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데반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를 받아들이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스데반은 살해당하고, 교회는 박해를 받게 됩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경계로 해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뚜렷이 갈라져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대립하는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 원인였을까요?
스데반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51절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다”는 말은 전혀 따르지 않는 가축을 이미지 하고 있습니다.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겨도 움직이지 않는다, 복종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할례라는 것은 남자의 음부인 가장 중요한 부분의 포피를 잘라 내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리는 것이 없고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과 귀를 닫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으로 통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귀를 닫고 있다. 그러한 완고함이 너희들에게는 있다고 스데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그러한 너희들은 성령을 거스르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며 자유로우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 계십니다만, 이 지상에서의 역사에 있어서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유대에서 태어나신 과거의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2000년 전에 유대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와 2000년 후에 일본에서 사는 우리들을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초월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지금을 사는 우리를 결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제 변변치 못한 설교를 통해서 옛날의 성경말씀을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만을 믿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서로만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과연 그런 작은 하나님으로 좋은 것인가? 너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죽어버리고 지금은 살아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하나님으로 좋은 것인가? 그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스데반의 이 설교를 어떻게 들으시겠습니까?
스데반이 39절에서 50절까지에 말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하나님의 처소)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지었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 뵙는다는 그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습니다만, 이 성전에서의 예배라는 것이 점점 의례화 되어 버렸습니다. 예배 그 자체가 형식화되어 실제로는 그 성전에서의 종교 행사가 여러 가지로 이권을 낳아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들의 돈벌이나 장사의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여기에 오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성전세를 빼앗기거나 여러 가지 이권에 관련되는 헛된 돈이 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현상을 스데반은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과 관계된 사람들로서는 이 스데반의 말은 간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의 주장의 중심은 48절에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성전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측의 입장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에 응하는 의미로라도 성전을 하나님의 처소로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도 그것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만큼 성전 건설은 우상 숭배로 결부되는 위험성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애굽에 있어서 노예 상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셔서, 애굽으로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인도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생하면서 애굽에서 탈출해 왔습니다만,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39절에 쓰여 있듯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다”라고 합니다. 애굽의 우상숭 배와 마찬가지로 송아지의 상을 만들어 그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자기들이 보이는 것, 제어할 수 있는 것에 하나님을 밀어 넣고 안심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너희들의 조상들이 거역한 것 같이 너희들도 거역하고 있다고 규탄했습니다.
가두어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과거에 쫓아 보내고 어떤 전통이나 자기들의 생각 속에 가두어 정해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늘 새로우며 아직도 앞으로도 계속되며 더욱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일관하는 구원의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에게 인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여 장막을 만들고,모세의 장막을 토대로 다윗과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큰 성전을 만들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순간, 그 때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성전만이 하나님과 우리들이 만나는 장소가 아닌 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들을 잇는 가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야흐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예루살렘에서 온 세계로 더 넓게 퍼져 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교회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나자 그리스도인들은 각지방이나 외국으로 흩어지게 되고, 실로 이들로 인해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되어 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보자면 한국이나 일본은 세계의 먼끝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 먼끝의 결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때도 교회에만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성전을 쓰셔서 교회의 외측으로 퍼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굉장한 하나 하나의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광야에 만들어진 모세의 장막을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각자 고유의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있고 간증이 있습니다. 각자 나름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각자 여러 가지의 색조로 하나님의 처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은 앞으로도 더 우리들이라는 사도를 통해서 계속해 갑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눈앞에 본 바울이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바꿔진 것 같이 그의 메시지를 통해서, 스케일이 큰, 바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켜진 우리들도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있다는 좋은 의미로서의 자신과 안심을 가지고 크신 하나님의 힘을 등에 업고 여기서부터 각자의 장소에 뒤돌아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 자신 속에 하나님께서는 계시는 것입니다.
【 2020年 7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神の住まい」 使徒言行録 7章 39~53節
先週に引き続き、ステファノの説教からお話しをしたいと思います。
ステファノは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を語りました。しかし、ユダヤ教指導者たちは神さまの救いのストーリーを受け入れようとはしませんでした。むしろ、神さまを冒涜していると、拒絶しました。そのために、ステファノは殺され、教会は迫害されます。ステファノの説教を境に、ユダヤ教とキリスト教がはっきりと別れ、それ以来、未だに対立するものとなっているのです。それは一体何が原因だったのでしょうか?
ステファノはこのように指摘しています。それが51節です。「かたくなで、心と耳に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たち、あなたがたがは、いつも聖霊に逆らっています。」
「かたくなで」とは、首が硬いという言葉です。これは言うことを聞かない家畜のイメージです。首が硬いと、手綱を強く引っ張っても、従わせることができません。さらにそのあとに、「心と耳に割礼を受けていない人たち」という言葉も出てきます。割礼というのは、男性の局部という、最も重要な部分の包皮を切り取ることによって、神さまと何も隔てるものがなく、結びついているということの証しであったわけですね。ですから、心と耳に割礼を受けていないというのは、心と耳が閉じてしまっている状態を表しています。神さまと心で通じ合えない。神さまの言葉に対して、耳を閉ざしている。そういう頑なさが、あなた方にはあるのだとステファノは指摘しているのです。そしてさらに、そういうあなた方は、聖霊に逆らっていると言っています。
聖霊なる神さまのの導きは、常に現在進行形であり、自由です。キリストは、今も天で生きておられますが、この地上での歴史においては、今から2000年前にユダヤで生まれた過去の方です。けれども聖霊は、その2000年前にユダヤで生まれられたキリストと、2000年後に日本で生きる私たちとを、時間と空間の隔たりを超えて、キリストのことが私たちにもわかるように、今を生きる私たちと結びつけてくださるのです。ですから、今も、私の拙い説教を通して、昔の聖書の言葉が、今、語られる神さまの言葉として聞くことができるわけです。それが聖霊の働きです。
しかし、ユダヤ教は、三位一体の神さまを信じません。父なる神さまの存在だけを信じますから、神さまの語りかけは、旧約聖書だけで終わっているのです。
ステファノは、果たして、そんな小さな神さまでいいのか?あなた方が信じている神さまは、過去に死んでしまって今は生きておられないような、そんな神さまでいいのか?と訴えているのです。
皆さん、どうでしょうか?ステファノのこの説教をどのようにお聞きになるでしょうか?
ステファノが39節から50節までに語っている内容というのは、神さまがどこにお住まいになるのか(神さまのおられるところ)ということが問題になっています。
この時のユダヤ教の指導者たちにとって、それはダビデ王とソロモン王が建てたエルサレムにある神殿でした。神殿に行って神さまにお会いする。これ自体はおかしなことではないのですが、この神殿での礼拝というものが、次第に儀礼化してしまったのです。礼拝そのものが、形式化し、実際にはその神殿での宗教行事が、様々な利権を生んで、神殿で働く祭司たちの金儲けや商売の手段となってしまったのです。そして神殿は、ここに来なければ神さまに会えないという場所になっていきました。そのためには神殿税が取られたり、色々な利権がらみの無駄なお金もかかるようになっていました。その現状をステファノは、痛烈に批判しているわけです。神殿に関係する人々にとっては、このステファノの言葉は見過ごす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
ステファノの主張の中心は、48節にある言葉です。「けれども、いと高き方は、人の手で造ったようなものにはお住みになりません。」
神殿に行けば神さまに会えるというのは、あくまでも人間側の都合であるわけですね。
ダビデという人は、聖書に出てくる人の中でも特に神さまに愛された人です。ダビデは神さまの愛に応える意味でも、神殿を、「神さまの住まい」を建てたいと願いました。しかし、神さまはダビデに対してそれを赦されませんでした。それほど、神殿建設は偶像礼拝に結びつく危険性をはらんでいたのです。
かつて、エジプトにおいて奴隷状態であったイスラエルの民たちを神さまは、モーセを用いてエジプトから約束の地カナンまで導き出されました。モーセに導かれたイスラエルの民たちは苦労してエジプトから脱出してきたのですが、その時、イスラエルの民は、39節にありますように、「モーセに従おうとせず、彼を退け、エジプトをなつかしく思った」と言います。エジプトの偶像礼拝と同じように、牛の象を造って、その偶像にいけにえをささげました。自分たちの見えるもの、コントロール出来るものに神さまを押し込めて安心を得たかったわけです。ステファノは「あなた方の先祖が逆らっ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そうしているのです」と語り、あの先祖と同じように、神さまに心を閉ざし、逆らっていると糾弾しました。
閉じ込めてしまってはいけない。神さまを、過去に追いやって、ある種の伝統や、こちらの考え方の中に閉じ込めて、決めつけてしまってはいけない。神さまは生きておられて、神さまがなさることはいつも新しく、神さまの御業は、まだまだこれからも続き、さらに未来を目指しています。歴史を貫く救いのストーリーは、まで終わってはいないのです。
モーセに導かれたイスラエルの民は、エジプトを脱出し、幕屋を作り、モーセの幕屋をもとにダビデとソロモンはエルサレムに大きな神殿を作り、それで終わりなのではなくて、イエス・キリストがお生まれになって、十字架に架かり死なれた瞬間、その時に神殿の垂れ幕が、上から下まで真っ二つに裂けました。それ以来、神殿だけが、神さまと私たちが出会う場所では、もうなくなったのです。今や、イエス・キリストご自身が、神さまと私たちをつなぐ架け橋になって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今や、キリストの霊である聖霊が、私たちの一人一人に注がれて、パウロの言葉によるならば、今や、私たちの子の一人一人の体が、神の霊の宿る、神の神殿になっているのです。そしてそういう一人一人を通して、神さまの救いはエルサレムから全世界に、さらに広く広がっていくのです。
ステファノが殺されたことで、教会に対する大迫害が起こり、キリスト者たちが地方や外国に散らばっていきますけれども、これによって、実はここから、散らされた人々を通して、世界に広がっていき、世界宗教となっていくのです。
エルサレムから見れば、韓国や日本というのは世界の果てです。でも、この世界の果てでの結実が私たちなのです。そして今この時も、教会にだけ神さまが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一人一人という神さまの神殿を用いて、教会の外側へと広がっていくのです。
私たちは、本当に一人一人が、素晴らしい、一つ一つの神さまの神殿、神の住まいです。荒れ野に作られたモーセの幕屋を、ステファノは、証しの幕屋と呼びましたけれども、私たち一人一人の中には、それぞれ固有の神さまとの出会いの経験があり、証しがあります。それぞれなりの神さまとの関係が、それぞれ色々な色合いのある、神さまの住まいを形づくっています。
皆さん、使徒言行録は、まだまだこれからも、私たちという使徒を通して続いていきます。ステファノの殉教を目の当たりにしたパウロが、世界に福音を宣べ伝えてゆく者に変えられたように、彼のメッセージから、スケールの大きな、まさに今この時にも、生きて働いておられる神さまを示された私たちも、神の住まいとされているという、良い意味での自身と安心をもって、大きな神さまの力を背に、ここからそれぞれの場所に戻っ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皆さん、私たち自身の中に神さまはいらっしゃるのです。
【2020년 7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처소” 사도행전 7장 39~53절
지난 주에 이어 스데반의 설교로부터 말씀을 드리고자 합니다.
스데반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교 지도자들은 하나님의 구원의 스토리를 받아들이려고는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을 모독하고 있다며 거절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스데반은 살해당하고, 교회는 박해를 받게 됩니다. 스데반의 설교를 경계로 해서 유대교와 기독교가 뚜렷이 갈라져서 그 이후로 지금까지도 대립하는 관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것은 도대체 무엇이 원인였을까요?
스데반은 이렇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51절입니다. “목이 곧고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너희도 너희 조상과 같이 항상 성령을 거스르는도다”
“목이 곧다”는 말은 전혀 따르지 않는 가축을 이미지 하고 있습니다. 고삐를 강하게 잡아당겨도 움직이지 않는다, 복종시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후에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 사람들” 이라는 말도 나옵니다. 할례라는 것은 남자의 음부인 가장 중요한 부분의 포피를 잘라 내는 것으로 하나님에 대해서 아무것도 가리는 것이 없고 하나님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의 증거였습니다. 그러므로 마음과 귀에 할례를 받지 못한다는 것은 마음과 귀를 닫고 있는 상태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하나님과 마음으로 통하지 못한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귀를 닫고 있다. 그러한 완고함이 너희들에게는 있다고 스데반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그러한 너희들은 성령을 거스르고 있다고 말한 것입니다.
성령이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은 항상 현재진행형이며 자유로우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지금도 하늘에서 살아 계십니다만, 이 지상에서의 역사에 있어서는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유대에서 태어나신 과거의 분이십니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그 2000년 전에 유대에서 태어나신 그리스도와 2000년 후에 일본에서 사는 우리들을 시간과 공간의 거리를 초월해 그리스도를 알 수 있도록 지금을 사는 우리를 결합시켜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도 제 변변치 못한 설교를 통해서 옛날의 성경말씀을 지금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들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입니다.
그러나 유대교는 삼위 일체이신 하나님을 믿지 않습니다. 아버지 하나님의 존재만을 믿고 있으므로 하나님의 말씀은 구약성서로만 끝나 버리는 것입니다.
스데반은 과연 그런 작은 하나님으로 좋은 것인가? 너희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께서는 과거에 죽어버리고 지금은 살아 계시지 않는 것 같은 그런 하나님으로 좋은 것인가? 그렇게 호소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떠십니까? 스데반의 이 설교를 어떻게 들으시겠습니까?
스데반이 39절에서 50절까지에 말하고 있는 내용이라는 것은 하나님께서 어디에 계시는지(하나님의 처소)가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그 때의 유대교 지도자들에게 있어서 그것은 다윗 왕과 솔로몬 왕이 지었던 예루살렘에 있는 성전이었습니다. 성전에 가서 하나님을 만나 뵙는다는 그것 자체는 이상하지 않습니다만, 이 성전에서의 예배라는 것이 점점 의례화 되어 버렸습니다. 예배 그 자체가 형식화되어 실제로는 그 성전에서의 종교 행사가 여러 가지로 이권을 낳아 성전에서 일하는 제사들의 돈벌이나 장사의 수단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리고 성전은 여기에 오지 않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는 장소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 때문에 성전세를 빼앗기거나 여러 가지 이권에 관련되는 헛된 돈이 들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 현상을 스데반은 통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성전과 관계된 사람들로서는 이 스데반의 말은 간과할 수가 없었습니다.
스데반의 주장의 중심은 48절에 있는 말입니다. “그러나 지극히 높으신 이는 손으로 지은 곳에 계시지 아니하시니”
성전에 가면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인간들 측의 입장입니다. 다윗이라는 사람은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하나님께 사랑받은 사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사랑에 응하는 의미로라도 성전을 하나님의 처소로 짓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윗에게도 그것을 용서하지 않으셨습니다. 그 만큼 성전 건설은 우상 숭배로 결부되는 위험성을 품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전에 애굽에 있어서 노예 상태였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쓰셔서, 애굽으로부터 약속의 땅 가나안까지 인도하셨습니다. 모세에게 인도된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생하면서 애굽에서 탈출해 왔습니다만, 그 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39절에 쓰여 있듯이 “모세에게 복종하지 아니하고자 하여 거절하며 그 마음이 도리어 애굽으로 향하였다”라고 합니다. 애굽의 우상숭 배와 마찬가지로 송아지의 상을 만들어 그 우상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자기들이 보이는 것, 제어할 수 있는 것에 하나님을 밀어 넣고 안심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스데반은 너희들의 조상들이 거역한 것 같이 너희들도 거역하고 있다고 규탄했습니다.
가두어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을 과거에 쫓아 보내고 어떤 전통이나 자기들의 생각 속에 가두어 정해 버리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살아 계시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늘 새로우며 아직도 앞으로도 계속되며 더욱 미래를 향하고 있습니다. 역사를 일관하는 구원의 스토리는 아직 끝나지 않은 것입니다.
모세에게 인도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탈출하여 장막을 만들고,모세의 장막을 토대로 다윗과 솔로몬은 예루살렘에 큰 성전을 만들고, 그것으로 끝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태어나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신 순간, 그 때 성전의 성소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습니다. 그 이후로 성전만이 하나님과 우리들이 만나는 장소가 아닌 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우리들을 잇는 가교가 되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바야흐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몸이 하나님의 영이 거주하는 하나님의 성전이 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의 구원은 예루살렘에서 온 세계로 더 넓게 퍼져 가는 것입니다.
스데반의 순교로 교회에 대한 대박해가 일어나자 그리스도인들은 각지방이나 외국으로 흩어지게 되고, 실로 이들로 인해 기독교가 세계 종교로 되어 갔던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보자면 한국이나 일본은 세계의 먼끝입니다. 그러나 이 세계 먼끝의 결실이 우리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때도 교회에만 하나님께서 계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라는 하나님의 성전을 쓰셔서 교회의 외측으로 퍼져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참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이 굉장한 하나 하나의 하나님의 성전, 하나님의 처소입니다. 광야에 만들어진 모세의 장막을 스데반은 증거의 장막이라고 불렀습니다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는 각자 고유의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이 있고 간증이 있습니다. 각자 나름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각자 여러 가지의 색조로 하나님의 처소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사도행전은 앞으로도 더 우리들이라는 사도를 통해서 계속해 갑니다. 스데반의 순교를 눈앞에 본 바울이 세계에 복음을 전파하는 자로 바꿔진 것 같이 그의 메시지를 통해서, 스케일이 큰, 바로 지금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가리켜진 우리들도 하나님의 처소가 되어 있다는 좋은 의미로서의 자신과 안심을 가지고 크신 하나님의 힘을 등에 업고 여기서부터 각자의 장소에 뒤돌아가고자 합니다. 여러분, 우리들 자신 속에 하나님께서는 계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