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열매를 먹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이 나타내는 죄라고 하는 것은 아담이라는 특정한 인류의 조상이 죄를 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흙(아다마)”이라는 말에서 온 “인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면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먼 조상이라기보다는 모든 인간이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죄를 분명히 나타내 주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규칙인 율법을 준수할 수 없다, 그것은 얼마나 인간이 하나님을 어기는 자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하면, 13절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13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의 자각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14절에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14절) 라고 말합니다. 즉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인간에게는 죄가 있고 사망을 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죽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은 결국 죽습니다. 생물로서 멸망합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인간은 모두 다 죽습니다. 선한 사람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악행의 한계를 다한 것 같은 인간이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당연한 일, 언젠가는 나에게도 찾아오는 당연한 일입니다. 단지 이 당연한 일이 성경에서, 또 우리의 신앙에서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계를 보실 때에 이 인간 세계는 사망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계십니다.
원래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에덴 동산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세계입니다. 그것이 아담(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추방되어 사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라 하는 예수님께서 아주 친하게 지내셨던 남성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 나사로를 이미 무덤에 매장한지 나흘이나 지났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게 해 주셨습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시기 전에 나사로가 매장된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신 게 아닙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망이라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망의 근원에 있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여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정말로 관용하십니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 물론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같이 인간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보답하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수난 주 그리고 부활절 예배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망에 지배된 인간에 대해서 사랑을 가지고 보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15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은사”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이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절)
새 아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에 지배된 세계를 뒤집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절)
아담의 잘못된 행위로 세계에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것과 대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심판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죽음도 뒤집는 것입니다.
제가 크리스천이 된지 얼마 안 될 무렵에 친구한테서 “너는 왜 크리스천이 되었어?”라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그다지 깊은 의미 같은 건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그냥 어쩌다 보니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는데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서 “내가 죄 많은 인간이라 구원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야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친구는 “나도 내가 정말로 못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모든 종교에 흥미를 잃었다” 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 라고 반론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6절) 라는 바울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라”(19절) 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친구가 말한 “모든 종교에 흥미를 잃었다 ”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정말로 자기에게 절망할 때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수행 등으로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죄 많음은 제거될 리가 없다고 직감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인간에게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소위 “종교”를 가지고도 그것은 무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으면 인간은 올바른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죄라는 점에 있어서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육체적으로는 이윽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제 죄인인 자신에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죽음에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남음이 있는 넘치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 아담으로 들어온 죽음이 한 사람의 사람 그리스도에 의해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미래의 소망은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생명의 소망이 주어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나날을 기쁨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연결되고자 합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이 한 분과 함께 걸어 가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그 나날은 이미 하늘의 예루살렘인 하나님 나라를 먼저 취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기쁨의 날들인 것입니다.
2022年5月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ガラテヤ(갈라디아서) 6章 14節
〇讃 頌 讃頌歌 415(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5章 12~21節
〇説 教 「死の支配から恵みの支配へ(죽음의 지배로부터 은혜의 지배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86(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5月 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死の支配から恵みの支配へ」 ローマ書 5章 12~21節
創世記3章には、アダムとエバが神さまから食べてはいけないと言われていた木の実を食べた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エデンの園から人間が追放されたという有名な話です。12節に「一人の人によって罪が世に入り、罪によって死が入り込んだように、死はすべての人に及んだのです」(5:12)とあります。
創世記3章が示す罪というのは、アダムという特定の人類の祖先が罪を犯したと言うことではなくて、アダムという名前は「土(アダマ)」という言葉から来た「人間」を表すもので、人間は誰一人罪から免れている人は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アダムが遠い祖先というよりもすべての人間がアダム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パウロはその罪によって「死」が入り込んできたというのです。その罪を明らかに示してくれるのが律法でした。神の掟である律法を遵守出来ない、それは如何に人間が神さまに背く者であるのかを示しています。
では、律法が与えられる前はどうであったのかと言いますと、13節に「律法が与えられる前にも罪は世にあったが、律法がなければ、罪は罪と認められない」(13節)とあります。罪の自覚が出来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パウロは14節で「アダムからモーセまでの間にも、アダムの違反と同じような罪を犯さなかった人の上にさえ、死は支配しました。」(14節)と言っています。つまり、律法が与えられる前にも人間には罪があり、死を免れ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人間は、皆、死にます。人間だけではなく、命あるものは、やがて死にます。生物として滅びます。善人であれ悪人であれ、人間は、皆、死にます。善人が悲惨な死を遂げることもあれば、悪行の限りを尽くしたような人間がそこそこ平穏な死を迎えることもあります。だから、人間にとって死というのは、当たり前のこと、いつかは私にも訪れる当然のことです。ただ、この当然のことが、聖書において、また、私たちの信仰において、当然のことではないのです。神さまがこの人間世界を見る時に、この人間世界は死が支配していると見ておられるのです。
そもそも、創世記3章に記されているエデンの園は、神さまと共に永遠と生きる世界です。それがアダム(人間)の犯した罪によって、そこから追放され、死が支配する世界で生きるようになったのです。
ところで、ヨハネによる福音書11章にラザロの死と復活の出来事が記されています。ラザロという、イエスさまがとても親しくしていた男性が死んでしまったです。そのラザロを、すでに墓に葬られて四日もたっていたのですが、イエスさまは生き返らせました。ラザロを生き返らせられる前、ラザロが葬られていた墓の前でイエスさまは涙を流され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父なる神さまに祈り、ラザロを生き返らせることが出来るお方でした。それなのに、イエスさまはラザロの墓の前で涙を流されたのです。これは単にラザロの死を悲しんだのではありません。人間の死というもの、人間世界を支配している死というもの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憤り涙を流されたのです。そして、その死の根源にある人間の罪に対して、憤り涙を流されたのでした。
イエスさまは人間の罪に対して真に寛容です。人間の罪を裁くことなく、勿論、これまで語ってきたように人間を罪を鋭く指摘していますが、人間の罪に対して、死をもって報われるのではなく、むしろ御自身の命を献げ、十字架の死をもって、人間の罪を贖って下さいました。受難週、そして、イースター礼拝でお話しした通りです。イエスさまはこの死に支配された人間に対し、愛をもって報いて下さったのです。
これが15節でパウロが言う「恵みの賜物」です。15節です。「しかし、恵みの賜物は罪とは比較になりません。一人の罪によって多くの人が死ぬことになったとすれば、なおさら、神の恵みと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の恵みの賜物とは、多くの人に豊かに注がれるのです。」(15節)
新しいアダムとも言えるイエス・キリストは罪と死に支配された世界をひっくり返されました。すべては恵みの働きの中へと入れられました。
「一人の人の正しい行為によって、すべての人が義とされて命を得ることになったのです。」(18節)
アダムのあやまった行為によって世界に死が入り込んできました。それと対比してイエス・キリストの正しい行為によって命が与えられました。神さまの恵みは裁きより強く、神さまの恵みは死をも覆すのです。
ところで、クリスチャンになってまだ間もない頃、友人から「どうしてクリスチャンになったのだ」と聞かれたことがありました。その時の私には、それほど深い意味などなく、正直に言えば、何となくクリスチャンになったと言った方が良いかと思いますが、そんなことは言えませんので、「自分が罪深い人間で、救いが必要だと感じたから」と答えました。それを聞いた友人は、「自分も、自分が本当にだめで汚い人間だと心から思ったときがある。そしてその時から、すべての宗教に興味を失った。」と答えたのです。その時、私は「決してそうではない」と反論出来ませんでした。どう答えて良いのか分からなかったのです。
しかし、今なら「恵みが働くときには、いかに多くの罪があっても、無罪の判決が下される」(16節)というパウロの言葉を伝えたいと思うのです。「一人の従順によって多くの人が正しい者とされるのです」(19節)という言葉を伝えたいと思います。
その友人が言った「すべての宗教に興味を失った」というのも理解出来ます。なぜなら、人が本当に自分に絶望するような感覚を持つ時、一般的に考えられる宗教的な儀式や修行などでは、自分のどうしようもない罪深さというのは取り除かれるわけがないと直感的に感じるからです。
そもそも人間には自分の罪を自分でどうすることもできません。いわゆる「宗教」をもってしてもそれは無理でしょう。それは神さまの恵みによらなければどうしようもないのです。ただお一人の方、イエス・キリストによらなければ人間は正しい者とはされません。
私たちは確かに罪ということにおいてアダムの子孫です。そして、確かに肉体的にはやがて死を迎えます。しかし、もう罪人である自分に絶望する必要はありません。死に怯える必要はありません。罪が増したところに恵みが満ちあふれたからです。罪に対して余りある恵みがあるからです。永遠の命が与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一人の人アダムによって入り込んで来た死が、一人の人キリストによって命、永遠の命に変えられました。一人の人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私たちは死から命へ移されたのです。永遠の命に写されました。
そして、永遠の命というのは、遠い未来の話ではありません。もちろん未来の希望は確かにあります。しかし、今もその命の希望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私たちは日々を喜びをもって生きていくことが出来るのです。
私たちはただ一人の方、キリストに信頼し、つながっていきたいと思うのです。良い時も悪い時も、お一人の方と歩みたいのです。キリストと共に歩むその日々は、すでに天のエルサレムである神の国の先取りであり、また神の国へ向かう喜びの日々なのです。
【2022년 5월 1일 주일예배(요약판)】
“죽음의 지배로부터 은혜의 지배로” 로마서 5장 12~21절
창세기 3장에는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먹으면 안 된다고 말씀하신 열매를 먹은 것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에덴 동산에서 인간이 추방되었다는 유명한 이야기입니다. 12절에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5:12) 라고 되어 있습니다.
창세기 3장이 나타내는 죄라고 하는 것은 아담이라는 특정한 인류의 조상이 죄를 범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아담이라는 이름은 “흙(아다마)”이라는 말에서 온 “인간”을 나타내는 것으로, 인간은 어느 누구도 죄로부터 면하고 있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담이 먼 조상이라기보다는 모든 인간이 아담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그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입니다. 그 죄를 분명히 나타내 주는 것이 율법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규칙인 율법을 준수할 수 없다, 그것은 얼마나 인간이 하나님을 어기는 자인지를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는 어떠했는가 하면, 13절에 “죄가 율법 있기 전에도 세상에 있었으나 율법이 없었을 때에는 죄를 죄로 여기지 아니하였느니라”(13절) 라고 되어 있습니다. 죄의 자각을 할 수 없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14절에서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하였나니”(14절) 라고 말합니다. 즉 율법이 주어지기 전에도 인간에게는 죄가 있고 사망을 면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모두 다 죽습니다. 인간뿐만 아니라 생명이 있는 것은 결국 죽습니다. 생물로서 멸망합니다. 선인이든 악인이든, 인간은 모두 다 죽습니다. 선한 사람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하고, 악행의 한계를 다한 것 같은 인간이 평온한 죽음을 맞이하기도 있습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죽음은 당연한 일, 언젠가는 나에게도 찾아오는 당연한 일입니다. 단지 이 당연한 일이 성경에서, 또 우리의 신앙에서 당연한 일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 인간 세계를 보실 때에 이 인간 세계는 사망이 지배하고 있다고 보고 계십니다.
원래 창세기 3장에 기록되어 있는 에덴 동산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사는 세계입니다. 그것이 아담(인간)의 범죄로 말미암아 거기에서 추방되어 사망이 지배하는 세계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과 부활의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사로라 하는 예수님께서 아주 친하게 지내셨던 남성이 죽어 버린 것입니다. 그 나사로를 이미 무덤에 매장한지 나흘이나 지났는데 예수님께서 다시 살게 해 주셨습니다.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시기 전에 나사로가 매장된 무덤 앞에서 예수님께서는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나사로를 다시 살게 하실 수 있는 분이셨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무덤 앞에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나사로의 죽음을 슬퍼하신 게 아닙니다. 인간의 죽음이라는 것, 인간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사망이라는 것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여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그리고 그 사망의 근원에 있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분노하여 눈물을 흘리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인간의 죄에 대해서 정말로 관용하십니다. 인간의 죄를 심판하시는 게 아니라, 물론 지금까지 말씀드린 것 같이 인간의 죄를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인간의 죄에 대해서 죽음으로 보답하시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자기 자신의 생명을 바치시고 십자가의 죽음으로 인간의 죄를 속죄해 주셨습니다. 수난 주 그리고 부활절 예배에서 말씀드린 대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사망에 지배된 인간에 대해서 사랑을 가지고 보답해 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15절에서 바울이 말하는 “은사”입니다. 15절입니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이 아니하니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15절)
새 아담이라고도 할 수 있는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죄와 사망에 지배된 세계를 뒤집으셨습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18절)
아담의 잘못된 행위로 세계에 사망이 들어왔습니다. 그것과 대비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생명이 주어졌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심판보다 강하고 하나님의 은혜는 죽음도 뒤집는 것입니다.
제가 크리스천이 된지 얼마 안 될 무렵에 친구한테서 “너는 왜 크리스천이 되었어?”라고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저에게는 그다지 깊은 의미 같은 건 없었고, 솔직히 말하면 그냥 어쩌다 보니 크리스천이 되었다고 말하는 게 맞는데 그렇게는 말할 수 없어서 “내가 죄 많은 인간이라 구원이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이야 ”라고 대답했습니다. 그것을 들은 친구는 “나도 내가 정말로 못되고 더러운 인간이라고 진심으로 생각할 때가 있다. 그리고 그 때부터 모든 종교에 흥미를 잃었다” 라고 했습니다. 그때 저는 “결코 그렇지 않다” 라고 반론할 수 없었습니다. 어떻게 대답하면 좋을지 몰랐던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라면 “은사는 많은 범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에 이름이니라”(16절) 라는 바울의 말씀을 전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라”(19절) 라는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그 친구가 말한 “모든 종교에 흥미를 잃었다 ”는 것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정말로 자기에게 절망할 때엔 일반적으로 생각되는 종교적인 의식이나 수행 등으로는 자신의 어쩔 수 없는 죄 많음은 제거될 리가 없다고 직감적으로 느끼기 때문입니다.
애당초 인간에게는 자신의 죄를 스스로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소위 “종교”를 가지고도 그것은 무리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지 않으면 어쩔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한 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으면 인간은 올바른 의인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확실히 죄라는 점에 있어서 아담의 후손입니다. 그리고 확실히 육체적으로는 이윽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제 죄인인 자신에게 절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죽음에 겁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기 때문입니다. 죄에 대해서 남음이 있는 넘치는 은혜가 있기 때문입니다. 영원한 생명이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사람 아담으로 들어온 죽음이 한 사람의 사람 그리스도에 의해 영원한 생명으로 바뀌었습니다. 한 사람의 사람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진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생명이라는 것은 먼 미래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물론 미래의 소망은 확실히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그 생명의 소망이 주어지고 있으므로 우리는 나날을 기쁨을 가지고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한 분, 그리스도만을 신뢰하고, 연결되고자 합니다. 좋을 때도 나쁠 때도 이 한 분과 함께 걸어 가고자 합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그 나날은 이미 하늘의 예루살렘인 하나님 나라를 먼저 취하는 것이며, 또 하나님 나라로 향하는 기쁨의 날들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