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3-4절), 이 말씀을 들으면, 환난을 참고 견디면 그 결과 뭔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고생을 통해 성장해 간다는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읽어 온 로마서에서 바울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과 모순됩니다. 환난 속에서 참고 견딘다는 행위나 인간의 마음가짐에 의해서 신앙의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는 부분을 일반적인 “환난을 인내합시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라는 문맥으로 읽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선 하나님과의 평화를 대전제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1절)
우리는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적대하고 언제나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의 귀한 희생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 속에 있어도 소망을 계속 가질 수 있습니다.
원래 환난이나 고난은 인간을 진정한 의미로 성장시키는 것일까요?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긴 고생 끝에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받아 더 완악하게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또 고생 끝에 성공은 했지만 오만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사람은 궁극적인 소망이 없으면, 확실한 희망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로의 인내는 할 수 없습니다.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인내는 인간의 마음을 망가뜨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고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영광을 받을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소망이야말로 자랑이며 즐거움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현재의 은혜와 장래의 영광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왜 환난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평화를 얻은 사람은 최종적인 소망, 진정한 소망,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소망이 있으므로 환난도 기쁨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크리스천에게는 신앙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신앙의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싸움이 없는 신앙 생활은 성장이 없는 신앙 생활입니다.
인내라고 번역된 말은 단순히 참고 견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거기에 머무른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내팽개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고, 소망이 있으므로 내던지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연단이라고 번역된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만, 금속을 정련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도를 늘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금속을 가열하여 두드리고 불순물을 제거해 가면 강도가 세지듯이 시련을 내던지지 않고 인내하고 거기에 머무르면 그 결과 신앙의 순도가 올라갑니다. 그것이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단 저쪽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만, 우리는 뭔가 트레이닝을 하듯이 자력으로 신앙의 순도를 늘려 가는 게 아닙니다. 이 환난으로부터 인내, 연단, 소망에 이르는 프로세스에 있어서도 이끌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나 인간은 무리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자 본연의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5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절)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막연히 하나님을 믿고 그냥 하나님을 고맙다고 생각하고 또 그냥 하나님께서 곤란할 때에는 도와 주시고 지켜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거나, 그냥 막연하게 장래에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거나 합니다만, 크리스천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란 명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냥 막연히 고마운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고마우신 분이심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정말 100만 번을 감사해도 부족할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의 근본을 바꾸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감사에 넘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분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명확히 하나님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냥 단순히 고마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인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해 주시는 구세주, 그것이 그리스도이십니다.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7~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현실로 오셔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하여 죽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때로는 생명을 내던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내던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반항하고 있는, 전쟁을 하고 있는, 죄를 범하는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죽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으로 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어떤 근거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알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이치를 따지자면 그런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다름아닌 바로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매주일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의 찢어진 살과 흘리신 피를 반복해서 기억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뚜렷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반복해서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영원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소망의 원천입니다. 그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연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망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은 소망에서 소망으로 향하는 걸음인 것입니다.
2022年4月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23編 1~3節
〇讃 頌 讃頌歌 419(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5章 1~11節
〇説 教 「神との和解(하나님과의 화해)」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58(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4月 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との和解」 ローマ書 5章 1~11節
今日の聖書箇所には有名な言葉があります。「苦難は忍耐を、忍耐は練達を、練達は希望を生む」(3-4節)、この言葉を聞くとき、何か苦難に耐えれば、その結果何か良いものを得られるような印象を受けるかもしれません。人は苦労することによって成長していくというようなイメージでとらえられるかもしれません。
そうしますと、ずっと読んできました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でパウロが繰り返し言っている「信仰によって義とされる」ということと矛盾してきます。苦難の中で耐えるという行為や人間の心がけによって信仰の希望が生まれてくるようなことになります。ですから「苦難は忍耐を、忍耐は練達を、練達は希望を生む」という箇所を一般的な「苦難を忍耐しましょう」そうすれば人間的に成長できます、という文脈で読むのはおかしいのです。この箇所は、まずもって、神さまとの平和ということが大前提として語られ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神との間に平和を得ており… 」(1節) 私たちは誰もが罪人です。その罪のゆえに私たちは神さまに敵対し、いつも神さまと争うものなのです。それが主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り、すなわちイエスさまの貴い犠牲によって、神さまとの和解をしているのです。それが「神さまとの平和」ということです。この神さまとの平和を得ているが故に私たちは、苦難の中にあっても希望を持ち続け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そもそも苦難や艱難というのは、人間を本当の意味で成長させるでしょうか? そうとばかりは言えません。長い苦労の末に、むしろ、心が傷ついて頑な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は良くあります。苦労の末に成功はしたけど、傲慢になってしまうということもあります。人は最終的な希望がなければ、確かな望みがなければ、本当の意味での忍耐は出来ません。希望を持てない忍耐は人間の心を壊してしまうのです。
では、希望とは何か? パウロはそれを2節で語っているのです。「キリストのお陰で、今の恵みに信仰によって導き入れられ、神の栄光にあずかる希望を誇りにしています。」(2節)
キリストの十字架のゆえに恵みを受け、終わりの日に神の国で私たちは栄光を受ける希望を持っています。その希望こそが誇りだとパウロは言うのです。
そして、3節で、「そればかりでなく、苦難をも誇りとします」とパウロは語ります。現在の恵みと将来の栄光を誇りとするのは理解できますが、なぜ苦難も誇りになるのでしょうか? それはキリストによって神さまとの平和を得ている者は、最終的な希望、本当の希望、神の栄光にあずかる希望があるので、苦難をも喜びに変えることが出来るからです。
そして実際に、クリスチャンには信仰ゆえの苦難があります。信仰の戦い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逆に、戦いのない信仰生活というのは、成長のない信仰生活であるです。
忍耐と訳されている言葉は、単に辛抱す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積極的にそこにとどまるというニュアンスがあります。投げ出さずにそこにとどまるのです。神さまとの平和を得て、希望があるので投げ出さずにとどま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また、練達と訳されている言葉は、色々な意味がある言葉なのですが、金属を精錬して不純物をとりのぞいて純度を増すことを考えれば分かりやすいかと思います。金属を熱し、叩いて、不純物を取り除いていくと強度が増すように、試練を投げ出さずに忍耐し、そこに留まると、その結果、信仰の純度が上がっていくのです。それが練達ということです。この練達の向こうに希望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が、私たちは何かトレーニングをするように自力で自分の信仰の純度を上げていくのではありません。この苦難から忍耐、練達、希望にいたるプロセスにおいても、導いてくださるのは神さまです。
誰でも人間は無理をしてしまう傾向があります。結局それは自分の力でやろうしていることなのです。自分の力ではなく神さまに期待するのです。それが信仰者のあり方です。なぜなら、5節でパウロが言う通りだからです。「希望はわたしたちを欺くことがありません。わたしたちに与えらえた聖霊によって、神の愛がわたしたちの心に注がれているからです。」(5節)
聖書は神さまの愛をくりかえし語ります。私たちも神さまの愛があることを知っています。しかし、その愛は漠然としたものではありません。漠然と神さまを信じて、何となく神さまって有難いと思って、また何となく神さまが困った時には助けてくださるような思いを持ったり、守られているような感じを持ったり、何となく漠然と将来は天国に行くんだと思ったりしますが、クリスチャンにとっての神さまは、そのよう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の愛はそのようなものではないのです。
クリスチャンにとって神さまとは明確なものです。神さまの愛ははっきりと示されているのです。何となく有り難いものではないのです。もちろん確かに神さまは有り難い方であることは間違いありませんが、その神さまの愛を知った時、100万回感謝してもし足りないようなお方です。私たちの生き方の根本を変えてくださるのが神さまの愛です。そして感謝にあふれ、ひれふして礼拝せざるを得ない、そのような方が聖書に記されている神さまです。
私たちは聖書を通して明確に神さまのお姿を知ることができます。そのお姿をはっきりと示しているのが、イエス・キリストです。キリストは何となく有り難いような神さまではないのです。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神さまです。罪人である私たちを父なる神さまの前で正しいものとみなされる者としてくださる救い主、それがキリストです。7節に「正しい人のために死ぬ者はほとんどいません。善い人のために命を惜しまない者ならい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わたしたちがまだ罪人であったとき、キリストがわたし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ったことにより、神はわたしたちに対する愛を示されました。」(7~8節)とあります。
人間の歴史の中に神さまの御子が現実にお越しになり、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それも罪人であった私たち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人間は自分が価値があると思うものに対しては時に命を投げ出すことができ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自分が価値があると思えない者のために命を投げ出すことはできません。
しかし、神さまはそうではありません。ご自分へ反抗をしている、戦争をしている、罪を犯している人間のためにキリストを十字架にかけて死に渡されました。そこに神さまの愛が示されているのです。キリストの死によって、そしてキリストの血によって私たちは救われました。神さまと和解させていただきました。これは信仰によって、聖霊によって知らされることです。
2000年前に死んだ人が自分と何の関係があるのか、何の根拠でキリストの死によって私の罪が赦されたことがわかるのか、理屈で考えればそのような疑問があるでしょう。しかし、私たちに与えられた聖霊によって、キリストが他ならぬこの私のために死なれたことを知らされます。
今、四旬節を歩んでおりますが、毎主日、私たちは十字架のキリストを仰ぎます。キリストの裂かれた肉と流された血を繰り返し覚えます。それは、他ならぬ私たち一人一人にはっきりと示された神さまの愛を繰り返し覚えるためです。
キリストの十字架に神さまの愛が示されました。その愛によって私たちが最終的に行きつく先は、神さまの裁きではなく、永遠の命となりました。それこそが希望の源泉です。その希望があるから、私たちは信仰ゆえに苦難を忍耐をすることが出来ます。練達を得ることが出来ます。そして、さらなる希望へと歩んで行きます。私たちの歩みは希望から希望へと向かう歩みなのです。
【2022년 4월 3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과의 화해” 로마서 5장 1~11절
오늘의 성경 말씀에는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3-4절), 이 말씀을 들으면, 환난을 참고 견디면 그 결과 뭔가 좋은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인상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사람은 고생을 통해 성장해 간다는 이미지로 인식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까지 읽어 온 로마서에서 바울이 반복해서 말하고 있는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는다는 것과 모순됩니다. 환난 속에서 참고 견딘다는 행위나 인간의 마음가짐에 의해서 신앙의 소망이 생기게 됩니다. 그래서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 ”는 부분을 일반적인 “환난을 인내합시다. 그렇다면 인간적으로 성장할 수 있습니다 ”라는 문맥으로 읽는 것은 이상한 것입니다. 이 부분은 우선 하나님과의 평화를 대전제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1절)
우리는 누구나 죄인입니다. 그 죄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과 적대하고 언제나 하나님과 다투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즉 예수님의 귀한 희생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 라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과의 평화를 얻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환난 속에 있어도 소망을 계속 가질 수 있습니다.
원래 환난이나 고난은 인간을 진정한 의미로 성장시키는 것일까요? 꼭 그렇다고만 할 수는 없습니다. 긴 고생 끝에 오히려 마음에 상처를 받아 더 완악하게 되어 버리는 경우도 자주 있습니다. 또 고생 끝에 성공은 했지만 오만하게 되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사람은 궁극적인 소망이 없으면, 확실한 희망이 없으면, 진정한 의미로의 인내는 할 수 없습니다.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인내는 인간의 마음을 망가뜨리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소망이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것을 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2절)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은혜를 받고 종말에 하나님 나라에서 우리는 영광을 받을 소망을 갖고 있습니다. 그 소망이야말로 자랑이며 즐거움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그리고 3절에서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현재의 은혜와 장래의 영광을 즐거워한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만, 왜 환난도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평화를 얻은 사람은 최종적인 소망, 진정한 소망, 하나님의 영광을 얻을 소망이 있으므로 환난도 기쁨으로 바꿀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실제로 크리스천에게는 신앙으로 인한 고난이 있습니다. 신앙의 싸움이 있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싸움이 없는 신앙 생활은 성장이 없는 신앙 생활입니다.
인내라고 번역된 말은 단순히 참고 견딘다는 것이 아닙니다. 적극적으로 거기에 머무른다는 뉘앙스가 있습니다. 내팽개치지 않고 거기에 머무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평을 얻고, 소망이 있으므로 내던지지 않고 머물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연단이라고 번역된 말은 여러가지 의미가 있는 말입니다만, 금속을 정련해서 불순물을 제거하고 순도를 늘리는 것을 생각하면 이해하기 쉬울 것 같습니다. 금속을 가열하여 두드리고 불순물을 제거해 가면 강도가 세지듯이 시련을 내던지지 않고 인내하고 거기에 머무르면 그 결과 신앙의 순도가 올라갑니다. 그것이 연단이라는 것입니다. 이 연단 저쪽에 소망이 있다는 것입니다만, 우리는 뭔가 트레이닝을 하듯이 자력으로 신앙의 순도를 늘려 가는 게 아닙니다. 이 환난으로부터 인내, 연단, 소망에 이르는 프로세스에 있어서도 이끌어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십니다.
누구나 인간은 무리를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결국 그것은 자신의 힘으로 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힘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대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신앙자 본연의 자세입니다. 왜냐하면, 5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대로이기 때문입니다. “소망이 우리를 부끄럽게 하지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5절)
성경은 하나님의 사랑을 반복해서 말합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사랑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은 막연한 것이 아닙니다. 막연히 하나님을 믿고 그냥 하나님을 고맙다고 생각하고 또 그냥 하나님께서 곤란할 때에는 도와 주시고 지켜 주시는 것 같은 느낌을 가지거나, 그냥 막연하게 장래에는 천국에 간다고 생각하거나 합니다만, 크리스천에게 있어서의 하나님이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그런 것이 아닌 것입니다.
크리스천에게 있어서 하나님이란 명확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분명히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냥 막연히 고마운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하나님은 고마우신 분이심에는 틀림이 없습니다만, 그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된다면 정말 100만 번을 감사해도 부족할 그런 분이십니다. 우리의 생활 방식의 근본을 바꾸어 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감사에 넘치고 경배하지 않을 수 없는 그런 분이 바로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이십니다.
우리는 성경을 통해서 명확히 하나님의 모습을 알 수 있습니다. 그 모습을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그냥 단순히 고마운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우리를 위하여 죽어 주신 하나님이십니다. 죄인인 우리를 아버지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해 주시는 구세주, 그것이 그리스도이십니다. 7절에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7~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의 역사 속으로 하나님의 아들이 현실로 오셔서, 죽어 주셨습니다. 그것도 죄인이었던 우리를 위하여 죽어 주셨습니다. 인간은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서는 때로는 생명을 내던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자기가 가치가 있다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을 위하여 생명을 내던질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자기에게 반항하고 있는, 전쟁을 하고 있는, 죄를 범하는 인간을 위하여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고 죽음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그리고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하나님과 화해되었습니다. 이것은 신앙으로 또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알게 되는 것입니다.
2000년 전에 죽은 사람이 나와 무슨 관계가 있느냐, 어떤 근거로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가 용서받은 것을 알 수 있는지, 이론적으로 이치를 따지자면 그런 의문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주어진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서 다름아닌 바로 나를 위하여 돌아가셨음을 알게 됩니다.
지금 사순절을 보내고 있습니다만, 매주일 우리는 십자가의 그리스도를 바라봅니다. 그리스도의 찢어진 살과 흘리신 피를 반복해서 기억합니다. 그것은 다름아닌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에게 뚜렷이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을 반복해서 기억하기 위함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났습니다.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최종적으로 도달하는 곳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라 영원의 생명이 되었습니다. 그것이 소망의 원천입니다. 그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신앙으로 말미암아 고난을 참아낼 수 있습니다. 연단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소망을 향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의 걸음은 소망에서 소망으로 향하는 걸음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