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은 동방 박사들의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동방 박사들이란 아마도 페르시아에서 마기라고 불린 학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점성술의 학자들”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른바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들이지만, 단순한 점성가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점성술은 천문학으로서 최첨단의 과학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판단에 따라 농작물의 심는 시기나 수확의 시기를 정했습니다. 그들은 과학자이며 또 종교자이며 의사이며 사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한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예배하기 위하여 오늘 여기 이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현대에 있어서의 “동방 박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먼 나라에서 별을 보고 구세주의 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았다고는 해도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구세주, 새로운 왕을 찾고 있었고, 어떤 별을 보고 유대 땅에 구세주가 태어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별을 쫒아 구세주를 찾으려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유대인의 왕, 구세주가 태어나신 “장소”를 묻는 물음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구세주는 누구이십니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기독교가 설명하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예수님께서 구세주라고 믿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예배를 보면서 동방 박사들처럼 구세주가 “어디 계시냐”고 묻고 구하고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또는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크리스천이 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계속 확인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모두 다 “어디 계시냐”고 구세주를, 구원을 찾아 구하는 자인 것입니다.
동방 박자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며 새로운 왕, 구세주를 찾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구세주가 탄생한 장소, 즉 구세주란 누구냐, 구원이란 무엇이냐를 가리킨 것은 바로 성경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의 물음에 다른 동기로 과민하게 반응한 헤롯 왕이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을 모아 캐물었더니 6절에 인용된 예언자의 말씀이 제시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 미가 5장 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구세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기독교의 구원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헤롯 왕을 통해서 성경말씀을 듣고 나간 동방 박사들은 다시 동방의 나라에서 보던 그 “별”을 찾았습니다. 별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9절), 박사들은 “그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였다”(10절) 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매우 크게 기뻐한 것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동방 박사들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관한 내용이란 어떤 것일까요?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11절) 여기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어째서 성경에는 일부러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다”고 쓰여 있을까요? 아직 태어나서 얼마 안되니까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당연한 것 같이 이 성경말씀을 읽고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지난 주, 누가복음 1장 26~38절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의 고뇌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것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임신이며 괴로움이 기다리는 출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깊이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죽어 버리려고 생각했을 정도로 괴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고뇌는 혹시 외토리다, 아무도 나의 고민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 괴로움을 서로 나누며 지탱해 주는 사람이 없다,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면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친족이 되는 사람이지만, 불임의 여성이며 노령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아기가 주어질 것임을 천사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도 남편 사가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었다”(눅1:24)고 쓰여 있는 것처럼 엘리사벳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엘리사벳을 찾아 석 달쯤 그 집에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눅1:56) 마리아는 아마 이 엘리사벳에게 괴로운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었고, 그녀가 들어 주었기에 불안함을 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잘 이해하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맛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엘리사벳과 함께 보내는 나날 가운데서 마리아는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 바꿔 말하자면 사랑으로 지탱되는 것이라고 깨닫고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이란 괴로움이나 고민이 없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고뇌 속에 빛나는 기쁨, 고뇌 속에서 찾아내는 기쁨인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고뇌의 인생 속에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것이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인생의 위로를, 격려를, 기쁨을 찾아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찾아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여기서부터 신앙의 인생, 구원의 여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은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11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지만, 바꿔 말하자면 자기의 보배를(가치 있는 것을), 더 말하면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동방 박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한 후,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12절) 다른 길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구원을 찾아내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을 찾아내서 “다른 길”=“신앙의 인생”을 걸어 가도록 합시다.
【 2020年 12月 2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救い主が共にいる喜び」マタイによる福音書 2章 1~12節
今日の聖書箇所は、東方の博士たちのクリスマス物語です。東方の博士たちというのは、おそらくペルシアの国でマギと呼ばれた学者たちでした。聖書には「占星術の学者たち」と記されおります。いわゆる「星占い」をする人々ですが、単なる星占いではありません。当時の占星術は天文学として最先端の科学と考えられていました。人々は、その判断によって農作物の植え付けや収穫の時期を定めたようです。彼らは、科学者であり、また宗教家であり、医者であり、社会の指導者でした。そういう人物が、イエス・キリストを礼拝するためにやって来たのです。
私たちもまた、イエス・キリストの誕生を祝い、礼拝するために、今日、私たちはこの教会にやって来ました。言わば、私たちは、現代における“東方の博士たち(占星術の学者たち)”だと言ってよいでしょう。
彼らは遠い国から星を見て、救い主の誕生を知りました。知ったと言っても、それは確か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彼らは真の救い主、新しい王を求めており、ある星を見て、ユダヤの地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と思ったのです。彼らはその星を頼りに、救い主を捜し求め、エルサレムにやって来たのです。けれども、彼らはまだ、イエス・キリストを見つけていません。イエス・キリストと出会っていません。
彼らはエルサレムで、「どこにおられますか」と叫んでいます。これは、文字どおりに考えれば、ユダヤ人の王、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場所”を尋ねる問いかけです。けれども、その裏側には、“救い主はどなたですか?”“救いとは何ですか?”という本質的な問いが込められているのです。
私たちも教会に来ました。けれども、それだけではキリスト教が説く救いがどんなものかは分かりませんし、イエスさまが救い主だとも信じられません。この中には、礼拝を守りながら、占星術の学者たちのように、救い主は「どこにおられますか」と問いかけ、求めている方がおられるかも知れません。あるいは信仰を告白し、洗礼を受け、クリスチャンとなった人も、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救いを確認し続けていると言うことができます。そういう意味で私たちは皆、「どこにおられますか」と救い主を、救いを求める者なのです。
占星術の学者たちは、「どこにおられますか」と新しい王、救い主を探し求めました。その彼らに、救い主の生まれた場所を、つまり救い主とはだれか、救いとは何かを示したものは、聖書の御言葉でした。
彼らの問いかけに、別の動機で過敏に反応したヘロデ王が、祭司長、律法学者たちを集めて問いただしたところ、6節に引用されている預言者の言葉が提示されました。これは、旧約聖書・ミカ書5章1節の御言葉です。この御言葉によって、救い主はベツレヘムに生まれることが示されました。言い換えれば、キリスト教による救いは、聖書の御言葉によって私たちに示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
ヘロデ王を通して聖書の御言葉を聞いて出かけた学者たちは、再び東方の国で見たあの「星」を見出しました。星は「幼子のいる場所の上に止まり」(9節)、学者たちは「その星を見て喜びにあふれた」(10節)と言います。彼らが「喜びにあふれた」のは、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と出会ったからです。
では、占星術の学者たちの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との出会いの内容とは、どういうものでしょうか?
11節をご覧下さい。「家に入ってみると、幼子は母マリアと共におられた。」(11節)
ここに、「幼子は母マリアと共におられた」と記されています。どうして、聖書にはわざわざ「母マリアと共におられた」と書かれているのでしょうか? まだ、生まれて間もない時ですから、母マリアと共にいるのは当然です。私たちは当然のようにこの聖書箇所を読んでおりますが、ここには特別な意味があるわけですね。
先週、ルカによる福音書1章 26~38節の御言葉からマリアの苦悩について考えました。マリアにとってイエスさまの誕生というのは、身に覚えのない妊娠であり、苦しみの待つ出産でした。それゆえに、マリアは深く苦しみ悩んだに違いありません。もしかしたら、死んでしまおうとさえ思うほどに、苦しみ悩んだかも知れません。その苦悩は、もし自分は独りぼっちだ、誰も私の悩みを聞いてくれる人はいない、苦しみを分かち合い、支えてくれる人はいない、共にいてくれる人はいない、と感じたら、実行に移されていたかも知れません。
そのために神さまはエリザベトを用意されました。エリザベトはマリアの親戚に当たる人物ですが、不妊の女性で老齢を迎えています。それが神さまの恵みとして子どもが与えられることが天使を通して告げられます。エリザベトも夫のザカリアも信じられません。「五ヶ月の間身を隠していた」(ルカ1:24)とありますように、エリザベトは自分の身に起こることが信じられず、不安の日々を送っていたのです。
マリアはこのエリサベトを訪ね、三カ月の間、その家に滞在したと記されています(ルカ1:56)。マリアはきっと、エリサベトに、自分の胸の苦しみを打ち明け、聞いてもらい、癒されたのでしょう。
あなたと共にいる、と言われる神さまは、自分をよく理解し、共にいてくれる人を備えてくださいました。共にいる人を通して、神さまが共におられることを味わわせてくださいました。エリサベトと共に過ごす日々の中で、マリアは、人生とは、神さまが共にいてくださるもの、言い換えれば、愛によって支えられているものとだと示され、それを信じたのです。
クリスマスに私たちに告げられる喜びとは、苦しみ悩みのない、単純な喜びではなく、苦悩の中に輝く喜び、苦悩の中で捜し当てる喜びなのです。
占星術の学者たちは、このマリアと共におられる神さまを捜し当てたのです。自分の苦悩の人生の中に、共にいて下さる神さまは探し当てたのです。それが「母マリアと共におられる」幼子イエス・キリストでした。彼らはここに人生の慰めを、励ましを、喜びを捜し当てたのです。それがまさに私たちにとっても“救い”なのです。
けれども、彼らはまだ見つけたに過ぎません。彼らはここから信仰の人生、救いの旅を始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彼らは、「宝の箱を開けて、黄金、入香、没薬を贈り物として献げた」(11節)とあります。それは礼拝を意味するものですが、言い換えれば、自分の宝(価値あるもの)を、もっと言えば自分の人生そのものを献げたと言って良いでしょう。
占星術の学者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を礼拝して、「別の道を通って‥‥帰って行き」(12節)ました。別の道とは、神さまが共におられるという救いを捜し当て、自分の人生をかけて信仰生活を始めたということにほかなりません。
皆さん、私たちも、聖書を通して、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もたらされる救いを見つけ、「別の道」=「信仰の人生」を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0년 12월 20일 주일예배(요약판)】
“구세주가 함께 계시는 기쁨” 마태복음 2장 1~12절
오늘의 성경말씀은 동방 박사들의 크리스마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동방 박사들이란 아마도 페르시아에서 마기라고 불린 학자들이었던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점성술의 학자들”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른바 별을 보고 점을 치는 사람들이지만, 단순한 점성가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의 점성술은 천문학으로서 최첨단의 과학이라고 생각되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판단에 따라 농작물의 심는 시기나 수확의 시기를 정했습니다. 그들은 과학자이며 또 종교자이며 의사이며 사회의 지도자였습니다. 그러한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하기 위하여 찾아온 것입니다.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축하하며 예배하기 위하여 오늘 여기 이 교회에 찾아왔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현대에 있어서의 “동방 박사들”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먼 나라에서 별을 보고 구세주의 탄생을 알게 되었습니다. 알았다고는 해도 그것은 확실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진짜 구세주, 새로운 왕을 찾고 있었고, 어떤 별을 보고 유대 땅에 구세주가 태어나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 별을 쫒아 구세주를 찾으려 예루살렘에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아직 예수 그리스도를 찾지 못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지 못한 것입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어디에 계십니까?”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문자 그대로 생각하면 유대인의 왕, 구세주가 태어나신 “장소”를 묻는 물음입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구세주는 누구이십니까?” “구원이란 무엇입니까?” 라는 본질적인 물음을 담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교회에 왔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기독교가 설명하는 구원이 어떤 것인지 모르고, 예수님께서 구세주라고 믿지도 못합니다. 여러분 가운데에는 예배를 보면서 동방 박사들처럼 구세주가 “어디 계시냐”고 묻고 구하고 있는 분이 계실지도 모릅니다. 또는 신앙을 고백하고 세례를 받아 크리스천이 된 사람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계속 확인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로 우리는 모두 다 “어디 계시냐”고 구세주를, 구원을 찾아 구하는 자인 것입니다.
동방 박자들은 “어디에 계십니까?” 라며 새로운 왕, 구세주를 찾았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구세주가 탄생한 장소, 즉 구세주란 누구냐, 구원이란 무엇이냐를 가리킨 것은 바로 성경의 말씀이었습니다.
그들의 물음에 다른 동기로 과민하게 반응한 헤롯 왕이 제사장들이나 서기관들을 모아 캐물었더니 6절에 인용된 예언자의 말씀이 제시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약성서 미가 5장 2절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 구세주는 베들레헴에서 태어날 것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바꿔 말하자면 기독교의 구원은 성경의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보여 진다는 것입니다.
헤롯 왕을 통해서 성경말씀을 듣고 나간 동방 박사들은 다시 동방의 나라에서 보던 그 “별”을 찾았습니다. 별은 “아기 있는 곳 위에 머물러”(9절), 박사들은 “그 별을 보고 매우 크게 기뻐하였다”(10절) 라고 말합니다. 그들이 매우 크게 기뻐한 것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동방 박사들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에 관한 내용이란 어떤 것일까요?
1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집에 들어가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는 것을 보고”(11절) 여기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다”고 쓰여 있습니다. 어째서 성경에는 일부러 “어머니 마리아가 함께 있다”고 쓰여 있을까요? 아직 태어나서 얼마 안되니까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우리는 당연한 것 같이 이 성경말씀을 읽고 있습니다만, 여기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지지난 주, 누가복음 1장 26~38절의 말씀을 통해서 마리아의 고뇌에 대해서 생각했습니다. 마리아에게 있어서 예수님의 탄생이라는 것은 자신이 알지도 못하는 임신이며 괴로움이 기다리는 출산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는 깊이 괴로워했을 것입니다. 어쩌면 죽어 버리려고 생각했을 정도로 괴로워했을지도 모릅니다. 그 고뇌는 혹시 외토리다, 아무도 나의 고민을 들어 주는 사람이 없다, 괴로움을 서로 나누며 지탱해 주는 사람이 없다, 함께 해 주는 사람이 없다고 느꼈다면 실행에 옮겼을지도 모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엘리사벳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엘리사벳은 마리아의 친족이 되는 사람이지만, 불임의 여성이며 노령에 이르러 있었습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아기가 주어질 것임을 천사를 통해 듣게 되었습니다. 엘리사벳도 남편 사가랴도 믿을 수 없었습니다. “다섯 달 동안 숨어 있었다”(눅1:24)고 쓰여 있는 것처럼 엘리사벳은 자신에게 일어난 일을 믿을 수 없어서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이 엘리사벳을 찾아 석 달쯤 그 집에 있었다고 쓰여 있습니다.(눅1:56) 마리아는 아마 이 엘리사벳에게 괴로운 마음을 털어 놓을 수 있었고, 그녀가 들어 주었기에 불안함을 덜 수 있었을 것입니다.
“너와 함께 계신다”고 말씀하시는 하나님께서는 나를 잘 이해하고 함께 해 주는 사람을 준비해 주셨습니다. 함께 하는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함께 계시는 것을 맛보게 하여 주셨습니다. 엘리사벳과 함께 보내는 나날 가운데서 마리아는 인생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시는 것, 바꿔 말하자면 사랑으로 지탱되는 것이라고 깨닫고 그것을 믿은 것입니다.
크리스마스에 우리에게 주어진 기쁨이란 괴로움이나 고민이 없는 단순한 기쁨이 아니라 고뇌 속에 빛나는 기쁨, 고뇌 속에서 찾아내는 기쁨인 것입니다.
동방 박사들은 이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을 찾아낸 것입니다. 말하자면 자기 고뇌의 인생 속에 함께 해 주시는 하나님을 찾아낸 것입니다. 그것이 “어머니 마리아와 함께 계시는 아기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들은 여기에 인생의 위로를, 격려를, 기쁨을 찾아낸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우리에게 있어서도 “구원”인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찾아낸 것에 불과합니다. 그들은 여기서부터 신앙의 인생, 구원의 여행을 시작해야 합니다. 그들은 “보배함을 열어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예물로 드리니라”(11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것은 예배를 드렸다는 의미지만, 바꿔 말하자면 자기의 보배를(가치 있는 것을), 더 말하면 자신의 인생을 바쳤다고 말할 수 있겠지요.
동방 박사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배한 후, “다른 길로” 돌아갔습니다.(12절) 다른 길이란 하나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구원을 찾아내서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신앙 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성경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을 찾아내서 “다른 길”=“신앙의 인생”을 걸어 가도록 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