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히로시마교회의 창립72주년 기념예배로서 주일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재일대한기독교회 히로시마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지키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었습니다. 재일교포들이 교제하는 장소이자, 일본 사회 속에서 민족의 긍지를 되찾는 장소이며, 초토화된 땅 히로시마에서 다시 살아갈 소망을 주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부활의 주님, 소망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교회에 가면 동포들을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 교회란 그런 장소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러한 장소였던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재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절)
텅 빈 무덤 앞에서 마리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울고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는 마리아가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씌어 있다고 할만큼 마리아는 심신이 힘들고 심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께 바쳐 따라갔습니다. 이른바 마리아에 있어서의 예수님은 마치 자기를 따뜻하게 비추는 “태양” 과도 같은 존재이며 마음을 의지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삶의 보람이기도 했었지요.
그러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리자면 절망이라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랑만큼은 사라져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살아 계신 때도 돌아가신 후도 마리아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일요일 새벽에 누구보다도 일찍 예수님께서 매장되어 계신 무덤에 온 것입니다. 거기에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자기의 존재의의를 확인하고픈 그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매장되어 계신 무덤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가 보았더니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예수님께서 안 계십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부랴부랴 베드로들을 부르러 갔는데, 마리아는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디를 찾아 봐야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 부활의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방향으로 말하면 앞인지 뒤인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위인지 아래인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된 곳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위에 계신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그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의 성경말씀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뒤에 계셨습니다. 즉 그냥 앞만 향해 보고 있었다면 보이지 않을 장소입니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인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분은 우리 뒤에 계시는 분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은 구원을 구하러 온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가면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에 가 보면 거기에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구하려고 앞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뒤, 즉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속에 하나님께서는 안 계셨다, 자신의 과거는 잊어버리고 싶다, 앞으로 밖에 자신의 구원이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뒤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걸음 그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반드시 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뒤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은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게 예수님이신 줄 알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동산지기려니 했던 것입니다.(15절)
그런데 두 번째로 뒤돌아 보았을 때에는 그것이 예수님이신 줄 알고 “랍오니(선생님)” 라고 부르고 붙들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는데 두번째에야 알았던 것입니다. 그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생판 남 같은 말투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친하게 “마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여느 때의 말투이며 귀에 익은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생전의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 것 같이 “랍오니”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주 친숙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자와 동산지기 같은 생판 남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마리아” “랍오니” 라고 서로 부르는 신뢰 관계, 사랑 받고 사랑 하는 관계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그냥 뒤돌아 본다고 해서 누구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사랑받는 것을,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쉽게 느끼지 못합니다. 성경말씀을 듣고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마치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 것 같이 예수님과 함께 인생을 걷는다, 그러한 신앙생활 가운데 예수님과의 신뢰 관계를 만들어 내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자신의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긍정적으로” 라고 흔히들 말합니다만, 우리가 참으로 앞을 향하여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뒤에 서서 지키고 살리고 사랑해 주시는 분을 신뢰하는 신앙과 안심이 있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은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이 보입니다. 거기에는 기쁨이나 즐거움 뿐만 아니라 괴로움이나 슬픔의 자국도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님께서 함께 걸어주시고 인도해 주신 것을, 하나님께 사랑받아 온 것을 믿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살아가게 해주시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다행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라고 말했습니다만, 주님을 본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창립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때때로 교회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 히로시마 교회의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돌이켜 보자면 항상 좋은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었고,성도들의 사이가 좋지않았던 때도 있었고, 소망을 찾아내지 못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되돌아보면 거기엔 늘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길, 구원의 스토리를 제시해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 2020年 7月 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救い主は後ろにおられるのかも」ヨハネ20章11~18節
今日は、広島教会の創立72周年記念礼拝として、主日礼拝を守っております。私たちの在日大韓基督教会という教会は、単に礼拝を献げ、信仰を守るための場所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在日同胞の交わりの場であり、日本社会の中で民族の誇りを取り戻す場所であり、焼け野原の広島での生きる希望を与える場所であったわけです。教会に行けば復活の主、希望のイエスさまと会える、教会に行けば同胞と会える、自分の存在意義を確かめることが出来る、そのような場所であったのです。私たちの教会がそのような場所であったことを、私たちはもう一度再認識する必要があるかと思います。
さて、13節をご覧下さい。「わたしの主が取り去られました。どこに置かれているのか、わたしには分かりません。」(13節)
空っぽのお墓の前で、マリアは途方に暮れて泣いていました。お墓の中に、イエスさまの遺体がなかったからです。
ルカによる福音書8章2節には、マリアはイエスさまによって「七つの悪霊を追い出していただいた」と書かれています。七つの悪霊が憑いていると言われるほどに、マリアは心身ともにつらく、ひどい状態だったのでしょう。そのような状態から、イエスさまによって癒され、救われたのです。それで、マリアは自分の人生をイエスさまに献げ、従って行きました。言わば、マリアにとってイエスさまは、自分を暖かく照らす“太陽”のような存在であり、心の拠り所でありました。そして、自分のすべてを献げても惜しくない生き甲斐でもあったでしょう。
そのような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架けられ、処刑されてしまったのです。マリアの気持を推し量ると、絶望という言葉では言い尽くせないものがあったと思われます。それでも、イエスさまを慕うマリアの愛は消えて無くなりはしませんでした。生きている時も、死んでしまった後も、マリアの愛は変わりませんでした。だからこそ、マリアは日曜日の早朝、だれよりも早く、イエスさまが葬られた墓にやって来たのです。そこに行けばイエスさまに会える、自分の存在意義を確かめる、そのような思いでイエスさまが葬られた墓にやって来たのです。
ところが、マリアがイエスさまのお墓に行ってみますと、イエスさまの遺体が墓から無くなっていたのです。肝心のイエスさまがいない。どこにいるのか分からない。取りあえずペトロたちを呼びに行ったものの、マリアは混乱し、どうしてよいのか、どこを捜したらよいのか分からなかったのです。そんな中で、人の気配を感じたのか、ふと後ろを振り向くと、そこに復活のイエスさまが立っていました。
ところで皆さん、神さまはどこにおられると思いますか? 方向で言うと、前なのか後ろなのか、右なのか左なのか、上なのか下なのか‥‥。聖書では、神さまは天におられると表現されている箇所が多いので、私たちは、神さまは上におられると考えるでしょう。もちろん、それは間違いではありません。
けれども、今日の聖書箇所では、復活したイエスさまはマリアの後ろにおられました。つまり普通に前を向いていたら見えない場所です。振り向かなければ見えない場所なのです。神さまというお方は、私たちの後ろにおられるのです。
教会を訪ねて来られる方は、救いを求めて来られるのだと思います。教会に行けば救い主イエスさまと会えると期待して来るわけですね。でも、実際、教会に行って見ますと、そこにイエスさまを見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という人が多いのです。それは私たちにも責任があるのかも知れませんが、でも、それは救いを求めて前ばかりを見ているからだと思うのです。だって、後ろ、すなわち自分のこれまでの歩みの中に神さまはいなかった、自分の過去は忘れてしまいたい、前にしか自分の救いはないと思い込んでいるからです。
神さまは、私たちの後ろにおられるのです。私たちが歩んできた歩みの中にも神さまはおられたのです。
けれども、後ろを振り向けば、復活したイエスさまが必ず見えるかと言えば、そうではありません。マリアは、自分の後ろに人が立っていることを認めました。けれども、それがイエスさまだとは気づかなかったのです。「園丁」(15節)だと思っていました。
ところが、2度目に振り向いた時には、それがイエスさまだと気づき、「ラボニ(先生)」(16節)と呼んで、すがりつこうとしました。最初は気づかなかったのに、2度目には気づいた。その違いはいったい何だったのでしょうか?
それは、イエスが「マリア」(16節)と呼ばれたからです。最初、イエスさまは「婦人よ」(15節)と言いました。まるで赤の他人のような呼び方です。でも、2度目には親しく「マリア」と呼ばれました。それは、いつもの呼び方であり、聞き慣れた声だったでしょう。だからマリアは、生前のイエスさまをそう呼んでいたように「ラボニ」と呼び返したのです。そこには、とても親しい関係があります。婦人と園丁のような、赤の他人の関係ではありません。「マリア」「ラボニ」と呼び合える信頼関係、愛されて愛する関係があります。
私たちも、ただ振り向くだけでは主イエスは見えません。イエスさまに愛されていることに、神さまに生かされてあることに気づきません。聖書の御言葉に聴き、礼拝と祈りを通して、まるでイエスさまが隣におられるかのように、イエスさまと共に人生を歩む。そういう信仰生活の中で、イエスさまとの信頼関係が造り上げられていき、神さまの愛が分かって来ると、自分の後ろにおられるイエスさまに、神さまに気づくようになる、信じられるようになっていくのです。
人生は“前向きに!”とよく言われますが、私たちが本当の意味で前向きに生きられるのは、自分の後ろに立っていて見守り、生かし、愛してくださる方を信頼する信仰と安心があって初めて、できることな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
人生は後を振り返った時、自分が歩いて来た足跡が見えます。そこには喜びや楽しみだけではなく、苦しみ悲しみの跡が見えます。けれども、そこに、イエスさまが共に歩んで導き支えてくださったことが、神さまに愛されてきたことが信じられるなら幸いです。自分の命は生かされ、愛されてあると気づくことができるなら幸いです。マリアは、弟子たちのところに行って「わたしは主を見ました」(18節)と告げましたが、主を見るとは、復活したイエスさまに出会うとは、そういうことなのです。
私たちは毎年、創立記念礼拝を守っておりますが、時々、教会の歩みを振り返るということも必要なのだろうと思います。この広島教会のこれまでの歩みを振り返るならば、いつも良いことばかりがあったわけではありません。財政的に苦しいこともありましたし、信徒が仲違いしている時もあったり、希望を見いだせない状態であった時もありました。でも、今、こうして振り返るならば、そこに復活の主イエスさまがこの教会と共におられたのです。そして、私たちにこの教会を通して、救いの道を、救いのストーリーを指し示して下さっていたのです。
皆さん、これからもこの広島教会と共に、神さまの救いの道を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0년 7월 5일 주일예배】
“구세주는 뒤에 계실지도 모른다” 요한복음 20장 11~18절
오늘은 히로시마교회의 창립72주년 기념예배로서 주일예배를 드리려고 합니다. 우리 재일대한기독교회 히로시마교회는 단순히 예배를 드리고 신앙을 지키기 위한 장소만은 아니었습니다. 재일교포들이 교제하는 장소이자, 일본 사회 속에서 민족의 긍지를 되찾는 장소이며, 초토화된 땅 히로시마에서 다시 살아갈 소망을 주는 장소이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가면 부활의 주님, 소망의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교회에 가면 동포들을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존재의의를 확인할 수 있다, 교회란 그런 장소였습니다. 우리 교회가 그러한 장소였던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재인식할 필요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럼 13절을 보십시오. “사람들이 내 주님을 옮겨다가 어디 두었는지 내가 알지 못함이니이다”(13절)
텅 빈 무덤 앞에서 마리아는 어찌할 바를 몰라서 울고 있었습니다. 무덤 속에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8장 2절에는 마리아가 “악귀를 쫓아내심과 병 고침을 받은 어떤 여자들 곧 일곱 귀신이 나간 자 막달라인이라 하는 마리아”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일곱 귀신이 씌어 있다고 할만큼 마리아는 심신이 힘들고 심한 상태였을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고침을 받고 구원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자신의 인생을 예수님께 바쳐 따라갔습니다. 이른바 마리아에 있어서의 예수님은 마치 자기를 따뜻하게 비추는 “태양” 과도 같은 존재이며 마음을 의지할 곳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삶의 보람이기도 했었지요.
그러한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신 것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헤아리자면 절망이라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할 수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을 사모하는 사랑만큼은 사라져 없어지지 않았습니다. 살아 계신 때도 돌아가신 후도 마리아의 사랑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일요일 새벽에 누구보다도 일찍 예수님께서 매장되어 계신 무덤에 온 것입니다. 거기에 가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 자기의 존재의의를 확인하고픈 그러한 마음으로 예수님이 매장되어 계신 무덤에 온 것입니다.
그런데, 마리아가 예수님의 무덤에 가 보았더니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서 사라졌던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예수님께서 안 계십니다. 어디에 있는지 모릅니다. 부랴부랴 베드로들을 부르러 갔는데, 마리아는 혼란스러워 어떻게 해야 좋을지 어디를 찾아 봐야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런 가운데 인기척을 느꼈는지 문득 뒤를 돌아보니 거기에 부활의 예수님께서 서 계셨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어디에 계신다고 생각하십니까? 방향으로 말하면 앞인지 뒤인지, 오른쪽인지 왼쪽인지, 위인지 아래인지‥‥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하늘에 계신다고 표현된 곳이 많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위에 계신다고 생각하지요. 물론 그것도 잘못은 아닙니다.
하지만 오늘의 성경말씀에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마리아의 뒤에 계셨습니다. 즉 그냥 앞만 향해 보고 있었다면 보이지 않을 장소입니다. 뒤돌아보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그런 곳인 것입니다. 하나님이라는 분은 우리 뒤에 계시는 분입니다.
교회를 찾아오는 사람은 구원을 구하러 온다고 생각합니다. 교회에 가면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수 있다고 기대하고 옵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에 가 보면 거기에서 예수님을 볼 수 없었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도 책임이 있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그것은 구원을 구하려고 앞만 보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뒤, 즉 자신의 지금까지의 삶속에 하나님께서는 안 계셨다, 자신의 과거는 잊어버리고 싶다, 앞으로 밖에 자신의 구원이 없다고 믿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뒤에 계시는 분입니다. 우리가 걸어온 걸음 그안에도 하나님께서는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뒤를 돌아본다고 해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반드시 볼 수 있는가 하면 그렇지만도 않습니다. 마리아는 자기 뒤에 사람이 서 있는 것은 느꼈습니다. 그러나 그게 예수님이신 줄 알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동산지기려니 했던 것입니다.(15절)
그런데 두 번째로 뒤돌아 보았을 때에는 그것이 예수님이신 줄 알고 “랍오니(선생님)” 라고 부르고 붙들려고 했습니다. 처음에는 알지 못했는데 두번째에야 알았던 것입니다. 그 차이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예수님께서 “마리아”라고 부르셨기 때문입니다. 처음에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치 생판 남 같은 말투입니다. 그러나 두 번째에는 친하게 “마리아” 라고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여느 때의 말투이며 귀에 익은 목소리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마리아는 생전의 예수님을 그렇게 부른 것 같이 “랍오니” 라고 대답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주 친숙한 관계가 있습니다. 여자와 동산지기 같은 생판 남과의 관계가 아닙니다. “마리아” “랍오니” 라고 서로 부르는 신뢰 관계, 사랑 받고 사랑 하는 관계가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도 그냥 뒤돌아 본다고 해서 누구나 예수님을 볼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께 사랑받는 것을, 하나님께 사랑받는 것을 쉽게 느끼지 못합니다. 성경말씀을 듣고 예배와 기도를 통해서 마치 예수님께서 옆에 계시는 것 같이 예수님과 함께 인생을 걷는다, 그러한 신앙생활 가운데 예수님과의 신뢰 관계를 만들어 내어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면 자신의 뒤에 계시는 예수님을, 하나님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믿을 수 있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인생은 “긍정적으로” 라고 흔히들 말합니다만, 우리가 참으로 앞을 향하여 긍정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자신의 뒤에 서서 지키고 살리고 사랑해 주시는 분을 신뢰하는 신앙과 안심이 있어야 비로소 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요?
인생은 뒤를 돌아 보았을 때 자기가 걸어온 발자국이 보입니다. 거기에는 기쁨이나 즐거움 뿐만 아니라 괴로움이나 슬픔의 자국도 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예수님께서 함께 걸어주시고 인도해 주신 것을, 하나님께 사랑받아 온 것을 믿을 수 있다면 다행입니다. 자신의 생명이 살아가게 해주시고 사랑받고 있다고 느낀다면 다행입니다. 마리아는 제자들이 있는 곳에 가서 “내가 주를 보았다” 라고 말했습니다만, 주님을 본다는 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우리는 해마다 창립기념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때때로 교회의 발자취를 되돌아 보는 것도 필요합니다. 우리 히로시마 교회의 지금까지의 시간들을 돌이켜 보자면 항상 좋은 일들만 있었던 건 아니었습니다. 재정적으로 어려울 때도 있었고,성도들의 사이가 좋지않았던 때도 있었고, 소망을 찾아내지 못했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렇게 되돌아보면 거기엔 늘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우리 교회와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 교회를 통해서 구원의 길, 구원의 스토리를 제시해 주고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앞으로도 우리 히로시마교회와 함께 하나님의 구원의 길을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