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재림의 주님을 대망하는 우리 어드벤트의 소망에 대해서 신앙의 아버지라고 칭찬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그 사건을 통해서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기 이전의 아브라함(이 시점에서는 아직 아브람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만, 번거로우므로 아브라함으로 통일합니다)은 우상 숭배의 집 안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호수아 24:2) 또,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이 시점에서는 사래)는 불임의 여자였습니다.(11:30) 많은 자손을 남기지 않으면 다른 씨족에게 멸해져 버리는 당시,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신앙을 포함하여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요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을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라고 불러낸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복이 될지라”(12:2)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이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축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토대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축복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일대일 관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3절) 라고 이렇게 이 세상과의 관계도 포함해서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살기 쉬운 사회 속에서 생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향해 가는 데에는 또 다른 사회가 있고, 이 세상 사람이 있고, 자기와 적대할 것 같은 사람도 있는 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땅과 우상 숭배의 집을 떠나 새로운 땅에 가더라도 거기에는 또 다른 우상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는 세계와는 무관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 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이라고 말씀하신 새로운 땅의 현실에 들어맞은 것입니다. 우상에게 둘러싸여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라고 쓰여 있듯이 우상으로부터 되돌아올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4절),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잠자코 길을 떠났습니다. 이 침묵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실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약 성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이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인 아브라함의 소명 사건의 결론이며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소명의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의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첫째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12:2), 이 큰 민족의 “민족”이라는 말은 보통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암”이라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꺼림칙한 이방인까지도 포함되는 “고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대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실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의 신도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7-9)
누구보다도 구약 성서에 정통하고 있었던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이라고 굳이 이방인을 포함한 말을 이용하여 축복의 근원이 된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을 인용할 때 굳이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갈라디아서3:8) 라고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혈육과는 관계없이 유대인이라도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최종적인 확대인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하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늘의 성경 말씀 마지막 부분,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12:4) 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아버지도 75년간은 우상 숭배의 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집에서 떠나가라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셨습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참으로 하나님께 되돌아오기에 때는 늦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아버지라고 칭찬받은 아브라함이 그 늙은 날에 진정한 하나님을 따랐다고,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75년 동안 우상 숭배의 집에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로 그 우상 숭배의 집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뻗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 숭배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핸디캡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곳이야말로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 세상의 속박도, 연령 제한도, 다른 어떤 장애도 없는 것입니다. 지상의 걸음이 끝날 때까지, 다시 주 예수님께서 오실 그 날까지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6:2),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째는, 이 구원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곳으로 이어졌습니다.이 세상적으로는 저주받고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이 부부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관철하는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은혜를 완벽하게 찬미한 것이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였습니다. 오늘 예배부름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누가복음 1장 46~47절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6-47)
처녀 마리아가 수태 고지를 받은 직후에 찬미한 것으로 그 때 그녀는 아마 열세 살 정도의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에게 처녀 탄생이라는 전대미문의 역할이 주어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적으로 보면 어땠을까요?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간음죄가 씌워져 돌로 맞아 죽든지,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숨죽이고 살아가든지, 아마도 그 중 하나가 이 가련한 소녀의 머리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드벤트의 소망입니다. 소망이 없는 곳에 신앙으로 소망을 본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어드벤트의 소망입니다.
불임으로 소망을 하나도 가질 수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부로부터 하나의 민족이 일으켜진 것처럼, 그리고 소망이 있을 리가 없는 소녀로부터 이 세상의 구세주가 탄생한 것처럼 소망이 없는 곳에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파견된 장소에서 이 어드벤트의 소망으로 서도록 합시다. 거기에야말로 축복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
2021年11月28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ルカによる福音書(누가복음) 1章 46~48節
〇讃 頌 讃頌歌 285(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創世記(창세기) 11章27節~12章4節
〇説 教 「祝福の源 ~アドベントの希望~
(축복의 그원 ~어드벤트의 소망~)」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84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1月 2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祝福の源~アドベントの希望~」創世記11章27節~12章4節
今日は、再臨の主を待ち望む私たちのアドベントの希望について、信仰の父と謳われたアブラハムの召命の出来事を通して、教えられたいと願います。
神さまから召命を受ける以前のアブラハム(この時点では、まだアブラムと呼ばれておりますが、ややこしいのでアブラハムで統一します)というのは、偶像崇拝の家の中で「他の神々を拝んで」いました。(ヨシュア24:2) また、アブラハムの妻であったサラ(この時点では、まだサライと呼ばれていた)は、不妊の女でした。(11:30) 多くの子孫を残さなければ、他の氏族に滅ぼされてしまう当時、これは深刻な問題でした。すなわちアブラハムには、彼の信仰を含めて、神さまに召命を受ける要素など一つもなかったのです。
しかし、このアブラハムを「あなたは生まれ故郷父の家を離れてわたしが示す地に行きなさい」(12:1)と召し出した主なる神さまは、彼を「祝福の源となる」(12:2)と、言われたのです。この主なる神さまの御言葉、神さまの決定によって、アブラハムは祝福の源にされたなのです。祝福の土台は、神さまの御旨、神さまの御言葉によるものだったのです。
さらに、この祝福は神さまとアブラハムとの一対一の関係だけ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を祝福する人をわたしは祝福し、あなたを呪う者をわたしは呪う」(3節)、とこのように、この世との関係も含まれて祝福が語られるのです。すなわち、アブラハムは、今全てのものを放棄して出発する、しかし、それは決してアブラハムにとって住みやすい社会の中で生活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向かう先には、また違う社会があって、この世の人がいる、自分と敵対するような人もいる、その関係の中で生きることが求められているのです。
偶像崇拝の土地と、偶像崇拝の家から出て行って新しい場所に行っても、そこにはまた他の偶像が待っているわけです。この世にある限り、偶像崇拝を続ける世界と無関係に生きることは出来ないのです。しかし、その只中で、「地上の氏族はすべて、あなたによって祝福に入る」、この約束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アブラハムに与えられた神さまの約束は、この世の社会と決して無関係ではないのです。これがとても重要なことなのです。
すなわち、神さまの約束は、「わたしが示す地」といわれたその新しい場所の現実に即したものなのです。偶像に取り囲まれても、「地上の氏族はすべて、あなたによって祝福に入る」と言うように、偶像から立ち返ることが出来るという約束になっているのです。
さて、これらの神さまの召命に対して、アブラハムは一言も語っておりません。「アブラムは、主の言葉に従って旅立った(4節)」、これが神さまの約束に対するアブラハムの回答の全てです。アブラハムには、言いたいこと、聞きたいことが山ほどあったでしょう。しかし、彼は黙って旅立ったのです。この沈黙がアブラハムの信仰の姿です。そして、実にここから、神の民イスラエルの歴史が始まったのです。新約聖書は「アブラハムの子ダビデの子、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この言葉から始まります。これが今日の御言葉のアブラハムの召命の出来事の結論であり、アブラハムに対する神さまの約束の実現とも言えます。
このアブラハムの召命の御言葉を通して、3つの大切な真理が示されています。
まず1つ目は、「わたしはあなたを大いなる国民にし」(12:2)、この大いなる国民の「国民」という言葉は、通常イスラエルの民を示すヘブライ語の「アム」という言葉ではなくて、ユダヤ人にとっては厭わしい響きさえある異邦人も含まれる「ゴーイ」という言葉が使われているところです。
これは、このアブラハムへの約束の時点で、神さまの祝福がイスラエルだけではなくて、全世界への広がりをもっていたということ暗示するもので、実は使徒パウロが、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の中でこのことを詳しく説明しています。(ガラテヤ3:7-9)
他の誰よりも旧約聖書に精通していたパウロは、神さまがアブラハムに、「大いなる国民」、とあえて異邦人を含む言葉を用いて、祝福の源とされたことを見逃さなかったのです。それでパウロは、この御言葉を引用する時に敢えて、「あなたのゆえに異邦人は皆祝福される」(ガラテヤ3:8)と、このように言い換えております。もはや血肉とは無関係に、ユダヤ人であろうが異邦人であろうが、「信仰によって生きる人々は、信仰の人アブラハムと共に祝福されている」、これが、アブラハムに対する神さまの祝福の最終的な広がりなのです。今や、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一つで、神の民とされることが約束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2つ目は、今日の御言葉の最後の部分、「アブラムは、ハランを出発したとき七十五歳であった」(12:4)ということです。信仰の父も75年間は、偶像崇拝の家に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今、その家から出ていけ、と命じられているのですから。すなわち、ここで大切なのは、悔い改めて真の神さまに立ち返るのに、手遅れはな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信仰の父と謳われたアブラハムが、その老いた日に真の神さまに従った、とこのように聖書は語っているのです。
75年間、偶像崇拝の家にあった、これはまさに私たちが住む社会の現実ではありませんか。しかし、実に、その偶像崇拝の家にも、神さまの救いの手は伸ば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偶像崇拝に囲まれた環境で生活しています。しかし、それが救いのハンディになることはないのです。主なる神さまは、そこにこそ救いの手を差し伸べておられるからです。神さまの救いに、この世のしがらみも、年齢制限も、他のどのような障害もないのです。地上の歩みが終わるまで、再び主イエスさまが来られるその日まで、「今や恵みの時、今こそ救いの日」、この御言葉は、全ての人に語られているのです。
最後に3つ目、この救いは、何の希望もないところにもたらされました。この世的には呪われ、希望を持てない夫婦から神さまの救いは始まったのです。これが聖書を貫く神さまの救いそのものです。
そして、この救いの恵みを見事に讃美したものが、ナザレの乙女マリアでした。今日の礼拝の招きの言葉として与えられたのが、ルカ1章46~47節でした。「わたし魂は主をあがめ、わたしの霊は救い主である神を喜びたたえます。身分の低い、この主のはしためにも、目を留め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今から後、いつの世の人も、わたしを幸いな者と言うでしょう。」(ルカ1:46-47)
乙女マリアが受胎告知を受けた直後に讃美したもので、この時彼女はおそらく13歳くらいの少女でした。その少女に処女降誕という前代未聞の役割が与えられ、聖霊によって身ごもったのです。しかし、この世的に見れば、どうだったでしょうか。
この世の視点では、誰の子かわからない子どもを身ごもったマリアには希望はありませんした。姦淫の罪を着せられて石打の刑で殺されるか、生涯後ろ指を指されてこそこそと生きていくか、恐らくそのいずれかが、この可憐な少女の頭を支配しようとしていたでしょう。
しかし、そこでマリアは、神さまを賛美しているのです。これこそが、アドベントの希望なのです。希望がないところに、信仰によって希望を見る、これが主イエス・キリストを待ち望むアドベントの希望です。
不妊の女といわれ、希望の一つも持てなかったアブラハムとサラの夫婦から一つの国民がおこされたように、そして、希望を持てるはずのない少女からこの世の救い主が誕生したように、希望のないところになお、希望が生まれるのです。
私たちは、それぞれ遣わされた場所で、このアドベントの希望に立とうではありませんか。そこにこそ、祝福の源があるのです。
【2021년 11월 28일 주일예배(요약판)】
“축복의 근원 ~어드벤트의 소망~” 창세기 11장 27절~12장 4절
오늘은 재림의 주님을 대망하는 우리 어드벤트의 소망에 대해서 신앙의 아버지라고 칭찬받은 아브라함이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은 그 사건을 통해서 함께 생각하려고 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소명을 받기 이전의 아브라함(이 시점에서는 아직 아브람이라고 불리고 있습니다만, 번거로우므로 아브라함으로 통일합니다)은 우상 숭배의 집 안에서 “다른 신들을 섬겼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호수아 24:2) 또, 아브라함의 아내였던 사라(이 시점에서는 사래)는 불임의 여자였습니다.(11:30) 많은 자손을 남기지 않으면 다른 씨족에게 멸해져 버리는 당시, 이것은 심각한 문제였습니다. 즉 아브라함에게는 그의 신앙을 포함하여 하나님께 소명을 받을 만한 그 어떤 요소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아브라함을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12:1) 라고 불러낸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를 “복이 될지라”(12:2) 하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이 주님이신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결정으로 말미암아 아브라함은 축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축복의 토대는 하나님의 뜻, 하나님의 말씀에 의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이 축복은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일대일 관계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3절) 라고 이렇게 이 세상과의 관계도 포함해서 축복을 말씀하셨습니다. 즉, 아브라함은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출발한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아브라함이 살기 쉬운 사회 속에서 생활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향해 가는 데에는 또 다른 사회가 있고, 이 세상 사람이 있고, 자기와 적대할 것 같은 사람도 있는 그 관계 속에서 사는 것이 요구되고 있는 것입니다.
우상 숭배의 땅과 우상 숭배의 집을 떠나 새로운 땅에 가더라도 거기에는 또 다른 우상들이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있는 한 우상 숭배를 계속하는 세계와는 무관하게 살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이 약속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약속은 이 세상 사회와 결코 무관하지 않습니다. 이것이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약속은 “내가 네게 보여줄 땅”이라고 말씀하신 새로운 땅의 현실에 들어맞은 것입니다. 우상에게 둘러싸여도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라고 쓰여 있듯이 우상으로부터 되돌아올 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하나님의 소명에 대해서 아브라함은 한마디도 하지 않습니다.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4절), 이것이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아브라함의 대답 전부였습니다. 아브라함에게는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말이 얼마든지 많이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잠자코 길을 떠났습니다. 이 침묵이 아브라함의 신앙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실로 여기서부터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신약 성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 이 말로부터 시작됩니다. 이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인 아브라함의 소명 사건의 결론이며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이 아브라함의 소명의 말씀을 통해서 세 가지의 중요한 진리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먼저 첫째는,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12:2), 이 큰 민족의 “민족”이라는 말은 보통 이스라엘 백성들을 나타내는 히브리어의 “암”이라는 말이 아니라, 유대인에게 있어서는 꺼림칙한 이방인까지도 포함되는 “고이”라는 말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시점에서 하나님의 축복이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전 세계로 확대된다는 것을 암시하는 것으로, 실은 사도 바울이 갈라디아의 신도에게 보내는 편지 속에서 이것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습니다. (갈라디아서3:7-9)
누구보다도 구약 성서에 정통하고 있었던 바울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큰 민족”이라고 굳이 이방인을 포함한 말을 이용하여 축복의 근원이 된 것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말을 인용할 때 굳이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갈라디아서3:8) 라고 이렇게 바꾸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미 혈육과는 관계없이 유대인이라도 이방인이라도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음을 받느니라” 이것이 아브라함에 대한 하나님의 축복의 최종적인 확대인 것입니다. 지금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 하나로 하나님의 백성이 되는 것이 약속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오늘의 성경 말씀 마지막 부분,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12:4) 라는 것입니다. 신앙의 아버지도 75년간은 우상 숭배의 집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지금 그 집에서 떠나가라고 하나님께서는 명령하셨습니다. 즉, 여기서 중요한 것은 회개하고 참으로 하나님께 되돌아오기에 때는 늦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신앙의 아버지라고 칭찬받은 아브라함이 그 늙은 날에 진정한 하나님을 따랐다고,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75년 동안 우상 숭배의 집에 있었던 것은 바로 우리가 사는 사회의 현실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실로 그 우상 숭배의 집에도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이 뻗쳐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상 숭배에 둘러싸인 환경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구원의 핸디캡이 될 수는 없습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그곳이야말로 구원의 손길을 뻗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이 세상의 속박도, 연령 제한도, 다른 어떤 장애도 없는 것입니다. 지상의 걸음이 끝날 때까지, 다시 주 예수님께서 오실 그 날까지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린도후서6:2), 이 말씀은 모든 사람에게 전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세째는, 이 구원은 아무런 희망도 없는 곳으로 이어졌습니다.이 세상적으로는 저주받고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이 부부로부터 하나님의 구원은 시작된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을 관철하는 하나님의 구원 그 자체입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은혜를 완벽하게 찬미한 것이 나사렛의 처녀 마리아였습니다. 오늘 예배부름 말씀으로 주어진 것이 누가복음 1장 46~47절이었습니다.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 그의 여종의 비천함을 돌보셨음이라 보라 이제 후로는 만세에 나를 복이 있다 일컬으리로다”(눅 1:46-47)
처녀 마리아가 수태 고지를 받은 직후에 찬미한 것으로 그 때 그녀는 아마 열세 살 정도의 소녀였습니다. 그 소녀에게 처녀 탄생이라는 전대미문의 역할이 주어지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임신을 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 세상적으로 보면 어땠을까요?
이 세상의 관점으로는 누구의 자식인지 모르는 아이를 임신한 마리아에게는 희망이 없었습니다. 간음죄가 씌워져 돌로 맞아 죽든지, 평생 손가락질 받으며 숨죽이고 살아가든지, 아마도 그 중 하나가 이 가련한 소녀의 머리속에 떠올랐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마리아는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어드벤트의 소망입니다. 소망이 없는 곳에 신앙으로 소망을 본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어드벤트의 소망입니다.
불임으로 소망을 하나도 가질 수 없었던 아브라함과 사라의 부부로부터 하나의 민족이 일으켜진 것처럼, 그리고 소망이 있을 리가 없는 소녀로부터 이 세상의 구세주가 탄생한 것처럼 소망이 없는 곳에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우리는 각각 파견된 장소에서 이 어드벤트의 소망으로 서도록 합시다. 거기에야말로 축복의 근원이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