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바울은 이 편지 첫부분 1절에서 간결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2~4절에서 복음을,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이며(2절), 당시 교회의 신앙 고백(3-4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5절) 라고 바울은 복음 선교의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이것은, 복음 선교 그 자체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어 순종한다”는 이 표현입니다. 신앙이란 실제로 따르는 것이지 사상과 같은 것이 아님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우리 죄인을 복종하는 자로 바꿉니다. 게다가 “모든 이방인”이 그 대상인데 누구 하나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서를 아무리 학문적으로 배우고 내용을 이해했다고 해도 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는 우리 죄인에게 신앙에 의한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노예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에 대한 한없는, 무상한, 압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순종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나 이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 이것이 로마서의 중심적인 사신입니다. 이 로마서는 순종과 사랑, 나와 하나님의 자녀, 이 두 가지의 면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로, 이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6절)
이것은 우리들을 말합니다. 우리야말로 이방인이자 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다음 8~15절에 쓰여 있는 이 로마서의 집필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그 목적의 하나로서 11절에서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렇게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신령한 은사”의“은사”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χάρισμα(카리스마)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카리스마성”이 있다거나 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는 그 말입니다. 그리고 이 카리스마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카리스마란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 카리스마를 성령으로 주어진 은혜로서 이 로마서에서도 또 고린도서에서도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는 카리스마란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매력이라든가 그런 인간적인 재능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할 때 그것이 그대로 카리스마입니다. 원래 카리스마에 우열 등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카리스마를 로마 교회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힘이 되고 싶다고 강하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니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3절)
실제로는 바울의 소원과 하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으로 이미 배운 것 처럼 바울의 계획과 하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바울의 계획이 산산히 부서져 갔습니다. 그러나 실로 바울의 소원과 하나님의 마음이 달랐기 때문에 이 로마서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방문의 동기와 목적을 14절에 쓰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4-15절)
바울은 “다 내가 빚진 자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여 있는 “빚”이라는 말은 금전상의 부채 즉 빚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속에도 나옵니다.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마18:24) 라고 예수님께서 쓰시는 “만 달란트의 빚”, 이 바로 이 빚입니다. 그리고 이 “만 달란트 빚진 자” 그것이 바울의 자기 이해였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전1: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란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부채를 많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빚을 탕감 받았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의 전도에 사명이 되고 열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여기서 바울이 “내가 빚진 자라” 라고 말하는 이 책임 혹은 이 빚이란 이미 그의 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빚의 내용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무엇으로 바뀌었느냐면, 그것은 죄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복음입니다. 모든 죄가 탕감 되었을 때 그에게 주어진 부채는 복음 선교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복음 선교가 새로운 빚으로서 바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죄를 탕감 받을 때 복음이 새로운 빚으로서 주어졌습니다. 복음 선교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빚입니다.
죄의 빚이 지불하는 보답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선교라는 빚으로 약속되는 보답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 정반대의 빚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실로 우리 죄인에게 주어진 빚은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복음 선교를 섬기는 그 역할은 다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어진 카
리스마에 따라 완수해야 할 빚이 있습니다. 말씀을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반주하는 사람, 찬미를 하는 사람, 헌금을 모아 관리하는 사람, 바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혹은 시련을 받고 인내하는 사람, 그 하나 하나가 카리스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 카리스마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빚입니다. 새로운 올 한 해, 조금씩 각자에 주어진 은사를 통해서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 갚아 나가고 싶습니다. 기뻐하면서 갚아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2022年1月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로마서) 18章 22, 35節
〇讃 頌 讃頌歌 200(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章 1~15節
〇説 教 「新たな責任(새로운 빚)」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16(1,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2年 1月 2日 主日礼拝説教】
「新しい責任」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 1章 1~15節
この新しい年、2022年は「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から教えられ、共に信仰を深め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
まず、パウロは、この手紙の冒頭、1節で簡潔に自己紹介をし、2~4節で福音を、それは神の約束の実現であり(2節)、当時の教会の信仰告白によって(3-4節)、言い表しています。
その上で、「その御名を広めてすべての異邦人を信仰による従順へと導くため」(5節)、とパウロの福音宣教の目的が語られます。
「その御名を広めて」、これは、福音宣教そのものであり、イエスさまの御名を地の果てまで宣教することです。さらにその実りが、「すべての異邦人を信仰による従順へと導くため」だと語っています。
ここで大切なのは、「信仰による従順」という、この表現です。信仰とは、実際に従うことであって、思想のようなものではないことが、ここで示されているのです。信仰は、必ず私たち罪人を服従する者へと変えるのです。しかも、「すべての異邦人」がその対象である、これに漏れる者は一人もいな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ですから、このローマ書をいかに学問的に学んで、内容を理解したとしても、主なる神さまに服従していないのなら、全く意味がないわけです。
このローマ書は、私たち罪人に信仰による従順を求める御言葉です。しかし、ただ神さまに服従しろ、と奴隷扱いするのではないのです。むしろ逆です。私たちに対する限りない、無償の、圧倒的な神の愛が示されているのです。服従にも勝る神さまの愛、そして、僕以上に神の子とされる恩恵、これがローマ書の中心的な使信です。このローマ書は、服従と愛、僕と神の子、この2つの面の紹介をもって始まっています。
では、この恩恵に、この福音に召された者とは誰のことでしょうか。それは他でもない私たちです。6節をご覧下さい。「この異邦人の中に、イエス・キリストのものとなるように召されたあなたがたもいるのです。」(6節)
これは私たちのことです。私たちこそが、異邦人であり罪人でありながら、神さまの愛と恵みによって召された者なのです。
それでは次に、8~15節に記されている、このローマ書の執筆動機と目的について見ていきたいと思います。
その目的の一つとして、11節で「 “霊”の賜物をいくらかでも分け与えて、力になりたいからです」(11節)と、このようにパウロは語ります。
この「“霊”の賜物」の、「賜物」という言葉は、ギリシア語でχάρισμα(カリスマ)という言葉です。今でも「カリスマ性」があるなどと、よく使われている、あのカリスマの元になった言葉です。そして、このカリスマの語源は、ギリシア語で神の恵みを表す「カリス」という言葉です。ですから、カリスマとは、「神の恵みとして与えられたもの」という意味です。
パウロは、このカリスマを聖霊によって与えられた恵みとして、このローマ書でも、またコリント書においても、繰り返し用いています。
ですから、パウロが語るカリスマとは、人を引き付けるような強い魅力とか、そのような人間的な才能とは全く違うのです。私たちが、毎週教会で与えられた働きをするとき、それがそのままカリスマなのです。そもそもカリスマに優劣などないのです。
パウロは、自分に与えられたカリスマをローマ教会の人々に分け与えて、力になりたいと強く願っておりました。しかし、それがなかなか叶わなかったのです。13節をご覧下さい。「兄弟たち、ぜひ知ってもらいたい。ほかの異邦人のところと同じく、あなたがたのところでも何か実りを得たいと望んで、何回もそちらに行こうと企てながら、今日まで妨げられているのです。」(13節)
実際には、パウロの願いと神さまの御心は違いました。使徒言行録ですでに学びましたように、パウロの計画と神の御心は一緒ではなかったのです。むしろ神の御心によってパウロの計画が、ことごとく砕かれていきました。しかし、実に、パウロの願いと神さまの御心が違ったがゆえに、このローマ書が生み出されたのです。
それから、パウロはローマ訪問の動機と目的を14節に記しています。「わたしは、ギリシア人にも未開の人にも、知恵のある人にもない人にも、果たすべき責任があります。それで、ローマにいるあなたがたにも、ぜひ福音を告げ知らせたいのです。」(14-15節)
パウロは、「果たすべき責任があります」と言っています。ここで使われている「責任」という言葉は、金銭上の負債、つまり借金をあらわす言葉です。この言葉は、イエスさまが語られた「仲間を許さない家来」のたとえの中に出て来ます。
「決済し始めたところ、一万タラントン借金している家来が、王の前に連れて来られた。」(マタイ18:24) ここでイエスさまが使われている「一万タラントンの借金」、この借金です。そして、この「一万タラントン借金している家来」、それがパウロの自己理解だったのです。パウロは自分のことを「罪人の中で最たる者」(Ⅰテモテ1:15)と言っています。この罪人の中で最たる者とは、他の誰よりも、最も負債を負っている者と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パウロは最も借金を抱えているこの自分が、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その借金を帳消しにされたことを、一瞬たりとも忘れなかったのです。そしてそれがパウロの伝道の使命となり、情熱となったのです。
つまり、ここでパウロが「果たすべき責任があります」という、この責任、或いは、この借金とは、もはや彼の罪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借金の内容が変わってしまったのです。
何に変わったのかと言いますと、それは、罪の正反対に位置する福音です。全ての罪が帳消しにされた時、彼に与えられた負債は福音宣教に変わったのです。福音宣教が、新しい負債としてパウロに与えられたのです。
そして、それは、私たちも同じなのです。私たちも罪を帳消しにされた時、福音が新しい負債として与えられたのです。福音宣教に仕える、これが私たちの負債なのです。
罪の負債が支払う報いは死でした、しかし、福音宣教という負債によって約束される報いは永遠の命です。死から命、正反対の負債が与えられのです。実に、私たち罪人に与えられた負債は永遠の命の道なのです。
そして、それぞれ、福音宣教に仕える役割は違います。お一人お一人が与えられたカリスマに応じて、果たすべき責任があるのです。御言葉を語る者、聞く者、奏楽に仕える者、賛美をする者、献金を集め管理する者、献げる者、祈る者、或いは、試練を与えられて忍耐をする者、その一つ一つがカリスマ、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恵み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には、神さまからの恵み、カリスマが与えられております。それは喜びの借金です。この新しい年、少しずつ、それぞれに与えられた賜物を通して、喜びをもって、神さまに返済して行きましょう。喜びながら返していくのです。そこには、永遠の命に至る報酬が待っております。
【2022년 1월 2일 주일예배】
“새로운 빚” 로마서 1장 1~15절
2022년 새해에는 “로마서”를 통해 배우면서 함께 신앙의 깊이를 더하고자 합니다.
먼저 바울은 이 편지 첫부분 1절에서 간결하게 자기 소개를 하고 2~4절에서 복음을, 그것은 하나님의 약속의 실현이며(2절), 당시 교회의 신앙 고백(3-4절)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이름을 위하여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하나니”(5절) 라고 바울은 복음 선교의 목적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이름을 위하여”, 이것은, 복음 선교 그 자체이며, 예수님의 이름을 땅 끝까지 선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결실이 “모든 이방인 중에서 믿어 순종하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믿어 순종한다”는 이 표현입니다. 신앙이란 실제로 따르는 것이지 사상과 같은 것이 아님을 여기서 보여주고 있습니다. 신앙은 반드시 우리 죄인을 복종하는 자로 바꿉니다. 게다가 “모든 이방인”이 그 대상인데 누구 하나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그러니까 이 로마서를 아무리 학문적으로 배우고 내용을 이해했다고 해도 주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전혀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이 로마서는 우리 죄인에게 신앙에 의한 순종을 요구하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단지 하나님께 순종하라고 노예 취급을 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우리에 대한 한없는, 무상한, 압도적인 하나님의 사랑이 제시되고 있습니다. 순종보다 더 하나님의 사랑, 그리고 나 이상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 이것이 로마서의 중심적인 사신입니다. 이 로마서는 순종과 사랑, 나와 하나님의 자녀, 이 두 가지의 면을 소개하는 것으로 시작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은혜로, 이 복음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이란 누구일까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우리들입니다. 6절을 보십시오. “너희도 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것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니라”(6절)
이것은 우리들을 말합니다. 우리야말로 이방인이자 죄인이면서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로 부르심을 받은 자입니다.
그러면 다음 8~15절에 쓰여 있는 이 로마서의 집필 동기와 목적에 대해서 보고자 합니다.
그 목적의 하나로서 11절에서 “어떤 신령한 은사를 너희에게 나누어 주어 너희를 견고하게 하려 함이니”, 이렇게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이 “신령한 은사”의“은사”라는 말은 그리스어로 χάρισμα(카리스마)라는 말입니다. 지금도 “카리스마성”이 있다거나 하는 표현으로 자주 쓰이는 그 말입니다. 그리고 이 카리스마의 어원은 그리스어로 하나님의 은혜를 나타내는 “카리스”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카리스마란 “하나님의 은혜로서 주어진 것”이라는 의미입니다.
바울은 이 카리스마를 성령으로 주어진 은혜로서 이 로마서에서도 또 고린도서에서도 반복해서 쓰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말하는 카리스마란 사람을 끌어당기는 강한 매력이라든가 그런 인간적인 재능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매주 교회에서 주어진 일을 할 때 그것이 그대로 카리스마입니다. 원래 카리스마에 우열 등은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에게 주어진 카리스마를 로마 교회의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서 힘이 되고 싶다고 강하게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좀처럼 실현되지 않았습니다. 13절을 보십시오. “형제들아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가고자 한 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니 니는 너희 중에서도 다른 이방인 중에서와 같이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로되 지금까지 길이 막혔도다”(13절)
실제로는 바울의 소원과 하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사도행전으로 이미 배운 것 처럼 바울의 계획과 하나님의 마음은 달랐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에 의해 바울의 계획이 산산히 부서져 갔습니다. 그러나 실로 바울의 소원과 하나님의 마음이 달랐기 때문에 이 로마서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로마 방문의 동기와 목적을 14절에 쓰고 있습니다. “헬라인이나 야만인이나 지혜 있는 자나 어리석은 자에게나 다 내가 빚진 자라 그러므로 나는 할 수 있는 대로 로마에 있는 너희에게도 복음 전하기를 원하노라”(14-15절)
바울은 “다 내가 빚진 자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쓰여 있는 “빚”이라는 말은 금전상의 부채 즉 빚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용서할 줄 모르는 종”의 비유 속에도 나옵니다.
“결산할 때에 만 달란트 빚진 자 하나를 데려오매”(마18:24) 라고 예수님께서 쓰시는 “만 달란트의 빚”, 이 바로 이 빚입니다. 그리고 이 “만 달란트 빚진 자” 그것이 바울의 자기 이해였습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디전1:15)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죄인 중에 내가 괴수란 다른 누구보다도 가장 부채를 많이 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가장 많은 빚을 지고 있는 자신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빚을 탕감 받았음을 한순간도 잊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바울의 전도에 사명이 되고 열정이 되었던 것입니다.
즉 여기서 바울이 “내가 빚진 자라” 라고 말하는 이 책임 혹은 이 빚이란 이미 그의 죄가 아닙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빚의 내용이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무엇으로 바뀌었느냐면, 그것은 죄의 정반대에 위치하는 복음입니다. 모든 죄가 탕감 되었을 때 그에게 주어진 부채는 복음 선교로 바뀌었던 것입니다. 복음 선교가 새로운 빚으로서 바울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죄를 탕감 받을 때 복음이 새로운 빚으로서 주어졌습니다. 복음 선교를 섬기는 것이 우리의 빚입니다.
죄의 빚이 지불하는 보답은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 선교라는 빚으로 약속되는 보답은 영원한 생명입니다. 죽음으로부터 생명, 정반대의 빚이 주어졌던 것입니다. 실로 우리 죄인에게 주어진 빚은 영원한 생명의 길입니다.
그리고 저마다 복음 선교를 섬기는 그 역할은 다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주어진 카
리스마에 따라 완수해야 할 빚이 있습니다. 말씀을 말하는 사람, 듣는 사람, 반주하는 사람, 찬미를 하는 사람, 헌금을 모아 관리하는 사람, 바치는 사람, 기도하는 사람, 혹은 시련을 받고 인내하는 사람, 그 하나 하나가 카리스마,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은혜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은혜, 카리스마가 주어져 있습니다. 그것은 기쁨의 빚입니다. 새로운 올 한 해, 조금씩 각자에 주어진 은사를 통해서 기쁨을 가지고 하나님께 갚아 나가고 싶습니다. 기뻐하면서 갚아 가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보상이 기다리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