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의 말씀은 이 로마서 전체의 주제이자, 또 동시에 결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절)
바울은 로마서의 주제로서 우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냐면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복음이라는 것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말합니다.(고전 15:2-5) 그러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기를 원했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고전 1:22)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다면 증거를 보여라, 그렇다면 믿어주겠다, 이것이 유대인의 주장이었습니다.
한편,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부활한 것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면 믿어 주겠다, 이것이 헬라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증거를 보여주면 믿는다,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믿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믿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 대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이 없는 이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이 세상은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라고 믿고, 거기에 아무것도 덧붙이기 없이 있는 그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고전1:24)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어디까지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구원 받는다라고, 이것이 복음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영어의 다이너마이트나 다이나믹의 어원이 된 그리스어로 듀나미스(δύναμις)라는 말입니다. 이 말 그대로 복음에는 압도적인 파괴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이나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조차 부숴버리고 믿게 해 버리는 힘이 복음에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거를 댈 필요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써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대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초조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주실까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이상 그것은 항상 다이나믹(역동적으로)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2000년 전의 이야기 즉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살아 숨쉬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작용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영원한 생명 속에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그대로 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 생활 방식을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기보다 오히려 주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모습과 겹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정말로 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 앞에 우리가 약하다든가 강하다든가 그런 것은 이미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이 약한 자를 강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앞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가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돌아가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고 다시 한번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여도 네번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몇 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회개하는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절)
여기에 “하나님의 의”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올바르심”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올바르심 앞에 죄인인 우리는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라고. 하박국 2장 4절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을 근거로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자는 그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살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에 선지자 하박국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듭하다가 그결과 멸망하고 바벨론 포수라는 괴로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백성들에게 새롭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 이외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올바르심이라는 것은 심판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계시되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이 하박국의 말씀을 율법 준수가 아니라 구원을 신앙으로만 받을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이 “신앙 의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을 믿음만으로라고 올바르게 해석하여도 어느새 그 신앙이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 되어 버립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죄인의 마음을 꺽고, 신앙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조차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입니다. 성경만, 신앙만, 그리고 은혜만,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고 믿고 이 분을 의지하면서 충실히 살기만 하면 됩니다. 복음이야말로 유대인을 비롯하여 헬라인에게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둔 배를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몹시 힘이 센 남자들이 열 명 아니 스무 명이 도전해도 1 톤짜리 배조차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물이 차오르고 배가 뜨면 어린 아이가 살짝 밀기만 해도 배는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힘, 재주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부디 은혜의 물을 보내 주시어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주님께 매달려 무거운 짐을 맡길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은 나의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도 유유히 배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세상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2022年1月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Ⅰコリント(고린도전서) 18章 22, 35節
〇讃 頌 讃頌歌 196(1, 3,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章 16~17節
〇説 教 「信仰によって生きる(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39(1,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2年 1月 9日 主日礼拝説教】
「信仰によって生きる」 ローマ書 1章 16~17節
今日、私たちが与えられたローマ書1章16節と17節の御言葉は、このローマ書全体のテーマであり、また同時に結論であるとも言える非常に重要な御言葉です。
まず、16節です。「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福音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信じる者すべてに救いをもたらす神の力だからです。」(16節)
パウロは、ローマ書の主題として、まず「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と宣言しております。なぜ、パウロがこのようなことを言っているのかと言いますと、パウロが宣べ伝える福音というのが、多くの人々にとっては、恥ずかしいものであると考えられていたからです。
そもそも福音というのは、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と復活のことです。(Ⅰコリント15:2-5) しかし、ユダヤ人はしるしを求め、ギリシア人は知恵を探しておりました。(Ⅰコリント1:22)
しるしを求めるというのは、「証拠を出せ」ということです。あのナザレのイエスが生き返ったのだったら証拠を見せろ、そうすれば信じてやる、これがユダヤ人の言い分であったのです。
一方、知恵を探すというのは、論理的な説明を要求したということです。あのナザレのイエスが復活したことについて論理的に説明ができたら信じてやる、これがギリシア人の言い分でありました。
しかし、証拠を見せれば信じる、或いは、論理的に説明出来たら信じるというのは、最初から信じたくないのです。信じたくないから、その代わりに、ユダヤ人はしるしを求め、ギリシア人は知恵を探すのです。これが、福音を信じない人々の姿です。信仰がない以上、それはどこまでも人間が中心ですから、人間の理性で説明できないものを、この世は恥ずかしいと思うのです。
しかしそれでもなお、パウロは「福音は、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ア人にも、信じる者すべてに救いをもたらす神の力」であると信じて、そこに何も付け加えることなくありのまま「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Ⅰコリント1:24)を宣べ伝えました。パウロが伝える福音というのは、あくまでも「十字架につけられたキリスト」でした。この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人は救われる、と。これが福音だと語ったのです。
この「神の力」という言葉は、英語のダイナマイトとか、ダイナミックの語源になったギリシア語でドューナミス(δύναμις)という言葉です。この言葉通り、福音には、圧倒的な破壊力があるのです。福音を拒む者、信じようとしない者さえ打ち砕いて、信じさせてしまう力が福音にはあるの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は、証拠を出す必要も、論理で説明する必要もないのです。大切なのは、聖書に書いてある通り、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をそのまま宣教することです。伝道で大切なのは、自分に何が出来るかと焦ることではなく、神さまが何をしてくださるか、と神さまの力を信じて祈ることです。
それから、福音が神さまの力である以上、それは常にダイナミックに働いているのです。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というのは、二千年前の話し、過去の話です。しかし、それは、過去の話ではなく、今私たちの中で躍動する現実であ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神さまの力が私たちに働き、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の、この神さまの赦しと愛と永遠の命の中に私たちは生かされる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中にキリストが生きているということであり、私たちがキリストと共に生き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ですから、福音を恥じるということは、そのままこの神の力を否定することになります。パウロは、「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というこの生き方を一歩も譲りませんでした。だから、行く先々で迫害されたのです。
私たちも同じはずです。「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これがキリスト者の生き方なのです。でも、実際、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というより、むしろ、主イエスさまを三度否認したペトロの姿と重なるではないのでしょうか。私たちは本当に弱い者です。
しかし、皆さん、神さまの力の前に、私たちが弱いとか強いとか、そのようなものはもはや問題ではないのです。この弱い者を強い者に変えてくれるのが神さまの力なのです。それが、信じる者すべてに救いをもたらす神の力です。
この神の力を前にして、私たちがなすべきことは、ただ一つ、悔い改めることです。悔い改めて、神の力に立ち返って、「わたしは福音を恥としない」、ともう一度やり直すことです。三度イエスさまを知らないと否認しても、四度目があるのです。これが悔い改めるということです。何度でもやり直せる、だから死の時まで悔い改める、それがキリスト教です。
それから、17節をご覧下さい。「福音には、神の義が啓示されていますが、それは、初めから終わりまで信仰を通して実現されるのです。『正しい者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17節)
ここに「神の義」とありますが、神の義を別な言葉で言い換えるならば、「神の正しさ」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の正しさの前に、罪人である私たちは裁かれます。裁かれないためにファリサイ派の人々は、モーセの律法を遵守することを強調しました。律法を守る、それが信仰である、と。ハバクク書2章4節の「神に従う人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という御言葉を根拠に、律法を守る正しい者は、その信仰のゆえ罪赦され生きることが出来ると主張したのです。
しかし、このハバクク書2章4節の御言葉は、エルサレムが、バビロンに滅ぼされる時に預言者ハバククに与えられた御言葉です。ユダヤ人たちが、律法を守らず偶像崇拝を繰り返していた結果滅ぼされ、バビロン捕囚という苦しみが与えられたのです。しかし、神さまは、律法を守れない民たちに、新たに信仰によって生きる道を示されたのです。それがこの御言葉です。それは神さまの憐れみ以外何ものでもありません。
神さまの正しさというのは、裁きだけではないのです。そこには赦しがあり、愛があるのです。それが福音に啓示されているとパウロは言います。パウロは、このハバクク書の御言葉を、律法遵守ではなくて、救いを信仰のみで受け取ることが出来ると理解したのです。これがユダヤ教との決定的な違いです。
これが「信仰義人」、信仰のみによって救われるということです。ただ、この場合も私たちは気をつ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正しい者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これを信仰のみと正しく解釈しても、いつのまにかその信仰が救われるための条件になってしまいます。決して、そうではないのです。人に信仰を与えるのは福音の力なのです。十字架の言葉は、罪人の心を砕き、信仰と永遠の命を与えるのです。信仰さえも人間の賜物ではなく、神さまからの授かりものな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罪人の救いは、最初から最後まで神さまの恩恵が全てなのです。聖書のみ、信仰のみ、そして恩恵のみ、これが私たちの信仰です。
皆さん、十字架で死なれたイエスさまが自分の救い主であると信じ、この方に頼りながら、忠実に生きさえすればよいのです。福音こそ、ユダヤ人をはじめギリシャ人にも、信じるすべての人にとって、救いを得させる神の力だからです。
地上においた船をどんなに動かそうとしても、動かすことはできません。屈強な男たちが十人か二十人かかっても、1トンの船さえ動かすのは容易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しかし潮が満ちて船が浮くと、幼子がちょっと押しただけでも動くようになります。神さまが御業を行われる方法とは、まさにこのようなものです。自分の力、才覚でやろうとするのではなく、「神さま、どうぞ恵みの水を送ってください。そしてこの困難を乗り越えさせてください」と主にしがみついて、重荷をゆだねるとき、私たちの取るに足らない力でも悠々と船を動かすことができる、驚くべき不思議に人生が転回し始めるのです。
「正しい者は信仰によって生きる。」皆さんも、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そのような世界を生きることができますようにお祈りいたします。
【2022년 1월 9일 주일예배】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6~17절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로마서 1장 16절과 17절의 말씀은 이 로마서 전체의 주제이자, 또 동시에 결론이라고도 말할 수 있는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16절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16절)
바울은 로마서의 주제로서 우선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왜 바울이 이런 말을 하냐면 바울이 전파하는 복음이라는 것이 많은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부끄러운 것이라고 생각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원래 복음이라는 것은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말합니다.(고전 15:2-5) 그러나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기를 원했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고 있었습니다.(고전 1:22)
표적을 구한다는 것은 증거를 대라는 것입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부활했다면 증거를 보여라, 그렇다면 믿어주겠다, 이것이 유대인의 주장이었습니다.
한편, 지혜를 찾는다는 것은 논리적인 설명을 요구했다는 것입니다. 그 나사렛 예수가 부활한 것에 대해서 논리적으로 설명을 할 수 있다면 믿어 주겠다, 이것이 헬라인의 주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증거를 보여주면 믿는다, 혹은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으면 믿는다는 것은 처음부터 믿고 싶지 않다는 것입니다. 믿고 싶지 않기 때문에 그 대신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믿지 않는 사람들의 모습입니다. 신앙이 없는 이상,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이 중심이기 때문에 인간의 이성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이 세상은 부끄럽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라고 믿고, 거기에 아무것도 덧붙이기 없이 있는 그대로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전파했습니다. (고전1:24) 바울이 전하는 복음은 어디까지나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였습니다. 이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사람은 구원 받는다라고, 이것이 복음이라고 이야기한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말은 영어의 다이너마이트나 다이나믹의 어원이 된 그리스어로 듀나미스(δύναμις)라는 말입니다. 이 말 그대로 복음에는 압도적인 파괴력이 있습니다. 복음을 거절하는 사람이나 믿으려고 하지 않는 사람조차 부숴버리고 믿게 해 버리는 힘이 복음에는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증거를 댈 필요도 논리적으로 설명할 필요도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써 있는 대로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그대로 선교하는 것입니다. 전도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초조해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무엇을 해주실까하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이 하나님의 능력인 이상 그것은 항상 다이나믹(역동적으로)하게 작용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2000년 전의 이야기 즉 과거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라 지금 우리 안에서 살아 숨쉬는 현실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능력이 우리에게 작용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과 영원한 생명 속에 우리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이며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을 부끄러워한다는 것은 그대로 이 하나님의 능력을 부정하는 것이 됩니다. 바울은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이 생활 방식을 한치도 양보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은 것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생활 방식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우리는 어떻습니까?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기보다 오히려 주 예수님을 세번 부인한 베드로의 모습과 겹치고 있지는 않을까요? 우리는 정말로 약한 자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능력 앞에 우리가 약하다든가 강하다든가 그런 것은 이미 아무 문제도 아닙니다. 이 약한 자를 강한 사람으로 바꾸어 주는 것이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것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이 하나님의 능력을 앞두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오직 한가지 회개하는 것입니다. 회개하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돌아가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라고 다시 한번 시작하는 것입니다. 세번 예수님을 모른다고 부인하여도 네번째가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회개한다는 것입니다. 몇 번이라도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죽을 때까지 회개하는 그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리고 17절을 보십시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17절)
여기에 “하나님의 의” 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의란 “하나님의 올바르심”이라고 바꾸어 말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올바르심 앞에 죄인인 우리는 심판을 받습니다. 심판을 받지 않기 위해서 바리새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준수할 것을 강조했습니다. 율법을 지킨다, 그것이 바로 신앙이다, 라고. 하박국 2장 4절의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라는 말씀을 근거로 율법을 지키는 올바른 자는 그 믿음으로 죄사함을 받고 살 수 있다고 주장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하박국 2장 4절의 말씀은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멸망시킬 때에 선지자 하박국에 주어진 말씀입니다.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지 않고 우상 숭배를 거듭하다가 그결과 멸망하고 바벨론 포수라는 괴로움이 주어졌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지킬 수 없는 백성들에게 새롭게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길을 가르쳐 주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 말씀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자비 이외 아무것도 아닙니다.
하나님의 올바르심이라는 것은 심판뿐만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용서가 있고 사랑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복음에 계시되어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이 하박국의 말씀을 율법 준수가 아니라 구원을 신앙으로만 받을 수 있다고 이해했습니다. 이것이 유대교와의 결정적인 차이입니다.
이것이 “신앙 의인”,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받는다는 것입니다. 다만, 이 경우도 우리는 조심해야 합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것을 믿음만으로라고 올바르게 해석하여도 어느새 그 신앙이 구원받기 위한 조건이 되어 버립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에게 믿음을 주는 것은 복음의 능력입니다. 십자가의 말씀은 죄인의 마음을 꺽고, 신앙과 영원한 생명을 주는 것입니다. 신앙조차 인간의 힘으로 할 수 있는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내려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죄인의 구원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전부입니다. 성경만, 신앙만, 그리고 은혜만, 이것이 우리의 신앙입니다.
여러분,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예수님이 나의 구세주라고 믿고 이 분을 의지하면서 충실히 살기만 하면 됩니다. 복음이야말로 유대인을 비롯하여 헬라인에게도 믿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얻게 하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입니다.
지상에 둔 배를 아무리 움직이려고 해도 움직일 수가 없습니다. 몹시 힘이 센 남자들이 열 명 아니 스무 명이 도전해도 1 톤짜리 배조차 움직이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밀물이 차오르고 배가 뜨면 어린 아이가 살짝 밀기만 해도 배는 움직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역사하시는 방법이란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이나 힘, 재주로 하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 부디 은혜의 물을 보내 주시어 헤쳐 나갈 수 있게 해 주시옵소서” 라고 주님께 매달려 무거운 짐을 맡길 때, 비로소 우리 인생은 나의 보잘것없는 능력으로도 유유히 배를 움직일 수 있는 그런 놀랍고도 신기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할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여러분도,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그러한 세상을 살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