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셉은 천사의 지시대로 아기에게 예수라고 이름 지어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찼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아기를 바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부모는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것 같습니다만, “첫 태에 난 남자” 즉 장자는 하나님께 드려서 거룩히 구별을 받기 위하여 제사장 입회 하에 일 년 된 어린 양과 비둘기 한 마리를 바쳐야 합니다. 다만, 가난해서 그것을 바치기 어려울 때에는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도 허용되었습니다. 요셉 부부는 가난하기 때문에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변찮은 것밖에 바칠 수 없는 부부, 또 그런 마리아에게 안긴 예수님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시므온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25-26절)
시므온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도 선지자도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유대 시민이었습니다. 단지 그는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고, 그 신앙은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은 아니지만 전 국민을 대표해서 기도하고 국가를 중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계시를 성령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아기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이때 불가사의한 것이 잇달아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먼저 성령의 감동으로 구세주를 만난 것입니다. 또, 겉보기에는 보통 아기인 예수님을 보고 구세주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시므온은 예수님께 구원을 보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놀랄 만한 것은 구세주가 가져오는 구원 범위의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나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절)
여기에는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칭찬하여 찬미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시므온이 생각하는 구원의 범위는 “이스라엘의 위로”(25절) 라는 것이었습니다. 선민 유대인의 구원이었는데 그것이 여기에서는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31-32절)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그 구원은 만민(이방인과 이스라엘)에게 이른다는 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임하여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시므온의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이 말을 듣고 요셉과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33절)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아기가 구세주임을 천사의 계시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때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시므온은 축복하여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4절입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34-35절)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이에게는 실족이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세주이십니다만, 우리 인간은 이 분을 구세주라고 인정하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방을 받는 표적”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입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라고 쓰여 있듯이 마리아는 그 슬픔을 맛보게 됩니다. 구세주가 태어나심 그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만, 어떻게 구세주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지 그것이 시므온의 입을 통해서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구세주를 만났던 또 다른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안나라는 나이든 여성 선지자입니다.
안나는 결혼한지 7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그 후, 줄곧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어 나이가 84세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결코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잃었기에 생활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계속 완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녀는 바리새인도 아니고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한 여성도 아니었습니다.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일반적인 유대 시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녀는 금식을 하고 있었을까요? 금식은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녀도 시므온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위로 받기를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의 그녀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녀의 감사는 그 후 그녀의 행동에 나타나 있습니다. 38절입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8절)
예수님께서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안나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구원을 대망하던 사람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데려온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9:13-15, 막10:13-16, 눅18:15-17) 그것은 당시의 습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만, 부모는 어린 아이를 유명한 제사장이나 랍비의 축복을 받기위해 성전에 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에게 이끌린 아기 예수님께서는 시므온과 안나라는 무명의 사람에게 안겨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만이 아기 예수님께 구세주의 본질을 볼 수 있었기에 오히려 반대로 그 둘이 구세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본질을 알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사람, 주님을 안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공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구세주를 대망할 수 없는 상황에 결코 휩쓸리지 않았던 사람들이며 또한 자신의 입장이나 생활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또, 구세주를 찾는 행동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구세주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를 안았던 사람은 기쁨에 넘쳐 그것을 스스로 밖을 향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 주민 등록이 될 가치도 없는 사람들, 이방인들,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 노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구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생활, 신분이나 입장,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 가난함, 나이 쪽으로 관심을 가집니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런 가운데서 주님이신 하나님을 제일로 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처한 곳에서 주님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기 속에 매몰되고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놓인 곳에서, 처한 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구원의 주님을 최우선으로 구하기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구세주를 제일로 구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생애를 모두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
2021年12月2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ヘブライ(히브리서) 11章 1~2節
〇讃 頌 讃頌歌 130(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ルカによる福音書(누가복음) 2章 21~38節
〇説 教 「救い主を抱いて(임주세두를 안고)」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12(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1
〇祝 祷
【 2021年 12月 26日 主日礼拝説教】
「救い主を抱いて」 ルカによる福音書 2章 21~38節
今日の御言葉には、イエスさまがお生まれになってからの出来事が記されています。
ヨセフは、天使のお告げ通り、幼子にイエスと名付け、律法に従って、割礼を施しました。そして、モーセの律法に定められた清めの期間が過ぎた時に、エルサレム神殿に行って、神さまに幼子を献げる礼拝を献げました。
礼拝の際、両親は山鳩一つがいか、家鳩の雛二羽をいけにえとして献げたようですが、「初めて生まれた男子」すなわち長子は、神さまに献げ、聖別してもらうために、祭司立ち会いのもと、一歳の子羊一頭と 鳩一羽を献げます。ただ、貧しくてそれが献げられない場合は、山鳩ひとつがいか、家鳩の雛二羽で許されておりました。ヨセフ夫婦は貧しいために山鳩ひとつがいか、家鳩の雛二羽を献げたのです。
エルサレム神殿には、大勢の人がいました。しかし、このような貧しいものしか献げられない夫婦、またマリアに抱かれたイエスさまに目を留める人はおりませんでした。
そのような中にシメオンという老人がいました。このシメオンについて聖書はこのように記しています。25節です。「この人は正しい人で信仰があつく、イスラエルの慰められるのを待ち望み、聖霊が彼にとどまっていた。そして、主が遣わすメシアに会うまでは決して死なない、とのお告げを聖霊から受けていた。」(25-26節)
シメオンは神殿で奉仕をする祭司でも預言者でもありません。ごく普通のユダヤ市民でした。ただ、彼は信仰に深く、その信仰は個人的な救いではなく、イスラエル国家全体が神の慰めを受けることを待ち望んでいました。彼は祭司ではありませんが、全国民を代表して祈る、国家をとりなす思いを持っていたのです。そのような彼の信仰に対して、神さまは「主が遣わすメシアに会うまでは決して死なない」というお告げを聖霊を通して示されたのです。
このシメオンが、聖霊に導かれてエルサレム神殿に入った時に幼子イエスさまを見つけました。この時に、不思議な事が次々と彼に起こったのです。
まず、聖霊に導かれて救い主と出会ったことです。また、見た目では普通の幼子であるイエスさまを見て、救い主だと認識できたことです。その時点で、イエスさまは何もしておられません。なのにシメオンはイエスさまに救いを見たのです。
さらに、最も驚くべきことは、救い主がもたらす救いの範囲の理解が変えられたことなのです。29節をご覧下さい。「主よ、今こそあなたは、お言葉どおり、この僕を安らかに去らせてくださいます。わたしはこの目であなたの救いを見たからです。これは万民のために整えてくださった救いで、異邦人を照らす啓示の光、あなたの民イスラエルの誉れです。」(29-32節)
ここには、シメオンがイエスさまに会い、そして、神さまをたたえる、賛美するという内容が記されていますが、イエスさまに出会うまで、シメオンが考える救いの範囲は、「イスラエルの慰め」(25節)ということでした。選民ユダヤ人の救いということだったのですが、それが、ここでは、「これは万民のために整えてくださった救いで、異邦人を照らす啓示の光」(31-32節)とありますように、その救いは万民(異邦人とイスラエル)に及ぶという告白に変わったのです。まさに聖霊がシメオンに臨み、語らせた。それがこのシメオンの神さまへの賛美の言葉であったのです。
シメオンのこの言葉を聞いて、ヨセフとマリアは驚きました。(33節) ヨセフとマリアは自分たちに与えられた幼子が救い主であるということを天使にお告げによって知ってはいたもののこの時、まだ十分に理解していなかったのです。そんな彼らをシメオンは祝福し、マリアにこのように言います。34節です。「御覧なさい。この子は、イスラエルの多くの人を倒したり立ち上がらせたりするためにと定められ、また、反対を受けるしるしとして定められています。―あなた自身も剣で心を刺し貫かれます―多くの人の心にある思いがあらわにされるためです。」(34-35節)
「倒したり立ち上がらせたり」というのは、イエスさまがこの世においては、ある人にとっては躓きであり、またある人にとっては救いとなるということです。イエスさまはすべての人の救い主ですが、私たち人間の側は、この方のことを救い主と認め、信じる人もいれば、そうでない人もいるのです。だから、「反対を受けるしるし」とも言われています。それが十字架です。私たち人間の罪がイエスさまを十字架にかけ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あなた自身も剣で心を刺し貫かれます」とありますように、マリアはその悲しみを味わうことになるのです。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そのことは大きな喜びでしたが、どのようにして、救い主は私たち人間の救いを行うのか、そのことがシメオンの口を通して語られているのです。
それから、聖書は救い主に出会ったもう一人の人のことを記しています。それがアンナという年老いた女性の預言者です。
アンナは、若いとき結婚し、七年後に夫と死別してから、ずっと神殿を離れず、断食したり祈ったりして、夜も昼も神さまに仕え、年齢が84歳になっていました。彼女の人生は決して幸福とは言えません。早くに夫を亡くし、生活することも大変だったでしょう。しかし、彼女は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預言者としての使命を果たし続けていました。その当時のパリサイ人は週2回断食をしておりましたが、彼女はパリサイ人でもなく神殿で奉仕するための女性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シメオンと同じく一般のユダヤ市民でした。
それでは、何のために彼女は断食をしていたのでしょうか。断食は、罪を悲しみ悔い改め、神さまの憐れみや助けを願い求めることです。聖書には記されていませんが、彼女もシメオンと同じ思いを持って、イスラエルが慰められることを祈っていたのでしょう。これが救い主イエスさまに出会う前の彼女の生き方でした。
しかし、救い主イエスさまを見た時に、彼女は神さまに感謝を献げたのです。彼女の感謝は、その後に彼女の行動に表れています。38節です。「近づいて来て神を賛美し、エルサレムの救いを待ち望んでいる人々皆に幼子のことを話した。」(38節)
イエスさまは「人の口からは、心にあふれていることが出て来るのである」(マタイ12:34)と言われましたが、アンナは神さまへの感謝を救いを待ち望んでいた人たちに語ったのです。
福音書には、人々が幼子らをイエスさまに触って頂くために連れてき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マタイ19:13-15, マルコ10:13-16, ルカ18:15-17) それは当時の人々の習慣を示しておりますが、両親は幼子を有名な祭司やラビに祝福して頂くために神殿に行ったのです。しかし、マリアとヨセフに連れられた幼子イエスさまはシメオンとアンナという無名の人に抱かれて祝福を受けたのです。シメオンとアンナだけが幼子イエスさまに救い主の本質を見ることができ、逆に救い主から祝福を受けたのです。
救い主イエスさまの本質を知り、主に出会うことができた人、主を抱くことができた人たちには共通する事があります。それは、当時の救い主を待ち望むことが出来ないような状況に決して流されなかった人たちであり、かつ自分の立場や生活を神さまに献げることができた人たちです。また、救い主を求める行動を起こしていた人たちです。その人だけが救い主を抱いています。
そして、救い主を抱いた人は喜びに溢れて、それを自分から外に向かって表しています。彼らは貧しい人、子どもに恵まれない人、住民登録される価値のない人たち、異邦人、伴侶に先立たれた人たち、老人でした。
私たちは救い主を求めるよりも、自分の置かれている状況や生活、身分や立場、自分に起こった不幸な事、貧しさ、年齢の方に目を向けます。これらのものはどうでも良いという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でも、そのような中で主なる神さまを第一に求め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自分が今いるところで主を求めないならば、私たちは自分の中に埋没し枯れていきます。置かれたところで、綺麗な花を咲かせて頂くためには、救い主を第一に求め続けることなのです。救い主を第一に求めるというのは、あなたの生涯を全て神さまに捧げることす。
【2021년 12월 26일 주일예배】
“구세주를 안고” 누가복음 2장 21~38절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후의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셉은 천사의 지시대로 아기에게 예수라고 이름 지어 할례를 베풀었습니다. 그리고 모세의 법대로 정결예식의 날이 찼을 때 예루살렘 성전에 가서 하나님께 아기를 바치는 예배를 드렸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부모는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것 같습니다만, “첫 태에 난 남자” 즉 장자는 하나님께 드려서 거룩히 구별을 받기 위하여 제사장 입회 하에 일 년 된 어린 양과 비둘기 한 마리를 바쳐야 합니다. 다만, 가난해서 그것을 바치기 어려울 때에는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도 허용되었습니다. 요셉 부부는 가난하기 때문에 산비둘기 한 마리나 집비둘기 두 마리를 바친 것입니다.
예루살렘 성전에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변변찮은 것밖에 바칠 수 없는 부부, 또 그런 마리아에게 안긴 예수님을 눈여겨 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런 중에 시므온이라는 노인이 있었습니다. 이 시므온에 대해서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25절입니다.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라”(25-26절)
시므온은 성전에서 봉사하는 제사장도 선지자도 아닙니다. 지극히 평범한 유대 시민이었습니다. 단지 그는 신앙에 깊이 빠져 있었고, 그 신앙은 개인적인 구원이 아니라 이스라엘 국가 전체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고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제사장은 아니지만 전 국민을 대표해서 기도하고 국가를 중재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의 신앙에 대해서 하나님께서는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계시를 성령을 통해 보여주셨습니다.
이 시므온이 성령의 인도를 받아 예루살렘 성전에 들어갔을 때에 아기 예수님을 발견했습니다. 이때 불가사의한 것이 잇달아 그에게 일어났습니다.
먼저 성령의 감동으로 구세주를 만난 것입니다. 또, 겉보기에는 보통 아기인 예수님을 보고 구세주라고 인식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 시점에서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고 있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시므온은 예수님께 구원을 보았던 것입니다.
게다가 가장 놀랄 만한 것은 구세주가 가져오는 구원 범위의 이해가 바뀐 것입니다. 29절을 보십시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나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29-32절)
여기에는 시므온이 예수님을 만나서 하나님을 칭찬하여 찬미한다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 시므온이 생각하는 구원의 범위는 “이스라엘의 위로”(25절) 라는 것이었습니다. 선민 유대인의 구원이었는데 그것이 여기에서는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31-32절)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그 구원은 만민(이방인과 이스라엘)에게 이른다는 고백으로 바뀌었습니다. 바로 성령께서 시므온에게 임하여 말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이 이 시므온의 하나님에 대한 찬미의 말이었던 것입니다.
시므온의 이 말을 듣고 요셉과 마리아는 깜짝 놀랐습니다. (33절) 요셉과 마리아는 자기들에게 주어진 아기가 구세주임을 천사의 계시로 알고 있었습니다만, 이때 아직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런 그들을 시므온은 축복하여 마리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34절입니다. “보라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34-35절)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라는 것은 예수님이 이 세상에서 어떤 이에게는 실족이 되고 또 어떤 이에게는 구원이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의 구세주이십니다만, 우리 인간은 이 분을 구세주라고 인정하고 믿는 사람도 있습니다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습니다. 그래서 “비방을 받는 표적”이라고도 합니다. 그것이 십자가입니다. 우리 인간의 죄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게 한 것입니다.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니” 라고 쓰여 있듯이 마리아는 그 슬픔을 맛보게 됩니다. 구세주가 태어나심 그것은 큰 기쁨이었습니다만, 어떻게 구세주가 우리 인간을 구원하시는지 그것이 시므온의 입을 통해서 말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경은 구세주를 만났던 또 다른 사람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것이 안나라는 나이든 여성 선지자입니다.
안나는 결혼한지 7년만에 남편과 사별하고 그 후, 줄곧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식하고 기도하며, 밤낮으로 하나님을 섬기어 나이가 84세가 되었습니다. 그녀의 인생은 결코 행복하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일찍이 남편을 잃었기에 생활도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선지자로서의 사명을 계속 완수하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바리새인들은 일주일에 두번 단식을 하고 있었습니다만, 그녀는 바리새인도 아니고 성전에서 봉사하기 위한 여성도 아니었습니다. 시므온과 마찬가지로 지극히 일반적인 유대 시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그녀는 금식을 하고 있었을까요? 금식은 죄를 슬퍼하고 회개하여 하나님의 자비와 도우심을 구하는 것입니다. 비록 성경에는 나와 있지 않지만, 그녀도 시므온과 같은 마음을 가지고 이스라엘이 위로 받기를 기도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것이 구세주 예수님을 만날 때까지의 그녀의 삶이었습니다.
그러나 구세주 예수님을 보았을 때 그녀는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그녀의 감사는 그 후 그녀의 행동에 나타나 있습니다. 38절입니다.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속량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그에 대하여 말하니라”(38절)
예수님께서 “이는 마음에 가득한 것을 입으로 말함이라”(마12:3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만, 안나는 하나님께 대한 감사를 구원을 대망하던 사람들에게 말한 것입니다.
복음서에는,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서 만져 주시기를 바라고 데려온 내용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19:13-15, 막10:13-16, 눅18:15-17) 그것은 당시의 습관을 나타내고 있습니다만, 부모는 어린 아이를 유명한 제사장이나 랍비의 축복을 받기위해 성전에 갔습니다. 그러나 마리아와 요셉에게 이끌린 아기 예수님께서는 시므온과 안나라는 무명의 사람에게 안겨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시므온과 안나만이 아기 예수님께 구세주의 본질을 볼 수 있었기에 오히려 반대로 그 둘이 구세주로부터 축복을 받은 것입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본질을 알고 주님을 만날 수 있었던 사람, 주님을 안을 수 있었던 사람들에게는 공통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당시의 구세주를 대망할 수 없는 상황에 결코 휩쓸리지 않았던 사람들이며 또한 자신의 입장이나 생활을 하나님께 바칠 수 있었던 사람들입니다. 또, 구세주를 찾는 행동을 한 사람들입니다. 그 사람들만이 구세주를 안고 있습니다.
그리고 구세주를 안았던 사람은 기쁨에 넘쳐 그것을 스스로 밖을 향해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들은 가난한 사람들, 아기를 낳지 못하는 사람들, 주민 등록이 될 가치도 없는 사람들, 이방인들, 배우자를 잃은 사람들, 노인들이었습니다.
우리는 구원을 구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상황이나 생활, 신분이나 입장, 자신에게 일어난 불행한 일, 가난함, 나이 쪽으로 관심을 가집니다. 이런 건 아무래도 좋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도 그런 가운데서 주님이신 하나님을 제일로 구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지금 처한 곳에서 주님을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기 속에 매몰되고 시들어 버릴 것입니다. 놓인 곳에서, 처한 곳에서 아름다운 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구원의 주님을 최우선으로 구하기를 계속 하는 것입니다. 구세주를 제일로 구한다는 것은 여러분의 생애를 모두 다 하나님께 바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