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총회의 평화 통일 주일입니다. 이 평화 통일 주일이 정해진 것은 1988년입니다. 같은 해 7월에 “민족 통일에 관한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만, 그 실천 항목으로서 9개의 항목을 들고 있고, 그 중의 하나가 “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한 주일”로서 총회 주일을 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광복절 전의 주일을 총회 통일 주일 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평화 통일이라고 하면,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기도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물론, 그것도 큰 과제입니다만, 이 선언에는 더 구체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원래 이 총회 선언이 나온 배경에는 일본내에서의 민단, 조총련 그리고 귀화 동포와의 각각의 사이에 큰 틈이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적의로서의 분단이 일본에 사는 동포들 사이에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화해의 역할을 교회가 담당해 가는 것이 총회의 선교 과제였습니다. 또, 당시 남북 분단에 의해 북쪽과 남쪽의 교회가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만, 총회가 각각의 대표자를 일본 도쿄로 불러서 대화의 장소를 마련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 밖에도 구체적인 실천 항목이 있습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별도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조국 통일과 세계 평화를 기도하는 주일로서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이 평화에 관해서는 전세계의 그 어느 누구라도 모두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평화가 오지 않느냐? 그것에 관하여 어떤 설교자는 “평화와 평화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오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의로 평화를 만들고 있고, 혹은 만들어 가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자기가 가지는 정의와 다른 사람이 가지는 정의가, 또 평화와 평화가 대립하고 결국은 평화가 분쟁을 낳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문제는 더 우리 근처에 있는 또 우리 자신 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1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즉, 예수님 자신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이 해체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분명히 교회에서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 사이에 있었던 커다란 벽, 분단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실정 안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11절), 혹은 “법조문으로 괸 계명의 율법”(15절)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이 편지 안에서 그러한 것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기에 유대인 같은 생활을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릴때부터 들인 습관을 좀처럼 쉽게 버릴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지금까지의 습관을 지키면서 자신들 나름의 신앙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예를 들면 음식에 대한 엄격한 규정 때문에 이방인들이 먹는 것 중에 그들이 먹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이교 사회에 있으면서도 유대교의 관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그러면서도 이러한 습관을 전혀 가지지 않는, 또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 중에서 그리스도자가 된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습관을 가지는 사람들이 함께 신앙 생활을 보내는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이방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과 유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야말로 “생각하라”(11절) 라는 바울의 권유의 말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지금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습관이나 생각의 차이를 가지고 교회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럴 때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5-16절)
확실히 우리는 다른 습관이나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무질서하게 모아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 앞의 문제만을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은혜의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안고 있는 적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 버리는 곳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걸리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다시 마음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우리가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 더 마음에 새겨둬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19-22절)
서로 다른 습관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치는 그 중의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나 생각을 모두가 따라 하는데 있는게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라는 것은 성경 말씀의 말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성경이 나타나는 진리 위에 우리가 설 때에 실현됩니다. 또한 이 교회의 모퉁잇돌은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라고 합니다. 이 모퉁잇돌이 없어져 버리면 그 건물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모퉁잇돌의 역할입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모퉁잇돌이 되시고 우리를 교회에 모아 주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께서 모아 주신 사람들 중에는 불필요한 사람, 없어도 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기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의 역사를 신뢰하며 서로 형제 자매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신앙 생활을 보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그 역사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진정한 교회는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전에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듣는 기회도 없었고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사는 희망이 없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이 교회에 모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보내 고자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
2021年8月1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5章 9節
〇讃 頌 讃頌歌 412(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エフェソ(에베소서) 2章 11~22節
〇説 教 「キリストは私たちの平和(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평)」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87(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8月 1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キリストは私たちの平和」エフェソの信徒への手紙 2章11~22節
今日は、総会の平和統一主日です。この平和統一主日が定められたのは、1988年です。この年の7月に、「民族統一に関する在日大韓基督教会総会宣言」が発表されたのですが、その実践項目として9つの項目が挙げられていて、その中の一つに「民族和解と統一のための主日」として総会主日を定めるとなっております。それで、光復節前の主日を総会統一主日として礼拝を守ることになりました。
平和統一と言いますと、祖国の平和的な統一を祈り求めると考えますが、勿論、それも大きな課題ではあります。ですが、この宣言にはもっと具体的な目的があったのです。もともと、この総会宣言が出された背景には、日本国内における民団と朝総連と帰化同胞とのそれぞれの間に大きな溝があったということがありました。それは敵意としての分断が日本に住む同胞たちの中に生じていたのです。その和解の役割を教会が担っていくことが総会の宣教課題としてあったのです。また、当時、南北分断により、北と南の教会が出会うことは不可能でしたが、総会がそれぞれの代表者を日本に招き、対話をする場を東京に設ける役割を担ったのです。他にも、具体的な実践項目がありますが、機会がありましたら、別な時にお話ししたいと思います。
このように、祖国統一と世界の平和を願う主日として、今日は礼拝を守っておりますが、この平和ということに関しては、世界中の誰もが願っていることだと思います。それなのになぜ、平和が訪れないのか? それに関してある説教者は「平和と平和が争っているからではないか」と言っています。とても興味深い意見だと思います。
人間は自分が持っている正義で平和を作っている、もしくは作って行こうと考えます。けれども、その正義は人によって異なっており、自分が持つ正義と他の人が持つ正義が、また、平和と平和が対立して、結局は平和が争いを生んで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うのです。ですから、平和の問題は、もっと私たちの近くにある、また、私たち自身の中にある問題を解決しない限り、真の平和は訪れないのかもしれません。
14節をご覧下さい。「実に、キリストは平和であります。二つのものを一つにし、御自分の肉において敵意という隔ての壁を取り壊し・・」(14節)とあります。これ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すなわちイエスさま御自身の命による贖いによって、私たち人間と神さまの間にある「敵意という隔ての壁」が取り壊されたということを言っているのですが、パウロがなぜこの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のかと言いますと、明らかに教会におけるユダヤ人クリスチャンと異邦人クリスチャンの間にあった大きな壁、分断を意識していたことが分かります。パウロは、教会の実情の中で、この言葉を語っているのです。
今日の聖書箇所に「手による割礼を身に受けている人々」(11節)、あるいは「規則と戒律ずくめの律法」(15節)と言う言葉が記されていますが、これはユダヤ人クリスチャンたちが大切にしていたものです。勿論、パウロもこの手紙の中でそれらのものはすでにキリストによって「廃棄された」(15節)と語っています。ですから、私たちは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あって、ユダヤ人のような生活を送る必要はないのです。
ところが人間は子どものときから身に着けた習慣を簡単に捨てることはなかなか出来ません。ユダヤ人たちはキリスト者になっても、今までの習慣を守りながら自分たちなりの信仰生活を送って暮らしていたのです。例えば、食べ物についての厳しい規程があって、異邦人が食べているものの中にも彼らが食べることが出来ないものがたくさんありました。また、ユダヤ人たちは異教社会にいながらも、ユダヤ教の慣習を守っておりました。その一方でこれらの習慣を一切持たない、また理解できない異邦人からキリスト者になった人々がエフェソ教会では多数を占めています。このような異なった習慣を持つ人々が一緒に信仰生活を送る教会で問題が起こらない訳がありません。
パウロはこの異邦人からキリスト者になった人々と、ユダヤ人からキリスト者になった人々の間に起こった問題を知りました。そしてここでその問題についての解決策を提示しようとしたのです。そしてその解決策こそが「心に留めておきないさい」(11節)と言うパウロの勧めの言葉に表されているのです。
このことは、私たちの教会においても同じです。私たちは様々な習慣や考え方の違いを持って教会に集められた者たちです。ですから、そこに問題が起こらないと言うことはまずないのです。それでは私たちはこのような時、どうしたらよいのでしょうか。パウロは15節で、このように語っております。「こうしてキリストは、双方を御自分において一人の新しい人に造り上げて平和を実現し、十字架を通して、両者を一つの体として神と和解させ、十字架によって敵意を滅ぼされました。」(15-16節)
確かに私たちは違った習慣や考え方を持って教会に集められています。しかし、私たちはここに無秩序に集められた者たちではありません。ここに集められた者たちは皆、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た者たちなのです。それなのに私たちは目の前の問題だけを見て、私たちが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たという恵みの事実を忘れてはい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が抱く敵意は、私たちがキリストの十字架を忘れてしまうところで生まれま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十字架にかかって私たちを救ってくださったキリストの愛に再び心を留める必要があります。そうすればこのキリストの愛が私たちの心に平安を与え、私たちが抱えている問題に私たちが冷静に対処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してくだるのです。
そして、私たちがもう一つ「心に留めるべき」ことがあります。それは私たちが今、このキリストの教会に集められていると言う事実です。19節をご覧下さい。「従って、あなたがたはもはや、外国人でも寄留者でもなく、聖なる民に属する者、神の家族であり、使徒や預言者という土台の上に建てられています。そのかなめ石はキリスト・イエス御自身であり、キリストにおいて、この建物全体は組み合わされて成長し、主における聖なる神殿となります。キリストにおいて、あなたがたも共に建てられ、霊の働きによって神の住まいとなるのです。」(19-22節)
お互いに違った習慣や考えを持つ者が教会に集められています。だからその一致は、その中の誰かの持つ習慣や考えに皆が倣うことにあるのではありません。ここでパウロが語っている「使徒や預言者たちの土台」とは聖書の言葉のことです。教会の一致は聖書の示す真理の上に私たちが立つときに実現します。さらに、この教会の要石はキリスト・イエスご自身であると言われています。この要石がなくなってしまうとその建物は影も形もなく破壊されてしまいます。それが要石の役目です。このキリストが要石になって私たちを教会に集めてくださり、私たちに聖霊を送って導いてくださるのです。
ですから、このキリストが集めてくださった者たちの中に、余計な者、いなくてもよい人は一人も存在していないのです。皆、一つの教会を作るためにキリストによってここに集められているからで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この要石であるキリストの御業に信頼して、互いに兄弟姉妹の存在を認め合いながら、信仰生活を送っていくべきなのです。
皆さん、教会は建物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の御業を心に留め、その御業に信頼する者たちが集まる場所に真の教会は生まれます。私たちはかつて異邦人として、福音を聞く機会もなく、神さまとは無縁に生きる、希望のない人生を送っていました。しかし、今は違います。キリストが私たちを救ってくださり、この教会に集め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この恵みを私たちは再び心に留めながら、感謝と喜びを持って教会生活を送って行きたいと思います。そして、平和を造り出す者になりたいと願います。
【2021년 8월 15일 주일예배(요약판)】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화평” 에베소서 2장 11~22절
오늘은 총회의 평화 통일 주일입니다. 이 평화 통일 주일이 정해진 것은 1988년입니다. 같은 해 7월에 “민족 통일에 관한 재일대한기독교회 총회 선언”이 발표되었습니다만, 그 실천 항목으로서 9개의 항목을 들고 있고, 그 중의 하나가 “민족 화해와 통일을 위한 주일”로서 총회 주일을 정한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광복절 전의 주일을 총회 통일 주일 예배로 드리게 되었습니다.
평화 통일이라고 하면, 조국의 평화적인 통일을 기도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물론, 그것도 큰 과제입니다만, 이 선언에는 더 구체적인 목적이 있습니다. 원래 이 총회 선언이 나온 배경에는 일본내에서의 민단, 조총련 그리고 귀화 동포와의 각각의 사이에 큰 틈이 있다는 것에 있습니다. 그것은 적의로서의 분단이 일본에 사는 동포들 사이에도 일어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 화해의 역할을 교회가 담당해 가는 것이 총회의 선교 과제였습니다. 또, 당시 남북 분단에 의해 북쪽과 남쪽의 교회가 만나는 것은 불가능했습니다만, 총회가 각각의 대표자를 일본 도쿄로 불러서 대화의 장소를 마련하는 역할을 담당했던 것입니다. 그 밖에도 구체적인 실천 항목이 있습니다만, 기회가 된다면 다음에 별도로 이야기 하고자 합니다.
이와 같이 조국 통일과 세계 평화를 기도하는 주일로서 오늘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만, 이 평화에 관해서는 전세계의 그 어느 누구라도 모두가 원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평화가 오지 않느냐? 그것에 관하여 어떤 설교자는 “평화와 평화가 싸우고 있기 때문에 오지 않는다”라고 말했습니다. 아주 흥미로운 의견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정의로 평화를 만들고 있고, 혹은 만들어 가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 정의는 사람에 따라 다르고 자기가 가지는 정의와 다른 사람이 가지는 정의가, 또 평화와 평화가 대립하고 결국은 평화가 분쟁을 낳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평화의 문제는 더 우리 근처에 있는 또 우리 자신 안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 한 진정한 평화는 오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14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그는 우리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하시고”(1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하여 즉, 예수님 자신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있는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이 해체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바울이 왜 이런 말을 하는가 하면 분명히 교회에서 유대인 기독교인과 이방인 기독교인 사이에 있었던 커다란 벽, 분단을 의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바울은 교회의 실정 안에서 이 말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11절), 혹은 “법조문으로 괸 계명의 율법”(15절)이라는 말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이것은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소중히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물론 바울도 이 편지 안에서 그러한 것은 이미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폐기되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구원받는 것이기에 유대인 같은 생활을 보낼 필요는 없습니다.
그런데 인간은 어릴때부터 들인 습관을 좀처럼 쉽게 버릴 수가 없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리스도인이 되어도 지금까지의 습관을 지키면서 자신들 나름의 신앙 생활을 하며 살고 있었습니다.예를 들면 음식에 대한 엄격한 규정 때문에 이방인들이 먹는 것 중에 그들이 먹지 못하는 것이 많이 있었습니다. 또 유대인들은 이교 사회에 있으면서도 유대교의 관습을 지키고 있었습니다.그러면서도 이러한 습관을 전혀 가지지 않는, 또 이해할 수 없는 이방인 중에서 그리스도자가 된 사람들이 에베소 교회에서는 다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다른 습관을 가지는 사람들이 함께 신앙 생활을 보내는 교회에서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리가 없습니다.
바울은 이 이방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과 유대인으로부터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난 문제를 알았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그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해결책이야말로 “생각하라”(11절) 라는 바울의 권유의 말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은 지금 우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저마다 다양한 습관이나 생각의 차이를 가지고 교회에 모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여기에 아무런 문제도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럴 때에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바울은 1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는 이 둘로 자기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15-16절)
확실히 우리는 다른 습관이나 생각을 가지고 교회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무질서하게 모아진 사람들이 아닙니다. 여기에 모인 사람들은 모두 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눈 앞의 문제만을 보고 우리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았다는 은혜의 사실을 잊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우리가 안고 있는 적의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잊어 버리는 곳에서 생깁니다. 그래서 우리는 십자가에 걸리시고 우리를 구원해 주신 그리스도의 사랑에 다시 마음을 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의 마음에 평안을 주고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에 우리가 냉정하게 대처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하나 더 마음에 새겨둬야만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지금 이 그리스도의 교회로 모아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19절을 보십시오.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19-22절)
서로 다른 습관과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교회에 모여 있습니다. 그러니까 그 일치는 그 중의 누군가가 가지고 있는 습관이나 생각을 모두가 따라 하는데 있는게 아닙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라는 것은 성경 말씀의 말입니다. 교회의 일치는 성경이 나타나는 진리 위에 우리가 설 때에 실현됩니다. 또한 이 교회의 모퉁잇돌은 그리스도 예수 자신이라고 합니다. 이 모퉁잇돌이 없어져 버리면 그 건물은 흔적도 없이 파괴되어 버립니다. 그것이 모퉁잇돌의 역할입니다. 이 그리스도께서 모퉁잇돌이 되시고 우리를 교회에 모아 주셔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고 이끌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그리스도께서 모아 주신 사람들 중에는 불필요한 사람, 없어도 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모두 하나의 교회를 만들기 위해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여기에 모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모퉁잇돌이신 그리스도의 역사를 신뢰하며 서로 형제 자매의 존재를 서로 인정하면서 신앙 생활을 보내야 합니다.
여러분, 교회는 건물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역사를 마음에 새기고 그 역사를 신뢰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에 진정한 교회는 태어납니다. 우리는 이전에 이방인으로서 복음을 듣는 기회도 없었고 하나님과는 무관하게 사는 희망이 없는 인생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다릅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이 교회에 모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은혜를 우리는 다시 한번 마음에 새기며 감사와 기쁨을 가지고 교회 생활을 보내 고자합니다. 그리고 평화를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