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지금까지 “신앙의인”에 대해서 말해 왔습니다만, 오늘의 6장부터 7장의 마지막까지 부분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이 “성화”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죄나 더러움이 깨끗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덕을 목표로 해 윤리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어렵게 들릴지도 모릅니다만, 이 “성화”를 생각하는 데 우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사는 것을 용서받은 이 압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살게 되었다는 이 구원입니다.
바울은 이 구원 가운데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2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죄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바울은 또 4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4절)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세례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 우리 교회에서 거행하는 세례는 적례(滴礼)이므로 자기가 감각적으로 “죽었다”고 느낄만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었다”고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심판받고 죽어야 했던 인간이 세례 때에 “죽었다”고 하나님께서는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죄에 죽는다”는 것이 필요하냐면, 4절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절)
세례에 있어서 사람이 죽었다고 간주되는 것은 새 생명에 살기 위함입니다. 한 번 죽고 새롭게 태어난다, 또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였으므로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밤에 남몰래 예수님을 만나러 와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는 없느니라”(요3:3) 라고.
니고데모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충족되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결여된 곳, 자신의 부족한 곳을 어떻게든 보완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 라고 반론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산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의 연장선 상에, 혹은 어떠한 레벨업을 한 곳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 3:5)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라는 것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한 번 죽고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세례에 대해서 나무를 밑동으로부터 끊어 뜨리는 것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뿌리로부터 끊고 접붙이기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접붙이기 하느냐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입니다. 죄의 뿌리를 잘라낸다, 즉 생물로서는 일단 생명을 끊고 그리고 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3절에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3절) 이라고 쓰여 있고, 8절에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살 줄 믿노니”(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께 접목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뿌리로부터 끊어져 있는데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죄를 범합니다. 반복해서 범합니다. 그 때마다 아아, 나는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이 되어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접붙이기 되었을 터인데,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여전히 죄 많고 한심한 모습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만 죄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죄는 다시 인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잘)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틀림없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남아 있습니다. 옛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 죽어야 하는 옛 사람을 죄는 지배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례를 받아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때마다 나는 조금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새 사람의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한 번 죽고 새로워진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몸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구약 성서 시대부터 동물을 바칠 때도 상처가 있는 동물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죄에 대해서 죽고 새롭게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결된 새로운 몸을 받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올바른 몸을 받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몸을 입은 새 사람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13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죽고 새롭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 때, 죄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나 전도사 또 신학생을 헌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나 신학생만이 헌신자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연결된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봉사를 한다든가 전도를 한다든가 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그리고 나날을 바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최선의 삶의 방식입니다.
자기를 드린다고 말하면 뭔가 자기를 잃어버리는 멸사봉공과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이기가 된 우리는 자신의 개성이 활용되어 진정한 인생의 사명에 살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기쁨이며 크리스천의 나날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
2022年5月8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6章 14節
〇讃 頌 讃頌歌 456(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6章 1~14節
〇説 教 「新しい命に生きる(새 생명에 산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13(1, 4, 5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5月 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新しい命に生きる」 ローマ書 6章 1~14節
パウロは、これまで「信仰義認」について語ってきましたが、今日の6章から7章の終わりまで、義とされたクリスチャンがどのように生きるべきかを語っております。これを「聖化」と言います。
この「聖化」というのは、聖霊の働きによって私たちの罪や汚れがきよめられ、キリストの徳をめざして倫理的・信仰的により高い次元へ上昇することを意味します。ちょっと難しく聞こえるかもしれませんが、この「聖化」を考える上で、まず重要なのは、私たちがどのように救われたか、ということです。
私たちは、ただ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罪赦され、キリストの復活によって永遠の命に生きることも許された、この圧倒的なキリストの恩恵によって、今、生かされているという救いです。
パウロはこの救いの中で、「罪の中にとどまるべきだろうか。決してそうではない」(1節)と言っています。そして、「罪に対して死んだわたしたちが、どうして、なおも罪の中に生き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2節)と言っています。
パウロはここで、私たちが「罪に対して死んだ」と言っていますが、罪が無くなった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罪の支配から解放されたという意味です。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私たちは罪に対して死にました。
パウロはまた4節で「わたしたちは洗礼によってキリストと共に葬られ、その死にあずかるものとなりました。」と言います。私たちが行っている洗礼というのは、パウロが言います「キリストと共に葬られ、その死にあずかるものとされる」ことを体現するものなのです。
ただ、私たちの教会で行っている洗礼は、滴礼ですので、自分が感覚的に「死んだ」と感じるようなものではな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神さまは「死んだ」とみなされるのです。
本来は、神さまによって裁かれ、死な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人間が、洗礼の時に「死んだ」と神さまはみなし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です。
なぜ、このように「罪に死ぬ」ということが必要かと言いますと、4節です。「それは、キリストが御父の栄光によって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新しい命に生きるためなのです。」(4節)
洗礼において人が死んだとみなされるのは、新しい命に生きるためなのです。一度死んで新しく生まれる、また復活をするということです。
ところで、ヨハネによる福音書3章にニコデモという人が出て来ます。ニコデモは、ファリサイ派の議員でユダヤ人指導者でありましたので、人に見られないように夜にこっそりとイエスさまに会いにきて、教えを請いました。その時、イエスさまはニコデモにおっしゃいました。「はっきり言っておく。人は、新たに生れなければ、神の国を見ることはできない」(ヨハネ3:3)と。
ニコデモまじめな人でした。一生懸命律法を守っていた人です。それでも自分の信仰に対して満たされないもの感じていて、自分の欠けた所、自分の足りないところをどうにかして補えば、神の国に入れるのではないかと考えておりました。そのニコデモ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新たに生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おっしゃったのです。ニコデモは「年をとった者が、どうして生まれることが出来ましょう。もう一度母親の胎内に入って生まれ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ヨハネ3:4)と反論します。
神の国に生きるということは、現在の自分の延長線上に、あるいはなんらかのレベルアップをしたところにあ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新しく生まれ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うことです。そのためイエスさまはニコデモに「はっきり言っておく。だれでも水と霊によって生れなければ、神の国に入ることはできない」(ヨハネ3:5)とおっしゃったのです。「水と霊によって」というのは洗礼を指します。ですから、洗礼は単なる儀式ではなく、一度死に、水と霊によって新しく生きるためのものなのです。
ある牧師任は、洗礼を植木を根元で断ち切ることだとおっしゃっています。罪の根っこから断ちきって、接ぎ木をするのだというのです。何に接ぎ木をするのかと言いますと、イエス・キリストにです。罪の根っこを切り取って、すなわち生き物としてはいったん命を断って、それから主イエス・キリストにつながれる、というのです。
3節に「キリスト・イエスに結ばれるために洗礼を受けたわたしたち」とあり、8節にある「わたしたちは、キリストと共に死んだのなら、キリストと共に生きることになるとも信じます」とありま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共に死に、キリストと共に、キリストに接ぎ木をされて生きるのです。
それでも、罪の根っこから切り離されているのに、洗礼を受けたキリスト者であっても、罪を犯します。繰り返し犯します。そのたびに、ああ自分はダメだなあと思います。クリスチャンになっても何も変わっていないとすら感じます。確かにキリストに接ぎ木されたはずなのに、自分の目に見える姿は、何も変わっていないような、相変わらず罪深く情けない姿なのです。
先程、言いましたように、私たちは罪に対して死んだのであって、罪が死んだわけではありません。罪はふたたび人間を支配しようとします。ですから12節で「従って、あなたがたの死ぬべき体を罪に支配させて、体の欲望に従うようなこと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とパウロは言っ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は洗礼を受けて、確かに神さまの目から見て死にました。しかし、なお肉体は残っています。古い体は残っているのです。その古い死ぬべき体を罪は支配しようとやってくるのです。それでも、私たちは洗礼を受けて、目には見えませんが、新しい体を頂いているのです。私たちは罪を犯すたびに、私はちっとも変っていないと思います。しかし、それは古い体に対してのことなのです。私たちは新しい体に目を向けるべきなのです。洗礼を受けた者は、一度死んで新しくされた体において生きるのです。
「かえって、自分自身を死者の中から生き返った者として神に捧げ、また、五体を義のための道具として神に捧げなさい」(13節)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本来、罪によって汚れた体を神さまに捧げることはできません。旧約聖書の時代から動物を奉納するときも傷のある動物を捧げることはできませんでした。しかし、一度罪に対して死んで新しく生きる者はキリストとつながれた新しい体をいただいています。聖く正しい体を頂いています。その新しい体は神さまに捧げることが赦され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パウロは「五体を義のための道具として神に捧げなさい」(13節)と言っているのです。一度死んで新しく生きる者は、神さまに自分を捧げて生きるのです。それが新しい生き方です。神さまに捧げて生きる時、罪は私たちを支配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
ところで牧師や伝道師、また神学生のことを献身者と言います。でも、牧師や神学生だけが献身者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に結ばれた者は皆、誰だって、神さまに献身して生きる人なのです。全てのクリスチャンが神さまに自分を捧げて生きるのです。
それは単に教会の奉仕をするとか伝道をするとかそういうことだけではありません。一人一人がそれぞれの場で、それぞれのあり方で、神さまに自分の体を、そして日々を捧げて生きていきます。それが、罪から自分を守る最善の生き方なのです。
自分を捧げるというと、何か自分をなくすような滅私奉公のようなイメージを持たれるかもしれませんが、そうではありません。キリストに接ぎ木をされた私たちは、自分の個性が生かされ、本当の人生の使命に生かされていくのです。それがクリスチャンの喜びであり、クリスチャンの日々なのです。まさに恵みの中に生きていく生き方です。
【2022년 5월 8일 주일예배(요약판)】
“새 생명에 산다” 로마서 6장 1~14절
바울은 지금까지 “신앙의인”에 대해서 말해 왔습니다만, 오늘의 6장부터 7장의 마지막까지 부분에서는 의롭다 하심을 받은 크리스천이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성화”라고 합니다.
이 “성화”는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우리의 죄나 더러움이 깨끗하게 되고 그리스도의 덕을 목표로 해 윤리적으로 또 신앙적으로 보다 높은 차원으로 상승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조금 어렵게 들릴지도 모릅니다만, 이 “성화”를 생각하는 데 우선 중요한 것은 우리가 어떻게 구원을 받았느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고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아 영원한 생명에 사는 것을 용서받은 이 압도적인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아 지금 살게 되었다는 이 구원입니다.
바울은 이 구원 가운데 “죄에 거하겠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1-2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2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여기서 우리가 “죄에 대하여 죽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죄가 없어졌다는 것은 아닙니다.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바울은 또 4절에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4절) 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행하는 세례는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되었다”는 것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단, 우리 교회에서 거행하는 세례는 적례(滴礼)이므로 자기가 감각적으로 “죽었다”고 느낄만한 것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죽었다”고 간주하시는 것입니다.
본래는 하나님으로 인하여 심판받고 죽어야 했던 인간이 세례 때에 “죽었다”고 하나님께서는 간주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왜, 이렇게 “죄에 죽는다”는 것이 필요하냐면, 4절입니다.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4절)
세례에 있어서 사람이 죽었다고 간주되는 것은 새 생명에 살기 위함입니다. 한 번 죽고 새롭게 태어난다, 또 부활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3장에 니고데모라는 사람이 나옵니다. 니고데모는 바리새인이며 유대인의 지도자였으므로 남들이 보지 못하도록 밤에 남몰래 예수님을 만나러 와서 가르침을 청했습니다. 그 때,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는 없느니라”(요3:3) 라고.
니고데모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열심히 율법을 지키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신앙에 대해서 충족되지 않는 것을 느끼고, 자신의 결여된 곳, 자신의 부족한 곳을 어떻게든 보완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거듭나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니고데모는 “사람이 늙으면 어떻게 날 수 있사옵나이까 두 번째 모태에 들어갔다가 날 수 있사옵나이까”(요3:4) 라고 반론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산다는 것은 현재의 자신의 연장선 상에, 혹은 어떠한 레벨업을 한 곳에 있다는 것이 아니라 “거듭나지 아니하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예수님께서는 니고데모에게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한 3:5) 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라는 것은 세례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세례는 단순한 의식이 아니라 한 번 죽고 물과 성령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살기 위한 것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세례에 대해서 나무를 밑동으로부터 끊어 뜨리는 것 같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죄의 뿌리로부터 끊고 접붙이기를 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무엇에 접붙이기 하느냐면 예수 그리스도에게입니다. 죄의 뿌리를 잘라낸다, 즉 생물로서는 일단 생명을 끊고 그리고 나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 연결된다는 것입니다.
3절에 “그리스도 예수와 합하여 세례를 받은 우리는”(3절) 이라고 쓰여 있고, 8절에는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와 살 줄 믿노니”(8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그리스도께 접목되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뿌리로부터 끊어져 있는데 세례를 받은 그리스도인이라도 죄를 범합니다. 반복해서 범합니다. 그 때마다 아아, 나는 안 되겠구나라고 생각합니다. 크리스천이 되어도 변한 것이 없다는 것을 느낍니다. 틀림없이 그리스도께 접붙이기 되었을 터인데, 자신의 눈에 보이는 모습은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여전히 죄 많고 한심한 모습입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 같이 우리는 죄에 대해서 죽었습니다만 죄가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죄는 다시 인간을 지배하려고 합니다. 그래서 12절에서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12잘)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세례를 받고 틀림없이 하나님의 눈으로 볼 때 죽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육체는 남아 있습니다. 옛 사람이 남아 있습니다. 그 죽어야 하는 옛 사람을 죄는 지배하려고 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세례를 받아 눈에는 보이지 않습니다만, 새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죄를 범할 때마다 나는 조금도 변한 게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옛 사람에 대한 것입니다. 우리는 새 사람의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세례를 받은 사람은 한 번 죽고 새로워진 몸으로 사는 것입니다.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13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본래 죄로 인하여 더러워진 몸을 하나님께 바칠 수 없습니다. 구약 성서 시대부터 동물을 바칠 때도 상처가 있는 동물을 바칠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한 번 죄에 대해서 죽고 새롭게 사는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결된 새로운 몸을 받고 있습니다. 거룩하고 올바른 몸을 받고 있습니다. 그 새로운 몸을 입은 새 사람은 하나님께 바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은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13절)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번 죽고 새롭게 사는 사람은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새로운 삶입니다. 하나님께 드리면서 살 때, 죄는 우리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목사나 전도사 또 신학생을 헌신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목사나 신학생만이 헌신자는 아닙니다. 그리스도께 연결된 사람은 모두 다 하나님께 헌신하면서 사는 사람입니다. 모든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자신을 드리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교회의 봉사를 한다든가 전도를 한다든가 하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각자의 장소에서 각자의 방법으로 하나님께 자신의 몸을 그리고 나날을 바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죄로부터 자기를 지키는 최선의 삶의 방식입니다.
자기를 드린다고 말하면 뭔가 자기를 잃어버리는 멸사봉공과 같은 이미지를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 접붙이기가 된 우리는 자신의 개성이 활용되어 진정한 인생의 사명에 살게 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크리스천의 기쁨이며 크리스천의 나날입니다. 바로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살아가는 삶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