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례와 율법, 이것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함께 읽었듯이 바울은 표면상의 유대인, 즉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는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또 몸에 베풀어진 할례가 할례인 것이 아니며 내면의 마음에 베풀어진 할례야말로 진정한 할례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특별히 택함을 받은 유대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대해서 바울은 이 3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절)
바울은 유대인의 나은 점으로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것을 꼽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은 구약 성서의 아브라함 시대부터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특별한 존재 의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점에 있어서 유대인은 뛰어납니다. 확실히 유대인들은 그 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본질적으로는 순종하지 않고 외관만 순종하는 척하면서 그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다는 것은 있습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그 말씀을 이끌어 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존재의 근간에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점에 있어서 유대인은 우수하다고 바울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3-4절) 라고 바울은 하나님의 미쁘심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놓인 유대인의 우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자인데 누가 봐도 죄인이며 옳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경우도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는 믿을 수 없고, 또 그런 사람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언제나 올바르게 걸어왔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든 또, 우리들이든 참으로 불성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불성실하다고 생각되지 않도록 신앙자는 모두 다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교회는 정신 차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라는 것을 생각할 때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온 인간이 지금으로 말하면 주 예수님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무리 불성실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절에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51편 6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유부녀의 밧세바와 범한 죄를 배경으로 한 회개의 시입니다. 다윗은 인간이 어디까지나 죄많으나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옳으시다고 고백하고 인간의 죄의 어둠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의 빛은 빛나고 있다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또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5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5절)
즉 인간은 불의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한다면 인간이 불의하다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논리입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7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7절)
이것도 또 인간의 논법, 이른바 핑계입니다. 핑계만 대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사랑의 실천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바울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니어도 누가 들어도 하나님께 영광이 나타나도록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기만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핑계를 대는 것은 원래 인간의 성질이며 그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신실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가 불성실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신실하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인간은 내 형편에 맞는 신실하심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올바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분노를 발하는 신실하심이며 심판 때에 엄격하게 심판을 하시는 신실하심입니다. 그 신실하심은 누구에게도 평등합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신실하심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은 어떻게든 그 평등한 심판으로부터 핑계를 대서 피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 평등하심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인간의 죄, 연약함, 오만 방자함을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가 밝혀졌을 뿐이라면 오늘의 말씀은 복음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죄가 밝혀졌어도 여전히 오늘의 성경 말씀이 복음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정직히 죄의 모습으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핑계를 대고 억지를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억지를 부려 자신의 불성실함을 숨기고 싶지만,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더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음미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순수한 마음으로 서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 앞에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내미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진정한 비참함, 죄의 모습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그 진정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설 때,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용서될 것입니다. 본래는 도저히 갈 수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는 인도될 것입니다. 아멘.
2022年2月2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51編 6(4), 9(7)節
〇讃 頌 讃頌歌 393(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3章 1~8節
〇説 教 「神の誠実さの前に立とう(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서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20(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2月 2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誠実さの前に立とう」 ローマ書 3章 1~8節
割礼と律法、これらはユダヤ人たちにとって、神さまから選ばれた民である象徴でした。しかし、先週、御一緒に読みましたように、パウロは外見上のユダヤ人が、すなわち律法を形式的に守っているユダヤ人がユダヤ人なのではなく、また、肉に施された割礼が割礼なのではなく、内面の心に施された割礼こそが真の割礼なのだと、バッサリと斬り捨てました。
それでは、神さまによって特別に選ばれたユダヤ人はどのような意味を持つのかということで、パウロはこの3章で語り始めております。
1節です。「では、ユダヤ人の優れた点は何か。割礼の利益は何か。それはあらゆる面からいろいろ指摘できます。まず、彼らは神の言葉をゆだねられたのです。それはいったいどういうことか。彼らの中に不誠実な者たちがいたにせよ、その不誠実のせいで、神の誠実が無にされるとでもいうのですか。 決してそうではない。」(1-4節)
パウロはユダヤ人の優れた点として、まず神さまの御言葉が委ねられたことを挙げております。そもそもユダヤ人は旧約聖書のアブラハムの時代から、選ばれた民として特別な存在意義がありました。そのことをパウロは認めているのです。そして、それが具体的に語られているのが「神の言葉をゆだねられたのです」ということです。
神さまの御言葉を委ねられているという点に置いてユダヤ人は優れている。確かにユダヤ人たちはその長い歴史のなかで「神さまの御言葉」を保ち続けておりました。勿論、神さまの御言葉に本質的には、従順ではなく、見かけだけ従順なふりをして、その心において神さまの御言葉を軽んじているということはあります。それでもなお、ユダヤ人たちは神さまの御言葉を託され、その御言葉を担って来たことは間違いないのです。
ユダヤ人たちは「神さまの御言葉」を自分たちの存在の根幹にかかわるものと認識していたのです。そのことにおいてユダヤ人は優れているとパウロは評価しているのです。
そして、「彼らの中に不誠実な者たちがいたにせよ、その不誠実のせいで、神の誠実が無にされるとでもいうのですか。 決してそうではない」(3-4節)と、パウロは神さまの誠実さの中に置かれているユダヤ人の優位性を語っております。
たとえば、主イエスさまを信じる信仰者が、やはり罪人であり、人から見て不誠実なことをするということも現実的にはあり得ます。あんな人が信じている宗教なんて信じられない、あの人が信じている神なんて価値がないのではないか、そう感じられてしまうということは残念ながらあります。教会の歴史においてもそうです。教会がいつも正しく歩んで来たかと言いますと、必ずしもそうではありません。ユダヤ人たちであれ、また、私たちであれ、まことに不誠実であると言えます。
だからと言って、ここでパウロは神さまが不誠実と思われないように、信仰者はみんな誠実でありなさい、教会はきっちりしなさいと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人間の罪ということを考える時、無理なことです。あくまでもここでパウロが言っているのは神さまの誠実さということです。
人間が、それも神さまの御言葉を担って来た人間が、今で言えば、主イエスさまの信仰を持っている人間がどれだけ不誠実であったとしても神さまの誠実さは絶対に変わ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4節に「あなたは、御言葉を述べるとき、正しいとされ、裁きを受けるとき、勝利を得られる。」とあります。この言葉は、詩編51編6節からの引用です。
詩編51編は、ダビデが人妻のバトシェバと犯した罪を背景にした悔い改めの詩です。ダビデは、人間はどこまでも罪深い、しかし、神さまはどこまでも正しいと告白し、人間の罪の闇の中でむしろ神さまの正義の光は輝いていると、神さまを讃美しているのです。
そこでまた、パウロはこのように問いかけます。5節です。「しかし、わたしたちの不義が神の義を明らかにするとしたら、それに対して何と言うべきでしょう。」(5節)
つまり、人間は不義であったとしても、それで神さまの義が明らかになるなら人間が不義であることはそんなに悪いことではないのではない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あくまでも、「人間の論法」であるわけですが、これと同じく7節にもあります。「またもし、わたしの偽りによって神の真実がいっそう明らかにされて、神の栄光となるのであれば、なぜ、わたしはなおも罪人として裁かれねばならないのでしょう。」(7節)
これもまた人間の論法、いわゆる屁理屈です。屁理屈ばかりこねて、律法を守らない、愛の実践を行わないのです。そういう者たちが「罰を受けるのは当然です」と、パウロは言い切っています。
パウロでなくても、誰が聞いても、神さまに栄光が現れるように不義を行うというのは愚かで欺瞞的に感じられます。しかし、神さまの前で屁理屈をこねるのは、そもそも人間の性質であり、それが私たちなのだ、ということ考える必要があります。
私たちはパウロが言うように、神さまが誠実な方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人間である私たちが不誠実であったとしても神さまはどこまでも誠実な方だと思っています。しかしそう思いながらも、私たちの望む神さまの誠実さというのは、どこまで行っても、自分を中心に据えた神さまの誠実さであることを認めざるを得ません。自分に都合の良い神さまの誠実さをどうしても人間は求めます。
しかし、神さまの誠実さは、正しくないことに対して怒りを発せられる誠実さであり、裁きの日に厳格に裁きをなさる誠実さです。その誠実さは誰に対しても平等なのです。人間にはそのような誠実さが耐えられないのです。自分だけはどうにかその平等な裁きから言い訳をしても逃れたいと思います。人間の罪の本性のゆえに神さまの誠実さ、平等さは耐えられないのです。
パウロはこの人間の罪、弱さ、身勝手さを今日の御言葉の中で明らかにしているのです。ただ、私たちの罪が明らかにされただけであるなら、今日の御言葉は福音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罪が明らかにされていても、それでもなお、今日の御言葉が福音であるのは、私たちがキリストのゆえに、私たちの罪があきらかにされることを恐れる必要がないから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の救いの業のゆえに、神さまの誠実さの前に、正直に罪の姿のままで立つことができるからです。もう屁理屈をこねる必要もありません。恐れることなく罪を認め、悔い改め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人間の本性として、神さまの前で屁理屈をこね、自分の不誠実さを隠したいところですが、キリストのゆえに私たちはもうそうする必要はなくなりました。
皆さん、今日の御言葉は、私たちに自分自身を吟味することを求めております。神さまの誠実さの前に、心素直に立つことを求めているのです。
皆さん、自分の持っているものをすべて神さまの前に置くのです。自分の罪を差し出すのです。自分の心を神さまの前にさらすのです。そして、そこで自分の本当のみじめさ、罪の姿があきらかにされます。しかし、それは絶望ではありません。その本当の自分の姿のままで立つ時、そこにキリストが共におられるがゆえに、私たちは罪を悔い改めることができます。そして、その罪が赦されます。本来は到底行くことなど赦されなかった神の国へと私たちは導かれるのです。アーメン。
【2022년 2월 27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서자” 로마서 3장 1~8절
할례와 율법, 이것들은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께 택함을 받은 백성이라는 상징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주 함께 읽었듯이 바울은 표면상의 유대인, 즉 율법을 형식적으로 지키고 있는 유대인이 유대인이 아니고, 또 몸에 베풀어진 할례가 할례인 것이 아니며 내면의 마음에 베풀어진 할례야말로 진정한 할례라고 단호하게 잘라 말합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 특별히 택함을 받은 유대인은 어떤 의미를 가지느냐에 대해서 바울은 이 3장에서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1절입니다.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4절)
바울은 유대인의 나은 점으로 우선 하나님의 말씀이 맡겨진 것을 꼽고 있습니다. 원래 유대인은 구약 성서의 아브라함 시대부터 택함을 받은 백성으로서 특별한 존재 의의가 있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인정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 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다는 점에 있어서 유대인은 뛰어납니다. 확실히 유대인들은 그 긴 역사 가운데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물론 하나님의 말씀에 본질적으로는 순종하지 않고 외관만 순종하는 척하면서 그 마음에서는 하나님의 말씀을 경시한다는 것은 있습니다. 그래도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받들어 그 말씀을 이끌어 온 것은 틀림없습니다.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들의 존재의 근간에 관련된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그점에 있어서 유대인은 우수하다고 바울은 평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떤 자들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어찌하리요 그 믿지 아니함이 하나님의 미쁘심을 폐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3-4절) 라고 바울은 하나님의 미쁘심 즉 하나님의 신실하심 속에 놓인 유대인의 우위성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주 예수님을 믿는 신앙자인데 누가 봐도 죄인이며 옳지 못한 일을 하고 있는 경우도 현실적으로는 있을 수 있습니다. 유감스럽지만 그런 사람이 믿고 있는 종교는 믿을 수 없고, 또 그런 사람이 믿고 있는 하나님은 가치가 없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습니다. 교회의 역사에 있어서도 그렇습니다. 교회가 언제나 올바르게 걸어왔느냐 하면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았습니다. 유대인들이든 또, 우리들이든 참으로 불성실하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기서 바울은 하나님께서 불성실하다고 생각되지 않도록 신앙자는 모두 다 성실하게 살아야 한다, 교회는 정신 차려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죄라는 것을 생각할 때 무리이기 때문입니다. 어디까지나 여기서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이 그것도 하나님의 말씀을 맡아 온 인간이 지금으로 말하면 주 예수님의 신앙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아무리 불성실했다고 해도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4절에 “주께서 주의 말씀에 의롭다 함을 얻으시고 판단 받으실 때에 이기려 하심이라”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말씀은 시편 51편 6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시편 51편은 다윗이 유부녀의 밧세바와 범한 죄를 배경으로 한 회개의 시입니다. 다윗은 인간이 어디까지나 죄많으나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옳으시다고 고백하고 인간의 죄의 어둠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정의의 빛은 빛나고 있다고 하나님을 찬미하고 있습니다.
거기서 또 바울은 이렇게 묻습니다. 5절입니다.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 하리요”(5절)
즉 인간은 불의했다고 해도 그것으로 하나님의 의가 드러나게 한다면 인간이 불의하다는 것도 그렇게 나쁜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인간의 논리입니다. 이것과 마찬가지로 7절에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의 거짓말로 하나님의 참되심이 더 풍성하여 그의 영광이 되었으면 어찌 내가 죄인처럼 심판을 받으리요”(7절)
이것도 또 인간의 논법, 이른바 핑계입니다. 핑계만 대서 율법을 지키지 않고 사랑의 실천을 행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정죄 받는 것이 마땅하니라” 라고 바울은 단언하고 있습니다.
바울이 아니어도 누가 들어도 하나님께 영광이 나타나도록 불의를 행한다는 것은 어리석고 기만적으로 느껴집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핑계를 대는 것은 원래 인간의 성질이며 그것이 우리들이라는 것을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바울이 말하는 것 같이 하나님께서 미쁘시고 신실하신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인간인 우리가 불성실하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어디까지나 신실하신 분이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우리가 바라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어떤 경우에도 나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신실하심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무래도 우리 인간은 내 형편에 맞는 신실하심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은 올바르지 않은 것에 대해서 분노를 발하는 신실하심이며 심판 때에 엄격하게 심판을 하시는 신실하심입니다. 그 신실하심은 누구에게도 평등합니다. 인간에게는 그런 신실하심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만은 어떻게든 그 평등한 심판으로부터 핑계를 대서 피하고 싶습니다. 인간의 죄의 본성 때문에 하나님의 신실하심, 평등하심이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 인간의 죄, 연약함, 오만 방자함을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밝히고 있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가 밝혀졌을 뿐이라면 오늘의 말씀은 복음이 아닙니다. 비록 우리의 죄가 밝혀졌어도 여전히 오늘의 성경 말씀이 복음인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밝혀지는 것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정직히 죄의 모습으로 설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핑계를 대고 억지를 부릴 필요도 없습니다. 두려움 없이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인간의 본성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억지를 부려 자신의 불성실함을 숨기고 싶지만, 그리스도 덕분에 우리는 더이상 그렇게 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여러분, 오늘의 성경 말씀은 우리에게 자기 자신을 음미하는 것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신실하심 앞에 순수한 마음으로 서는 것을 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자기가 가진 것을 모두 하나님 앞에 놓는 것입니다. 자신의 죄를 내미는 것입니다. 자신의 마음을 하나님 앞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서 자신의 진정한 비참함, 죄의 모습이 밝혀집니다. 그러나 그것은 절망이 아닙니다. 그 진정한 자신의 모습 그대로 설 때, 거기에 그리스도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죄를 뉘우치고 회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죄가 용서될 것입니다. 본래는 도저히 갈 수 없었던 하나님의 나라로 우리는 인도될 것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