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결국 성전에서 바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이방인을 넣었다는 오해 때문에 큰 소란이 났고 성전 밖으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 때 로마군 천부장이 와서 바울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려고 하자 거기서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살아나기 위해서라면 이대로 로마병의 조사에 응해 오해를 풀고 풀려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동포 앞에서 굳이 이야기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말한 내용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중복됩니다. 바울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만난 일, 그리고 회심을 한 일, 또한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전도자가 된 일, 바울은 자기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경위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자기가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정결한 의식을 치렀던 일이나 이방인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던 것을 말하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때문에 증오는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증거를 해도 율법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살 뿐입니다. 원래 신앙의 일은 이론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무리 진실의 말이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직접 말씀하실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태 11:15 등)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을 들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 귀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말이 진실일수록 미움을 더 조장하는 말이 됩니다. 진실의 말은 듣기 좋은 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부정하는 말로도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인간의 죄나 자기 자신의 천박함을 알려주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크게 바뀔 수 있습니다. 실은 바울의 인생에도 그런 전환점이 온 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 중에도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경험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과 그 이후 자기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을 과신하여 자기가 모든 것을 바꾸어 보인다는 열정을 품고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살해하는 열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4-5절)
그런데 그 바울 앞에 부활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과 힘에 자신감을 가졌던 바울은 거기에서 자기가 가졌던 자신감을 깨뜨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만 행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울이었습니다만, 그것이 완전한 잘못이었음을 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음에 한 말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10절) 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을 깨부수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진정한 의미로 배운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에는 다마섹의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크게 관계됩니다만,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절)
아나니아는 여기서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성서의 하나님,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유대인의 관습을 열심히 지키고 성전의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누구라도 이 하나님의 목소리와 그 역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바울은 다메섹에서 확실히 이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의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 “의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율법을 열심히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유일한 “의인”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와 주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목숨을 버리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로부터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유일한 “의인”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의인”으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바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전 1:15)
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하는 말은 바울만의 말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말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피가 흐르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너는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했지만 나는 약간의 긁힌 상처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아아, 나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아니, “아아, 나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라면 그것은 정말로 자신의 죄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만, 자신의 죄를 정말로 아는 것은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용서받았을 때 반대로 자기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그만큼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복음서 내용에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죄 많은 여자는 아마 창녀였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사회에서 누가 봐도 죄가 많다고 생각되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여성이 방에 들어오는 것, 하물며 몸에 닿는 일 등은 율법을 지키고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성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보고 집 주인은 예수님을 아마 경멸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누가복음 7장 47절)
바울도 또한 많은 용서를 받고 많은 사랑을 하며 사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말하고 자기를 바꾸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많이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은 자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말한다는 것은 올바르게 교리를 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성서 해석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바꾸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각각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고 새롭게 사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바꾸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반복해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바뀐 우리들의 인생을 앞으로도 담대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이 인생을 걸어 나갑시다. 아멘.
2021年8月2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テモテ一(디모데전서) 5章 9節
〇讃 頌 讃頌歌 453(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1章37節~22章21節
〇説 教 「主によって変えられた人生(주님으로 바꿔진 인생)」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0(1,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8月 2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主によって変えられた人生」使徒言行録 21章 37節~22章21節
パウロは、とうとう神殿でパウロの命を狙う者たちに捕まってしまいました。そして、神殿に異邦人を入れたという誤解から大騒ぎとなり、神殿の外に連れて行かれ殺されそうになったのです。その時、ローマ軍千人隊長がやってきて、パウロは命拾いをしました。千人隊長はパウロを兵営に連れて行こうとしましたが、そこでパウロは、ユダヤ人たちの前で語り出したのです。パウロは、自分が助かるためであれば、このままローマ兵の取り調べに応じて誤解を解いて釈放してもらうことも出来たでしょう。それなのにパウロは自分を殺そうとした同胞の前で敢えて話をすることを希望しました。
この時、パウロが語った内容は、使徒言行録9章に記されていることと重複します。パウロがかつてキリスト教徒を迫害していたこと。キリスト教徒を迫害するためにダマスコに行こうとして、その途上でキリストと出会ったこと。そして回心をしたこと。さらにキリストを証しする伝道者となったこと。パウロは自分の信仰を持つに至った経緯を話し、キリストの福音を証ししました。
ユダヤ人たちの誤解を解くためには、自分が律法に基づいて神殿で清めの儀式をしていたことや、異邦人を神殿の入れてはいけない場所に異邦人を入れてはいないことを語れば良かったのです。しかし、そうではなく、パウロは自分がいかにしてキリスト教徒になったかを語りました。でもそれは、火に油を注ぐようなことでした。パウロを殺そうとしていたユダヤ人たちは、そもそも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られない人々です。パウロが律法を守ることではなく、キリストを信じさえすれば救われると言っている、そのことに憎しみを募らせていたのです。その人々に、自分が主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ようになったという証をしても、律法によってこそ救われると思っている人々の反発を買うだけなのです。そもそも信仰の出来事は、理屈で納得させることのできる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がどんなに真実の言葉であっても、聞きとることができない人々は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ご自身、お語りになる時、「耳ある者は聞きなさい」(マタイ11:15等)とおっしゃっていました。言葉を聞くことが出来ても、神さまの真理を聞く耳のない人はいるのです。そんな人々に対して語るとき、むしろその言葉が真実であればあるほど、聞く耳のない人々にとっては憎しみを助長する言葉になるのです。真実の言葉は、耳当たりのいい言葉ばかりではないからです。神さまの真理の言葉は、人間の思いや行いを否定する言葉にも聞こえるからです。神さまの真理の言葉は、人間の罪、自分自身の浅ましさを知らされる言葉でもあるからです。
しかし、この神さまの真理の言葉を聞くことが出来るならば、その人の人生は大きく変えられます。実はパウロの人生にもそのような転換点が訪れたことが今日の箇所の中でも示されています。ここでパウロは自分が経験したダマスコ途上でのイエスさまとの出会いと、それ以後、自分がどのようにしてこのイエスさまに従う者となったのかと言うことを語っています。イエスさまに出会う前に、パウロは自分の能力や力を過信し、自分がすべてを変えて見せると言った熱心さを抱いて行動しました。それが教会を迫害し、信者達を殺害するという熱心さとして現されたのです。(4-5節)
ところが、そのパウロの前に復活されたイエスさまが現れると言う出来事が起こります。そして自分の才能や力に自信を持っていたパウロはそこで自分が持っていた自信を打ち砕かれてしまいます。今まで自分の立てた計画通りに行えば、何もかもうまくいくと考えていたパウロでしたが、それが全くの誤りであったことがこのイエスさまとの出会いによって彼に示されたのです。そこで彼が次に発した言葉は「主よ、どうしたらよいのでしょうか」(10節)と言うものになりました。つまり、ここでパウロはイエスさまと出会い、自分が打ち砕かれることで、初めて主に従うことを本当の意味で学んだのです。
パウロの回心には、ダマスコのアナニアという人が大きく関わっているのですが、アナニアはパウロに次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わたしたちの先祖の神が、あなたをお選びになった。それは、御心を悟らせ、あの正しい方に会わせて、その口からの声を聞かせるためです。」(14節)
アナニアはここで「わたしたちの先祖の神」と語っています。つまり旧約聖書の神、ユダヤ人たちが神殿で熱心に礼拝を献げている神と同じ方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もしユダヤ人の慣習に熱心で、神殿の礼拝を大切にしているならば誰でもこの神の声とその御業に心を向ける必要があると語っているのです。
それからアナニアはイエスさまについてこう語っています。「あの正しい方に会わせて、その口からの声を聞かせるためです」。パウロはダマスコ途上で確かにこの言葉の通り、イエス・キリスト、「正しい方」の口から出る声を聞いたのです。ユダヤ人は皆、神さまと共に生きるために「正しい者」と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そのために律法に熱心に従っていました。しかし、私たちがいくら努力しても私たちは自分の力で自分を「正しい者」とす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むしろ、私たちを「正しい者」とするために唯一「正しい者」であったはずの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ところに来てくださり、十字架にかけられ命を捨てられたが故に、私たちはその恵みによって「正しい者」とされたのです。ですから、誰も神さまの前で自分を「正しい者」とすることが出来る者はいません。しかし、神さまから遣わされた救い主イエスだけは唯一の「正しい者」だったがゆえに、私たちを「正しい者」と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テモテへの手紙一にパウロの有名な言葉があります。「『キリスト・イエスは、罪人を救うために世に来られた』という言葉は真実であり、そのまま受け入れるに値します。わたしは、その罪人の中で最たる者です。」(Ⅰテモテ1:15 )
この「わたしは、その罪人の中で最たる者です」という言葉は、パウロだけの言葉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自身の言葉です。私たちの罪は、神さまであるキリストを十字架につけ、キリストの肉を裂き、血が流されなければ赦されないほどのものなのです。あなたはキリストの血を流させたが私はちょっとしたひっかき傷だけだ、などといえる人はいないのです。誰もがキリストの肉を裂き、血を流させた者です。
また、それを聞いて、「ああ私なんてダメだ」と思って終わりでもないのです。いえ、「ああ私なんてダメだ」と思っている程度であれば、それは本当のところでは罪がわかっていないのです。不思議なことなのですが、自分の罪が本当に分かるのは、罪が赦されたことを知った時なのです。赦された時、逆に自分がどれほどの罪を犯していたのかが分かるのです。そして、それと同時にそれほど神さまに愛されているのかを知るのです。
福音書の中に、罪深い女がイエスさまのの足を涙でぬらし、自分の髪の毛でぬぐい、イエスさまの足に接吻して香油を塗ったという話があります。この罪深い女はおそらく娼婦であったと思われます。当時の社会で、誰から見ても、罪深いと思われる女性でした。そんな女性が部屋に入って来ること、ましてや体に障られることなどは、律法を守って生きている人には耐え難いことでした。イエスさまが女性の為すままにされているのを見て、家の主人はイエスさまを軽蔑したと思います。しかし、イエスさまはおっしゃったのです。「この人が多くの罪を赦されたことは、わたしに示した愛の大きさで分かる。赦されることの少ない者は、愛することも少ない。」(ルカ7:47)
パウロもまた、多く赦され、多く愛を示して生きる者とされました。パウロは福音を語ること、自分を変えてくださったイエス・キリストを語り続けることによって、神さまの愛、そして隣人への愛を多く示した人でした。神さまは赦された者に新しい使命を与えられます。その使命がパウロにとっては、福音を語ることでした。福音を語るということは正しく教理を講義す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立派な聖書解釈を示すことでもありません。自分自身を変えてくださったイエス・キリストを指し示すことです。
皆さん、私たちもキリストによって変えられたのです。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って、私たちは罪赦され、新しく生きる者にされました。それぞれに新しい役割を与えられ新しく生きる者に変えられたのです。そして、一度、変えられたらそれで終わりではありません。繰り返し変えられるのです。その変えられた私たちの人生を、これからも大胆に語りながらこの生涯を歩んで行きましょう。
【2021년 8월 22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님으로 바꿔진 인생” 사도행전 21장 37절~22장 21절
바울은 결국 성전에서 바울의 목숨을 노리는 사람들에게 붙잡히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성전에 이방인을 넣었다는 오해 때문에 큰 소란이 났고 성전 밖으로 끌려 나가 죽임을 당할 뻔했습니다. 그 때 로마군 천부장이 와서 바울은 목숨을 건졌습니다. 천부장은 바울을 영내로 데려가려고 하자 거기서 바울은 유대인들 앞에서 말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가 살아나기 위해서라면 이대로 로마병의 조사에 응해 오해를 풀고 풀려나게 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자기를 죽이려 했던 동포 앞에서 굳이 이야기하기를 원했습니다.
이 때, 바울이 말한 내용은 사도행전 9장에 기록되어 있는 것과 중복됩니다. 바울이 과거에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했던 일,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가는 도중에 그리스도를 만난 일, 그리고 회심을 한 일, 또한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전도자가 된 일, 바울은 자기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경위를 말하며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명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는 자기가 율법에 따라 성전에서 정결한 의식을 치렀던 일이나 이방인이 들어가면 안 되는 곳에 이방인을 데리고 들어가지 않았던 것을 말하면 좋았습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 바울은 자기가 어떻게 그리스도인이 되었는지를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불에 기름을 붓는 격이었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한 유대인들은 원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바울이 율법을 지키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믿기만 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때문에 증오는 더해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자기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다는 증거를 해도 율법에 의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반발을 살 뿐입니다. 원래 신앙의 일은 이론으로 납득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아무리 진실의 말이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사람들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도 직접 말씀하실 때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마태 11:15 등)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말을 들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진리를 듣는 귀가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듣지 못하는 그런 사람들에게는 오히려 그 말이 진실일수록 미움을 더 조장하는 말이 됩니다. 진실의 말은 듣기 좋은 말만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인간의 생각이나 행동을 부정하는 말로도 들리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은 인간의 죄나 자기 자신의 천박함을 알려주는 말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면 그 사람의 인생은 크게 바뀔 수 있습니다. 실은 바울의 인생에도 그런 전환점이 온 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 중에도 쓰여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은 자기가 경험한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일과 그 이후 자기가 어떻게 이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는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에 바울은 자신의 능력이나 힘을 과신하여 자기가 모든 것을 바꾸어 보인다는 열정을 품고 행동했습니다. 그것이 교회를 박해하고 신자들을 살해하는 열정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4-5절)
그런데 그 바울 앞에 부활된 예수님께서 나타나시는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재능과 힘에 자신감을 가졌던 바울은 거기에서 자기가 가졌던 자신감을 깨뜨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세운 계획대로만 행하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라고 생각했던 바울이었습니다만, 그것이 완전한 잘못이었음을 이 예수님과의 만남을 통해 그에게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다음에 한 말은 “주님, 무엇을 하리이까”(10절) 라는 것이었습니다. 즉 여기서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 자신을 깨부수면서 비로소 처음으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을 진정한 의미로 배운 것입니다.
바울의 회심에는 다마섹의 아나니아라는 사람이 크게 관계됩니다만, 아나니아는 바울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14절)
아나니아는 여기서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구약 성서의 하나님, 유대인들이 성전에서 열심히 예배를 드리고 있는 하나님과 같은 분이시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만약 유대인의 관습을 열심히 지키고 성전의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있다면 누구라도 이 하나님의 목소리와 그 역사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나니아는 예수님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를 택하여 너로 하여금 자기 뜻을 알게 하시며 그 의인을 보게 하시고 그 입에서 나오는 음성을 듣게 하셨으니・・・” 바울은 다메섹에서 확실히 이 말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 “그 의인”의 입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었던 것입니다. 유대인은 모두 하나님과 함께 살기 위해 “의인”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때문에 율법을 열심히 따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의인”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의인”으로 만들기 위하여 유일한 “의인”이셨던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와 주셔서 십자가에 못박혀 목숨을 버리신 그 은혜로 말미암아 “의인”으로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무도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의인”이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로부터 오신 구세주 예수님께서는 유일한 “의인”이었기 때문에 우리를 “의인”으로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디모데전서에 바울의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전 1:15)
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라고 하는 말은 바울만의 말이 아닙니다. 우리 자신의 말입니다. 우리의 죄는 하나님이신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피가 흐르지 않으면 용서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너는 그리스도의 피를 흘리게 했지만 나는 약간의 긁힌 상처뿐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는 것입니다. 누구나 그리스도의 몸을 찢고 피를 흘리게 한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듣고 “아아, 나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그걸로 끝이 아닙니다. 아니, “아아, 나는 안 되겠다”라고 생각하고 있는 정도라면 그것은 정말로 자신의 죄를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이상한 일입니다만, 자신의 죄를 정말로 아는 것은 죄가 용서받았다는 것을 알았을 때입니다. 용서받았을 때 반대로 자기가 얼마나 많은 죄를 범하고 있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과 동시에 그만큼 하나님께 사랑받고 있는지를 아는 것입니다.
복음서 내용에 죄 많은 여인이 예수님의 발을 눈물로 적셔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고 그 발에 입맞추고 향유를 부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 죄 많은 여자는 아마 창녀였다고 생각됩니다. 당시 사회에서 누가 봐도 죄가 많다고 생각되는 여성이었습니다. 그런 여성이 방에 들어오는 것, 하물며 몸에 닿는 일 등은 율법을 지키고 살고 있는 사람에게는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성이 하는 대로 내버려 두는 것을 보고 집 주인은 예수님을 아마 경멸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그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누가복음 7장 47절)
바울도 또한 많은 용서를 받고 많은 사랑을 하며 사는 사람으로 여겨졌습니다. 바울은 복음을 말하고 자기를 바꾸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계속 이야기함으로써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많이 보여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용서받은 자에게 새로운 사명을 주십니다. 그 사명이 바울에게 있어서는 복음을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복음을 말한다는 것은 올바르게 교리를 강의하는 것이 아닙니다. 훌륭한 성서 해석을 보여주는 것도 아닙니다. 자기 자신을 바꾸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를 증명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바꿀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우리는 죄 사함을 받고 새롭게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각각 새로운 역할을 부여 받고 새롭게 사는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그리고 한 번 바꾸면 그것으로 끝나는 게 아닙니다. 반복해서 바꿀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바뀐 우리들의 인생을 앞으로도 담대하게 이야기하면서 우리의 이 인생을 걸어 나갑시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