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죄로부터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율법이 죄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 “그렇지 않다” 고 부정하고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 라며 율법과 죄의 올바른 관계를 먼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라 죄를 파헤치는 것, 그것이 율법과 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아담이 선악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이것이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입니다. 아담이 이 열매를 먹은 이유가 뱀에게 속았다느니 하와가 먹으라고 했다느니 각각 핑계를 대는데, 그 충동에 사로잡힌 이유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먹지 말라”가 최초의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아담이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말씀 즉 율법은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죄로 바꾼 그것이 인간의 첫번째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을 인간은 하려고 해 버립니다. 금지하면 할수록 그것을 바라고 맙니다. 그런 마음이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있고 하나님의 것을 또 남의 것을 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좀처럼 억제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4-15절)
우리는 자신의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죄로 매도된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우리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다, 죄가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해도 통상의 상식적인 사회에서 통용될 리가 없습니다. 법적인 죄를 범한 사람이 “내가 행한 게 아니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행한 거야” 라고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18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과해 버릴 듯한 말입니다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 죄의 성질을 갖고 그 죄의 힘을 주체할 수 없는 인간이 여전히 “선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창세기를 읽으면 그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 하셨다, 즉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인간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신성, 하나님의 성질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본래는 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선을 바라십니다. 그 비슷한 모습을 닮은 인간 또한 선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성질이 인간에게 스며들었습니다. 몸은 죄에 지배당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서 선을 원하는 인간이 선을 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악을 원하다가 악을 행한 것이라면 거기에 괴로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분열되는 것 같은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원하고 있어도 몸은 제멋대로 악을 행해 버리는 그 몸을 우리는 컨트롤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 자기 자신의 죄 많음을 상기시키며 여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의 마음으로부터의 외침이었습니다. “너희들은 곤고한 인간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곤고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디전1:15)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이 과거에는 기독교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고 있던 부분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구체적인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돌연 자신의 비참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이 고백은 바울의 외침이며 동시에 마음으로 선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행할 수 없는 인간 모두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8장에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신했던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라고 기도했습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의 앞잡이로서 탐욕스러운 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 중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돌아온 것은 세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하는 세리의 모습은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외치는 바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야말로 옳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비참함과 연약함을 알고 있는 인간, 선을 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 그 눈빛을 기울이십니다. 그리고 구원해 주십니다.
7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의 외침은 계속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거의 노래하듯이 바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7장 후반의 부분에서 바울이 논리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마지막에 정리되어 있듯이 마음과 육신의 분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넘치도록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찬미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구성으로는 구원에 관해서는 8장에서 이야기되는데,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비참함의 고백과 하나님께 대한 찬미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논리적인 논리의 구성을 깨뜨려도 바울이 외친 말 속에 바로 성령께서 일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선을 행하고 싶어도 못하는 그 비참한 모습인 그대로, 또 죄의 육신 그대로 가슴을 치면서 성전에 선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의 빛이 풍요롭게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못하는 우리가 선을 원해도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 우리가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됩니다. 최초의 창조 때처럼 정말로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비참한 모습 그대로 서서 그저 한탄할 때 하나님의 연민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시편 51편에 있듯이 우리 속에 맑은 마음을 새롭게 창조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참한 죄의 모습으로 서서 탄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맑은 마음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2022年5月2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51編 1(3), 3(5), 10(12)節
〇讃 頌 讃頌歌 260(1, 3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7章 7~25節
〇説 教 「わたしの内に住む罪(내 속에 거하는 죄)」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26(1, 3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5月 2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わたしの内に住む罪」 ローマ書 7章 7~25節
パウロはこの7章に入って律法と私たちの聖化との関係を示し、私たち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贖いの恵みによって、すでに罪から、そして、律法から解放されている、これが救いなのだと語ってきました。この「律法からの解放が救い」というのであれば、律法は罪なのか?という疑問が生じます。
しかし、パウロは、間髪入れずに「決してそうではない」と否定し、「しかし、律法によらなければ、わたしは罪を知らなかったでしょう」、と律法と罪との正しい関係をまず示しています。律法は罪ではなく、罪を暴くもの、それが律法と罪の関係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皆さんもよくご存じだと思いますが、アダムが善悪の知識の木の実を食べた、これが人間の犯した最初の罪です。アダムがこの木の実を食べた理由が、蛇に騙されたとか、エバが食べろと言ったとか、それぞれ言い訳をするのですが、その衝動に駆られた理由は、神さまが「食べるな」と言われたからです。この「食べるな」が、最初の掟でした。
神の戒めは、神さまの御心であり、アダムが楽園で幸せに生きるための言葉、つまり律法はそのまま神さまの愛でもあるのです。しかし、その神さまの愛を罪に変えた、それが人間の最初の罪でありました。
神さまが禁じていることを人間はやろうとしてしまう。禁止されればされるほど、それを欲してしまう。そういう思いがいつも私たちの心の中にあって、神さまのものを、また、人のものをむさぼろうとするのです。これが私たちの罪の本質です。
私たちはそれをなかなか抑制することが出来ないのです。パウロは14節でこう言っています。「わたしは肉の人であり、罪に売り渡されています。わたしは、自分のしていることが分かりません。自分が望むことを実行せず、かえって憎んでいることをするからです。」(14-15節)
私たちは自らの罪をコントロールするどころか、私たちは「罪に売り渡されている」のです。「自分が望むことを実行せず、かえって憎んでいることをする」のです。
パウロはそのような私たちのことを「もし、わたしが望まないことをしているとすれば、それをしているのは、もはやわたしではなく、わたしの中に住んでいる罪なのです」(20節)と言っています。
悪いことをしているのは私ではなく、私の中の罪なのだ、罪が勝手にやっているのだ、と言っても、通常の常識的な社会で通用するはずがありません。法的な罪を犯した人が、「自分がやったんじゃない、自分の中に住んでいる罪がやったんだ」と言っても通りません。しかし、それほどに罪は私たちの手に負えな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しかし、パウロはここで「善を為そうとする意志はありますが」(18節)とも言っています。何となく読みすごしてしまう言葉ですが、このことはとても大切なことなのです。アダムとエバ以来、罪の性質をもち、その罪の力を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人間がなお「善をなそうとする意志」を持っているとパウロは言うのです。
創世記を読みますと、その1章27節に「神はご自分にかたどって人を創造された」とあります。神さまはご自分にかたどって人間を造られた、つまり、神さまに似た姿を人間は持っているのです。人間には神性、神の性質が本来、備わ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人間は神さまが、本来は、分る存在なのだ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は善なる方ですから、当然、善を望まれます。その似姿である人間もまた、善を望むのです。
しかし、罪の性質が人間に入り込んできました。体は罪に支配されました。本来、神の似姿として善を望む人間が善を行えなくなりました。もともと悪を望んでいて悪をなすのであれば、そこに苦しみはなかったでしょう。心と体が分裂するような苦しみを味わうことはなかったでしょう。心で善を望んでいても、体は勝手に悪をなしてしまう。その体を私たちはコントロールできないのです。
パウロはこのような人間の弱さ、自分自身の罪深さを思い起こし、ここで、「わたしはなんと惨めな人間なのでしょう」と叫んでいます。この言葉はパウロの心からの叫びでした。「あなたがたはみじめな人間だ」と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他の誰でもない自分自身がみじめ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
パウロは自分のことを「罪人の頭(罪人の中で最たる者)」(Ⅰテモテ1:15)だと言います。パウロは自分自身の罪の具体的な内容は明らかにしていません。もちろんパウロはかつてはキリスト教徒を迫害していましたから、そのことをもって自分の罪と考えていたところもあるでしょう。でも、具体的なことは分かりません。しかし、パウロはここで突然、自分のみじめさを告白しているのです。「わたしはなんと惨めな人間なのでしょう」と。この告白は、パウロの叫びでありながら、同時に、心で善を願いながらそれをなすことのできない人間すべての告白です。
ところで、ルカによる福音書18章に有名なファリサイ人と徴税人の祈りの話があります。ふたりはそれぞれに祈るために神殿に上りました。そして自分は律法をしっかり守っているという自信のあったファリサイ人は「神さま、わたしはほかの人たちのように、奪い取る者、不正な者、姦通を犯す者でなく、また、この徴税人のような者でもないことを感謝します」と祈りました。一方で、当時、イスラエルを支配していたローマの手先として、あこぎなやり方で人々から税を徴収していた徴税人は「遠くに立って、目を天に上げようともせず、胸を打ちながら『神様、罪人のわたし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祈りました。そして、主イエスさまはこの二人の内で義とされて家に帰ったのは徴税人なのだとお語りになったのです。
胸を打ちながら「神さま、罪人のわたしを憐れんでください」と祈る徴税人の姿は、「わたしはなんと惨めな人間なのでしょう」と叫ぶパウロの姿でもあります。神さまは、自分こそは正しく立派だと思う人間ではなく、自らのみじめさ弱さを知っている人間、善をおこないたくてもできない苦しみの中にある人間に、そのまなざしを注がれます。そして救われます。
7章の最後の部分でパウロの叫びは続きます。「だれがわたしを救ってくれるでしょうか。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を通して神に感謝いたします。」この神さまへの感謝はほとんど歌うようにパウロの口から出てきた言葉です。この7章の後半の部分でパウロが論理的に語りたかったことは「このように、わたし自身は心では神の律法に仕えていますが、肉では罪の法則に仕えているのです」と最後にまとめてあるように、心と肉の分裂なのです。
しかし、そこからあふれるように、キリストの救いへの讃美がまじりこんでいるのです。論理的な構成としては救いに関しては8章で語られるのですが、ここでパウロは自身のみじめさの告白と神さまへの賛美を語らずにはおられなかったのです。論理的な論理の組み立てを壊してもパウロが叫んだ言葉の内にまさに聖霊が働いたと言えます。
皆さん、私たちは、善を行いたくても行えない、そのみじめな姿のままで、罪の体のままで、胸を打ちながら神殿に立った徴税人のように神さまの前に立つのです。
そのとき、キリストの十字架からの光が豊かに私たちには注がれるのです。善を行えない私たちが、善を願っても体が言うことを聞かない私たちが、罪の支配から解放されます。最初の創造の時のようにまことに神さまの似姿として生き始めるのです。
私たちは神さまの前にみじめな姿のままで立ち、ただただ嘆くとき、神さまの憐みのうちにすでにあります。神さまは憐れんでくださる方なのです。そしてまさにその時、神さまは、詩編51編にあるように、私たちの内に清い心を新しく創造してくださる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がみじめな罪の姿で立ち、嘆き祈る時、神さまは新たな人間へと生まれ変えさせて下さいます。神さまが新しく創造された清い心は、罪に支配をされません。私たちは願っている善をなす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るのです。新しく生きていくのです。
【2022년 5월 29일 주일예배(요약판)】
“내 속에 거하는 죄” 로마서 7장 7~25절
바울은 이 7장에 들어가 율법과 우리 성화의 관계를 보여주며,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은혜로 말미암아 이미 죄로부터 그리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어 있다, 이것이 구원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율법으로부터의 해방이 구원이라고 한다면 “율법이 죄인가?” 라는 의문이 생깁니다.
그러나 바울은 곧 “그렇지 않다” 고 부정하고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다” 라며 율법과 죄의 올바른 관계를 먼저 보여주고 있습니다. 율법은 죄가 아니라 죄를 파헤치는 것, 그것이 율법과 죄의 관계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잘 아시다시피 아담이 선악 지식의 나무 열매를 먹은 이것이 인간이 범한 최초의 죄입니다. 아담이 이 열매를 먹은 이유가 뱀에게 속았다느니 하와가 먹으라고 했다느니 각각 핑계를 대는데, 그 충동에 사로잡힌 이유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먹지 말라”가 최초의 계명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하나님의 마음이며 아담이 낙원에서 행복하게 살기 위한 말씀 즉 율법은 그대로 하나님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하나님의 사랑을 죄로 바꾼 그것이 인간의 첫번째 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금하시는 것을 인간은 하려고 해 버립니다. 금지하면 할수록 그것을 바라고 맙니다. 그런 마음이 늘 우리의 마음 속에 있고 하나님의 것을 또 남의 것을 탐내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 죄의 본질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좀처럼 억제할 수 없습니다. 바울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나는 육신에 속하여 죄 아래에 팔렸도다 내가 행하는 것을 내가 알지 못하노니 곧 내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함이라”(14-15절)
우리는 자신의 죄를 다스리기는커녕 죄로 매도된 것입니다. “자기가 원하는 것을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미워하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우리를 “만일 내가 원하지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는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20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나쁜 짓을 하고 있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거하는 죄다, 죄가 마음대로 하고 있다고 해도 통상의 상식적인 사회에서 통용될 리가 없습니다. 법적인 죄를 범한 사람이 “내가 행한 게 아니야 내 속에 거하는 죄가 행한 거야” 라고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만큼 죄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내 육신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아니하는 줄을 아노니 원함은 내게 있으나”(18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간과해 버릴 듯한 말입니다만, 이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담과 하와 이래 죄의 성질을 갖고 그 죄의 힘을 주체할 수 없는 인간이 여전히 “선을 이루고자 하는 의지”를 갖고 있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창세기를 읽으면 그 1장 27절에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라고 쓰여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형상대로 인간을 창조 하셨다, 즉 하나님을 닮은 모습을 인간은 갖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에게는 신성, 하나님의 성질이 본래 갖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인간은 하나님이 본래는 알 수 있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을 행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당연히 선을 바라십니다. 그 비슷한 모습을 닮은 인간 또한 선을 바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죄의 성질이 인간에게 스며들었습니다. 몸은 죄에 지배당했습니다. 본래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서 선을 원하는 인간이 선을 행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원래 악을 원하다가 악을 행한 것이라면 거기에 괴로움은 없었을 것입니다. 마음과 몸이 분열되는 것 같은 고통을 겪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원하고 있어도 몸은 제멋대로 악을 행해 버리는 그 몸을 우리는 컨트롤할 수 없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러한 인간의 나약함, 자기 자신의 죄 많음을 상기시키며 여기서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이 말은 바울의 마음으로부터의 외침이었습니다. “너희들은 곤고한 인간이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다름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 곤고하다고 바울은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을 “죄인 중에 내가 괴수”(디전1:15) 라고 말합니다. 바울은 자기 자신의 죄에 대해서 구체적인 내용은 밝히고 있지 않습니다. 물론 바울이 과거에는 기독교 성도들을 박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가지고 자신의 죄라고 생각하고 있던 부분도 있었겠지요. 그러나 구체적인 것은 모릅니다. 그러나 바울은 여기서 돌연 자신의 비참함을 고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이 고백은 바울의 외침이며 동시에 마음으로 선을 원하면서도 그것을 행할 수 없는 인간 모두의 고백입니다.
그런데 누가복음 18장에 유명한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이야기가 있습니다. 두 사람은 각자 기도하기 위해서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자기는 율법을 잘 지키고 있다고 자신했던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눅18:11) 라고 기도했습니다. 한편, 당시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로마의 앞잡이로서 탐욕스러운 수단으로 사람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고 있었던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눈을 들어 하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이르되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18:13) 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주 예수님께서는 이 두 사람 중에 의롭다 하심을 받고 집에 돌아온 것은 세리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가슴을 치면서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라고 기도하는 세리의 모습은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라고 외치는 바울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야말로 옳고 훌륭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스로의 비참함과 연약함을 알고 있는 인간, 선을 행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있는 인간에게 그 눈빛을 기울이십니다. 그리고 구원해 주십니다.
7장의 마지막 부분에서 바울의 외침은 계속됩니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건져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이 하나님께 대한 감사는 거의 노래하듯이 바울의 입에서 나온 말입니다. 이 7장 후반의 부분에서 바울이 논리적으로 말하고 싶었던 것은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 라고 마지막에 정리되어 있듯이 마음과 육신의 분열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넘치도록 그리스도의 구원에 대한 찬미가 섞여 있는 것입니다. 논리적인 구성으로는 구원에 관해서는 8장에서 이야기되는데, 여기서 바울은 자신의 비참함의 고백과 하나님께 대한 찬미를 말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논리적인 논리의 구성을 깨뜨려도 바울이 외친 말 속에 바로 성령께서 일하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선을 행하고 싶어도 못하는 그 비참한 모습인 그대로, 또 죄의 육신 그대로 가슴을 치면서 성전에 선 세리처럼 하나님 앞에 서는 것입니다.
그때, 그리스도의 십자가로부터의 빛이 풍요롭게 우리에게 내려오는 것입니다. 선을 행하지 못하는 우리가 선을 원해도 육신이 말을 듣지 않는 우리가 죄의 지배로부터 해방됩니다. 최초의 창조 때처럼 정말로 하나님을 닮은 모습으로서 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비참한 모습 그대로 서서 그저 한탄할 때 하나님의 연민 가운데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쌍히 여겨 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때 하나님께서는 시편 51편에 있듯이 우리 속에 맑은 마음을 새롭게 창조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비참한 죄의 모습으로 서서 탄식하며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새로운 인간으로 거듭나게 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새롭게 창조하신 맑은 마음은 죄의 지배를 받지 않습니다. 우리는 원하는 선을 행할 수 있게 됩니다. 새롭게 살아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