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말한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의 성경 말씀은 그 바울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대해서 쓰여 있습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라고 42절에 쓰여 있습니다. 즉 바울의 설교를 회당 안에서 들은 유대인들은 그 이야기를 기꺼이 들으며 “좀 더 말해 주세요. 다음 안식일에도 여기에 와서 오늘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여느 때라면 금방 거절 반응을 보이는 유대인들인데, 수월히 바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니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방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이방인 사회 속에서 유대인들이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자기의 신앙을 지키려고 하면 거기에는 항상 알력이 생깁니다. 이방인 사회 속에서 그들은 고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율법을 열심히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게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언젠가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자기 구원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언제까지나 “나는 구원받았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틀림없이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설교로 인하여 한줄기 빛이 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 받았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물론 거기에는 “그렇다면 자기들이 필사적으로 지켜 온 율법은 어떻게 되느냐? 자기들이 지켜 온 신앙은 헛일이었느냐” 라는 생각이나 불만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평안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을 나간 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따라 왔습니다. 바울들은 그러한 그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고 권했습니다.(43절)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래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죄의 책임, 심판을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심판으로 끝난 게 아니라, 부활의 생명, 영원한 은혜로서 우리에게도 주여졌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감사하면서 살라고 바울은 권하고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안식일이 되자 유대인들의 반응이 크게 바꿔져 버렸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비방하거늘”(44-45절)
유대인들은 자기들 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바울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여 온 모습을 보고 “시기심”을 품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들에 대한 호의는 사라지고 도리어 바울들을 비방하며 그들의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방인 사회 가운데 좀처럼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못해서 고생하면서 생활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지 얼마 되지 않는 바울들이 이방인들에게서 받아들여져 있는 것을 보고 질투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은 율법과 무관한 생활을 하고 마음대로의 생활을 해 왔는데 어째서 그들도 자기들과 마찬기지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 그것으로는 지금까지 자기들이 해 온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그것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며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에 이번에는 반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꺼이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덧 “시기”의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쉽게 흔들려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게다가 그 연약함은 우리의 노력으로서는 쉽사리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43절에서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 머무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고 어드바이스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일어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며”(46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바울이 말하는 것에 반대해서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되어버렸다며 그들의 죄를 단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들은 여기서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라고.
유대인 이외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싶다고 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써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결단한 것입니다.
바울들은 자기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유대인들과의 싸움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47절)
바울은 이사야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자기들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 새로운 결단을 여기서 내린 것입니다. (이사야49:6)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인생의 시간이라는 것은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인생의 시간을 지금 어떻게 쓰고 있을까요? 지나간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써 버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끝도 없는, 그리고 뒷맛이 안 좋은 이웃 사람과의 싸움을 위해 그 시간을 쓰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이 인생의 시간을 유효하게 쓰기 위하여 먼저 성경에 쓰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동네 사람들을 질투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배워 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기쁨을 서로 나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책임의 응보를 그들 자신이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 그것은 우리가 자기의 인생을 가장 좋게 살 수 있는 중요하고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오늘의 성경말씀으로부터 마음에 새깁시다.
【 2021年 1月 1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神の恵みの下に生き続ける」 使徒言行録 13章42~52節
先週は、ピシディア州アンティオキアにある会堂で語ったパウロの説教を取り上げましたが、今日の聖書箇所は、そのパウロの説教を通して、神さまの御言葉を聞いたユダヤ人たちがどのような反応をしたのかという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
「パウロとバルナバが会堂を出るとき、人々は次の安息日にも同じことを話してくれるようにと頼んだ」と、42節に記されています。つまり、パウロの説教を会堂の中で聞いたユダヤ人たちは、その話を喜んで聞き、「もっと話してほしい。次の安息日にもここに来て、今日の同じ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の福音について語ってもらえないか」と願ったと言うのです。
ユダヤ人たちがすんなりパウロの言葉を喜んで受け入れたというのは、ちょっと不思議な気がいたします。いつもだったら、すぐに拒絶反応が返って来そうなのですが、それは彼らが異邦人社会に住むユダヤ人たちであったことが一つの理由かもしれません。
異邦人社会の中で、ユダヤ人たちが信仰を守るというのは大変なことです。自分の信仰を守ろうとするならば、そこにいつも軋轢が生じます。異邦人社会の中で彼らは孤立するわけですね。ですから、彼らは自分の信仰を維持するために、より律法を守ることに熱心にならざるを得ません。ただ、それは同時に、律法を守ると言っても完全に守ることが出来ない自分であることも分かっています。ですから、その信仰生活というのは、いつかは律法を守ることが出来るようになり、救われるだろうという、自分の救いについての期待を抱くことしかできません。つまり、いつまでも「自分は救われた。神さまに受け容れられた」と言う確信を持つ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彼らには確かに信仰がありました。でも、同時に不安もあったのです。だからこそ、救いの確信が得たいという思いがあったのです。
それがパウロの説教によって、一筋の光が見えて来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れば、信じさえすれば救われるというのです。あなたたち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すでに救われている。だから、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なさい。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さえすれば救われるんだ。
勿論、そこには、「じゃ、自分たちが必死に守ってきた律法はどうなるのか、自分たちが守ってきた信仰は無駄だったのか」という思い、不満は当然あったと思います。でも、彼らは、救いの確信を得たかったのです。信仰による平安が欲しかったのです。
そのため、パウロとバルナバが会堂を出た後も、多くのユダヤ人たちがついて来ました。パウロたちはそんな彼らと語り合い、「神の恵みの下に生き続けるように」と勧めました。(43節)
信じさえすれば救われるというのは、ただただ神さまの恵みです。本来私たちが負わなければならない罪の責任、裁きをすべて神の子であるイエスさまが負われ、十字架の死によって裁かれた。そして、その裁きは裁きだけで終わったのではなく、復活の命、永遠の恵みとして、私たちにもたらされました。それらはすべて神さまの愛と恵みによるものです。この神さまの愛と恵みをただ信じ、感謝して生きなさいとパウロは勧めて、彼らは喜んでそれを受け入れました。そして、また次の安息日にも、神さまの恵みの言葉を聞けると思って会堂に集まったわけです。
ところが、次の安息日になりますと、ユダヤ人たちの反応が大きく変わってしまったのです。「次の安息日になると、ほとんど町中の人が主の言葉を聞こうとして集まって来た。しかし、ユダヤ人はこの群衆を見てひどくねたみ、口汚くののしって、パウロの話すことに反対した。」(44〜45節)
ユダヤ人たちは自分たちだけではなくて町中の人々がパウロの話を聞こうとして集まって来る姿を目撃して「ねたみ」の心を抱きました。その結果、パウロたちに対する好意は消え去り、反ってパウロたちを罵り、彼らの活動を妨害し始めたと言うのです。
彼らは異邦人社会の中でなかなか受け入れずに、苦労して生活をして来ました。それなのに、この町に来て間もないパウロたちが異邦人たちから受け入れられているの見て妬んだのです。そればかりではなく、「町の人たちは律法とは無関係の生活をし、自分勝手な生活をして来たのに、どうして彼らも自分たちと同じように救われることが出来るのか? それではいままで自分たちがやってきたことは無意味なことだったのか? それでは納得出来ない」とユダヤ人たちはパウロの話すことに今度は反対し始めたのです。
彼らが喜んで受け入れた神さまの言葉が、いつしか「ねたみ」のきっかけとなってしまいました。私たちの心はすぐに揺れ動いてしまいます。それが私たちの弱さです。しかも、この弱さは私たちの努力ではなかなか克服出来ません。だからこそ、パウロは先の43節で語ったように、神さまの恵みにとどまり続けることが必要であるのです。そのためにパウロは彼らに「神の恵みの下に生き続けるように」とアドバイスしていたのです。しかし、彼らはこの恵みの下にとどまり続けることが出来ませんでした。
パウロたちはここでユダヤ人たちの「ねたみ」から起こった激しい反対に出会いました。しかし、パウロたちはそこで福音を語ることを止めることはありませんでした。「そこで、パウロとバルナバは勇敢に語った」(46節)と語られています。そしてユダヤ人たちにこう語っています。「神の言葉は、まずあなたがたに語られるはずでした。だがあなたがたはそれを拒み、自分自身を永遠の命を得るに値しない者にしている。見なさい、わたしたちは異邦人の方に行く。」(46節)
ユダヤ人たちは神の言葉を聞いたのに、パウロの話すことに反対し、自らを永遠の命に値しない者としてしまったとパウロは彼らの罪を断罪しています。そして、パウロたちはここで重要な決断を下しています。「わたしたちは異邦人の方に行く」と。
ユダヤ人以外にもキリストの福音を聞きたいと願っている人たちがいます。パウロは自分たちに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時間を使って、その人々のために福音を語ろうと決断したのです。
パウロたちは自分たちの働きを妨害するユダヤ人たちとの争いに自分に与えられた時間を使うことは無意味であると考えたのです。なぜなら、パウロは神さまが自分たちに何を望んでおられるかを知っていたからです。「主はわたしたちにこう命じておられるからです。『わたしは、あなたを異邦人の光と定めた、/あなたが、地の果てにまでも/救いをもたらすために。』」(47節)。
パウロは、イザヤ書に語られた神の言葉に基づいて、自分たちが今何をしなければならないかを知り、新たな決断をここで下したのです。(イザヤ49:6)
皆さん、神さまが私たちに与えておられる人生の時間というものは、大変貴重なものです。私たちはその人生の時間を今どのように使っているでしょうか?。過ぎ去って行った過去の出来事を悔いることでその時間を使ってしまっていないでしょうか。終わることのない、そして後味の悪い隣人との争いのためにその時間を使ってい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はこの人生の時間を有効に使うために、まず聖書に示された神さまの御言葉に耳を傾ける必要があるのです。
ユダヤ人たちは他の町の人々をねたむのではなく、自分たちが学んできた神さまの御言葉を伝え、共に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た喜びを分かち合うことが出来たはずです。それなのに彼らはそれをしませんでした。だからその責任の報いを彼ら自身が受けとら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のです。
「神の恵みの下に生き続けること」。それは私たちが自分の人生をもっともよく生きることができる大切な唯一の鍵であることを私たちはもう一度、今日の御言葉から心に刻みたいと思います。
【2021년 1월 17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 사도행전 13장 42~52절
지난 주는 비시디아 안디옥에 있는 회당에서 말한 바울의 설교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만, 오늘의 성경 말씀은 그 바울의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어떻게 반응했느냐에 대해서 쓰여 있습니다.
“그들이 나갈새 사람들이 청하되 다음 안식일에도 이 말씀을 하라” 라고 42절에 쓰여 있습니다. 즉 바울의 설교를 회당 안에서 들은 유대인들은 그 이야기를 기꺼이 들으며 “좀 더 말해 주세요. 다음 안식일에도 여기에 와서 오늘처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말해 주세요” 라고 청했다고 합니다.
여느 때라면 금방 거절 반응을 보이는 유대인들인데, 수월히 바울의 말을 기꺼이 받아들였다니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그것은 그들이 이방인 사회에서 살고 있는 유대인들이었다는 것이 하나의 이유일지도 모릅니다.
이방인 사회 속에서 유대인들이 신앙을 지킨다는 것은 아주 힘든 일입니다. 자기의 신앙을 지키려고 하면 거기에는 항상 알력이 생깁니다. 이방인 사회 속에서 그들은 고립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신앙을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율법을 열심히 지켜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율법을 완전하게 지키는 게 어렵다는 것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신앙 생활이라는 것은 언젠가 율법을 제대로 지킬 수 있게 되면 그때는 구원을 받게 될 것이라는 자기 구원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즉 언제까지나 “나는 구원받았다. 하나님께 받아들여졌다”는 확신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틀림없이 신앙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불안도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확신을 얻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울의 설교로 인하여 한줄기 빛이 보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고 하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이미 구원 받았다. 그러기에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기만 하면 구원 받는다.
물론 거기에는 “그렇다면 자기들이 필사적으로 지켜 온 율법은 어떻게 되느냐? 자기들이 지켜 온 신앙은 헛일이었느냐” 라는 생각이나 불만이 당연히 있었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구원의 확신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신앙의 평안을 얻고 싶었던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과 바나바가 회당을 나간 후에도 많은 유대인들이 따라 왔습니다. 바울들은 그러한 그들과 서로 이야기를 나누며 “항상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고 권했습니다.(43절)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본래 우리가 짊어져야 하는 죄의 책임, 심판을 모두 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짊어지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갚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은 심판으로 끝난 게 아니라, 부활의 생명, 영원한 은혜로서 우리에게도 주여졌습니다. 그것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에 의거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믿고 감사하면서 살라고 바울은 권하고 그들은 기꺼이 그것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안식일에도 하나님의 은혜의 말씀을 들을 수 있다고 생각해서 모였던 것입니다.
그런데 다음 안식일이 되자 유대인들의 반응이 크게 바꿔져 버렸습니다. “그 다음 안식일에는 온 시민이 거의 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이니 유대인들이 그 무리를 보고 시기가 가득하여 바울이 말한 것을 비방하거늘”(44-45절)
유대인들은 자기들 뿐만 아니라 온 동네 사람들이 바울의 말씀을 듣고자 하여 모여 온 모습을 보고 “시기심”을 품었습니다. 그 결과, 바울들에 대한 호의는 사라지고 도리어 바울들을 비방하며 그들의 활동을 방해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그들은 이방인 사회 가운데 좀처럼 쉽사리 받아들여지지 못해서 고생하면서 생활해 왔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지 얼마 되지 않는 바울들이 이방인들에게서 받아들여져 있는 것을 보고 질투한 것입니다. 그 뿐만 아니라 “동네 사람들은 율법과 무관한 생활을 하고 마음대로의 생활을 해 왔는데 어째서 그들도 자기들과 마찬기지로 구원받을 수 있느냐? 그것으로는 지금까지 자기들이 해 온 것은 무의미한 것이었을까? 그것으로는 납득할 수 없다”며 유대인들은 바울이 말에 이번에는 반박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들이 기꺼이 받아들인 하나님의 말씀이 어느덧 “시기”의 계기가 되어 버렸습니다. 우리의 마음은 쉽게 흔들려 버립니다. 그것이 우리의 연약함입니다. 게다가 그 연약함은 우리의 노력으로서는 쉽사리 극복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바울이 43절에서 말한 것 같이 하나님의 은혜에 계속 머무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바울은 그들에게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으라”라고 어드바이스를 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은혜 가운데 계속 머무르지 못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유대인들의 “시기심”으로 인해 일어난 격렬한 반대에 부딪혔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거기서 복음을 전하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습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담대히 말하며”(46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에게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마땅히 먼저 너희에게 전할 것이로되 너희가 그것을 버리고 영생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자처하기로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46절)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는데도 바울이 말하는 것에 반대해서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합당하지 않은 자로 되어버렸다며 그들의 죄를 단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울들은 여기서 중요한 결단을 내리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방인에게로 향하노라” 라고.
유대인 이외에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싶다고 원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울은 자기들에게 주어진 시간을 써서 그 사람들을 위하여 복음을 전하려고 결단한 것입니다.
바울들은 자기들의 활동을 방해하는 유대인들과의 싸움에 자기에게 주어진 시간을 쓰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은 하나님께서는 자기들에게 무엇을 원하고 계시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주께서 이같이 우리에게 명하시되 내가 너를 이방의 빛으로 삼아 너로 땅 끝까지 구원하게 하리라”(47절)
바울은 이사야에 말씀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의거하여 자기들이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알아 새로운 결단을 여기서 내린 것입니다. (이사야49:6)
여러분,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인생의 시간이라는 것은 아주 귀중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 인생의 시간을 지금 어떻게 쓰고 있을까요? 지나간 과거의 일을 후회하는 것으로 그 시간을 써 버리고 있지는 않을까요? 끝도 없는, 그리고 뒷맛이 안 좋은 이웃 사람과의 싸움을 위해 그 시간을 쓰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이 인생의 시간을 유효하게 쓰기 위하여 먼저 성경에 쓰여 있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다른 동네 사람들을 질투하는 게 아니라 자기들이 배워 온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여 함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 받는 기쁨을 서로 나눌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것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책임의 응보를 그들 자신이 받아들여야 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있는 것”, 그것은 우리가 자기의 인생을 가장 좋게 살 수 있는 중요하고 유일한 열쇠라는 것을 우리는 다시 한번 오늘의 성경말씀으로부터 마음에 새깁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