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절)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그것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아니, 적당한 생활 방식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서 이미 살고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오늘의 성서 부분 서두에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범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15절)라고 쓰여 있습니다.이것은 지난주 논의 되었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용서되고,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다면, 아무리 죄를 범해도 용서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억지 이론에 대해 대응하고 있습니다.왜 이러한 억지 이론이 나올까요?
그것은 이전에 자기가 죄의 노예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죄에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3장 9절에는“죄 아래 있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죄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를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부터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비참한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해방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예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서 이윽고 왕좌에 오르실 때 자신의 아들들을 거두어 주시길 원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듣고 다른 제자들은 분이 여겼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분이 여겼다는 것은 두 사람만 남보다 앞지르지 말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윗사람이 되고 싶다고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종이라는 말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훌륭한 자가 되고 싶다면 종이 되라, 노예가 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노예가 되셨습니다. 소나 말을 치는 채찍보다 더 심한 유리 파편이 붙은 채찍으로 맞으시고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셔서 사실 그것만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로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의 욕설 가운데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두 손과 발을 못으로 박히시고 격통 가운데 서서히 죽어 가는 죽음을 노예로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께서 우리 대신 노예가 되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노예가 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때까지 노예였던 것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한 사람의 죄인이 발견될 때까지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룩15:1-7) 우리는 모두 합쳐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의 손에 의해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손을 평생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날을 상기하며 처음의 신앙으로 되돌아가서 늘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절) 라고 말합니다. 거룩함에 이른다는 것은 성화, 즉 성화하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여생이라”(22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즉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너희들은 이미 성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이라는 말에는 “성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가려 내준다는 것입니다.
성찬식 때에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받습니다만 그 떡과 포도주는 특별한 곳에서 구입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전날에 슈퍼에 가서 보통 매장에 진열된 상품 중에서 골라서 사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배의 성찬식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써 주시므로 성스러운 떡과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 가운데 우리는 주 예수님의 성스러운 몸과 피로서 받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떡도 신성한 포도주도 아닙니다. 그냥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빵이나 떡처럼 어디에나 있는 보통의 죄인입니다. 외관으로는 분간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별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가려 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거룩함에 이른다”고 말하는 성화는 우리가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성별해 주신다는 이 상태의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룩하게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우리가 성별 된다는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향합니다. 죄 가운데 머무는 자는 죽음으로 향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23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죽음”인지 “영원한 생명”인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면서 한층 더 죄를 되풀이하여 죽음으로 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함에 이르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향합니다. 만약 자기가 잘못된 방향에 향하고 있다면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우리는 빈 깡통을 내던지거나 옆 차에 폐를 끼치거나 할 수 없습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라고 하면 듣기 싫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노예일 때 우리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마11:2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인간을 혹사시키는 끔찍한 주인이 아닙니다. 그 멍에는 가볍습니다. 즉 우리는 죄의 노예였을 때보다 더 편안하고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날은 결실을 맺는 생활인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우리는 방향을 바꿔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위의 풍경은 크게 바뀌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도 바뀌고 있지 않은 것 같이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바꾼 보람이 없는 것 같이 보여도 열매를 맺는 나날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 가운데 우리는 이미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방향이 바뀐 새로운 사람으로서 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눈빛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죄투성이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에 부응하면서 사는 자로 분류되는 것입니다.
2022年5月1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20章 26~27節
〇讃 頌 讃頌歌 278(1, 2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6章 15~23節
〇説 教 「あなたは誰の奴隷ですか?(당신은 누구의 노예입니까?)」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58(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5月 1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は誰の奴隷ですか?」 ローマ書 6章 15~23節
「あなたがたは、かつては罪の奴隷でしたが、今は伝えられた教えの規範を受け入れ、それに心から従うようになり、罪から解放され、義に仕えるようになりました。」(17-18節)
キリストを信じて律法から解放され、罪を赦された者はそれにふさわしい生き方をするの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いや、ふさわしい生き方を私たちが意識的に選択するのではなく、もうそうせざるを得ない者としてすでに生かされているはずだとパウロは言うのです。今日の聖書箇所の冒頭に「私たちは律法の下ではなく恵みの下にいるのだから罪を犯してよいということでしょうか」(15節)とあります。これは先週、議論となっていた「罪が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赦されて、人間がキリストの恵みの下にあるのなら、いくら罪を犯しても赦されるのではないか」という屁理屈に対して応えているのです。なぜこのような屁理屈がでてくるのでしょうか?
それは、かつて自分が罪の奴隷であったということがわか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です。罪の奴隷というほどに私たちは罪に支配されていたのです。ローマ書3章9節には、「罪の下にあった」とあります。私たちは罪の下にあったのです。私たちは自分で罪をコントロールはできないのです。罪が上から私たちを支配していたのです。私たちはみじめな罪の奴隷でした。でもそれには気づくことができなかったのです。
もうひとつ大事なことは、罪の奴隷であった私たちを解放してくださるために、神の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が奴隷になってくださったということです。
マタイによる福音書20章でイエスさまの弟子であるヤコブとヨハネの母が、イエスさまがやがて王座につかれる時、自分の二人の息子を取り立てて欲しいと願う場面がありました。それを聞いて他の弟子たちは怒りました。他の弟子たちが怒ったのは、二人だけぬけがけするなということです。と、いうことは、他の弟子たちも同じようなことを考えていたということです。自分たちが偉くなりたい、上になりたいと願っていたわけです。それに対して、イエスさまは「あなたがたの中で、偉くなりたい者は、皆に仕える者になり、いちばん上になりたい者は、皆の僕になりなさい」(マタイ20:)と言われました。ここで言われる僕というのが奴隷という意味の言葉です。偉くなりたい者は僕になれ、奴隷になれとイエスさまはおっしゃっているのです。
奴隷になるというのは、誰だって嫌でしょう。しかし、実際にイエスさまは奴隷になられました。牛馬を打つ鞭よりもひどいガラスの破片がついた鞭で打たれ、全身傷だらけになり、それで死んでもおかしくありませんでした。そんな状態で十字架を担ぎ、人々の罵声の中、ゴルゴタの丘まで歩まれました。そして、十字架に両手両足釘で打ち付けられ、激痛の中、じわじわと死んでいく死を、奴隷として受け入れられました。イエスさまご自身が私たちの代わりに奴隷となって仕えてくださり、神さまの裁きを受けてくだいました。それゆえに、私たちは罪を赦されたのです。
主イエス・キリストご自身が奴隷となってくださり、私たちに救いの恵みが与えられるまで、私たちはそれまで奴隷であったことすら気づかなかったのです。
主イエスさまは、99匹の羊を残して、一人罪人が見つかるまで探してくださるお方です。(ルカ15:1-7) 私たちは、十把一絡げに救われているのではなく、一人一人イエスさまの手によって救われているのです。その救いの御手を生涯忘れてはならないのです。私たちは、十字架の血に救われた日を思い起こし、初めの頃の信仰に立ち帰って、いつも悔い改め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パウロは「かつて自分の五体を汚れと不法の奴隷として、不法の中に生きていたように、今これを義の奴隷として献げて、聖なる生活を送りなさい」(19節)と言います。聖なる生活を送るというのは、聖化、つまり聖化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
また、パウロは「あなたがたは、今は罪から解放されて神の奴隷となり、聖なる生活の実を結んでいます」(22節)と言っています。
「聖なる生活の実を結んでいる」つまり、信仰によって義と認められたあなたがたは、すでに聖化さ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この「聖なる」という言葉には、「聖別する」という意味があります。そして、この「聖別する」というのは、神さまのものとして取り分けるということです。
聖餐式の時に、私たちはパンとぶどう酒を頂きますが、あのパンとぶどう酒は特別なところで購入し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私が前日にスーパーに行って、普通に売り場に並んでいる商品の中から選んで買ってきたものです。しかし、それを、礼拝の聖餐式で主イエス・キリストが用いてくださるので、聖なるパンとぶどう酒となるわけですね。それを聖霊の働きの中で、私たちは主イエスさまの聖なる体と血として頂くのです。
私たちも同じです。私たちは、特別なパンでも神聖なぶどう酒でもありません。普通に陳列されたパンのように、どこにでもいる普通の罪人です。外見では見分けもつきません。しかし、主イエス・キリストが聖別してくださるのです。救いに取り分けてくださり、この私たちを用いてくださるのです。だから、私たちは聖なる者たちであるのです。
ですから、聖書が「聖なる生活」、という言葉で示す聖化というのは、私たちが倫理的に正しく生きる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主なる神さまが私たちを選び、聖別してくださるという、この状態のこと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が聖くなろうとするのではなくて、神さまによって、私たちが聖くされるのです。罪深い私たちが聖別される、これが聖化ということです。
キリストによって罪赦された者は、永遠の命へと向かいます。罪の中にとどまるものは死へと向かいます。「罪が支払う報酬は死です」(23節)とパウロは言っています。目的地が「死」なのか「永遠の命」なのか、それが大事なことなのです。永遠の命に向かいながら、さらに罪を重ねて死へと向かうことはできません。私たちは聖なる生活を送りながら、永遠の命へ向かいます。もし自分が間違った方向に向いていたら、向きを変える必要があります。神さまに向かって心の向きを変えるのです。永遠の命に向かう道路で、私たちは空き缶を投げ捨てたり、隣の車に迷惑をかけたりはできません。
罪の奴隷であった私たちは、今や神さまの奴隷となりました。奴隷というと嫌な響きですが、神さまの奴隷である時、私たちは安心して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わたしは柔和で謙遜な者だから、わたしの軛を負い、わたしに学びなさい」(マタイ11:29)と言われました。私たちの主人である神さまは柔和で謙遜なお方です。血も涙もなく人間をこき使うようなひどい主人ではありません。その軛は軽いのです。つまり私たちは罪の奴隷であった時より、軽やかにのびのびと生きていくことができます。そして、その日々は実を結ぶ生活なのです。
洗礼を受け、私たちは向きを変えて生きています。それでも周りの風景は大きく変わってはいないように見えるかもしれません。私たち自身も変わっていないように思える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その道は既に永遠の命へと向かっています。変わり映えしないように見えても、実を結ぶ日々が与えられています。神さまがそのようにしてくださっているのです。それが恵みです。その恵みの中に私たちはすでに生かされています。
そして、神さまご自身が、私たち一人一人を死から命へと向きが変えられた、新しい人間として見てくださっています。その神さまのまなざしを覚える時、私たちは罪にまみれて生きるのではなく、その神さまの愛と信頼に応えて生きる者とされるのです。
【2022년 5월 15일 주일예배(요약판)】
“당신은 누구의 노예입니까?” 로마서 6장 15~23절
“너희가 본래 죄의 종이더니 너희에게 전하여 준 바 교훈의 본을 마음으로 순종하여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17-18절)
그리스도를 믿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죄를 사함 받은 사람은 그것에 걸맞은 삶을 사는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아니, 적당한 생활 방식을 우리가 의식적으로 선택하는 게 아니라, 이미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는 사람으로서 이미 살고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합니다.오늘의 성서 부분 서두에 “우리가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범해도 된다는 것입니까? ”(15절)라고 쓰여 있습니다.이것은 지난주 논의 되었던 “죄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의해서 용서되고, 인간이 그리스도의 은혜 아래에 있다면, 아무리 죄를 범해도 용서되는 것은 아닌가 ”라는 억지 이론에 대해 대응하고 있습니다.왜 이러한 억지 이론이 나올까요?
그것은 이전에 자기가 죄의 노예였다는 것을 모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죄의 노예라고 할 정도로 우리는 죄에 지배되고 있었습니다. 로마서 3장 9절에는“죄 아래 있었다”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는 죄 아래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죄를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위에서부터 죄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비참한 죄의 노예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하나 더 중요한 것은 죄의 노예였던 우리를 해방해 주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노예가 되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0장에서 예수님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서 이윽고 왕좌에 오르실 때 자신의 아들들을 거두어 주시길 원하는 장면이 있었습니다. 그것을 듣고 다른 제자들은 분이 여겼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분이 여겼다는 것은 두 사람만 남보다 앞지르지 말라는 것인데 그렇다면 다른 제자들도 같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훌륭한 사람이 되고 싶다, 윗사람이 되고 싶다고 원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제자들에게 예수님께서는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마20:26-27)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씀하신 종이라는 말은 노예라는 뜻입니다. 훌륭한 자가 되고 싶다면 종이 되라, 노예가 되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신 것입니다.
노예가 된다는 것은 누구나 싫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께서는 노예가 되셨습니다. 소나 말을 치는 채찍보다 더 심한 유리 파편이 붙은 채찍으로 맞으시고 전신이 상처투성이가 되셔서 사실 그것만으로 죽어도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상태로 십자가를 지시고 사람들의 욕설 가운데 골고다 언덕까지 걸어가셨습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두 손과 발을 못으로 박히시고 격통 가운데 서서히 죽어 가는 죽음을 노예로서 받아들이셨습니다. 예수님 자신께서 우리 대신 노예가 되셔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주셨습니다. 그 때문에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자신께서 노예가 되시고 우리에게 구원의 은혜가 주어질 때까지 우리는 그때까지 노예였던 것조차 깨닫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는 아흔아홉 마리의 양을 들에 두고 한 사람의 죄인이 발견될 때까지 찾아 주시는 분이십니다. (룩15:1-7) 우리는 모두 합쳐서 구원받은 게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 예수님의 손에 의해 구원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구원의 손을 평생 잊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피로 구원받은 날을 상기하며 처음의 신앙으로 되돌아가서 늘 회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전에 너희가 너희 지체를 부정과 불법에 내주어 불법에 이른 것 같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19절) 라고 말합니다. 거룩함에 이른다는 것은 성화, 즉 성화하라는 것입니다.
또 바울은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여생이라”(22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즉 신앙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은 너희들은 이미 성화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 “거룩함”이라는 말에는 “성별한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 “성별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서 가려 내준다는 것입니다.
성찬식 때에 우리는 떡과 포도주를 받습니다만 그 떡과 포도주는 특별한 곳에서 구입하는 게 아닙니다. 제가 전날에 슈퍼에 가서 보통 매장에 진열된 상품 중에서 골라서 사 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예배의 성찬식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써 주시므로 성스러운 떡과 포도주가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의 역사 가운데 우리는 주 예수님의 성스러운 몸과 피로서 받는 것입니다.
우리도 똑같습니다. 우리는 특별한 떡도 신성한 포도주도 아닙니다. 그냥 매장에 진열되어 있는 빵이나 떡처럼 어디에나 있는 보통의 죄인입니다. 외관으로는 분간하지도 못합니다. 그러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별해 주시는 것입니다. 구원으로 가려 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스러운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이 “거룩함에 이른다”고 말하는 성화는 우리가 윤리적으로 올바르게 산다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성별해 주신다는 이 상태의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거룩하게 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거룩하게 되는 것입니다. 죄 많은 우리가 성별 된다는 것이 바로 성화입니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은 사람은 영원한 생명으로 향합니다. 죄 가운데 머무는 자는 죽음으로 향합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요”(23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목적지가 “죽음”인지 “영원한 생명”인지, 그것이 중요합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면서 한층 더 죄를 되풀이하여 죽음으로 향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거룩함에 이르면서 영원한 생명으로 향합니다. 만약 자기가 잘못된 방향에 향하고 있다면 방향을 바꿀 필요가 있습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의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는 도로에서 우리는 빈 깡통을 내던지거나 옆 차에 폐를 끼치거나 할 수 없습니다.
죄의 노예였던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노예가 되었습니다. 노예라고 하면 듣기 싫은 말이지만 하나님의 노예일 때 우리는 안심하고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매고 내게 배우라”(마11:2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는 온유하시고 겸손하신 분이십니다. 피도 눈물도 없이 인간을 혹사시키는 끔찍한 주인이 아닙니다. 그 멍에는 가볍습니다. 즉 우리는 죄의 노예였을 때보다 더 편안하고 느긋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나날은 결실을 맺는 생활인 것입니다.
세례를 받고 우리는 방향을 바꿔서 살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주위의 풍경은 크게 바뀌고 있지 않은 것처럼 보일지도 모릅니다. 우리 자신도 바뀌고 있지 않은 것 같이 생각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 길은 이미 영원한 생명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바꾼 보람이 없는 것 같이 보여도 열매를 맺는 나날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 주신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입니다. 그 은혜 가운데 우리는 이미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 자신께서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방향이 바뀐 새로운 사람으로서 보고 계십니다. 그 하나님의 눈빛을 기억할 때 우리는 죄투성이가 아니라 그 하나님의 사랑과 신뢰에 부응하면서 사는 자로 분류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