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저 십자가 전야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전야에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 교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정말로 잔혹한 처형 도구입니다. 손발에 못을 박고 알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방치되는 형벌입니다. 거기에는 인간, 즉 우리의 잔혹함, 증오와 폭력성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힌 누구나 맛보는 고통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별한 아픔, 우리 속죄의 희생이라는 고생도 맛보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상상도 설명할 수도 없는 터무니없는 아픔, 슬픔,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아픔에 아무렇지도 않은 초인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아픔, 괴로움, 슬픔을 느끼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여기에서도 정직하게 또 솔직하게 아버지 하니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듯한 기도, 신앙인 다운 기도가 좋은 것 같지만,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새삼스러운 소원조차 그대로 기도해도 좋습니다. 미혹이나 불안마저도 그대로 기도하는 것이 용서되고 있음을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우리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기도하면서, 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더 고귀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어깨의 무거운 짐을 벗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세 가지의 기도를 보고자 합니다.
먼저 유명한 이 기도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심한 아픔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셨을 때입니다. 그 몸이 뒤틀리는 격통에 더하여 사람들은 조롱하거나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뽑기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모든 단죄나 욕설을 내뱉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 상황에서 어떤 허울 좋은 말이나 멋 부릴 그런 행동은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의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것은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폭력, 남을 조롱하고, 상처를 입히고,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그런 폭력적인 인간의 한복판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서로 상처를 입히고 고독으로 가망이 없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잘못이나 겉으로만 사는 생활 방식보다 그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적인 우리의 존재 자체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받아들여 주시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무서운 고민으로 이성과 겉모습이 벗겨진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용서를 위해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도 속에 싸여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실은 우리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이 수난 주 동안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반성하면서 기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거기에 십자가의 주님께서 계십니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하나님께 부딪치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기도를 드렸더라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중재 기도를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기도를 드리는 것과 함께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중재 기도를 해서 축복을 빌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두 번째 기도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격통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죄의 심판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죽음의 저 편에 있는 음부의 세계의 고독,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독을 견딜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서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독이 얼마나 무섭고 외롭고 견딜 수 없는 것인지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합니다. 단지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외침을 짧게 외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기도하거나 푸념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저는 한없는 위로를 찾게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다.
그런 기도는 불신앙이라고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게 아니냐? 이런 기도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실족하는 게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소리에 맞춰 함께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해 주시는 이상,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에 하나님께 버림받으셨기 때문에 나는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고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의 세 번째 기도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지셨을 때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결코, 온화하게 또 조용하게도 아닙니다. 절규하셨습니다. 우리도 삶이 다하여 최후의 시간이 올 때,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며 “하나님 나의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합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믿는 자다운 최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평안을 가질 수 없거나 불안,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 등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해도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여, 제 영혼을 주께 맡기옵니다” 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그런 기도라도 좋습니다.
아무리 엉망진창일 때라도 우리의 영혼을 받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죽을 때뿐만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도, 평소의 삶 속에서도 우리 영혼을 그 손에 맡길 수 있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기도는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이 돌로 치는 형으로 살해당하기 직전에 기도한 기도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기도를 흉내냈을 겁니다. 이 스데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매일 기도해 갑니다만, 예수님의 이 네 가지의 기도를 기억하면서 기도합시다.
2022年4月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39編 7~8節
〇讃 頌 讃頌歌 150(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ルカによる福音書(누가복음) 22章 39~46節
〇説 教 「イエスの祈り(예수님의 기도)」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50(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4月 1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イエスの祈り」 ルカによる福音書 22章39~46節
今年の受難週の始めに、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関わる祈りについて共に考えたいと思います。
まず最初は、十字架前夜の祈りです。「父よ、御心なら、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ください。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御心のままに行ってください。」(ルカ22:42)
イエスさまは、十字架の前夜に「最後の晩餐」の後、郊外の「ゲッセマネの園」で祈られました。十字架というのは、本当に残酷な処刑道具です。手足を釘で打たれ、裸で十字架にぶら下げられて放って置かれる刑です。そこには、人間の、すなわち私たちの残酷さ、憎悪や暴力性が暴露されています。しかも、そこでイエスさまは、十字架に架かる誰もが味わう苦痛だけではない、神の子としての特別な痛み、私たちの贖いの生贄という大変さも味わうことをご存じでした。それは私たちには想像も説明も出来ない、とんでもない痛み、悲しみ、恐れです。イエスさまは決して痛みにも平気な超人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と同じ人間でした。痛み、苦しみ、悲しみを感じるお方でした。そしてイエスさまは、その思いをここでも正直に、率直に、父なる神さまに祈られたのです。
皆さん、私たちも率直に自分の思いを、天の父なる神さまに打ち明け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私たちはかしこまった祈り、信仰者らしい祈りが良いように思いますが、私たちの素直な気持ちを告白したら良いのです。今更のような願いさえそのまま祈って良いのです。迷いや不安もそのまま祈ることが赦されていることが、イエスさまの祈りから教えられます。それは不信仰ではないのです。神さまへの信頼があるが故に可能なことなのです。
だからこそ、私たちも「しかし、わたしの願いではなく、御心のままに行ってください。」と祈るのです。正直に祈りつつ、その一方で、神さまはもっと尊いご計画がおありだ。だから「御心がなりますように」と祈る時、私たちは自分の肩の重荷を下ろすのです。
次に、イエスさまが十字架の上で祈られた三つの祈りを見てみたいと思います。
まず有名なこの祈りです。「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知らないのです。」(ルカ23:34)
十字架に釘打ち付けられ、激しい痛みと息も出来ない程苦しい時です。その体がねじ曲がる激痛に加え、人々は嘲ったり、自分の服をくじ引きしたりしています。その時、イエスさまは、彼らに向かって、あらゆる断罪や罵りを吐くことも出来たでしょう。何も綺麗事や格好付けなんて出来ない程の苦しみであったのです。しかし、イエスさまはこう祈られました。「父よ、彼らをお赦しください。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知らないのです。」
それは、これこそがイエスさまの本心だったからです。人間が何をしているか分かっていない。あらゆる暴力、人を嘲り傷つけ、罪人を罰するのが正義だと思っている、そういう暴力的な人間のただ中に、イエスさまは来られました。傷つけ合い、孤独で望みのない人たちと一つになってくださいました。人の間違いや上辺の生き方よりも、その底にある無意識の私たちの存在そのものを、赦して欲しい、父なる神さまに受け入れて欲しい、それを本心から願っておられました。あの十字架の恐ろしい苦悶に、理性や建前が引っぺがされた所で、イエスさまは私たちの赦しを祈って下さったのです。
皆さん、この祈りの中に包まれて、私たちは今ここにいるのです。自分が何をしているのか、何を祈っているのか、実は、私たちもよく分かっていないのかもしれません。だから、特にこの受難週の間、自分自身を謙虚に省みながら、祈りたいと思います。私たちが祈る時、そこに十字架の主が共におられます。自分の素直な気持ちを神さまにぶつけたいと思います。もし、私たちが誤った祈りを献げたとしても、共におられるイエスさまが執り成しの祈りをして下さいま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自分の祈りを献げると共に、私たちも他者を赦す祈りをし、執り成して祝福を祈りたいと思うのです。
それからイエスさまが十字架の上で祈られた二つ目の祈りです。「エリ、エリ、レマ、サバクタニ」、「わが神、わが神、なぜ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マタイ27:46)
イエスさまにとって十字架の激痛よりも、神さまから遠く離れた罪の裁きとしての死、そして、死の向こうにある陰府の世界の孤独、神さまに見捨てられる孤独に耐えられなかっ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救い主として、私たちの代わりに神さまに見捨てられなさいました。神さまに見捨てられる孤独が、どんなに恐ろしく、淋しく、堪えられないものであるか、私たちには想像も出来ません。ただ、この時、イエスさまは、その叫びを短く叫ばれました。十字架の上で最初から最後までずっと祈ったり愚痴ったり恨めしがったりもしてはいません。しかし、その中でも最後に、大声で「わが神、わが神、なぜわたし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叫ばずにはいられなかったのです。そこに、私は限りない慰めを見出すのです。
時に、神さまに見捨てられたような思いになることがあります。その時、私たちは「我が神、どうして私をお見捨てになったのですか」と叫ばすにはいられません。「神さまが私を見捨てた」と。
そんな祈りは不信仰だと神さまを怒らすのではないかとか、こんな祈りを他の人が聞いたら躓かせるのではないかとか、そんな考えを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自分の思いをそのまま祈れば良いのです。なぜなら、十字架の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声に合わせて共に祈って下さるから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が共に祈って下さる以上、私たちは決して神さまに見捨てられはしないのです。なぜなら、本当にイエスさまが私たちの代わりに神さまに見捨てられてくださったからです。イエスさまが私の代わりに神さまに見捨てられたが故に、私は決して神さまに見捨てられることはない。そう信じるのです。
それから、イエスさまは十字架の上で最後の祈りを献げられました。それが十字架上での三つ目の祈りです。「父よ、わたしの霊を御手にゆだねます。」(ルカ23:46)
「父よ、わたしの霊を御手にゆだねます。」イエスさまが十字架上で息を引き取られた時の祈りです。イエスさまの最後の言葉がこれでした。これをイエスさまは大声で叫ばれました。決して、穏(おだ)やかに、お淑(しと)やかにではありません、絶叫したのです。私たちの最後の時、穏やかに微笑みを浮かべて、神さま「父よ、私の霊をあなたの御手に委ねます」と祈ることが出来たらと思います。それが信仰者らしい最後だと考えます。しかし、そんな平安を持つことなど出来なかったり、不安や死にたくないという思いなど複雑な色々な思いに襲われても、それでも私たちは「父よ、私の霊を御手に委ねます」と必死に祈るような、そんな祈りでも良いのです。
どんなボロボロな時にも、その私たちの霊を受け取ってくださる方がおられるのです。それは死の時だけではありません。今、ここにも、日頃の歩みの中でも、私の霊をその手に委ねることの出来るお方がいてくださいます。実際、この祈りは初代教会最初の殉教者であるステパノが、石打ちで殺される間際に祈った祈りです。きっと、イエスさまの祈りを真似たのでしょう。このステパノの祈りからも分かるように、イエスさまの祈りは、私たちのための祈りだったのです。
皆さん、これらのイエスさまの祈りを通して、私たちの祈りの筋道を知ることが出来ます。今週一週間、イエスさまの十字架を仰ぎながら毎日祈っていきますが、このイエスさまの四つの祈りを覚えながら祈っていきましょう。
【2022년 4월 10일 주일예배(요약판)】
“예수님의 기도” 누가복음 22장 39~46절
올해 수난 주 초에, 예수님의 십자가에 관련된 기도에 대해서 함께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먼저 십자가 전야의 기도입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전야에 “최후의 만찬”을 하신 후 교외의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라는 것은 정말로 잔혹한 처형 도구입니다. 손발에 못을 박고 알몸으로 십자가에 매달려 방치되는 형벌입니다. 거기에는 인간, 즉 우리의 잔혹함, 증오와 폭력성이 폭로되고 있습니다. 게다가 거기서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박힌 누구나 맛보는 고통 뿐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로서의 특별한 아픔, 우리 속죄의 희생이라는 고생도 맛보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에게는 상상도 설명할 수도 없는 터무니없는 아픔, 슬픔, 두려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결코 아픔에 아무렇지도 않은 초인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었습니다. 아픔, 괴로움, 슬픔을 느끼는 분이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그 마음을 여기에서도 정직하게 또 솔직하게 아버지 하니님께 기도하신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도 솔직하게 자신의 마음을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께 털어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럴듯한 기도, 신앙인 다운 기도가 좋은 것 같지만, 우리의 솔직한 마음을 고백하면 되는 것입니다. 새삼스러운 소원조차 그대로 기도해도 좋습니다. 미혹이나 불안마저도 그대로 기도하는 것이 용서되고 있음을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그것은 불신앙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대한 신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그렇기 떄문에 우리도 “그러나 내 원대로 마시옵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기도하면서, 그 한편으로 하나님께서는 더 고귀한 계획이 있을 것이다. 그 때문에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라고 기도할 때 우리는 자신의 어깨의 무거운 짐을 벗는 것입니다.
다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세 가지의 기도를 보고자 합니다.
먼저 유명한 이 기도입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십자가에 못박히시고 심한 아픔과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을 정도로 괴로워하셨을 때입니다. 그 몸이 뒤틀리는 격통에 더하여 사람들은 조롱하거나 예수님의 옷을 나눠 제비뽑기나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향해서 모든 단죄나 욕설을 내뱉을 수도 있었겠지요. 그 상황에서 어떤 허울 좋은 말이나 멋 부릴 그런 행동은 도저히 할 수 없을 정도의 괴로움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들이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
그것은 이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진심이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모든 폭력, 남을 조롱하고, 상처를 입히고, 죄인을 처벌하는 것이 정의라고 생각하는 그런 폭력적인 인간의 한복판에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서로 상처를 입히고 고독으로 가망이 없는 사람들과 하나가 되어 주셨습니다. 인간의 잘못이나 겉으로만 사는 생활 방식보다 그 밑바닥에 있는 무의식적인 우리의 존재 자체를 용서해 달라고, 아버지 하나님께 받아들여 주시기를 진심으로 원하고 계셨습니다. 그 십자가의 무서운 고민으로 이성과 겉모습이 벗겨진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용서를 위해 기도해 주신 것입니다.
여러분, 이 기도 속에 싸여 우리는 지금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지, 실은 우리도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래서 특히 이 수난 주 동안 자기 자신을 겸허하게 반성하면서 기도하고자 합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거기에 십자가의 주님께서 계십니다. 자신의 솔직한 마음을 하나님께 부딪치고 싶습니다. 만약 우리가 잘못된 기도를 드렸더라도 함께 계시는 예수님께서 중재 기도를 해 주실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의 기도를 드리는 것과 함께 우리도 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기도를 하고 중재 기도를 해서 축복을 빌고자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기도하신 두 번째 기도입니다.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27:46)
예수님에게 있어서 십자가의 격통보다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죄의 심판으로서의 죽음, 그리고 죽음의 저 편에 있는 음부의 세계의 고독,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독을 견딜 수 없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세주로서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받으셨습니다. 하나님께 버림받는 고독이 얼마나 무섭고 외롭고 견딜 수 없는 것인지 우리로서는 상상도 못합니다. 단지 그때 예수님께서는 그 외침을 짧게 외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 기도하거나 푸념하거나 원망하지도 않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 마지막으로 큰 소리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거기에 저는 한없는 위로를 찾게 됩니다..
때로는 하나님께 버림받은 것 같은 느낌이 될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라고 소리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버렸다.
그런 기도는 불신앙이라고 하나님을 화나게 만드는 게 아니냐? 이런 기도를 다른 사람이 들으면 실족하는 게 아니냐?, 그런 생각을 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을 그대로 기도하면 됩니다. 왜냐하면, 십자가의 예수님께서 우리의 목소리에 맞춰 함께 기도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함께 기도해 주시는 이상, 우리는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예수님께서 우리 대신 하나님께 버림받아 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나 대신에 하나님께 버림받으셨기 때문에 나는 결코 하나님께 버림받지 않는다고 그렇게 믿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서 마지막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것이 십자가 위에서의 세 번째 기도입니다.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눅 23:46)
“아버지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숨지셨을 때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말씀이 이것이었습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는 큰 소리로 외치셨습니다. 결코, 온화하게 또 조용하게도 아닙니다. 절규하셨습니다. 우리도 삶이 다하여 최후의 시간이 올 때, 조용하게 미소를 띄우며 “하나님 나의 영혼을 하나님 손에 부탁합니다” 라고 기도할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믿는 자다운 최후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런 평안을 가질 수 없거나 불안, 죽고 싶지 않다는 생각 등 여러가지 복잡한 생각에 사로잡힌다 해도 그래도 우리는 “아버지여, 제 영혼을 주께 맡기옵니다” 라고 필사적으로 기도하는 그런 기도라도 좋습니다.
아무리 엉망진창일 때라도 우리의 영혼을 받아 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그것은 죽을 때뿐만 아닙니다. 지금 여기에도, 평소의 삶 속에서도 우리 영혼을 그 손에 맡길 수 있는 분이 계시는 것입니다. 실제로 이 기도는 초대 교회 최초의 순교자인 스데반이 돌로 치는 형으로 살해당하기 직전에 기도한 기도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기도를 흉내냈을 겁니다. 이 스데반의 기도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의 기도는 우리를 위한 기도였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이러한 예수님의 기도를 통해서 우리가 드려야 할 기도의 도리를 알 수 있습니다. 이번 한 주 동안도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매일 기도해 갑니다만, 예수님의 이 네 가지의 기도를 기억하면서 기도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