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프롤로그로서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은 이것이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약혼자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것”(18절)이라며 지금 임신중임을 들은 요셉이 고뇌하여 헤어지려고 결심했을 때,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셨습니다.(20절) 그때, 천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라고 요셉에게 명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 즉 이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계보 상에 지금 요셉이 있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서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무서워한다”라는 말은 원래 도망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계보로부터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역할은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이 계보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잠자코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에 쓰여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기 때문에 요셉과 혈연 관계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이해로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 예수를 법적으로 인지하면 그것은 혈연 관계보다 우선되고 예수도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혈연 관계와는 무관하게 계보 속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후, 이 예수로부터 이어지는 구원의 계보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더 계속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이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 성서의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같아서 “주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대로 예수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적인 구세주가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 그것은 탄생 때부터의 예수님의 사명이자 십자가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태어나셨고,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23절) 라고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이것은 약속된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에서 시작된 가장 위대한 진리입니다.
그럼, 이 임마누엘에 대해서 두 가지의 진리를 배우려고 합니다.
우선, 하나는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가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지상적인 구세주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유력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고 세리나 창녀들과 같은 당시 죄인이라 멸시받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즉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는 죄인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첫장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이 시대 본래라면 불필요한 여성의 이름, 게다가 창녀와 같은 무거운 과거를 가진 여성이나 이방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에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소유한 사람의 인격 전체, 생애 전체를 나타내는 역할도 했습니다. 한사람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생애를 보냈는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성경에 나타난 이름은 그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나 호칭으로 쓰이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세주의 계보 속에 라합이나 우리야의 아내(밧세바) 라는 여성의 이름이 있으니 더욱 위화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이름을 이 계보에 넣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것은 이것이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렇게 무거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무거운 짐을 벗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 9:13) 이스라엘은 그녀들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쫓아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그녀들을 부르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도 라합 같은 사람은 있습니다. 밧세바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여기 내가 바로 밧세바입니다. 많은 무거운 짐과 셀수도 없는 수많은 죄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저도 이 계보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마리아든 라합이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불러 주신 이상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지금 함께 계신 이상, 우리는 이미 죄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무관하게 되는 은혜가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진리의 두번째, 이 계보는 주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세상의 끝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 잉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으로부터 그 뒤로는 이미 혈연과는 관계없이 이 계보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주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우리가 성령으로 주 예수님을 믿고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주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 자신도 이미 육체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임마누엘이란 살든 죽든 우리가 주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자인 이상 설령 우리의 의식이 없어져도, 이 생명이 없어져도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이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일까요?
새로운 천지창조인 구원의 역사, 그것이 임마누엘로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의 끝까지 이어지는 이 구세주의 계보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때문입니다. 여기에 크리스마스의 복음이 있습니다.
2021年12月19日 聖誕節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7章 14節
〇讃 頌 讃頌歌 122(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 劇 絵本朗読(小さな羊飼いの大切な夜)
〇聖書奉読 マタイによる福音書(마태복음) 1章 18~23節
〇説 教 「インマヌエル(임마누엘)」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20(1, 4節)
〇献 金
〇報 告 教会学校讃美・演奏・クリスマスプレゼント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15(1節)
〇祝 祷
【 2021年 12月 19日 主日礼拝説教】
「インマヌエル」 マタイによる福音書 1章 18~23節
マタイによる福音書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誕生のプロローグとしてアブラハムから始まる系図が記されています。実は、このことが、神学的にはとても重要なのです。
許嫁のマリアから、「聖霊によって身ごもっている」(18節)ことを聞いたヨセフが苦悩し、離縁しようと決心した時、主の天使がヨセフに現れました。(20節) その時、天使は、「ダビデの子ヨセフ、恐れずマリアを妻に迎えなさい」、とヨセフに命じました。
「ダビデの子ヨセフ」、すなわち、これはアブラハムから始まる系図上に今ヨセフがいることを明確にしています。そのうえで、「恐れずマリアを妻に迎えなさい」、というのです。
この「恐れる」という言葉はもともと逃げ出す、という意味を持っています。すなわち、この系図から逃げるな、ということなのです。ヨセフの役割は、アブラハムから続くこの系図から逃げ出さずに、黙って神さまの約束の実現に用いられることなのです。イエス・キリストは、聖霊によって身ごもったわけですから、ヨセフと血のつながりがあ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当時のイスラエルの理解では、ダビデの子孫ヨセフが、イエスを法的に認知すれば、それは血のつながり以上に優先され、イエスもダビデの子と認められたのです。そして、この血のつながりと無関係に系図の中に入れられる、これが大切なのです。この後、このイエスから続く救いの系図にそのまま反映されるからです。
さて、天使はさらに続けます。「マリアは男の子を産む。その子をイエスと名付けなさい。この子は自分の民を罪から救うからである。」(21節)
このイエスという名前は、旧約聖書のヨシュアという名前と同じで、「主は救い」という意味を持っています。そして、その名前の通り、イエスと名付ける理由が、「この子は自分の民を罪から救うからである」、とこのように示されています。そして、これこそが、イエス・キリストが、人となってこの世に来られた目的なのです。
主イエスさまは、救い主です。しかし、それは地上的な救い主ではなくて、罪からの救い主なのです。しかし、これを最後まで理解できないユダヤの人々が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つけたのです。罪からの救い主、それは誕生の時からのイエスさまの使命であると同時に、十字架の理由ともな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罪からの救い主であるがゆえに生まれ、罪からの救い主であるがゆえに殺されたのです。
そのうえで、「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この名は、『神は我々と共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23節)と、このように聖書は語っているのです。
「インマヌエル」、これは約束の救い主の誕生を祝うクリスマスによって始まった最も偉大な真理がこの約束なのです。
では、このインマヌエルについて2つの真理を教えられたいと思います。
まず、一つは、罪からの救い主が、インマヌエル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主イエスさまは、地上的な救い主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この世の有力者たちには全く興味を示さず、徴税人や娼婦たちといった当時罪人と蔑まれていた人々のところに赴き、彼らの友となられました。つまり、罪からの救い主は、罪人と共にお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マタイによる福音書の最初に記されているアブラハムから始まる系図には、ほころびがあって、この時代本来なら不要な女性の名前、しかも娼婦のように重い過去を持った女性や異邦人の名前が記されています。
当時のユダヤにおいて、名前というのは、その人の人格全体、生涯全体を指し示す大切なものです。特に、聖書に登場します名前というのは、ユダヤ人には、その人がどのような人物で、どのような生涯を送ったのか、よく知っています。ですから、救い主の系図の中に、ラハブとかウリアの妻(バトシェバ)とかの女性の名前がありますと、とても違和感があるのです。
しかし、彼女らの名前をこの系図に入れました。なぜか? それは、これが、罪からの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系図だからです。
キリストは、まさにそのように重たい過去を持っている人の重荷を取り除くために、この世に来られたのです。(マタイ9:13) イスラエルは、彼女たちを、罪人と呼んで追い出すでしょう。しかし、イエスさまは、あなたの罪は許された、と彼女たちを招く救い主なのです。そして、これがインマヌエルです。
私たちの時代も、ラハブのような人はおられます。バトシェバのような人もおられます。いいえ、この私がバトシェバです。たくさんの重荷を、数えきれない罪を背負っているからです。しかし、それでもなお、私もこの系図から省かれないのです。もはやマリアであろうが、ラハブであろうが、それはたいした問題ではありません。主イエスさまが招いてくださった以上、そして主イエスさまが、今、共におられる以上、私たちはもはや罪とは無関係にされているからです。この罪人であるのに、罪と無関係にされる恵みがインマヌエルです。
そして、インマヌエルの真理の二つ目、この系図は、主イエスさまからさらに世の終わりまで続い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主イエスさまは聖霊によっておとめマリアの胎に宿りました。ですから、主イエスさまから先は、もはや血筋とは無関係にこの系図が伸びているのです。大切なのは、おとめマリアが聖霊によって主イエスさまを宿したように、私たちが聖霊によって、主イエスさまを信じて迎え入れることです。そして、聖霊によって主イエスさまを迎え入れ、インマヌエルが私たちの中で生き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は、私たち自身も、もはや肉体の死と無関係にされていると言うことなのです。実に、インマヌエルとは、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私が主イエスさまと共にある約束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がキリスト者である以上、たとえ私たちの意識がなくなっても、この命が失われても、主が共におられる、この現実は何ら変わらないのです。何という憐れみでしょうか。
新しい天地創造である救いの御業、それが、インマヌエルで実現したのです。今、私たちは、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主イエスさまから世の終わりまで続くこの救い主の系図に名が記されているのです。「インマヌエル(神は私たちと共におられる)」からです。ここにクリスマスの福音があります。
【2021년 12월 19일 주일예배】
“임마누엘” 마태복음 1장 18~23절
마태복음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프롤로그로서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계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실은 이것이 신학적으로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약혼자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것”(18절)이라며 지금 임신중임을 들은 요셉이 고뇌하여 헤어지려고 결심했을 때, 주님의 천사가 요셉에게 나타나셨습니다.(20절) 그때, 천사는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 라고 요셉에게 명하셨습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 즉 이것은 아브라함으로부터 시작되는 계보 상에 지금 요셉이 있는 것을 명확하게 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무서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이하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무서워한다”라는 말은 원래 도망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즉 이 계보로부터 도망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요셉의 역할은 아브라함부터 이어지는 이 계보로부터 도망치지 않고, 잠자코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에 쓰여지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기 때문에 요셉과 혈연 관계가 있는 게 아닙니다. 그러나 당시 이스라엘의 이해로는 다윗의 자손 요셉이 예수를 법적으로 인지하면 그것은 혈연 관계보다 우선되고 예수도 다윗의 자손으로 인정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혈연 관계와는 무관하게 계보 속에 들어갑니다.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이 후, 이 예수로부터 이어지는 구원의 계보에 그대로 반영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천사는 더 계속합니다.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1절)
이 예수라는 이름은 구약 성서의 여호수아라는 이름과 같아서 “주님께서는 구원”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대로 예수라고 이름을 붙이는 이유가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라고 나타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이 되셔서 이 세상에 오신 목적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상적인 구세주가 아니라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을 끝까지 이해하지 못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것입니다.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 그것은 탄생 때부터의 예수님의 사명이자 십자가의 이유가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태어나셨고,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이시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23절) 라고 이렇게 성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 이것은 약속된 구세주의 탄생을 축하하는 크리스마스에서 시작된 가장 위대한 진리입니다.
그럼, 이 임마누엘에 대해서 두 가지의 진리를 배우려고 합니다.
우선, 하나는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가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지상적인 구세주가 아니셨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의 유력자들에게는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으셨고 세리나 창녀들과 같은 당시 죄인이라 멸시받던 사람들을 찾아가 그들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즉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는 죄인과 함께 계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첫장에 기록되어 있는 아브라함부터 시작되는 예수님의 계보를 보면, 이 시대 본래라면 불필요한 여성의 이름, 게다가 창녀와 같은 무거운 과거를 가진 여성이나 이방인의 이름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유대에 있어서 이름은 그 사람의 신원을 확인하는 것뿐만 아니라 그 이름을 소유한 사람의 인격 전체, 생애 전체를 나타내는 역할도 했습니다. 한사람의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사람이 어떤 인물이며 어떤 생애를 보냈는지 아는 것을 의미합니다. 특히 성경에 나타난 이름은 그 이름이 갖고 있는 의미나 호칭으로 쓰이는 그 이상의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따라서 구세주의 계보 속에 라합이나 우리야의 아내(밧세바) 라는 여성의 이름이 있으니 더욱 위화감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들의 이름을 이 계보에 넣었습니다. 어째서일까요? 그것은 이것이 죄로부터 구원해 주시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바로 그렇게 무거운 과거를 가지고 있는 사람의 무거운 짐을 벗게 하기 위하여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마 9:13) 이스라엘은 그녀들을 죄인이라고 부르고 쫓아내겠지요.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너의 죄는 용서받았다고 그녀들을 부르는 구세주이십니다. 그리고 이것이 임마누엘입니다.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에도 라합 같은 사람은 있습니다. 밧세바 같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여기 내가 바로 밧세바입니다. 많은 무거운 짐과 셀수도 없는 수많은 죄를 짊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런데도 저도 이 계보로부터 벗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미 마리아든 라합이든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주 예수님께서 불러 주신 이상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 지금 함께 계신 이상, 우리는 이미 죄와는 무관하기 때문입니다. 이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죄와 무관하게 되는 은혜가 임마누엘입니다.
그리고 임마누엘의 진리의 두번째, 이 계보는 주 예수님으로부터 다시 세상의 끝까지 이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성령으로 처녀 마리아의 태에 잉태하셨습니다. 그래서 주 예수님으로부터 그 뒤로는 이미 혈연과는 관계없이 이 계보가 계속되어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처녀 마리아가 성령으로 주 예수님을 잉태한 것처럼 우리가 성령으로 주 예수님을 믿고 맞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주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임마누엘이신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서 살고 계신다는 것은 우리 자신도 이미 육체의 죽음과는 관계없이 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실로 임마누엘이란 살든 죽든 우리가 주 예수님과 함께 있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그리스도자인 이상 설령 우리의 의식이 없어져도, 이 생명이 없어져도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이 현실은 조금도 변하지 않습니다. 얼마나 큰 은혜일까요?
새로운 천지창조인 구원의 역사, 그것이 임마누엘로 실현되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사나 죽으나 주 예수님으로부터 세상의 끝까지 이어지는 이 구세주의 계보에 우리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는 것입니다.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때문입니다. 여기에 크리스마스의 복음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