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 우리의 신앙이란 때로는 하나님을 의심하여 신앙이 흔들리면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거한 약속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실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란 무엇일까요?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절)
아브라함의 후손, 또 그의 믿음에 속한 자, 즉 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만, 그 우리가 “세상을 상속받는 자 ”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이 “세상을 상속받는다 ”는 것은 물론 지상적으로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윽고 올 그리스도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름다운 자신의 나라를, 모든 재산을, 그리고 영원의 생명을 상속한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은혜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강약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이 강하다든가 약하다든가,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신앙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전능자라고 보고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어린 아이는 금방 웁니다. 떼를 씁니다. 하지만 완전히 부모를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신앙이란 이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약해도 좋고, 영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울상을 지어도 되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안 계시면 살아 갈 수 없다는, 이 완전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입장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정도로 더러운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은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거나 구원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은, 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1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0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순되는 말들이 있고 실제의 아브라함의 신앙이 불신앙과 무관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었으며, 현실적으로는 아이가 주어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히 99세의 아브라함은 20년 전에 비하면 신앙자로서 틀림없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삭이 태어나는 직전까지 불신앙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신앙의 극에서 약속의 장자 이삭이 주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21:1~2)
아브라함이 비록 불신앙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이것은 증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브라함에게 신앙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확립하고 이끌어낸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만,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분이심으로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아브라함은 우직하게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그 점으로 신앙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에 전혀 의심이 없었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의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불신앙 하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다는 것을 성경은 실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라는 것은 상처투성이의 신앙이었습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같은 거짓과 같은 죄를 반복하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똑같이 같은 죄를 범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되돌아올 때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의 횟수나,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라든가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비참한 모습을 인정하고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곳에서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의 소망이 아닙니다. 눈 앞의 현실에서 승산이 있기 때문에 기대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부활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이 세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무리입니다. 전혀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전혀 승산이 없는 우리가 죽음에 승리하고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소망입니다. 죽음이 생명에 역전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소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소망에 관해 로마서 8장에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8장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3~25)
우리의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참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낙관적 소망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눈을 떼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자기들의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 세상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불신앙과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그 전혀 가능성이 없는 곳에 소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망이란 가능성이 없는 곳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인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전면적 신뢰”, 그것이 “성서 신앙 ”입니다. 즉 “소망이 없는 곳에서 소망을 가진다 ”는 것이 그대로 “성서 신앙 ”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려나 의심이나 미혹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을 곳이 없을 만큼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팬데믹이 있거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거나 하는 지금 정말로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 보이는 세계가 어떻게 변하든 그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전혀 변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을 가엾게 여기고, 또 바울을 도우신, 그 같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
2022年3月2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62編 6(5)~7(6)節
〇讃 頌 讃頌歌 294(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4章 13~25節
〇説 教 「神の約束(하나님의 약속)」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0(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3月 2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約束」 ローマ書 4章 13~25節
先週、私たちの信仰というのは、時には神さまを疑い、信仰が揺らぎながらも、神さまの憐れみと愛に基づく約束を信じることであるとお話ししました。パウロはそれを信仰の父であるアブラハムを通して実証していました。
では、神さまの約束とは、何でしょうか? 16節です。「従って、信仰によってこそ世界を受け継ぐ者となるのです。恵みによって、アブラハムの子孫、つまり、単に律法に頼る者だけでなく、彼の信仰に従う者も、確実に約束にあずかれるのです。彼はわたしたちすべての父です。」(16節)
アブラハムの子孫、また彼の信仰に従う者、つまり私たちのことでありますが、その私たちが、「世界を受け継ぐ者」となるという約束です。この「世界を受け継ぐ」というのは、勿論、地上的に世界を征服す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やがて来るキリストの御国の世継ぎとされる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は、その素晴らしい御自身の御国を、全ての財産を、そして永遠の命をあなたは受け継ぐのだと約束されているのです。それがアブラハムを通して私たちに約束して下さった恵みなのです。
聖書は、アブラハムの信仰の強弱には興味を示しません。信仰が強いとか弱いとか、それは大した問題ではないのです。大切なのは、その信仰が、全能の神さまをそのまま全能者と見ているかいないかです。幼子はすぐに泣きます。駄々をこねます。しかし、完全に親を信じ切っています。むしろ、親がいなければ生きていけません。それが幼子の姿です。
信仰とは、この幼子のような信仰です。弱くてもいい、お利口さんでなくてもいい、べそをかいても結構、ただ神さまに全てを委ねる、父なる神さまがいなければ生きていけないという、この完全な信頼です。そして、これが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者の、神さまの約束に対する立場であるわけですね。
皆さん、私たちを神さまの国の世継ぎとするために、神さまの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は十字架にお架かりになりました。神さまの御子イエスさまが十字架で死なれるほどに、汚れた私を愛して下さいました。そうである以上、神さまが下さらないものは、もはや何も残っていないのです。ここに神さまの恩恵の全てがあるからです。
それなのに、私たちは自分の愚かさを嘆いたり、救いに不安を感じたりします。実は、私たちはまだキリストの愛をよくわかっていないのです。
18節をご覧下さい。「彼は希望するすべもなかったときに、なおも望みを抱いて信じ… 」(18節)とあります。そして、20節には「彼は不信仰に陥って神の約束を疑うようなことはなく、むしろ信仰によって強められ、神を賛美しました」(20節)とあります。ここには、矛盾するようなことが言われており、実際のアブラハムの信仰が不信仰と無関係であったかと言いますと、決してそうではありません。
この時、アブラハムは99歳になっており、現実的には子どもが与えられるような状況ではありません。信仰が揺れ動いていたのです。確かに99歳のアブラハムは、20年前と比べれば、信仰者として成長していました。しかし、それでも聖書の記録によればイサクが生まれる直前まで、不信仰な姿をさらしていたのです。
パウロが言っていることとは全く反していたのです。しかし、実に、その不信仰の極みで、約束の長子イサクが与えられたのです。(創世記21:1~2)
アブラハムが不信仰であっても、神さまは真実で、約束を守られる方であるということをこのことは証明しているのです。結局、この神さまの真実が、アブラハムに信仰を与えただけでなく、その信仰を確立し、導き守ったのです。つまり、「彼は不信仰に陥って神の約束を疑うようなことはなく」とパウロは言いますが、アブラハムが不信仰に陥っても神さまは真実なお方で約束を守られ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
確かにアブラハムは、愚直に神さまに従いました。彼はその点で信仰の父であると言えます。しかし、その信仰に全く疑い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疑えなかっ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たとえ不信仰であっても疑えないほど神さまは真実である、それを聖書は実証しているのです。
アブラハムの信仰というのは、傷だらけの信仰でした。二度も三度も同じ偽りと同じ罪を繰り返すアブラハムは、自分の弱さをよく知っていました。だから、神さまに頼るしかなかったのです。私たちもそうです。私たちもアブラハムと同じように、同じ罪ばかり犯します。そこに私たちのそれぞれの弱さがあるからです。
それでもなお、神さまは、私たちが悔い改めて立ち帰る時、赦してくださるのです。だから、私たち罪人は神さまに頼るしかないのです。そうである以上、失敗の数とか、今の自分の姿であるとか、そのようなものは問題ではありません。大切なのは、その惨めな姿を認めて、徹底的に悔い改めることです。
希望のないところで希望を持つ、というのは自己矛盾です。論理的に説明なんて出来ません。しかし、論理的に説明出来るならば、それは本当の意味での希望ではないのです。目の前の現実に、勝算があるから期待するというのは、聖書の言います希望ではないのです。まさに復活ということもそうでしょう。死んだ者が甦るなんて、この世的にはあり得ません。無理です。全く勝ち目などありません。しかし、その全く勝ち目のない私たちが、死に勝利して復活することを信じるのが真の希望です。死が命に逆転する、これが聖書の語る希望なのです。
パウロはこの希望に関して、このローマ書8章においても説明しています。8章23節です。「被造物だけでなく、“霊”の初穂をいただいているわたしたちも、神の子とされること、つまり、体の贖われることを、心の中でうめきながら待ち望んでいます。わたしたちは、このような希望によって救われているのです。見えるものに対する希望は希望ではありません。現に見ているものをだれがなお望むでしょうか。わたしたちは、目に見え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なら、忍耐して待ち望むのです。」(8:23~25)
私たちの希望は、目に見えないものです。目に見えないものを望んでいるがゆえに、忍耐が必要なのです。それは単なる楽観的希望ではありません。現実から目をそらすことでもありません。アブラハムは、極めて現実的に自分たちの状況を判断していました。だから、しばしばこの世を恐れたのです。そして、だから信仰は不信仰との戦いになるのです。しかし、それでもなお、彼はその全く可能性などないところに、希望を抱いたのです。
ですから真の希望とは、可能性のないところに与えられる神さまの御言葉に対する全面的な信頼なのです。
「御言葉に対する全面的信頼」、それが「聖書信仰」です。つまり「希望のないところで希望を持つ」ということが、そのまま「聖書信仰」なのです。大切なのは、御言葉に満たされることです。私たちの恐れや疑いや迷いが、私たちの心に居場所がないほどに御言葉に満たされることです。
コロナのパンデミックがあったり、ロシアのウクライナ侵攻があったり、本当に、この世界はどうなるのでしょうか?
しかし、皆さん、大切なことは、それでもなお、主なる神さまは同じ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見える世界がいかに変わろうが、その世界を支配される神さまは全く変わらないのです。アブラハムを憐れみ、またパウロを助けた、その同じ神さまが今私たちを導いているのです。
【2022년 3월 27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약속” 로마서 4장 13~25절
지난 주, 우리의 신앙이란 때로는 하나님을 의심하여 신앙이 흔들리면서도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에 의거한 약속을 믿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신앙의 아버지인 아브라함을 통하여 실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의 약속이란 무엇일까요? 16절입니다. “그러므로 상속자가 되는 그것이 은혜에 속하기 위하여 믿음으로 되나니 이는 그 약속을 그 모든 후손에게 굳게 하려 하심이라 율법에 속한 자에게뿐만 아니라 아브라함의 믿음에 속한 자에게도 그러하니 아브라함은 우리 모든 사람의 조상이라”(16절)
아브라함의 후손, 또 그의 믿음에 속한 자, 즉 우리를 말하는 것입니다만, 그 우리가 “세상을 상속받는 자 ”가 된다는 약속입니다. 이 “세상을 상속받는다 ”는 것은 물론 지상적으로 세계를 정복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이윽고 올 그리스도의 나라의 상속자가 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아름다운 자신의 나라를, 모든 재산을, 그리고 영원의 생명을 상속한다고 약속하신 것입니다. 그것이 아브라함을 통하여 우리에게 약속해 주신 은혜입니다.
성경은 아브라함의 신앙의 강약에는 흥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신앙이 강하다든가 약하다든가,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신앙이 전능하신 하나님을 그대로 전능자라고 보고 있는가 아닌가입니다. 어린 아이는 금방 웁니다. 떼를 씁니다. 하지만 완전히 부모를 믿고 있습니다. 오히려 부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것이 어린 아이의 모습입니다.
신앙이란 이 어린 아이와 같은 신앙입니다. 약해도 좋고, 영리하지 않아도 됩니다. 울상을 지어도 되고, 오직 하나님께 모든 것을 맡긴다는, 아버지이신 하나님이 안 계시면 살아 갈 수 없다는, 이 완전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은 자의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입장인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상속자로 하기 위하여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히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돌아가실 정도로 더러운 나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는 것은 이미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 은혜의 모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자신의 어리석음을 한탄하거나 구원에 불안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실은, 우리는 아직도 그리스도의 사랑을 잘 모르고 있습니다.
18절을 보십시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1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그리고 20절에는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20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여기에는 모순되는 말들이 있고 실제의 아브라함의 신앙이 불신앙과 무관했는가 하면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때, 아브라함은 99세가 되었으며, 현실적으로는 아이가 주어질 만한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이 흔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확실히 99세의 아브라함은 20년 전에 비하면 신앙자로서 틀림없이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의 기록에 따르면 이삭이 태어나는 직전까지 불신앙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바울이 말하고 있는 것과는 완전히 반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불신앙의 극에서 약속의 장자 이삭이 주어진 것입니다. (창세기 21:1~2)
아브라함이 비록 불신앙 하여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하시고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이것은 증명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아브라함에게 신앙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신앙을 확립하고 이끌어낸 것입니다. 즉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만, 아브라함이 믿음이 없어도 하나님께서는 신실한 분이심으로 약속을 지키셨다는 것입니다.
확실히 아브라함은 우직하게 하나님을 따랐습니다. 그는 그 점으로 신앙의 아버지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신앙에 전혀 의심이 없었다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의심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비록 불신앙 하여도 의심할 수 없을 만큼 하나님께서는 진실하시다는 것을 성경은 실증하고 있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신앙이라는 것은 상처투성이의 신앙이었습니다. 두 번이고 세 번이고 같은 거짓과 같은 죄를 반복하는 아브라함은 자신의 연약함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우리도 아브라함과 똑같이 같은 죄를 범합니다. 거기에 우리의 연약함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회개하고 되돌아올 때 용서해 주십니다. 그래서 우리 죄인은 하나님께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패의 횟수나, 지금의 자신의 모습이라든가 그런 것은 문제가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그 비참한 모습을 인정하고 철저하게 회개하는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곳에서 소망을 가진다는 것은 자기모순입니다.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로의 소망이 아닙니다. 눈 앞의 현실에서 승산이 있기 때문에 기대한다는 것은 성경이 말하는 소망이 아닌 것입니다. 바로 부활이라는 것도 그렇습니다.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다니 이 세상적으로는 있을 수 없습니다. 무리입니다. 전혀 승산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전혀 승산이 없는 우리가 죽음에 승리하고 부활하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소망입니다. 죽음이 생명에 역전한다,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소망인 것입니다.
바울은 이 소망에 관해 로마서 8장에서도 설명하고 있습니다. 8장 23절입니다. “그뿐 아니라 또한 우리 곧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여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느니라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8:23~25)
우리의 소망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고 있기 때문에 참음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단순한 낙관적 소망이 아닙니다. 현실에서 눈을 떼는 것도 아닙니다. 아브라함은 지극히 현실적으로 자기들의 상황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종종 이 세상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신앙은 불신앙과의 싸움이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그 전혀 가능성이 없는 곳에 소망을 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소망이란 가능성이 없는 곳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전면적인 신뢰인 것입니다.
“말씀에 대한 전면적 신뢰”, 그것이 “성서 신앙 ”입니다. 즉 “소망이 없는 곳에서 소망을 가진다 ”는 것이 그대로 “성서 신앙 ”입니다. 중요한 것은 말씀으로 채워지는 것입니다. 우리의 우려나 의심이나 미혹이 우리 마음에 자리 잡을 곳이 없을 만큼 말씀으로 충만해지는 것입니다.
코로나의 팬데믹이 있거나,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있거나 하는 지금 정말로 이 세계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요?
그러나 여러분, 중요한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똑같다는 것입니다. 이 보이는 세계가 어떻게 변하든 그 세계를 지배하시는 하나님께서는 전혀 변하지 않으십니다. 아브라함을 가엾게 여기고, 또 바울을 도우신, 그 같은 하나님께서 지금도 우리를 인도해 주시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