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의 성경 말씀(1장 18~23절)에서는 우상 숭배의 죄가 지적되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그 우상 숭배가 가져온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창조주를 칭송하고 찬미해야 하는데, 당치 않게도 그 창조주가 만든 것을 찬미하고 예배까지 드리게 되는 것이 우상 숭배의 정체이고, 여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예배 대상을 바꿔치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 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잃어버리고(26-27절), 지혜가 무가치한 것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28절) 그 어리석은 행위로부터 야기되는 죄의 리스트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30-31절)
그러나 이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놀랄 만한 두 가지의 어리석음으로 화답해 주셨습니다.
첫번째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위조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있을 수 없는 어리석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위조한 인간에게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화답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지상에 오신 것입니다. 놀랄 만한 어리석음, 이렇게 어리석은 행위가 어디에 또 있을까요? 영원하시며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이 멸망해야 하는 비참한 육체를 취하고 지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화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큰 야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 이상으로 더 큰 어리석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두번째의 어리석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뒤집혀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는 성서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내버린다” 혹은 “내버려 둔다” 고 번역된 말이 키워드로서 세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24절) 라고 있는 “내버려 두사”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26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26절) 라고 쓰여 있는 “내버려 두셨으니”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28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28절) 라고 있는 “내버려 두사”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 라는 말로 이 단어가 가진 의미는 어떤 누군가의 지배 세력 안에 내버려두다. 그 세력 안에 처박아 버리다. 그 영향력 안으로 건네주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마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사람들의 세력에 팔아 넘겼듯이, 또한 주님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 죽음의 세력에 내버려 두었듯이 말입니다. 그냥 방치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오히려 자기가 원하는 신들을 마음대로 만들어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자유롭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거나 마음대로 하라”고 하실 때, 그것은 그 사람을 심판에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선택한 것의 결과로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업자득이라는 것입니다. 내어 쫓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들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죄인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선택한 것의 결과가 나쁘면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내가 나쁜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이것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결국은 남 탓을 하거나 또 하나님 탓으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죄로부터 피할 수 없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최종적인 심판을 인간에게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으로 향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랄 만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좀전의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 라는 말은 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향하는 장면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말입니다. 특히 그 장면을 그린 마태복음 26장은 이 말로 시작하여 이 말로 끝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마 26:2)
이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이 “팔리리라” 라는 말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15절, 21절, 23절, 24절, 25절에도 이 말이 사용됩니다. (“넘겨 준다”고 번역되고 있는 말도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6장 45절의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라는 “팔리느니라”와 46절의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라는 “파는 자”도 모두 “파라디도미” 라는 말입니다. “파라디도미”의 온 퍼레이드입니다. 측근 중의 측근인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의 배반으로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내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파라디도미”, 내버린다고 번역되는 말은 주님이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십자가의 구원이 실현되어 갈 때에 사용되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즉 오늘의 성경 말씀 28절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까지 세번이나 반복되는 “파라디도미” 이 내버려두사라는 말 위에는 십자가가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골고다 언덕의 전체상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우리의 죄가 탕감되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에는 십자가가 서 있었을 뿐일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억울한 심정으로 넘겨진 죄인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실로 이것이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풍경이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인간의 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었던 분과, 십자가 아래에 모여 조소하고 있었던 자들의 콘트라스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이 모두 다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그 죄인의 수만큼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형에 처해진 자는 가장 처해져서는 안 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서 죄인인 우리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형수의 죄인이 무죄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십자가 아래에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거기에 있습니다. 여전히 죄를 범하지 않고는 우리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방치된 내 마음대로의 내버려진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평화와 참 자유 안에 살고 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녹아 있음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이상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문제가 아닙니다. 죄인이 구원받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바라보고, 혹여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합당치 않은 자유를 누리고 있지는 않는지 회개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유 안에서 살게 될 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
2022年1月2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Ⅰヨハネ(요한 1 서) 1章 7節
〇讃 頌 讃頌歌 259(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章 24~32節
〇説 教 「十字架の下で(십자가 아래에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51(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月 23日 主日礼拝説教】
「十字架の下で」 ローマ書 1章 24~32節
先週の御言葉(1章18~23節)では、偶像崇拝の罪が指摘されていました。今日の御言葉は、その偶像崇拝がもたらす人間の愚かな行為について語っております。
本来は創り主をほめたたえ、賛美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に、あろうことか創り主に創られたものを賛美し、礼拝までささげる始末、これが偶像崇拝の正体であり、ここに人間の愚かさがあるのです。物事が反対にな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神の真理を偽りに替え」(25節)、「造り主の代わりに造られた物を拝んでこれに仕えた」(25節)という人間の愚かな行為が生まれるのです。さらに男女の自然の関係が失われ(26-27節)、知恵が無価値なものへと変わってしまいます(28節)。その愚かな行為から引き起こされる罪のリストがここに示されています(30-31節)。
しかし、実にこの人間の愚かな行為に対して、神さまは驚くべき二つの愚かさによって回答してくださいました。
まず一つ目、偶像崇拝の愚かさに対して、永遠の神の御子がこの世に来られたのです。
神さまは神さまのかたちに人間を創られました。しかし、人間は、人間のかたちに神さまを偽造したのです、これが偶像崇拝の愚かな行為でした。ところが、それ以上にありえない愚かさがあるのです。それがイエスキリストです。
神さまは、神さまのかたちに人間を創られたのに、人間のかたちに神さまを偽造した人間に対して、最終的に神さまはどのように回答したでしょうか。実に、神さまが人間のかたちになって地上に来られたのです。驚くべき愚かさ、これほど愚かな行為が他にあるでしょうか。永遠であり栄光の神の子が、滅ぶべき惨めな肉体をとって地上に来られたのです。そして、これが憎むべき偶像崇拝に対する神さまの回答なのです。神さまは人間の罪に愛をもって答えてくださったのです。そこには神さまの私たちに対する大きな皮肉があるように思います。
しかし、実は、それ以上に大きな愚かさがあったのです。それが二つ目の愚かさです。
それが何かと言いますと、イエス・キリストが十字架で死なれたという愚かさです。これは、世界がひっくり返ってもあってはならないことでした。
今日の御言葉では、聖書的にも非常に大切である「まかせる」或いは「委ねる」、「引き渡す」、と訳されている言葉がキーワードとして3度使われています。まず、24節に「そこで神は、彼らが心の欲望によって不潔なことをするにまかせられ(24節)」とあります「まかせられ」という言葉です。そして、26節に「神は彼らを恥ずべき情欲にまかせられました(26節)」とあります「まかせる」、という言葉です。それから、28節に「神は彼らを無価値な思いに渡され(28節)」とあります「渡され」という言葉です。これらの言葉は、ギリシャ語で「パラディドミー」(παραδίδωμι)という言葉で、本来、「見放す」とか「見捨てる」という意味を持ちます。
神さまは、偶像崇拝に陥り、様々な罪を犯す人間を放って置かれたとか、好きにさせたとか言うのではなく、見捨てたと言うことなのです。神さまが、「なんでも好きにしなさい」と言う時、それはその人を裁きに委ねた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罪人は自分が選んだことの結果として裁かれるしかありません。自業自得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しかし、罪人は、アダムとエバがそうしたように、自分が選んだことの結果が悪いとなれば、他の人のせいにします。「私が悪いわけではない。あの人がこれをしなければ、私はこの道を選ばなかったのだ」と言って、結局は、人のせいにしたり、また、神さまのせいにしようとします。私たちはこの罪から逃れることが出来ず、最終的には神さまに裁かれしかないものです。しかし、神さまはその最終的な裁きを人間に向けるのではなく、御自身の独り子イエスさまに向けられたのです。これは驚くべき愚かな行為です。
先程の「パラディドミー」(παραδίδωμι)という言葉は、実は、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向かう場面で何度も繰り返されている言葉なのです。特に、その場面を描くマタイによる福音書の26章はこの言葉で始まりこの言葉で終わります。
「あなたがたも知っているとおり、二日後は過越祭である。人の子は、十字架につけられるために引き渡される。」(マタイ26:2)
この「人の子は、十字架につけられるために引き渡される」、この引き渡す、という言葉です。さらにマタイによる福音書26章15節、21節、23節、24節、25節でもこの言葉が使われます。(「裏切る」と訳されている言葉も「パラディドミー」(παραδίδωμι)です。そして、最後に26章45節の「人の子は罪人たちの手に引き渡される」という、「この引き渡される」や、46節の「立て、行こう。見よ、わたしを裏切る者が来た」という「裏切る者」も、すべて「パラディドミー」という言葉です。「パラディドミー」のオンパレードなのです。側近中の側近であります12弟子の一人ユダの、しかも接吻を合図にする裏切りという転倒が用いられて主イエスが十字架に引き渡されるのです。
ですから、この「パラディドミー」、引き渡すと訳される言葉は、主なる神さまのご計画の中で十字架の救いが実現していく時に使われる極めて大切な言葉なのです。
つまり、本日の28節の「神は彼らを無価値な思いに渡され」までで3度繰り返される「パラディドミー」この引き渡すという言葉の上には十字架が立っているのです。
「神は彼らを無価値な思いに渡された」、しかし、同時に神さまはキリストを十字架に引き渡されたのです。そして、これが、あのゴルゴダの丘の全体像なのです
福音は、キリストの十字架そのものです。神の御子がゴルゴダの丘で、十字架で殺され、私たちの罪が帳消しにされた、これが福音です。しかし、ゴルゴダの丘には十字架がたっていただけでしょうか。いいえ、そこには多くの野次馬や見物人が押し寄せていました。無価値な思いに渡された、罪人がそこに群がっていたのです。
29節、「あらゆる不義、悪、むさぼり、悪意に満ち、ねたみ、殺意、不和、欺き、邪念にあふれ、陰口を言い、人をそしり、神を憎み、人を侮り、高慢であり、大言を吐き、悪事をたくらみ、親に逆らい、無知、不誠実、無情、無慈悲です。」(29~31節)
実に、これが十字架の下にあった風景でありました。十字架の下には、人間の罪が渦巻いていたのです。
福音とは、十字架の上で死の苦しみにあえいでいた方と、十字架の下に群がって嘲笑っていた者、このコントラストなのです。そしてこれこそが転倒なのです。本来ならば、彼らが全員磔にされなければなりませんでした。その罪人の数だけ十字架が必要であったのです。磔にされたのは、最も磔にされてはならない神の御子でした。この転倒によって、驚くべき逆転が起こり、私たち罪人は救われたのです。死刑のはずの罪人が無罪になったのです。
私たちもこの十字架の下におりました。いいえ、今もそこにおります。相変わらず、罪を犯さずには、生きることさえできないからです。
しかし、十字架の下にいる以上、十字架の主を仰ぐことは出来ます。そして、これが福音なのです。私たちは死ぬまで罪人である、しかし、それはもはや問題ではない。罪人が救われるから福音なのです。十字架の下から、私たちの罪のために引き渡されたイエスさまを救い主と仰ぎ、悔い改めて、主なる神さまの驚くべき転倒によって生かされる時、私たちはすでに、永遠の命に歩み始めているのです。
【2022년 1월 23일 주일예배】
“십자가 아래에서” 로마서 1장 24~32절
지난 주의 성경 말씀(1장 18~23절)에서는 우상 숭배의 죄가 지적되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은 그 우상 숭배가 가져온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원래는 창조주를 칭송하고 찬미해야 하는데, 당치 않게도 그 창조주가 만든 것을 찬미하고 예배까지 드리게 되는 것이 우상 숭배의 정체이고, 여기에 인간의 어리석음이 있는 것입니다. 즉 인간이 예배 대상을 바꿔치기 했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25절) 는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남녀의 자연스러운 관계를 잃어버리고(26-27절), 지혜가 무가치한 것으로 바뀌어 버립니다. (28절) 그 어리석은 행위로부터 야기되는 죄의 리스트가 여기에 나와 있습니다. (30-31절)
그러나 이 인간의 어리석은 행위에 대해 하나님께서는 놀랄 만한 두 가지의 어리석음으로 화답해 주셨습니다.
첫번째는 우상 숭배의 어리석음에 대해서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위조한 것입니다. 이것이 우상 숭배의 어리석은 행위였습니다. 그런데 그 이상으로 있을 수 없는 어리석음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하셨는데, 인간의 형상대로 하나님을 위조한 인간에게 최종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화답하셨을까요? 그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의 형상으로 지상에 오신 것입니다. 놀랄 만한 어리석음, 이렇게 어리석은 행위가 어디에 또 있을까요? 영원하시며 영광의 하나님의 아들이 멸망해야 하는 비참한 육체를 취하고 지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가증스러운 우상 숭배에 대한 하나님의 화답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하여 사랑을 가지고 대답해 주셨습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우리에 대한 큰 야유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실은 그 이상으로 더 큰 어리석음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두번째의 어리석음입니다.
그것이 무엇이냐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다는 어리석음입니다. 이것은 세상이 뒤집혀도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는 성서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내버린다” 혹은 “내버려 둔다” 고 번역된 말이 키워드로서 세번이나 사용되고 있습니다. 24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버려 두사”(24절) 라고 있는 “내버려 두사”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26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부끄러운 욕심에 내버려 두셨으니”(26절) 라고 쓰여 있는 “내버려 두셨으니” 라는 말입니다. 그리고 28절에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사”(28절) 라고 있는 “내버려 두사” 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그리스어로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 라는 말로 이 단어가 가진 의미는 어떤 누군가의 지배 세력 안에 내버려두다. 그 세력 안에 처박아 버리다. 그 영향력 안으로 건네주다라는 뜻을 가진 말입니다. 마치 가롯 유다가 예수님을 유대 사람들의 세력에 팔아 넘겼듯이, 또한 주님이 독생자 예수를 십자가 죽음의 세력에 내버려 두었듯이 말입니다. 그냥 방치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자유롭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인간은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습니다.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을 수도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저버리고 오히려 자기가 원하는 신들을 마음대로 만들어 숭배하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것은 우리가 마음대로 자유롭다는 그 자체가 하나님의 진노인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무거나 마음대로 하라”고 하실 때, 그것은 그 사람을 심판에 맡기셨다는 것입니다. 죄인은 자기가 선택한 것의 결과로서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자업자득이라는 것입니다. 내어 쫓긴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바로 인간 자신들인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죄인은 아담과 하와가 그랬던 것처럼 자기가 선택한 것의 결과가 나쁘면 다른 사람의 탓으로 돌립니다. 내가 나쁜 게 아니다. 그 사람이 이것을 하지 않았다면 나는 이 길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며 결국은 남 탓을 하거나 또 하나님 탓으로 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이 죄로부터 피할 수 없고 최종적으로는 하나님께 심판 받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 최종적인 심판을 인간에게 돌리는 게 아니라 자신의 독생자 예수님으로 향하셨습니다. 이것은 놀랄 만한 어리석은 행위입니다.
좀전의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 라는 말은 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향하는 장면에서 몇 번이나 반복되고 있는 말입니다. 특히 그 장면을 그린 마태복음 26장은 이 말로 시작하여 이 말로 끝납니다.
“너희가 아는 바와 같이 이틀이 지나면 유월절이라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마 26:2)
이 “인자가 십자가에 못 박히기 위하여 팔리리라”, 이 “팔리리라” 라는 말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6장 15절, 21절, 23절, 24절, 25절에도 이 말이 사용됩니다. (“넘겨 준다”고 번역되고 있는 말도 “파라디도미”(παραδίδωμι)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26장 45절의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라는 “팔리느니라”와 46절의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 라는 “파는 자”도 모두 “파라디도미” 라는 말입니다. “파라디도미”의 온 퍼레이드입니다. 측근 중의 측근인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의 배반으로 주 예수께서 십자가에 내버려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 “파라디도미”, 내버린다고 번역되는 말은 주님이신 하나님의 계획 안에서 십자가의 구원이 실현되어 갈 때에 사용되는 아주 중요한 말입니다.
즉 오늘의 성경 말씀 28절의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사”까지 세번이나 반복되는 “파라디도미” 이 내버려두사라는 말 위에는 십자가가 서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 두셨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내버리신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그 골고다 언덕의 전체상입니다.
복음은 그리스도의 십자가 그 자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우리의 죄가 탕감되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그러나 골고다 언덕에는 십자가가 서 있었을 뿐일까요? 아닙니다. 거기에는 많은 구경꾼들이 몰려와 있었습니다. 억울한 심정으로 넘겨진 죄인들이 거기에 모여 있었습니다.
29절,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께서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로마서1: 29~31절)
실로 이것이 십자가 아래에 있었던 풍경이었습니다. 십자가 아래에는 인간의 죄가 소용돌이치고 있었습니다.
복음이란, 십자가 위에서 죽음의 괴로움에 허덕이고 있었던 분과, 십자가 아래에 모여 조소하고 있었던 자들의 콘트라스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아이러니입니다. 원래대로라면 이들이 모두 다 십자가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그 죄인의 수만큼 십자가가 있어야 했던 것입니다. 형에 처해진 자는 가장 처해져서는 안 될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반전이 일어나서 죄인인 우리는 구원받은 것입니다. 사형수의 죄인이 무죄가 된 것입니다.
우리도 이 십자가 아래에 있었습니다. 아니, 지금도 거기에 있습니다. 여전히 죄를 범하지 않고는 우리는 살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방치된 내 마음대로의 내버려진 자유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르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참 평화와 참 자유 안에 살고 있고, 거기에는 하나님의 섭리가 녹아 있음을 명심해야만 합니다.
십자가 아래에 있는 이상 우리는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볼 수는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복음인 것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까지 죄인입니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문제가 아닙니다. 죄인이 구원받기 때문에 복음인 것입니다. 십자가 밑에서 예수님을 구세주로 바라보고, 혹여 순리를 역리로 바꾸는 합당치 않은 자유를 누리고 있지는 않는지 회개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자유 안에서 살게 될 때, 우리는 이미 영원한 생명을 향해 나아가기 시작하고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