そのように、神さまが、この異邦人であるイタリア人の救いに導かれたことを信じざるを得ないのです。
そして、ペトロはこう話し出しました。「どんな国の人でも、神を畏れて正しいことを行う人は、神に受け入れられるのです。」(35節)
どんな国の人でも‥‥。これは私たちの想像を遙かに越えた物凄いことを言っていると思います。相手の国と良好な関係にある時には問題にならないでしょうが、相手の国と戦争をするようになった場合、しかもこちらが、さんざんひどい仕打ちを受けているときに、それでも相手の国の人だって、神さまを畏れて正しいことを行えば、神さまに受け入れられるのだ、と素直に思う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ペトロが福音を伝えている相手は、人間的に言えば、憎むべきローマに属する人間です。神の民であるユダヤ人をいいように踏みにじる敵国の人間なのです。それにも関わらずペトロは、そういった人間的な思想や感情を乗り越えて、いみじくもコルネリウスが「神の前に」と語りましたように、神さまの前で福音を聞くべき一人の人として、見ているのです。このように、キリストの福音には、敵国への怒りや憎しみを乗り越えさせる力があるのだと思います。
神さまは分け隔てをなさらない、偏り見られない。偏見も先入観もない。これはすばらしいことです。人間は分け隔てをします。偏って人を見ます。人種で人を見る、民族や国籍、見かけで人を判断します。学歴や職業で人を見ます。そのように人間は人を、外見や外側のことで判断します。しかし、神さまは分け隔てをなさらないのです。みな同じように見られます。ただ、神さまを求めるのかどうか、救いを求めるのかどうかのみです。
コルネリウスは、それまでイエスさまのことをよく知りませんでした。ただ、神さまを信じていました。さらに神さまの救いを求めて来ました。そのコルネリウスに、ペトロはイエスさまのことを語りました。
ここで私たちが注目したいと思いますのは、ペトロがこの時語りましたキリストの福音は、何か聞いたこともないような話では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ペトロもコルネリウスに「あなたがたはご存じでしょう」(37節)と語っています。その意味でペトロは難しい勉強でもしなければ分からないような話をしてはおりません。自分たちも間近に体験し、またコルネリウスを初め、一般の人たちも見聞きして知っている話をしているんですね。 内容的には、イエスさまこそが「油を注がれた者」、すなわちキリスト(メシア)であること、十字架につけられて死んだこと、しかし神さまが三日目にイエスさまを復活させられたこと、そしてこのイエスさまが世の終わりの審判者であること。そしてこのイエス・キリストの名を信じる者はだれでも罪を赦されること、ということです。
ペトロが語ったことは、クリスチャンならば皆知っている、イエスさまの話です。でも、そのイエスさまの話が人を救うのです。聖霊なる神さまが共に働いて、聴く人々に信仰を与えてくれるからです。
昔、ある信仰者が、私たちの心の中にはぽっかりと穴が開いていると言いました。人間はその穴を埋めようとして、いろいろなものを求めるけれども、決してそれを埋めることはできない。なぜなら、その穴は神さまの形をして、神さま以外のものでは埋まらないのだと言ったのです。まことにその通りです。
コルネリウスは神さまを信じていました。でも、まだ、心に穴が空いていたのです。その穴はイエスさまの形をしておりました。それがペトロの話しを聞いて、その穴が埋まったのです。
ペトロがそのように話していると、コルネリウスと、コルネリウスと共に話を聞いていた人々に聖霊が降りました。なぜ聖霊が降ったことが分かったかというと、彼らが異言を話し、また神を賛美し始めたからです。これはつまり、コルネリウスたちがすなおに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た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聖霊が降った。
普通は聖霊は、洗礼と共に与えられるものです。しかしこのときは、洗礼に先立って聖霊が降りました。それは、神さまが人間に先回りなさっているかのようです。さあ、この人たち、異邦人であるこの人たちに洗礼を授けなさい、と。
先ほど言いましたように、ユダヤ人以外の異邦人が救われる、ということはユダヤ人にはなかなか信じられないことでした。しかし、聖霊が彼らに降ったということは、神さまが彼らを救ったということです。使徒ペトロが、すなわち教会が異邦人に洗礼を授けることを神さまが促しておられるのです。それでペトロは彼らに洗礼を授けました。
先にフィリポが、聖霊に導かれてエチオピア人に洗礼を授けました。しかしそのことはまだ教会全体に知れ渡ってい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しかし、今回のペトロは使徒です。教会の代表者です。キリストの教会が、聖霊によって正式に異邦人に洗礼を授けました。教会に加え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このようにして徐々に、キリストの新しい恵みが明らかになっていきます。
コルネリウスは、神さまを求め続け、救いを求め続けました。その結果、神さまがキリストのもとへと導かれ、教会へ加えられました。
さて、「求道者(きゅうどうしゃ)」という言葉があります。教会ではまだ洗礼を受けていないけれども教会に通っている人のことを指します。しかし、同じ字を書いて仏教ではふつうは「くどうしゃ」と読みます。仏教の求道者は、まだ信者になっていない人というよりも、むしろもっと先に行く人、僧侶となってもさらに道を究めようとする人のことを指したりするようです。これは尊いことだと思います。
キリスト教会でも、本当のことを言えば、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て洗礼を受ければ求道者でなくなる、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いやむしろ、洗礼を受けてから、本当の求道が始まるといってもよいと思います。
フィリピの信徒への手紙の3章12節を思い出してください。使徒パウロがこう述べています。‥‥「わたしは、すでにそれを得たというわけではなく、すでに完全なものとなっているわけでもありません。何とかして捕らえようと努めているのです。自分がキリスト・イエスに捕ら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すでに自分がイエス・キリストに捕らえられている。その自分が、何とかして捕らえようと努めている。‥‥これは矛盾した言い方のように聞こえますが、信仰というものをよく言い表していると思います。私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救われている。しかしその救いのすばらしさをもっと知りたい。キリストの恵み、聖霊の働きについて、もっともっと知りたい。そのように求めている。私たちはそういう意味では、永遠の求道者であると言えます。
皆さん、私たちは、永遠の求道者です。神さまを求める。聖霊を求める。救いの確信を求める。自分の知らなかった聖霊なる神さまの働きを求め続ける。神さまは必ずそれらの祈りを聞き入れてくださいます。
【2020년 10월 4일 주일예배(요약판)】
“고넬료 이야기 ②” 사도행전 10장 34~48절
오늘의 성경말씀은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서 복음을 말한 장면입니다. 베드로는 이방인 특히 이탈리아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에 저항이 있었습니다. 이방인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아 구원받는다는 것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 입니다. 그러나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베드로는 환상과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넬료를 만났습니다. 또 고넬료도 하나님의 사자의 인도하심으로 그 때까지 몰랐던 베드로를 집에 초대했습니다. 이렇기에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께서 이 이방인인 이탈리아인을 구원으로 인도하신 것을 믿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베드로는 이렇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각 나라 중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다 받으시는 줄 깨달았도다”(35절)
각 나라 중‥‥, 어떤 나라 사람이라도‥‥. 이것은 우리의 상상을 훨씬 초월한 아주 굉장한 것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상대방 나라와 좋은 관계에 있을 때는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그러나 상대방 나라와 전쟁이라도 하게 되었을 경우, 게다가 이쪽이 엄청 심한 취급을 당하고 있는 그런 상황에서 상대 나라의 사람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의를 행하면 하나님께 받아들여진다고 순순히 생각할 수 있을까요?
베드로가 복음을 전하고 있는 상대는 인간적으로 말하자면, 미워해야 하는 로마에 속한 인간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유대인을 마음대로 짓밟는 적국의 인간인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드로는 그러한 인간적인 사상이나 감정을 극복하여 적절하게 고넬료가 “하나님 앞에”(33절) 라고 말한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들어야 하는 한 사람의 인간으로 보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복음에는 적국에 대한 노여움이나 미움을 극복하게 하는 힘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편견도 선입관도 없습니다. 이것은 굉장한 것입니다. 인간은 외모를 봅니다. 편견으로 사람을 봅니다. 인종으로 사람을 봅니다. 민족이나 국적, 겉보기로 사람을 판단합니다. 학력이나 직업으로 사람을 봅니다. 그렇게 인간은 삶을 겉보기나 외모로 판단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사람의 외모를 보지 않으십니다. 모두 다 같다고 보십니다. 단지, 하나님을 구하는지 아닌지, 구원을 구하는지 아닌지를 보실 뿐입니다.
고넬료는 그 때까지 예수님을 잘 몰랐습니다.오직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더 하나님의 구원을 구해 왔습니다. 그 고넬료에게 베드로는 예수님을 전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하는 것은 베드로가 그 때 말한 그리스도의 복음이 지금까지 들어본 적도 없는 것 같은 그런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베드로도 고넬료에게 “그것을 너희도 알거니와”(37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의미로서 베드로는 어려운 공부라도 해야만 알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자기들도 가까이에서 체험하고 또 고넬료를 비롯하여 일반 사람들도 보고 들어서 알고 있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용적으로는 예수님이시야말로 “기름 부어진 자” 즉 그리스도(메시아)이신 것,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것,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흘 만에 다시 살리신 것, 그리고 이 예수님께서 종말의 심판자이신 것, 그리고 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 자는 다 죄 사함을 받는다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말한 것은 크리스천이라면 다 알고 있는 예수님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이야기가 사람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하나님께서 함께 하셔서 듣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전에 어떤 믿는 자가 우리의 마음 속에는 구멍이 뻥 뚫려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은 그 구멍을 채우려고 여러 가지를 구해 보지만 결코 그것을 채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구멍은 하나님의 모양을 해서 하나님 이외의 것으로서는 채우지 못한다고 했습니다. 바로 그대로입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직 마음에 구멍이 나 있었던 것입니다. 그 구멍은 예수님의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베드로의 이야기를 듣고 그 부분이 채워진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고넬료와 고넬료와 함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어째서 성령이 내려온 것을 알았는가 하면 그들이 방언을 말하며 하나님을 찬양하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즉 이것은 고낼료들이 순순히 예수님을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이 내려오셨습니다.
보통 성령께서는 세례와 함께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때는 세례에 앞서서 성령께서 내려오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앞질러 가신 것 같습니다. 자, 이 사람들, 이방인인 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주라고 말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유대인 이외의 이방인이 구원받는다는 것은 유대인에게는 쉽사리 믿을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령께서 그들에게 내려오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을 구원해 주셨다는 것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즉 교회가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는 것을 하나님께서 촉구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들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먼저 빌립이 성령께 인도받아 에디오피아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교회 전체에 널리 알려진 일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베드로는 사도입니다. 교회의 대표자입니다. 그리스도의 교회가 성령으로 정식으로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었습니다. 교회에 가입시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서서히 그리스도의 새로운 은혜가 밝혀져 갑니다.
고넬료는 하나님을 계속 구하며 구원을 계속 구했습니다. 그 결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밑으로 인도하셔서 교회에 가입시키셨습니다.
그런데, “구도자”라는 말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는 아직 세례를 받지 않았지만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그러나 불교에서의 구도자란 아직 신자가 되지 않는 사람을 말하기 보다 오히려 더 먼저 간 사람,승려가 되어서도 더욱더 도를 닦아 터득하려고 하는 사람을 가리키는것 같습니다. 이것은 고귀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독교 교회에서도 사실대로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면 구도자가 아니게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오히려 세례를 받고 나서 진실한 구도가 시작한다고 말해도 괜찮습니다.
빌립보서 3잘 12절을 떠올려 보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빌3:12)
이미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 잡힌 바 되었다. 그 내가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고 있다. 이것은 모순된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이 들리지만 신앙이라는 것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으로 구원받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구원의 굉장함을 더 알고 싶다. 그리스도의 은혜, 성령의 역사하심에 대해서 더욱더 알고 싶다. 그렇게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의미에서는 영원히 구도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영원한 구도자입니다. 하나님을 구합니다. 성령님을 구합니다. 구원의 확신을 구합니다. 자기가 몰랐던 성령의 역사하심을 계속 구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십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