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 클라이맥스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채찍에 맞아 깊은 상처를 입으셨기에 그 몸으로는 도저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기 힘드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십자가를 지고서는 걷지 못하게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구레네 사람 시몬이 골고다까지 짊어졌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라고만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특징적인 기술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의사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의사로 십자가의 일이 진척되고 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고 십자가는 수난과 동시에 참되신 왕,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20~22절도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이 십자가 위에 붙인 패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다시 쓰라고 요청했습니다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며 거절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도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 “참되신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 이하에는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 나누었던 것이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쓰여 있는데, 그러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옷으로 제비 뽑는 장면은 구약 성경(시편 22편 19절)에 예언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일도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5~27절의 내용도 요한복음 밖에 없는 기술입니다. 25절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해서 여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남성인 “사랑하시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절) 그리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가족으로서 함께 생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장면은 마치 죽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자기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신 것 같이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여자여” 라고 어머니를 부르신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이 “여자여” 라는 부르심은 요한복음 2장에 있는 가나의 혼례의 장면에서도 나옵니다. 혼례 자리에서 포도주가 없어졌다고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전한 장면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는 냉담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원래 “여자여” 라는 말은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이며, 인간으로서,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말이 아닌 것입니다. 구세주로서 그 구원의 때, 즉 십자가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가나의 혼례 장면에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는 바로 예수님의 때가 온 장면입니다. 십자가의 때가 왔습니다. 바로 그 때, 다시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서 또 하나님으로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바로 십자가의 때, 예수님의 때에 새로운 가족 관계, 새 가족이 탄생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고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탄생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성령강림의 때라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줄 압니다만, 그 교회의 핵이 되는 “하나님의 가족”이 예수님 십자가의 그 결정적인 순간에 생겨난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활동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평상시라면 어느 교회라도 전도니 교제니 봉사니 해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교회가 그런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의의를 예수님의 대선교명령에 의거하는 선교라고 생각한다면,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지 못하는 요즘 교회는 그 존재 의의 그 자체가 크게 흔들려 버립니다. 그러나 선교가 바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인 활동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 있을 때 거기에 교회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관철될 때 그것은 동시에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가족은 무엇보다 십자가 곁에 모아진 가족입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화기 애애하더라도 거기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친해서 무엇이라도 얘기할 수 있는 즐거운 교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인간적인 친밀한 사이로만 그친다면 그건 하나님의 가족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은 가족은 오히려 말이 없어도 또 서로의 개인적인 것들을 전혀 몰라도 여전히 거기에 사랑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한복음에는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자주 나옵니다만, 이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여성의 제자들조차도 알아낼 수 있도록 쓰여 있는데 이 사람의 이름만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이 복음서를 쓴 요한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는 그리스도께 사랑받고 있는 자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습니까?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가리키셔서 “보라 네 어머니라”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머니 마리아라는 것은 어머니인 교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교회와 맺어진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것입니다. 거기에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가족이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리우는 우리들, 즉 다른 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께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수난이자 슬픔이면서도 거기서부터 참된 사랑의 교제가 시작된 하나님 사랑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어둠 속을 비추는 빛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랑받고 있는 제자로서 우리에게도 빛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설령 고독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어머니인 교회와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랑받고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기쁨 가운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 2021年 3月 2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
「神の家族の誕生」 ヨハネ 19章16~27節
今日の聖書箇所は、まさに「イエスさまの受難」のクライマックスである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る場面です。
イエスさまは自ら十字架を背負いゴルゴダへと向かわれました。しかし、イエスさまはすでに鞭打たれ、深い傷を負ったそのお体では、とても困難なものでありました。他の福音書には、十字架を担いで歩けなくなったイエスさまの代わりに、キレネ人のシモンという人がゴルゴダまで担いだ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
ただ、ヨハネによる福音書では「自ら十字架を背負い」とだけ記されています。これはヨハネによる福音書の特徴的な記述の一つでもありますが、それは、イエスさまがご自身の意思で十字架を背負われたということが強調されているのです。あくまでもイエスさまのご意思によって十字架の出来事が進んでいくことに重点が置かれており、十字架は受難であると同時に、まことの王、まことの神であるイエス・キリストの栄光への道のりでもあるのです。
また、20~22節も他の福音書にはない内容です。それは祭司長たちが十字架に掲げられた罪状書きを「ユダヤ人の王と自称した」と書き直して下さいと頼むのですが、ピラトは書いたままにしておけ、と拒絶したという内容です。これもヨハネによる福音書が強調していることで、イエスさまは「ユダヤ人の王」「まことの王」として、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ったということを示しているのです。
それから、23節以下には、兵士たちがイエスさまの衣服をはぎとって分け合っ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ここには、人間の醜悪な姿が記されておりますが、そのような人間の救いのために、イエスさまはすべての罪を背負い、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ったことが示されているのです。そして、この衣服のことでくじをひく場面は、旧約聖書(詩編22編19節)に預言されていたことであったと聖書は語っています。つまり、この出来事も神さまのご計画の内にあったということです。醜悪な人間の罪が行われている、その現実の中で、それでもなお、そこに神さまのご計画があり、神さまの御業が進んでいたということです。
それからまた、25~27節の内容もヨハネによる福音書にしかない記述です。まず、「イエスの十字架のそばには、その母と母の姉妹、クロバの妻マリアとマグダラのマリアとが立っていた」(25節)とあります。十字架の下にはイエスさまの母を含め女性の弟子たちがいたのです。そしてまた、男性である「愛する弟子」もいました。イエスさまは母に「婦人よ、御覧なさい。あなたの子です。」とおっしゃいました。そしてまた、愛する弟子に「見なさい、あなたの母です」とおっしゃいました。聖書には、「そのときから、この弟子はイエスの母を自分の家に引き取った」と記されています。これは、イエスさまの母と、愛する弟子が、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のち、家族として一緒に過ごしたということです。
ある意味、この場面は、死の間際に、イエスさまがご自分の母親のことをよろしく頼むと、愛する弟子に対して頼んでいるようにも読めます。しかし、そうすると、「婦人よ」という母への呼びかけが不自然です。この「婦人よ」という呼びかけは、ヨハネによる福音書2章のカナの婚礼の場面でも出てきます。婚礼の席でぶどう酒がなくなってしまったということを母マリアがイエスさまに伝えた場面です。それ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婦人よ、わたしとどんなかかわりがあるのです。わたしの時はまだ来ていません」という、実に冷たい返事をされました。そもそも「婦人よ」という言葉は、救い主であり、神さまであるイエスさまが語られている言葉であって、人間として、マリアの子としての言葉ではないのです。救い主として、その救いの時、つまり十字架の時はまだ来ていないのだと、カナの婚礼の場面ではおっしゃったことだったのです。
それが、今日の聖書箇所では、まさにイエスさまの時が来た場面です。十字架の時が来たのです。そのまさにその時、再びイエスさまは救い主として、また神さまとして、母マリアに語られたのです。「婦人よ、御覧なさい。あなたの子です。」まさに十字架の時、イエスさまの時に、新しい親子関係、新しい家族が誕生したことをイエスさまは告げられたのです。
教会の誕生は、イエスさまの復活と昇天の後、ペンテコステの時であることは、皆さんもよくご存じかと思いますが、その教会の核となる「神の家族」が、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その決定的な時に、生まれたのです。
今、教会の活動は自粛されています。普段はどこの教会も伝道だ、交わりだ、奉仕だと忙しく活動をしています。しかし、今は、多くの教会でそのような活動は休止しています。教会の意義をイエスさまの大宣教命令に基づく宣教にあると考えるならば、活発に宣教活動が出来ない今の教会というのは、その存在意義そのものが大きく揺れ動いてしまいます。しかし、宣教イコール様々な活動をす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実際的な活動はなくても、神の家族として立っている時、そこに教会はあるのです。神の家族としてのあり方が貫かれている時、それは同時に宣教になるのです。
そもそも神の家族は、何より、十字架のもとに集められた家族です。それを忘れてはなりません。どのように和気あいあいとしていても、そこで十字架が見上げられていなければそれは神の家族とは言えません。親しく何でも話せる楽しい交わりがあったとしても、それが単に人間的な親しさにとどまるのであれば、神の家族とは到底言えません。十字架を見あげ、キリストによって結ばれた家族は、むしろ、言葉はなくても、またお互いの個人的なことは一切知らなくても、なおそこに愛の結びつきがあるのです。
それにしても、ヨハネによる福音書には、この「愛する弟子」が度々登場しますが、この人の名前が記されていません。女性の弟子たちでさえ、特定出来るように語られてるいるのに、この人の名前だけはしるされないのです。伝統的には、この福音書を書いたヨハネと考えられておりますが、確かなことは分かりません。ただ、考えられますことは、この「愛する弟子」にはキリストに愛されている者すべての人を意味し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
宜しいでしょうか? この「愛する弟子」とは、まさに私たちのことでもあるのです。私たちが、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から母マリアを指し示されて「見なさい、あなたの母です」と告げられているとも言えるのです。ここで、母マリアというのは、母なる教会を表しております。その教会とつながる私たちはキリストの愛する弟子なのです。そこにまぎれもなく神の愛の家族が成り立っているのです。「愛する弟子」と呼ばれる私たち、つまり他でもない、私たち一人一人が、神の家族としてキリストに招かれているのです。
皆さん、十字架は受難であり、悲しみでありながらも、そこからまことの愛の交わりが生み出された神の愛の御業であったのです。暗闇の中に射す、光であったのです。
皆さん、今、愛されている弟子として私たちにも光が注がれております。私たち一人一人は、仮に孤独であっても、なお私たちは、母なる教会に結ばれています。そして私たちはキリストに愛されている者として、神の愛の家族の一員として喜びの内に歩むことが出来るのです。
【2021년 3월 28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 가족의 탄생” 요한복음 19장 16~27절
오늘의 성경 말씀은 바로 “예수님의 수난” 클라이맥스인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시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향하여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나 이미 채찍에 맞아 깊은 상처를 입으셨기에 그 몸으로는 도저히 십자가를 짊어지고 걷기 힘드셨습니다. 다른 복음서에는 십자가를 지고서는 걷지 못하게 되신 예수님을 대신하여 구레네 사람 시몬이 골고다까지 짊어졌다고 쓰여 있습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서는 “예수께서 자기의 십자가를 지시고” 라고만 쓰여 있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의 특징적인 기술의 하나이지만, 그것은 예수님 자신의 의사로 십자가를 지셨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끝까지 예수님의 의사로 십자가의 일이 진척되고 있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고 십자가는 수난과 동시에 참되신 왕, 참 하나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으로의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또 20~22절도 다른 복음서에는 없는 내용입니다. 그것은 제사장들이 십자가 위에 붙인 패를 “자칭 유대인의 왕”이라고 다시 쓰라고 요청했습니다만, 빌라도는 “내가 쓸 것을 썼다”라며 거절했다는 내용입니다. 이것도 요한복음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고, 예수님께서는 “유대인의 왕” “참되신 왕”으로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23절 이하에는 군인들이 예수님의 옷을 취하여 나누었던 것이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인간의 추악한 모습이 쓰여 있는데, 그러한 인간을 구원하기 위하여 예수님께서는 모든 죄를 지시고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옷으로 제비 뽑는 장면은 구약 성경(시편 22편 19절)에 예언된 것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 일도 하나님의 계획이었고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진행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5~27절의 내용도 요한복음 밖에 없는 기술입니다. 25절에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십자가 곁에는 예수님의 어머니를 포함해서 여자 제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또 남성인 “사랑하시는 제자”도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머니에게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나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26절) 그리고 사랑하시는 제자에게 “보라 네 어머니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어머니와 사랑하는 제자가 예수님의 십자가 후에 가족으로서 함께 생활하였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보면 이 장면은 마치 죽기 직전에 예수님께서 자기의 어머니를 사랑하는 제자에게 부탁하신 것 같이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면 “여자여” 라고 어머니를 부르신 것은 부자연스럽습니다. 이 “여자여” 라는 부르심은 요한복음 2장에 있는 가나의 혼례의 장면에서도 나옵니다. 혼례 자리에서 포도주가 없어졌다고 어머니 마리아가 예수님께 전한 장면입니다. 그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라는 냉담한 대답을 하셨습니다. 원래 “여자여” 라는 말은 구세주이시며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말이며, 인간으로서, 마리아의 아들로서의 말이 아닌 것입니다. 구세주로서 그 구원의 때, 즉 십자가의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고 가나의 혼례 장면에서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그것이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는 바로 예수님의 때가 온 장면입니다. 십자가의 때가 왔습니다. 바로 그 때, 다시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서 또 하나님으로서 어머니 마리아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바로 십자가의 때, 예수님의 때에 새로운 가족 관계, 새 가족이 탄생한 것을 예수님께서는 고하신 것입니다.
교회의 탄생은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 후, 성령강림의 때라는 것을 여러분도 잘 아실 줄 압니다만, 그 교회의 핵이 되는 “하나님의 가족”이 예수님 십자가의 그 결정적인 순간에 생겨난 것입니다.
지금, 교회의 활동은 제한되어 있습니다. 평상시라면 어느 교회라도 전도니 교제니 봉사니 해서 바쁘게 활동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요즘은 많은 교회가 그런 활동을 잠시 중단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의의를 예수님의 대선교명령에 의거하는 선교라고 생각한다면, 활발하게 선교 활동을 하지 못하는 요즘 교회는 그 존재 의의 그 자체가 크게 흔들려 버립니다. 그러나 선교가 바로 여러 가지 활동을 해야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실제적인 활동을 하지 못해도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서 있을 때 거기에 교회는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가족으로서의 올바른 자세가 관철될 때 그것은 동시에 선교가 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의 가족은 무엇보다 십자가 곁에 모아진 가족입니다. 그것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아무리 화기 애애하더라도 거기서 십자가를 바라보지 않는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가족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친해서 무엇이라도 얘기할 수 있는 즐거운 교제가 있더라도 그것이 단순히 인간적인 친밀한 사이로만 그친다면 그건 하나님의 가족이라고는 도저히 말할 수 없습니다. 십자가를 쳐다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맺은 가족은 오히려 말이 없어도 또 서로의 개인적인 것들을 전혀 몰라도 여전히 거기에 사랑의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요한복음에는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자주 나옵니다만, 이 사람의 이름이 쓰여 있지 않습니다. 여성의 제자들조차도 알아낼 수 있도록 쓰여 있는데 이 사람의 이름만은 쓰여 있지 않습니다. 전통적으로는 이 복음서를 쓴 요한이라고 생각되고 있습니다만 확실한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 “사랑하시는 제자”에게는 그리스도께 사랑받고 있는 자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좋습니까? 이 “사랑하시는 제자”가 바로 우리들이란 말입니다. 우리가 십자가의 주 예수님께서 어머니 마리아를 가리키셔서 “보라 네 어머니라” 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여기서 어머니 마리아라는 것은 어머니인 교회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 교회와 맺어진 우리들은 그리스도의 사랑하시는 제자인 것입니다. 거기에 틀림없이 하나님의 사랑의 가족이 성립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시는 제자”라고 불리우는 우리들, 즉 다른 게 아니라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하나님의 가족으로서 그리스도께 초대받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십자가는 수난이자 슬픔이면서도 거기서부터 참된 사랑의 교제가 시작된 하나님 사랑의 역사였던 것입니다. 어둠 속을 비추는 빛이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사랑받고 있는 제자로서 우리에게도 빛이 쏟아지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설령 고독하다 하더라도 여전히 우리는 어머니인 교회와 맺어져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리스도께 사랑받고 있는 자로서 하나님의 사랑의 가족의 일원으로서 기쁨 가운데 나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