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6장에서 죄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늘의 7장에는 율법과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그가 율법을 지키는데 남달리 열심이었고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고 진지하게 율법을 준수해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율법 지상주의자였던 그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6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결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2절)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공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율법이 있는 것이 당연하며 율법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죽었다”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반려자의 갑작스런 죽음, 이 결별이야말로 바울에게 있어서 주 예수님과의 만남의 체험이었습니다. 그 다마섹 도상에서 돌연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을 걸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눈이 안 보이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둘도 없는 반려자, 즉 “율법”으로부터 억지로 떼어놓였습니다. 그 때 비로소 바울은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한 번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로 말미암아 한 번 죽고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에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6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치 율법이 나쁜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본래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지배된 인간 즉 육신에 있는 인간의 지체 중에는 그 본래 좋은 것인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죄의 정욕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율법이 “이렇게 해라”라고 말하면 하고 싶지 않고, 율법이 “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면 하고 싶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있을 때 우리는 죄를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켜 온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을 갖고 있지 않는 이방인이라도 저마다 하나님의 계명은 주어져 있습니다. 그 계명에 따라 각각 죄로 정해집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께 연결된 사람은 유대인이든 그 이외의 인간이든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이미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면 무엇을 해도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노예로 새 생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 조문”이란 종이에 쓰여진 글자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그 근본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거듭 안식일 계명에 관한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의 분쟁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반하고 있다고 율법 학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배고파진 제자들이 밀의 이삭을 잘라 안식일에 먹은 것에 대해서도 율법 학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이었던 율법이 단지 종이에 쓰여진 조문으로서 인간을 속박해 갑니다. 본래는 인간을 건강하게 살려 나가야 할 것이 바로 종이에 쓰여진 조문으로만 해석되어 인간을 속박해 갔습니다. 종이에 쓰여진 것, 율법 조문에는 따르지 않아도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근본의 계명에 따르지 않고 율법주의적으로 사는 것이 율법 조문을 따르는 낡은 생활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에 걸맞게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 가고자 할 때 이미 자유로워져 있어야 할 율법에 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는 율법을(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자기 자신의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이렇게 제대로 하고 있는데 저 녀석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심판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고 있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이웃에게 대한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크리스천끼리 서로 심판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비판하고 너는 회개가 부족하다거나 그것은 성경에 써 있는 것에 어긋나 있다며 지적하고 규탄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게 옳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것은 바로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걱정되는 것은 비판을 하고 있는 사람 본인입니다. 그 사람 자신이 힘들까봐 걱정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결국 신앙적으로 실족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삶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것은 성령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한 영,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그 신앙에 살 때에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고속도로를 일단 내리고 방향을 바꾸고 달리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예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 방향을 바꾸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차를 운전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운전대를 잡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스스로 핸들을 잡고 운전하고 있습니다만, 성령께서 그 운전을 도와주십니다.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지금의 자동차는 운전 지원 기능이 표준화되려고 합니다. 가까운 장래에는 완전 자율 주행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멋대로 스피드를 너무 내거나 제멋대로의 판단으로 핸들을 꺾을 수는 없게 됩니다. 핸들조작이 나쁘면 보조해 주고 위험한 일을 하면 브레이크를 걸어 줍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은 여러 가지 표지판도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셈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고 자신의 나날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자사자 핸들에 매달려 운전을 계속해 갈 필요는 없습니다. 느긋하게 주위의 경치를 즐기면서 달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뻐하면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왔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구원을 얻은 게 아닙니다. 우리의 손으로 지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을 구하여 성령에 따라 살아 갈 때 구원의 현실은 확실한 것으로 됩니다. 지금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지고 완전히 새로운 날들을 걷고 있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령을 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나날들을 더 한층 보게 되도록 합시다. 그 성령을 따르는 날들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요롭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
2022年5月2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ガラテヤ(갈라디아서) 2章 20節
〇讃 頌 讃頌歌 491(1, 3, 5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7章 1~6節
〇説 教 「必ず実を結ぶ生活(반드시 열매를 맺는 생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07(1,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5月 2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必ず実を結ぶ生活」 ローマ書 7章 1~6節
パウロは6章において、罪と聖化の関係について語っておりますが、今日の7章において、律法と聖化の関係を語っております。
パウロはことあるごとに、律法のわざ、行いを通して救われ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を語りました。それは恐らく、彼が人一倍、律法を守ることに熱心で、誰にも負けない程、真面目に、真剣に律法を遵守してきたことの裏返しなのでしょう。律法至上主義者であった彼が、「しかし今は、自分を縛っていた律法に対して死んだものとなり、律法から解放されている」(6節)と語っています。
しかもパウロは、律法からの解放を、「結婚の比喩」によって説明しています。2節です。「結婚した女は、夫の生存中は律法によって夫に結ばれているが、夫が死ねば、自分を夫に結びつけていた律法から解放されるのです。」(2節)
パウロにとって「律法」は「空気」のような存在でした。律法があって当たり前であり、律法がなければ生きていけません。しかし、その「律法が死んだ」と言う出来事が起こったのです。長年連れ添って来た伴侶の突然の死、訣別こそが、パウロにとって、主イエスさまとの出会いの体験であったのです。あのダマスコ途上で、突然、復活の主イエスさまがパウロに呼びかけられました。それでパウロの目が見えなくなってしまった、何も見えなくなってしまったと言います。まさに愛する者が取り去られるような体験だったのでしょう。自分のかけがえのない伴侶、つまり「律法」から無理やり引き離されました。ここで初めてパウロは新しくされたのです。そうでもしなければ、自分からは新しくなれないのが人間であるかと思います。
パウロはイエスさまと出会って、一度死にました。それがキリストに結ばれた者は律法に対して死んでいるということです。律法は生きている者と結ばれるものだから、洗礼によってキリストと結ばれて死んだ者は律法から自由なのだとパウロは語ります。
5節には「わたしたちが肉に従って生きている間は、罪へ誘う欲情が律法によって五体の中に働き、死に至る実を結んでいました」とあります。まるで律法が悪いもののように感じますが、本来は、律法というのは、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もので、それ自体は良いものであるはずです。しかし、罪に支配されている人間、つまり肉に従って生きている人間の体のうちには、その本来善いものである律法によって、むしろ罪への欲情が働いてしまうというのです。分かりやすく言いますと、律法で「こうやりなさい」と言われたらやりたくないし、律法から「やってはいけない」と言われるとやりたくなる、ということです。肉に従って生きている時、私たちは罪をコントロール出来ないのです。罪を支配することが出来ません。そしてその結果、私たちは死に至る実を結んでしまうのです。
これは律法を守ってきたユダヤ人だけの話ではありません。律法を持たない異邦人であっても、それぞれに神さまの戒めは与えられています。その戒めに従って、それぞれ罪に定められます。しかし、今は違うのです。キリストに結ばれた者はユダヤ人であれ、それ以外の人間であれ、律法に対して死にました。もはや律法は私たちを縛りません。では、律法から自由であるなら、何をしてもいいのかという、そう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は、今や神さまの奴隷として新しい命に生きているのです。私たちはキリストと結ばれて生きていくのです。
パウロは6節で「文字に従う古い生き方ではなく、“霊”に従う新しい生き方で仕えるようになっているのです。」(6節)と語っています。
ここでパウロが言います「文字」というのは、律法のことです。確かに律法は紙に書かれた文字です。しかし、元々は、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愛の戒めでした。その根本の精神は、神さまを愛し隣人を愛するということでした。マタイによる福音書においても、繰り返し、安息日の戒めに関するイエスさまと律法学者の争いがあります。安息日に腕の萎えた人をイエスさまはお癒しになりました。安息日に働いてはいけないという律法に反していると律法学者たちは怒りました。お腹を空かせた弟子たちが麦の穂を摘んで安息日に食べたことに対しても律法学者たちは怒りました。麦の穂を摘むということは安息日にしてはならない労働にあたるからです。
このように、本来、神さまの愛の戒めであった律法が、ただ紙に書かれた文字として人間を縛っていくのです。本来は人間を健やかに生かしていくはずのものが、まさに紙に書かれた文字としてだけ解釈され人間を縛っていきました。紙に書かれたもの、文字には従わなくて良いということは、何でもあり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本来の、神さまを愛し、人間を愛するという根本の戒めに従うことなく、律法主義的に生きることが文字に従う古い生き方です。
私たちは、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救われました。だからと言って、私たちがそれにふさわしく頑張って生きて行こうと思う時、すでに自由になっているはずの律法にまた囚われてしまいます。それは実を結ばない生き方なのです。そして、それは実を結ばないだけでなく、自分は律法を(愛の戒めを)守っているという自分自身の誇りへとつながります。自分はこんなにちゃんとしているのに、あいつは何なんだという思いを持ち、人を裁くことになります。自分では神さまの戒めをまじめに守っているつもりで、実際は人を見下していて、そこには神さまへの愛も隣人への愛もないのです。
教会で最も憂鬱になるのが、クリスチャン同士で裁き合っているのを見る時です。他の人の行いを批判し、あなたは悔い改めが足りないとか、それは聖書に書かれていることに反している、そう指摘して糾弾するのです。批判をする人はまじめなつもりですが、これはまさに「文字に従って」生きている人なのです。でも、本当に心配なのは批判をしている人本人です。その人自身が、しんどいのではないかと心配になります。実際、そういう人はやがて信仰的に躓いてしまうことが多いのです。
そういう「文字に従う」生き方ではなく「“霊”に従う新しい生き方」をパウロは説きます。霊に従うとは、聖霊に従うということです。すでに神さまの愛が私たちには注がれているのです。キリストはそのために死んでくださいました。そして、私たちには神さまの愛を知るための霊、聖霊が与えられています。その信仰に生きる時、私たちの内なる聖霊に従うことができるのです。
キリストと共に生きるとは、高速道路をいったん降りて向きを変えて走り出すようなものだと以前、お話ししました。これまでは死へと向かっていたのが、向きを変えて、永遠の命へと向かって走り出すようなものだと申しました。そのとき、車を運転しているのは確かに私たちです。私たちがハンドルを握っています。確かに自分でハンドルを握って運転をしているのですが、聖霊がその運転を支えてくださいます。安全に運転でき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のが聖霊です。今の車は、運転支援機能が標準化されようとしています。近い将来は、完全自動運転になるでしょう。そうしますと、自分勝手にスピードを出しすぎたり、勝手な判断でハンドルを切ることはできなくなります。ハンドルの切り方が悪ければ補助してくれますし、危険なことをすれば、ブレーキをかけてくれます。そうなれば、それまで見えなかった色んな標識も良く見えてきます。世界が違って見えてくるわけです。
聖霊の働きとは、まさにこのようなものです。私たちが聖霊に従う生き方をするならば、神さまのなさることが見えてくるのです。この世界に、そして自分の日々に神さまが働いておられることが見えてきます。それは世界が新しくされたといっていいことです。私たちはしゃにむにハンドルにしがみついて運転を続けていく必要はないのです。ゆったりと周りの景色を楽しみながら走っていくことができるのです。神さまの御業を喜びながら生きていくのです。
私たちはすでに新しい世界に生かされています。救いは律法からではなくキリストからきました。私たちの手で救いを勝ち得たの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手で守ってゆくものでもありません。聖霊を求め、聖霊に従って生きて行くとき、救いの現実は確かなものとされます。今まさに、キリストのゆえに死から命へと移され、まったく新しい日々を歩んでいることを実感します。ですから、皆さん、聖霊を求め、聖霊によってその新しい世界を、そして日々をさらに見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その聖霊に従う日々の中で、私たちは、キリストによって、豊かに実らせていただくのです。
【2022년 5월 22일 주일예배(요약판)】
“반드시 열매를 맺는 생활” 로마서 7장 1~6절
바울은 6장에서 죄와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습니다만, 오늘의 7장에는 율법과 성화의 관계에 대해서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무슨 일이 있을 때마다 율법을 지키는 것으로 구원받는 게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은 아마 그가 율법을 지키는데 남달리 열심이었고 누구 못지 않게 성실하고 진지하게 율법을 준수해 왔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합니다.율법 지상주의자였던 그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6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울은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을 “결혼의 비유”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2절입니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 생전에는 법으로 그에게 매인 바 되나 만일 그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나느니라”(2절)
바울에게 있어서 “율법”은 “공기”와 같은 존재였습니다. 율법이 있는 것이 당연하며 율법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죽었다”는 사건이 일어난 것입니다. 오랜 세월을 함께 지낸 반려자의 갑작스런 죽음, 이 결별이야말로 바울에게 있어서 주 예수님과의 만남의 체험이었습니다. 그 다마섹 도상에서 돌연 부활의 주 예수님께서 바울에게 말을 걸으셨습니다. 그 때문에 눈이 안 보이게 되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어 버렸다고 합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는 체험이었을 것입니다. 자신의 둘도 없는 반려자, 즉 “율법”으로부터 억지로 떼어놓였습니다. 그 때 비로소 바울은 새롭게 되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스스로 새롭게 될 수 없는 것이 인간입니다.
바울은 예수님을 만나서 한 번 죽었습니다. 그것이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사람은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율법은 살아 있는 사람과 연결되는 것이기 때문에 세례로 말미암아 한 번 죽고 그리스도와 연결된 사람은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5절에는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6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마치 율법이 나쁜 것처럼 느껴집니다만, 본래 율법은 하나님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며 그 자체는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죄에 지배된 인간 즉 육신에 있는 인간의 지체 중에는 그 본래 좋은 것인 율법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죄의 정욕이 일어난다고 합니다. 알기 쉽게 말하면, 율법이 “이렇게 해라”라고 말하면 하고 싶지 않고, 율법이 “해서는 안 된다” 라고 하면 하고 싶게 된다는 것입니다. 육신에 있을 때 우리는 죄를 컨트롤 할 수 없습니다. 죄를 지배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 우리는 사망에 이르는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율법을 지켜 온 유대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율법을 갖고 있지 않는 이방인이라도 저마다 하나님의 계명은 주어져 있습니다. 그 계명에 따라 각각 죄로 정해집니다. 그러나 이제는 다릅니다. 그리스도께 연결된 사람은 유대인이든 그 이외의 인간이든 율법에 대하여 죽었습니다. 이미 율법은 우리를 속박하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율법으로부터 자유롭다면 무엇을 해도 되느냐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이제 하나님의 노예로 새 생명에 살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결되어 살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6절에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니라”(6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바울이 말하는 “율법 조문”이란 종이에 쓰여진 글자입니다. 그러나 원래는 하나님께서 주신 사랑의 계명이었습니다. 그 근본 정신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도 거듭 안식일 계명에 관한 예수님과 율법 학자들의 분쟁이 있습니다. 안식일에 한쪽 손이 마른 사람을 예수님께서는 고치셨습니다. 안식일에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율법에 반하고 있다고 율법 학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배고파진 제자들이 밀의 이삭을 잘라 안식일에 먹은 것에 대해서도 율법 학자들은 화를 냈습니다. 밀 이삭을 자르는 것은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노동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 하나님의 사랑의 계명이었던 율법이 단지 종이에 쓰여진 조문으로서 인간을 속박해 갑니다. 본래는 인간을 건강하게 살려 나가야 할 것이 바로 종이에 쓰여진 조문으로만 해석되어 인간을 속박해 갔습니다. 종이에 쓰여진 것, 율법 조문에는 따르지 않아도 좋다는 것은 무엇이든지 해도 된다는 것은 아닙니다. 본래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근본의 계명에 따르지 않고 율법주의적으로 사는 것이 율법 조문을 따르는 낡은 생활방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것에 걸맞게 열심히 노력하고 살아 가고자 할 때 이미 자유로워져 있어야 할 율법에 또 사로잡히고 맙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지 않는 삶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열매를 맺지 못할 뿐만 아니라, 나는 율법을(사랑의 계명을) 지키고 있다는 자기 자신의 자랑으로 이어집니다. 나는 이렇게 제대로 하고 있는데 저 녀석은 무엇인가 하는 생각을 가지고 사람을 심판하게 됩니다. 자기 스스로는 하나님의 계명을 성실하게 지키고 있다고 여기며 다른 사람을 업신여기고 있다면 거기에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이웃에게 대한 사랑도 없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가장 안타까운 것이 크리스천끼리 서로 심판하는 것을 볼 때입니다. 다른 사람의 행동을 비판하고 너는 회개가 부족하다거나 그것은 성경에 써 있는 것에 어긋나 있다며 지적하고 규탄하는 것입니다. 비판을 하는 사람은 그렇게 하는게 옳다고 여길지 모르지만, 이것은 바로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사람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걱정되는 것은 비판을 하고 있는 사람 본인입니다. 그 사람 자신이 힘들까봐 걱정됩니다. 실제로 그런 사람은 결국 신앙적으로 실족해 버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런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섬기는 삶이 아니라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기는 삶”을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긴다는 것은 성령을 따른다는 것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쏟아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그 때문에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사랑을 알기 위한 영, 성령이 주어졌습니다. 그 신앙에 살 때에 우리 속에 계시는 성령을 따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산다는 것은 고속도로를 일단 내리고 방향을 바꾸고 달리기 시작하는 것과 같다고 예전에 말씀드렸습니다. 지금까지는 죽음으로 향하고 있었던 것이 방향을 바꾸고 영원한 생명을 향해 달리기 시작하는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때 차를 운전하고 있는 것은 확실히 우리들입니다. 우리가 운전대를 잡고 있습니다. 틀림없이 스스로 핸들을 잡고 운전하고 있습니다만, 성령께서 그 운전을 도와주십니다. 안전하게 운전할 수 있도록 해 주시는 것이 성령이십니다. 지금의 자동차는 운전 지원 기능이 표준화되려고 합니다. 가까운 장래에는 완전 자율 주행이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제멋대로 스피드를 너무 내거나 제멋대로의 판단으로 핸들을 꺾을 수는 없게 됩니다. 핸들조작이 나쁘면 보조해 주고 위험한 일을 하면 브레이크를 걸어 줍니다. 그렇게 되면, 그때까지 보이지 않은 여러 가지 표지판도 잘 보이게 될 것입니다.
세계가 다르게 보이는 셈입니다.
성령의 역사하심이란 바로 이런 것입니다. 우리가 성령을 따르는 삶을 산다면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 보이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그리고 자신의 나날에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것이 보입니다. 그것은 세상이 새롭게 되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우리는 죽자사자 핸들에 매달려 운전을 계속해 갈 필요는 없습니다. 느긋하게 주위의 경치를 즐기면서 달려 갈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기뻐하면서 살아 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새로운 세계에 살고 있습니다. 구원은 율법으로부터가 아니라 그리스도로부터 왔습니다. 우리의 손으로 구원을 얻은 게 아닙니다. 우리의 손으로 지켜 가는 것도 아닙니다. 성령을 구하여 성령에 따라 살아 갈 때 구원의 현실은 확실한 것으로 됩니다. 지금 바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죽음으로부터 생명으로 옮겨지고 완전히 새로운 날들을 걷고 있는 것을 실감합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령을 구하여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새로운 세계를 그리고 나날들을 더 한층 보게 되도록 합시다. 그 성령을 따르는 날들 가운데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풍요롭게 열매를 맺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