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혼자 아덴(아테네)까지 왔습니다. 그리스는 당시 로마제국 속에서 이전의 정치적인 지위는 잃고 있었습니다만, 문화나 학문이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이나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못 들었던 기묘한 종교에 대해 말하는 바울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테네에서의 선교는 그다지 잘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34절에 쓰여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면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지적이고 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아테네에는 많은 신들의 우상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지적인 사람들이 뜻밖에도 곁에서 보면 근거없는 것을 믿고 있을때가 종종 있습니다.
현대에도 종교는 아니지만 자기 계발 세미나나 심리학 세미나라고 하면서 수상한 장사를 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처음에는 수강자들에게 종교는 아니라고 안심시키지만 실은 교묘히 수강자를 심리적으로 끌어들여 가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지적인 말을 쓰면서 실제로는 심리적으로 고양되거나 엘리트 의식에 호소하거나 이것을 하면 무엇이든지 잘된다고 사례를 소개하거나 해서 이성을 잃게 하여 믿게 하는 것입니다. 지적인 사람일수록 그런 것에 현혹되기 쉽습니다. 이전에 일본 사회를 떨게 했던 테러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에 소위 고학력의 사람들, 그것도 이공계의 유능한 사람들이 입교했던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적인 아테네 사람들이 많은 신들을 숭배한 것처럼 인간은 자칫하면 쉽게 근거없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 학문이라고 말하면 “철학”이 떠오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도 나오는 그리스 철학의 에피쿠로스나 스토아라는 것도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들도 아테네에 서 있는 우상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예배하는 것은 미신이며, 사람의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라고 하면 왠지 까다로운 학문처럼 생각되고, 종교와의 차이도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철학은 원래 사람이 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생각하기 위해 태어난 학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을 습득하여 진리가 무엇인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철학은 사람이 행복하게 되기 위한 방법을 찾는 학문인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보면 철학과 종교는 목적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철학과 종교의 큰 차이는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합리성, 즉 이성을 통해 진리를 연구하려는 것이며, 그에 반하여 종교는 이성을 초월한 신앙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그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18절에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 즉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테네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바울의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에 데리고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라고 하는 것은 기원전 400년대부터 그리스의 국회가 있었던 곳이며 당시의 문화나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서 바울과 차분히 토론하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발언 내용에 그들이 구하는 지식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19절입니다.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19-20절)
즉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나 그 부활이라는 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한 일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고 그들은 원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리스인들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성경을 흥미 본위로 읽고자 하는 현대인의 경향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쓰여 있습니다. 그대로는 거기에 쓰여 있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행해지는 것은 성경의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실제로는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합리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이성에 합치하도록 해석한다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내용을 이성으로 이해하여 지식으로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는 결국 인간의 지식이 만들었던 우상일 뿐입니다. 즉 그 지식에는 우리를 구원할 힘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생각해낸 학설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바꿔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철학자들처럼 진리를 추구하는게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만났던 사람입니다. 살아 계신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바울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생이 180도 바꿔진 것입니다.
교회가 전하고 있는 것은 철학자들이 생각해낸 사상과 다르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실족을 주고 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아테네에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지적인 아테네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신들을 모시면서 불안하였던 것입니다. 그 불안으로 자기들이 아직 모르는 모셔야 하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이름도 모르는 신까지 제단을 만들고 예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많은 신들을 모시고 있었던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뭔지 모를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알지 못하는 신”까지 모신 것입니다. 지적인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던 것은 두려움이며 불안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메우기 위하여 학문을 하고 한편으로 “알지 못하는 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천지창조하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자신을 인간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시야말로 인간에게서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 주시고 참 사랑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사랑은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코로나 사태 가운데 앞날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세계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된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직히 말하자면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알게 된 하나님을… 이 세상에는 두려움 투성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그 사랑을 알아 사랑으로 두려움을 내쫓는 것입니다.
2021年6月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黙祷をもって礼拝を始めます。
〇招 詞 이사야(イザヤ書) 46章 9~10節
46:9 思い起こせ、初めからのことを。わたしは神、ほかにはいない。わたしは神であり、
わたしのような者はいない。
46:10 わたしは初めから既に、先のことを告げ/まだ成らないことを、既に昔から約束し
ておいた。わたしの計画は必ず成り/わたしは望むことをすべて実行する。
46:9 너희는 옛적 일을 기억하라 나는 하나님이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
는 하나님이라 나 같은이가 없느니라
46:10 내가 처음부터 종말을 알리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
르기를 나의 뜻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〇讃 頌 讃頌歌 529(1, 4節)
〇祈 祷 お祈りいたします。
天地の造り主なる神さま。この主日も聖霊の導きにより、それぞれの場において礼拝を献げられますことを感謝いたします。今日、あなたが私たちに語りかけて下さる御言葉に耳を傾け、そこにあなたの御心が示されていることを信頼をもってしっかりと聴き取れますように。
あなたに逆らう者たちは、御心が成就することを妨げようとし、あらゆる手段を尽くして私たちの前に立ちはだかります。私たちはどれだけ抵抗しようと望んでも、結局押し流されてしまいます。私たちは無力で、また罪深い者です。
しかし、あなた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逆らう者の試みを空しくして、必ず御自分の計画を成就されます、あなたの前には、どのような悪の力も空しいものでしかありません。
教会が困難の中にある時も、あなたは教会を支え、守って下します。どうか教会の切なる祈りを聴き上げて下さい。そして、信じる者一人ひとりに聖霊を豊かに注いで下さい。
どうか私たちが皆、聖霊に満たされ、あなたから頂く力によって、大胆に神の御言葉を語り、すべての人々を救いの道に招くことが出来ますように。
このコロナ禍の中にあっても、信仰をもって、体と心の健康を保つことが出来ますように。子どもたちや年老いた方々をお守り下さい。
今、緊急事態宣言下の中で、それぞれの場において、礼拝を献げておりますが、祈りを共にするすべての姉妹兄弟の上に主の祝福が降り注がれますように。
すべての祈りと併せて、このお祈りを、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アーメン。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이 주일도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각자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릴 수 있게 하심에 감사드립니다.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려는 그 말씀에 귀를 기울여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가리키고 있는 것을 신뢰를 가지고 잘 들을 수 있게 하옵소서.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들은 하나님의 뜻이 성취하는 것을 방해하려고 모든 수단을 다하여 우리 앞을 막아섭니다. 우리는 아무리 저항하려고 해도 결국 떠밀려 가 버립니다. 우리는 무력하며 또 죄 많은 존재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으십니다. 거스르는 자의 시험을 공허하게 하시고, 반드시 하나님의 계획을 성취하십니다. 하나님 앞에는 어떤 악의 힘도 헛된 것이 될 수 밖에 없습니다.
교회가 곤란 속에 있을 때도 하나님께서는 교회를 지켜 주십니다. 부디 교회의 간절한 기도를 들어 주시옵소서. 그리고 믿는 자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성령을 충만하게 쏟아 부어 주시옵소서.
아무쪼록 우리가 모두 다 성령이 넘치고 하나님께 받는 힘으로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말하여 모든 사람들을 구원의 길로 인도할 수 있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지금 긴급사태선언 아래에서 각자 그 자리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기도를 함께 하는 모든 자매 형제 위에 주님의 축복을 내려 주시옵소서.
모든 기도와 더불어 이 기도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 드리옵나이다. 아멘.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 17章 16~34節
17:16 パウロはアテネで二人を待っている間に、この町の至るところに偶像があるのを
見て憤慨した。
17:17 それで、会堂ではユダヤ人や神をあがめる人々と論じ、また、広場では居合わせ
た人々と毎日論じ合っていた。
17:18 また、エピクロス派やストア派の幾人かの哲学者もパウロと討論したが、その中
には、「このおしゃべりは、何を言いたいのだろうか」と言う者もいれば、「彼は外国
の神々の宣伝をする者らしい」と言う者もいた。パウロが、イエスと復活について
福音を告げ知らせていたからである。
17:19 そこで、彼らはパウロをアレオパゴスに連れて行き、こう言った。「あなたが説いて
いるこの新しい教えがどんなものか、知らせてもらえないか。
17:20 奇妙なことをわたしたちに聞かせているが、それがどんな意味なのか知りたいの
だ。」
17:21 すべてのアテネ人やそこに在留する外国人は、何か新しいことを話したり聞いた
りすることだけで、時を過ごしていたのである。
17:22 パウロは、アレオパゴスの真ん中に立って言った。「アテネの皆さん、あらゆる点
においてあなたがたが信仰のあつい方であることを、わたしは認めます。
17:23 道を歩きながら、あなたがたが拝むいろいろなものを見ていると、『知られざる神
に』と刻まれている祭壇さえ見つけたからです。それで、あなたがたが知らずに拝ん
でいるもの、それをわたしはお知らせしましょう。
17:24 世界とその中の万物とを造られた神が、その方です。この神は天地の主ですか
ら、手で造った神殿などにはお住みになりません。
17:25 また、何か足りないことでもあるかのように、人の手によって仕えてもらう必要も
ありません。すべての人に命と息と、その他すべてのものを与えてくださるのは、こ
の神だからです。
17:26 神は、一人の人からすべての民族を造り出して、地上の至るところに住まわせ、
季節を決め、彼らの居住地の境界をお決めになりました。
17:27 これは、人に神を求めさせるためであり、また、彼らが探し求めさえすれば、神を
見いだ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ということなのです。実際、神はわたしたち一人一人か
ら遠く離れてはおられません。
17:28 皆さんのうちのある詩人たちも、/『我らは神の中に生き、動き、存在する』/『我
らもその子孫である』と、/言っているとおりです。
17:29 わたしたちは神の子孫なのですから、神である方を、人間の技や考えで造った
金、銀、石などの像と同じものと考えてはなりません。
17:30 さて、神はこのような無知な時代を、大目に見てくださいましたが、今はどこにい
る人でも皆悔い改めるようにと、命じておられます。
17:31 それは、先にお選びになった一人の方によって、この世を正しく裁く日をお決めに
なったからです。神はこの方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て、すべての人にそのこと
の確証をお与えになったのです。」
17:32 死者の復活ということを聞くと、ある者はあざ笑い、ある者は、「それについては、
いずれまた聞かせてもらうことにしよう」と言った。
17:33 それで、パウロはその場を立ち去った。
17:34 しかし、彼について行って信仰に入った者も、何人かいた。その中にはアレオパ
ゴスの議員ディオニシオ、またダマリスという婦人やその他の人々もいた。
17:16 바울이 아덴에서 그들을 기다리다가 그 성에 우상이 가득한 것을 보고 마음
에 격분하여
17:17 회당에서는 유대인과 경건한 사람들과 또 장터에서는 날마다 만나는 사람들
과 변론하니
17:18 어떤 에피쿠로스와 스토아 철학자들도 바울과 쟁론할새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화을 전하기 때문이러라
17:19 그를 붙들어 아레오바고로 가며 말하기를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수 있겠느냐
17:20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
하니
17:21 모든 아덴 사람과 거기서 나그네 된 외국인들이 가장 새로운 것을 말하고 듣
는 것 이외에는 달리 시간을 쓰지 않음이더라
17: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심이 많도다
17: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가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
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17: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
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17: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이심이라
17: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살게 하시고 그들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장하셨으니
17:27 이는 사람으로 혹 하나님을 더듬어 찾아 발견하게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
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계시지 아니하도다
17: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존재하느니라 너희 시인 중 어떤 사람들
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17:29 이와 같이 하나님의 소생이 되었은즉 하나님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
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
17:30 알지 못하던 시대에는 하나님이 간과하셨거니와 이제는 어디든지 사람에게
다 명하사 회개하라 하셨으니
17:31 이는 정하신 사람으로 하여금 천하를 공의로 심판할 날을 작정하시고 이에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신 것으로 모든 사람에게 믿을 만한 증거를
주셨음이니라 하니라
17:32 그들이 죽은 자의 부활을 듣고 어떤 사람은 조롱도 하고 어떤 사람은 이 일
에 대하여 네 말을 다시 듣겠다 하니
17:33 이에 바울이 그들 가운데서 떠나매
17:34 몇 사람이 그를 가까이하여 믿으니 그 중에는 아레오바고 관리 디오누시오
와 다마리라 하는 여자와 또 다른 사람들도 있었더라
〇説 教
21.06.06主日(要約版)「知られざる神」使徒言行録17章 16~34節
パウロは一人でアテネまでやって来ました。ギリシャは、当時、ローマ帝国の中でかつての政治的な地位は失っておりましたが、文化や学問の盛んなところでした。知識人が多くいたのです。彼らは、新しい知識や文化に興味津々でした。ですから、これまで聞いたことがない奇妙な宗教のことを語るパウロに関心を示しました。
しかし、結論から言いますと、アテネではそれほど宣教はうまくいきませんでした。もちろん、34節にあります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た人々もおりましたが、それほど多くはありませんでした。頭のいい人は理屈で物事を捉えるので、信仰に入りにくいという面があるかもしれません。
ところで、ここで不思議なことがあるのです。知的で議論好きな人々のいるアテネの町には多くの神々の偶像が立っていたのです。滑稽に聞こえる話なのですが、知的な人々が、意外にはたから見ると根拠のないものを信じている、ということは往々にしてあります。
現代においても、宗教ではないのですが、自己啓発セミナーや心理学セミナーと称して、怪しげな商売をする組織があります。それらはかなり法外なお金を取るのです。そういうところでは、最初に宗教ではありませんと受講者に語り安心させながら、実際は巧みに受講者を心理的に引き込んでいくのです。現代的な知的な言葉を使いながら、実際は心理的な高揚感に訴えかけたり、エリート意識に訴えかけたり、これをやると何もかも上手くいくと事例を紹介したりして、理性を失わせて信じ込ませるのです。知的な人ほどそういうものに入り込んでしまうのです。かつて日本中を震撼させたテロ事件を起こしたオウム真理教に、いわゆる高学歴の人々、それも理科系の人々が入信していたことが話題になりました。知的なアテネの人々が多くの神々をあがめたように、人間は一歩間違うと、容易に根拠のないものを信じ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また、ギリシアの学問と言いますと「哲学」を思い起こします。今日の御言葉にも出て来ますギリシア哲学のエピクロス派やストア派というのも聞いたことがあるかと思います。彼らもアテネの町に立ち並んでいる偶像には否定的な見解を持っておりました。偶像を作って礼拝するのは迷信であり、人の正しい判断を誤らせるものだと彼らは批判していたようです。
哲学と言いますと、小難しい学問のようにも思え、宗教との違いもよく分からないという方もおられるでしょう。哲学は、もともと人がよりよく生きるためにはどうしたらよいのかと言うことを考えるために生まれた学問です。そのためにはまず人間は物事を正しく理解する方法を身につけ、真理が何であるかを見極める必要があります。つまり、哲学は人が幸せになるための方法を探る学問なのです。そのような意味で哲学と宗教は目的において共通しているところがあると言えるのです。
ただ哲学と宗教の大きな違いは、哲学において大切なのは合理性、つまり理性を使って真理を究めようとすることであり、それに反して宗教は理性を超えた信仰を持って真理を受け入れることだと言えます。
理性によって真理を追究しようとする彼らにとって、パウロの語る福音は理解出来ません。18節に「『このおしゃべりは、何を言いたいのだろうか』と言う者もいれば、『彼は外国の神々の宣伝をする者らしい』と言う者もいた。パウロが、イエスと復活について福音を告げ知らせていたからである」(18節)とあります。
パウロは信仰、すなわち理性的には説明することが出来ないことを語っておりました。それでも、アテネの人々は理解出来ないパウロのこの話しに興味を抱いたと言います。そのため、彼らはパウロをアレオパゴスにつれて行きます。アレオパゴスというのは、紀元前400年代から、ギリシャの議会が置かれていたところで、小高い丘でした。当時の文化・学問の中心の場所でした。そこでパウロとじっくり討論しようと思ったのです。
ここでの彼らの発言の内容に、彼らの求める知識がどのようなものであったかが分かるところがあります。19節です。「あなたが説いているこの新しい教えがどんなものか、知らせてもらえないか。奇妙なことをわたしたちに聞かせているが、それがどんな意味なのか知りたいのだ」(19〜20節)。
つまり、彼らはパウロが語る福音の内容が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やその復活と言ったような「奇妙なこと」であると思っています。そこでその奇妙な出来事に「どんな意味なのか」を知りたいと彼らは願ったのです。言葉を換えて言えば、ギリシャ人はパウロの語る福音を合理的に説明してほしいと願っているのです。これはある意味で、聖書を興味本位に読もうとする現代人の傾向と似ているところがあります。
聖書には確かに私たちの理性では割り切れない不思議な出来事がたくさん記されています。そのままでは現代人はそこに記されている事柄を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ないのです。そこで行われるのは聖書の合理的な解釈です。イエスの行われた奇跡は実際に起こったことでなく、その表現を通して私たちに大切な意味を教えていると考えるのです。キリストの復活も事実ではないが、その表現を通して私たち人間に何らかの真理を伝えようとしていると解釈するのです。このように合理的解釈とは聖書の真理を人間の理性に合うよう解釈すると言う行為です。これは明らかな間違いです。
皆さん、聖書の内容を理性によって理解し、知識として受け入れようとすることは、信仰ではないのです。それによって、理解され受け入れられる真理は結局は人間の知識が作り出した偶像でしかありません。つまりその知識には私たちを救う力は全くないのです。
パウロが語った福音の中心は、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であり、復活されたキリストです。そして、それはパウロが考え出した学説ではありません。パウロは復活されたキリストと出会って、変えられた者なのです。パウロは哲学者たちのように真理を究めたのではありません。彼はイエス・キリストと言う真理に出会った人物なのです。生ける真理であるキリストが自らパウロにご自身を示してくださったからこそ、パウロはこのキリストによって人生を180度変えられたのです。
教会が伝えているものは、哲学者たちが考えた思想とは違い、実際にキリストの生涯を通して神さまを知り、復活されたキリストに出会った人々の証言を伝えているのです。確かに、それはユダヤ人にはつまずきを与え、ギリシャ人には愚かなもののように見えますが、私たちを救うことの出来る神さまの御言葉なのです。
それから、興味深いことは、アテネの町には『知られざる神に』と刻まれた祭壇まであったと言います。知的なアテネの人々はたくさんの神々を祀っていました。それだけたくさんの神々を祀りながら不安だったのです。その不安からか、自分たちがまだ知らない敬うべき神がいるかもしれないと『知られざる神』と名前を知らない神まで祭壇を作り礼拝をしていたのです。つまりたくさんの神々を祀っていたアテネの人々の心に平安はなかったのです。
アテネの人々は、何か知らない不安や恐れの故に、『知られざる神』まで祀ったのです。知的な人々の心にあったのは恐れであり不安でした。その恐れを埋めるために学問をし、一方で『知られざる神』を祀るのです。
そこでパウロはアテネの人々に天地創造をされたただお一人の神さまを語り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というお方を通してご自分を人間に知らされた神さまです。知られざる神ではなく、キリストによって知られた神さまです。その神さまこそ、人間から恐れと不安を取り除き、まことの愛で満たしてくださるお方です。ヨハネの手紙一4章18節に「愛には恐れがない。完全な愛は恐れを締め出します」(Ⅰヨハネ 4:18)とあります。
キリストの十字架から注がれる愛は、私たちから恐れを締め出します。コロナ禍の中、先行きの見えない不安な世界にありながら、なお、キリストによって知られている神さまのゆえに私たちは恐れません。いや正直に言うと、誰もが恐れを持っているでしょう。だからこそ見上げるのです。ただお一人の知られている神さまを。地上には恐れだらけです。だから神さまを見上げ、その愛を知り、愛によって恐れを砕いていただくのです。
[お祈りいたします」
天の父なる神さま。天地万物を創造されたあなたなは、私たち一人一人がその人生であなたを探し求め、あなたに出会うことを望んで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私たちがあなたを見出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をこの地上に遣わしてくださいました。御子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示されたあなたの私たちに対する愛に、私たちが答えて生き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してください。ますます、私たちがあなたの愛を知り、喜びをもって主の御業を褒め称え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して下さ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アーメン。
21.06.06주일(요약판) “알지 못하는 신” 사도행전 17장 16~34절
바울은 혼자 아덴(아테네)까지 왔습니다. 그리스는 당시 로마제국 속에서 이전의 정치적인 지위는 잃고 있었습니다만, 문화나 학문이 번성한 곳이었습니다. 지식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새로운 지식이나 문화에 관심이 많았습니다.그렇기 때문에 지금까지 못 들었던 기묘한 종교에 대해 말하는 바울에게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테네에서의 선교는 그다지 잘 되지 못했습니다. 물론 34절에 쓰여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를 믿은 사람들도 있었습니다만, 그리 많지 않았습니다. 머리가 좋은 사람은 논리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신앙을 받아들이기 어렵다는 면이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여기서 이상한 일이 있습니다. 지적이고 논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는 아테네에는 많은 신들의 우상이 서 있었던 것입니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지적인 사람들이 뜻밖에도 곁에서 보면 근거없는 것을 믿고 있을때가 종종 있습니다.
현대에도 종교는 아니지만 자기 계발 세미나나 심리학 세미나라고 하면서 수상한 장사를 하는 조직이 있습니다. 그들은 터무니없는 돈을 요구하기도 합니다. 그런 곳에서는 처음에는 수강자들에게 종교는 아니라고 안심시키지만 실은 교묘히 수강자를 심리적으로 끌어들여 가는 것입니다. 현대적인 지적인 말을 쓰면서 실제로는 심리적으로 고양되거나 엘리트 의식에 호소하거나 이것을 하면 무엇이든지 잘된다고 사례를 소개하거나 해서 이성을 잃게 하여 믿게 하는 것입니다. 지적인 사람일수록 그런 것에 현혹되기 쉽습니다. 이전에 일본 사회를 떨게 했던 테러 사건을 일으킨 옴진리교에 소위 고학력의 사람들, 그것도 이공계의 유능한 사람들이 입교했던 일이 화제가 된 적이 있었습니다. 지적인 아테네 사람들이 많은 신들을 숭배한 것처럼 인간은 자칫하면 쉽게 근거없는 것을 믿게 되는 것입니다.
또 그리스 학문이라고 말하면 “철학”이 떠오릅니다. 오늘의 성경말씀에도 나오는 그리스 철학의 에피쿠로스나 스토아라는 것도 들어 보셨으리라 생각됩니다. 그들도 아테네에 서 있는 우상에는 부정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습니다. 우상을 만들고 예배하는 것은 미신이며, 사람의 올바른 판단을 그르치게 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철학이라고 하면 왠지 까다로운 학문처럼 생각되고, 종교와의 차이도 잘 모르겠다고 하는 사람도 있을겁니다. 철학은 원래 사람이 보다 더 잘 살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면 좋은가를 생각하기 위해 태어난 학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사물을 올바르게 이해하는 방법을 습득하여 진리가 무엇인지를 규명할 필요가 있습니다. 즉 철학은 사람이 행복하게 되기 위한 방법을 찾는 학문인 것입니다. 그러한 의미로 보면 철학과 종교는 목적에 있어서 공통점이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다만 철학과 종교의 큰 차이는 철학에서 중요한 것은 합리성, 즉 이성을 통해 진리를 연구하려는 것이며, 그에 반하여 종교는 이성을 초월한 신앙으로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성으로 진리를 추구하려는 그들에게 바울이 말하는 복음은 이해할 수 없습니다. 18절에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 말쟁이가 무슨 말을 하고자 하느냐 하고 어떤 사람은 이르되 이방 신들을 전하는 사람인가보다 하니 이는 바울이 예수와 부활을 전하기 때문이러라”(1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바울은 신앙, 즉 이성적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아테네 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운 바울의 이 이야기에 관심을 가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울을 아레오바고에 데리고 갔습니다. 아레오바고라고 하는 것은 기원전 400년대부터 그리스의 국회가 있었던 곳이며 당시의 문화나 학문의 중심지였습니다. 거기서 바울과 차분히 토론하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여기서 그들의 발언 내용에 그들이 구하는 지식이 어떤 것인지 알 수 있는 구절이 있습니다. 19절입니다. “네가 말하는 이 새로운 가르침이 무엇인지 우리가 알 수 있겠느냐 네가 어떤 이상한 것을 우리 귀에 들려 주니 그 무슨 뜻인지 알고자 하노라”(19-20절)
즉 그들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의 내용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이나 그 부활이라는 것을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이상한 일이 “무슨 뜻인지” 알고 싶다고 그들은 원했던 것입니다. 바꿔 말하자면 그리스인들은 바울이 말하는 복음을 합리적으로 설명해달라고 원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어떤 의미로 보면 성경을 흥미 본위로 읽고자 하는 현대인의 경향과 비슷한 점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우리의 이성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사의한 일들이 많이 쓰여 있습니다. 그대로는 거기에 쓰여 있는 일을 받아들일 수 없는 것입니다. 거기서 행해지는 것은 성경의 합리적인 해석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은 실제로는 일어난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을 통해서 우리에게 중요한 의미를 가르치려고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합리적인 해석이라는 것은 성경의 진리를 인간의 이성에 합치하도록 해석한다는 행위입니다. 이것은 분명히 잘못입니다.
여러분, 성경의 내용을 이성으로 이해하여 지식으로서 받아들이려고 하는 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이해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진리는 결국 인간의 지식이 만들었던 우상일 뿐입니다. 즉 그 지식에는 우리를 구원할 힘은 전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한 복음의 중심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이며 부활하신 그리스도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울이 생각해낸 학설이 아닙니다. 바울은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나서 바꿔진 사람입니다. 바울은 철학자들처럼 진리를 추구하는게 아닙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만났던 사람입니다. 살아 계신 진리이신 그리스도께서 스스로 바울에게 자신을 보여 주셨기 때문에 바울은 이 그리스도로 인하여 인생이 180도 바꿔진 것입니다.
교회가 전하고 있는 것은 철학자들이 생각해낸 사상과 다르고 실제로 그리스도의 생애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만났던 사람들의 증언을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에게는 실족을 주고 그리스인에게는 어리석은 것으로 보이지만,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흥미로운 것은 아테네에는 “알지 못하는 신”이라고 새겨진 제단까지 있었다고 합니다. 지적인 아테네 사람들은 많은 신들을 모시고 있었습니다. 그만큼 많은 신들을 모시면서 불안하였던 것입니다. 그 불안으로 자기들이 아직 모르는 모셔야 하는 신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해서 이름도 모르는 신까지 제단을 만들고 예배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즉 많은 신들을 모시고 있었던 아테네 사람들의 마음에는 평안이 없었던 것입니다.
아테네 사람들은 뭔지 모를 불안이나 두려움으로 “알지 못하는 신”까지 모신 것입니다. 지적인 사람들의 마음에 있었던 것은 두려움이며 불안이었습니다. 그 두려움을 메우기 위하여 학문을 하고 한편으로 “알지 못하는 신”을 모시는 것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아테네 사람들에게 천지창조하신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을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분을 통해서 자신을 인간에게 알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알지 못하는 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하신 하나님이십니다. 그 하나님이시야말로 인간에게서 두려움과 불안을 없애 주시고 참 사랑으로 채워 주시는 분이십니다. 요한일서 4장 18절에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쫓나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쏟아지는 사랑은 우리에게서 두려움을 내쫓습니다. 코로나 사태 가운데 앞날이 보이지 않는 불안한 세계에 있으면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알게 된 하나님 때문에 우리는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아니, 정직히 말하자면 누구나 두려움을 갖고 있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우러러보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이신 알게 된 하나님을… 이 세상에는 두려움 투성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우러러보고 그 사랑을 알아 사랑으로 두려움을 내쫓는 것입니다.
〇讃 頌 讃頌歌 465(1, 3節)
〇献 金 ※ 毎週、各家庭で献金を献げ、教会で礼拝を守られるようになりましたなら、
まとめて献げてください。
〇報 告
①緊急事態宣言が、解除されるまで(予定では6月20日)教会を閉鎖します。主日礼拝は継続しますが、非公開とさせて頂きます。主日礼拝の説教映像と礼拝式順・説教を教会ホームページの「教会活動」に当日の午後1時頃に掲載いたしますので、それを用いて、各家庭で礼拝をお守り下さい。
②聖書研究会は緊急事態宣言が解除されるまで、休会します。
③来週は、総会オリニ主日です。特別献金はありません。
〇感謝の祈り
主なる神さま。あなたの限りない恵みに感謝します。今ここに、それぞれが感謝と献身のしるしとして献金を献げました。、この献げ物を通して、あなたへの感謝と信頼を新たにする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そして、与えられた全てのものを通して、あなたの栄光をあらわすことが出来ますように、私たちをお導き下さい。今日よりの新たな一週間もあなたと共に歩ませてください。この困難な時期を耐える力を私たちにお与えください。また、あなたとのつながり、そしてあなたを信じる人々とのつながりがより深まりますように。
主イエス・キリストの御名によって祈ります。アーメン。
〇主祈祷 主の祈り
天にまします我らの父よ。
願わくは、御名をあがめさせたまえ。御国をきらたせたまえ。
みこころの天になるごとく、地にもなさせたまえ。
我らの日用の糧を、今日も与えたまえ。
我らに罪を犯す者を、我らが赦すごとく、我らの罪をも赦したまえ。
我らをこころみにあわせず、悪より救いだしたまえ。
国と力と栄えとは、限りなくなんじのものなればなり。
アーメン。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이 임하옵시며,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같이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고,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대개 하나와 권세와 영광이 아버지께 영원히 있사옵나이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