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성령강림일(펜테코스트)입니다. 펜테코스트는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펜테코스트가 지금 조금도 관심이 고조되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펜테코스트의 은혜를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경은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서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절)
성경은 더 이상의 설명이나 평가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펜테코스트 사건의 모습만을 전달할 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펜테코스트에서 제자들의 성령 체험을 우리가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요?
펜테코스트를 신앙적 고지식함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이 제자들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고 뜨겁게 불타는 것 같은 신앙이 필요하다든가, 혹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라는 것을 방언이라고 파악해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펜테코스트는 제자들이 있었던 집을 뒤흔드는 듯한 성령의 격렬한 역사가 있어서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만, 제자들 위에 일어난 것은 제자들이 홀연히 다양한 나라의 말로 하나님을 증명하기 시작했다는 것뿐입니다.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서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여호수아에는 모세의 인도함으로 출애굽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번에는 여호수아의 인도함으로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정주해서 자기들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그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그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모세와는 다른 사명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습니다만, 여호수아로서는 엄청난 압박이었을 것입니다. 그 위대한 지도자 모세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자기가 해야 하다니 그야말로 겁에 질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하라”(여호수아 1:6) 라고 여호수아를 고무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모세는 죽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없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있던 것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리스어로 “예수” 입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들어갈 것을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것은 바로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생각하면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눈 앞에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는데 거기에는 강한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약하고 초라한 자기들이 어떻게 거기에 들어가서 영토로 해 갈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서 보고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시고 또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으로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펜테코스트의 사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특별한 존재로서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후, 지상에 남겨진 제자들 위에 성령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고 그들의 신앙은 더욱 확실한 것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새로운 사명도 자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을 둘러싼 현실을 보면 약하고 초라한 자기들이 어떻게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모여서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 펜테코스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이 위대한 역사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400년 후에 이루어졌다고 여호수아기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경험이나 상상을 훨씬 넘는 모습으로 신중하게 게다가 끈질기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제자들 위에 임하셔서 교회라는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새 사명으로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큰 사명이자 현실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여호수아 1:5) 라고 여호수아에게 약속의 말씀을 준 것 같이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은 새롭게 사도로서 일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고 노력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모두 하나가 되어 함께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떡을 떼어 함께 식사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사2:43-47참조) 그런데 이것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을 때와 똑같이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는 안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약속을 받은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도록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펜테코스트는 먼 옛날에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또 사도들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또 모이고 기도할 때, 기도하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때에 일어나는 일, 또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펜테코스테의 축복입니다.우리 히로시마 교회도, 이 하나님의 축복아래 교회가 탄생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사명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이 사명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을 건넌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그 기초에 두고 있습니다.그 축복에 기초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히로시마 교회는 잘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음을 같이하여 은혜를 서로 나눈다는 것이 요구되는데 어떻습니까? 때로는 삐걱거리고 서로 나눔이 잘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삐걱거린다고 해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기지는 않습니다. 아니요, 삐걱거리기 때문에 그 은혜의 깊음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펜테코스트는 마음을 같이하는 곳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펜테코스트를 증언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제각각의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펜테코스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치란 우리가 하는 방법이 잘 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서로 기뻐하고 서로 나누는 가운데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령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서로 나누고 현실이 어떻든 주 안에서 하나임을 믿고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발걸음을 교회는 2000년 이상 지속하고 있습니다.
2022年6月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シュア記(여호수아) 1章 5~6節
〇讃 頌 讃頌歌 190(1, 4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使徒言行録(사도행전) 2章 1~13節
〇説 教 「主の恵みを分かち合う(주님의 은혜를 나눈다)」
〇祈 祷
〇聖 礼 典 聖餐式
〇讃 頌 讃頌歌 191(1, 3, 4節)
〇献 金
〇報 告
〇感謝祈祷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6月 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主の恵みを分かち合う」使徒言行録 2章1~11節
今日は聖霊降臨日(ペンテコステ)です。ペンテコステはクリスマス・イースターと並んで教会にとって重要な出来事です。でも、ペンテコステが今一つ盛り上がらないのは、多くの人がペンテコステの恵みを共感することが出来ないと思っているからではないでしょうか。
聖書は、その時の様子をこのように語っています。「突然、激しい風が吹いて来るような音が天から聞こえ、彼らが座っていた家中に響いた。そして、炎のような舌が分かれ分かれに現れ、一人一人の上にとどまった。すると、一同は聖霊に満たされ、“霊”が語らせるままに、ほかの国々の言葉で話しだした。」(2-4節)
聖書はこれ以上の説明や評価を記していません。ペンテコステの出来事の様子だけを伝えるだけで、それをどう理解し、どう解釈すべきかは、まったく記されていないのです。ですから、ペンテコステにおける弟子たちの聖霊体験を私たちがどれほど共感できるでしょうか。
ペンテコステを信仰的生真面目さをもって理解しようとする人々は、自分たちもこの弟子たちと同じようにならなければならないと考える人もいるでしょう。聖霊に満たされ熱く燃えるような信仰が必要だとか、もしくは、「聖霊が語らせるままに語る」ということを異言と捉えて、異言を語ることが聖霊に満たされることであると捉える人もいるでしょう。しかし、聖書が語るペンテコステというのは、弟子たちがいた家を揺る動かすような聖霊の激しい働きがあって、弟子たちが聖霊に満たされたのは確かですが、弟子たちの上に起こったことは、弟子たちが突然色々な国の言葉で神さまを証しし始めたということだけなのです。
礼拝の招きの言葉としてヨシュア記1章の御言葉をお読みしました。このヨシュア記にはモーセの導きによって出エジプトをなしたイスラエルの民たちが、今度はヨシュアの導きによっていよいよ約束の地カナンに入り定住し、自分たちの国を造っていく、その過程が記されています。
モーセは偉大な指導者でしたが、約束の地カナンに入ることは赦されませんでした。そのモーセの後継者であるヨシュアがイスラエルの民たちを約束の地に導き入れることになります。モーセとは違う使命がヨシュアには与えられたのですが、ヨシュアにしたら大変なプレッシャーであったでしょう。あの偉大な指導者モーセすら為し得なかったことを自分がしなければならないなんて、それこそ恐れおののいたでしょう。ですから、神さまは「強く、雄々しくあれ」とヨシュアを鼓舞するのです。
モーセは律法の代表者と言えます。そのモーセは死んだのです。モーセはイスラエルの民を約束の地に導くことができませんでした。約束の地に導くことができたのはヨシュアです。ヨシュアとはギリシャ語で「イエス」です。そうです、約束の地に導くのは律法ではなくイエスご自身であり、イエスさまを通してなされた神さまの御業を信じる信仰によってなのです。約束の地カナンにイスラエルの民たちを導き入れることをヨシュアに託されたのは、まさに律法ではなく、福音によって神さまの約束を受けることを象徴するものであったのです。
神さまはヨシュアに、そしてイスラエルの民たちに「強く、雄々しくあれ」と言われます。しかし、目の前に見える現実を考えるならば、「強く、雄々しく」なんて考えられる状況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目の前に約束の地カナンがあるもののそこには強い国がすでに存在しているのです。弱く、みすぼらしい自分たちが、どのようにしてそこに入り、領土としていくのか、見当もつきません。現実を見るならば途方もない話なのです。
しかし、神さまはそんなヨシュアやイスラエルの民たちに「強く、雄々しくあれ」と言われるのです。それは彼らが特別な存在だから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が彼らを特別な存在として見ておられたのは、神さまが彼らに特別な使命を与え、また、彼らが神さまの特別な使命に生きる者たちであったからです。
それは、ペンテコステの出来事においても同じなのです。弟子たちだけが特別なのではなく、彼らが特別な存在として神さまに覚えられているのは、彼らが神さまの特別な使命に生きる者だからです。だからこそ、主イエス・キリストの出来事の後、地上に残された弟子たちの上に、聖霊が臨むことになったのです。
弟子たちは、復活のイエスさまと出会い、彼らの信仰は確かなものになりました。自分たちの新たな使命も自覚いたしました。でも、自分たちを取り巻く現実を見るならば、弱く、みすぼらしい自分たちがどうやってその使命を全うすることが出来るのか想像もつきません。彼らに出来ることは集まって祈ることだけでした。それはモーセという指導者を失ったイスラエルの民たちの姿と同じです。
しかし、その時にペンテコステが起こったのです。それは神さまの偉大な御業でした。この偉大な御業というのは、アブラハムに与えられた祝福が、その神さまの御言葉通りに400年後に実現したとヨシュア記が語るように、私たちの経験や想像を遙かに超える形で、丁寧に、しかも、粘り強く、現されるものなのです。
神さまは、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救いを完成させられ、神の民という共同体を形作ろうとされ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聖霊が弟子たちの上に臨み、教会というコミュニティーを形作られていくわけです。
弟子たちに新たな使命として神の国建設の使命が与えられました。弟子たちにとっては余りにも大きな使命であり、現実不可能なことであったわけですが、神さまは「わたしはモーセと共にいたように、あなたと共にいる。あなたを見放すことも、見捨てることもない。」(ヨシュア1:5)と、ヨシュアに約束の御言葉を与えたように、弟子たちに聖霊による約束を弟子たちにお与えになったのです。それゆえに弟子たちは、新たに使徒として立ち上がり、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使命を全うしようと努力していくわけです。
使徒たちは神の国の建設のために信仰共同体を造っていきます。皆一つになって、持ち物を分け合い、パンを裂き、共に食事をしながら神さまを讃美しました。(使2:43-47参照) でも、これらはイエスさまが行っていたことでした。イエスさまと生活を共にしていた時と同じようにしたのです。そこにはイエスさまはおりません。しかし、聖霊の約束を受けた彼らは、何も恐れることなく、イエスさまと共に生活するように、イエスさまの御言葉に従って生活をしていたのです。
皆さん、ペンテコステは遠い昔に一度起こったことというのでもなく、また、使徒たちのような特別な人々にだけ起こった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が洗礼を受ける時、また、集まって祈る時、祈りながら何かを為そうとする時、その時に起こること、また私たちにすでに起こったことでもあるのです。これがペンテコステの祝福なのです。私たち広島教会も、この神さまの祝福の下に教会が誕生し、神の国建設の使命が与えられているのです。この使命は、イスラエルがヨルダン川を渡ったのと同じように、初めから神さまの祝福の約束をその基礎に置いているのです。その祝福に基づく共同体を形作ることが神さまの御心であるのです。
神さまの偉大なる御業の目的が、神の民という共同体を形作るということを考えますと、広島教会は上手く行っているでしょうか。神さまの恵みの中で心を一つに、恵みを分かち合うということが求められるわけですが、どうでしょう。時には、ぎくしゃくして、分かち合いが上手く行かない時もあります。けれども、ぎくしゃくしていたとしても、この神さまの恵みが取り上げられることはないのです。いえ、ぎくしゃくするからこそ、その恵み深さを強く意識させられるのです。そもそもペンテコステは一つになっているところに起こった神さまの御業ではありません。ペンテコステを証言している多くの人は、むしろ神さまの御業を否定的に捉えていた人々でした。皆が一致した考えも持っていたのではなく、バラバラの状態でした。そこにペンテコステは起こったのです。
なぜなら、一致とは、私たちのやり方がうまくいっているから許されていることではなく、聖霊の働きによって、自ずと与えられるものだからです。つまり、私たちが懸命に掴み取ろうとするものではなく、自ずと与えられるものであり、このことを互いに喜び、分かち合う中で約束されているものだと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皆さん、聖霊を受けた私たちが為すべき事は、主から与えられたものを分かち合い、現実はどうであれ、主にあって一つであることを信じて歩むことなのです。これが教会の始まりであったのです。この歩みを教会は、2000年以上もの間続けております。
これからも広島教会は、御言葉に従い、主から与えられた恵みを分かち合いながら、歩んで行きたいと願います。
【2022년 6월 5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님의 은혜를 서로 나눈다” 사도행전 2장 1~11절
오늘은 성령강림일(펜테코스트)입니다. 펜테코스트는 성탄절 부활절과 함께 교회에 있어서 중요한 사건입니다. 그러나 펜테코스트가 지금 조금도 관심이 고조되지 않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펜테코스트의 은혜를 공감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닐까요?
성경은 그때의 모습을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홀연히 하늘로부터 급하고 강한 바람 같은 소리가 있어 그들이 앉은 온 집에 가득하며 마치 불의 혀처럼 갈라지는 것들이 그들에게 보여 각 사람 위에서 하나씩 임하여 있더니 그들이 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고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다른 언어들로 말하기를 시작하니라”(2-4절)
성경은 더 이상의 설명이나 평가를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펜테코스트 사건의 모습만을 전달할 뿐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러니 펜테코스트에서 제자들의 성령 체험을 우리가 얼마나 공감할 수 있을까요?
펜테코스트를 신앙적 고지식함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사람들은 자기들도 이 제자들과 똑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요.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고 뜨겁게 불타는 것 같은 신앙이 필요하다든가, 혹은 “성령이 말하게 하심을 따라” 라는 것을 방언이라고 파악해서 방언을 말하는 것이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는 것이라고 보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펜테코스트는 제자들이 있었던 집을 뒤흔드는 듯한 성령의 격렬한 역사가 있어서 제자들이 성령의 충만하심을 받은 것은 확실합니다만, 제자들 위에 일어난 것은 제자들이 홀연히 다양한 나라의 말로 하나님을 증명하기 시작했다는 것뿐입니다.
예배 부름의 말씀으로서 여호수아 1장의 말씀을 읽었습니다. 이 여호수아에는 모세의 인도함으로 출애굽을 이룬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번에는 여호수아의 인도함으로 드디어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 정주해서 자기들의 나라를 만들어 가는 그 과정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모세는 위대한 지도자였습니다만,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는 것은 용서받지 못했습니다. 그 모세의 후계자인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약속의 땅에 들어가게 됩니다. 모세와는 다른 사명이 여호수아에게 주어졌습니다만, 여호수아로서는 엄청난 압박이었을 것입니다. 그 위대한 지도자 모세조차 할 수 없었던 일을 자기가 해야 하다니 그야말로 겁에 질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강하고 담대하라”(여호수아 1:6) 라고 여호수아를 고무하신 것입니다.
모세는 율법의 대표자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 모세는 죽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없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이끌 수 있던 것은 여호수아입니다. 여호수아는 그리스어로 “예수” 입니다. 그렇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예수 자신이시며 예수님을 통하여 이루신 하나님의 역사하심을 믿는 신앙으로 말미암은 것입니다. 약속의 땅 가나안에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해 들어갈 것을 여호수아에게 맡겨진 것은 바로 율법이 아니라 복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약속을 받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에게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눈앞에 보이는 현실을 생각하면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눈 앞에 약속의 땅 가나안이 있는데 거기에는 강한 나라가 이미 존재하고 있습니다. 약하고 초라한 자기들이 어떻게 거기에 들어가서 영토로 해 갈지 가늠조차 할 수 없습니다. 현실을 보면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그런 여호수아나 이스라엘의 백성들에게 “강하고 담대하라” 라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은 그들이 특별한 존재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서 보고 계신 것은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시고 또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으로 사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펜테코스트의 사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자들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특별한 존재로서 하나님께 기억되는 것은 그들이 하나님의 특별한 사명에 사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건 이후, 지상에 남겨진 제자들 위에 성령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제자들은 부활의 예수님을 만났고 그들의 신앙은 더욱 확실한 것이 되었습니다. 자기들의 새로운 사명도 자각했습니다. 그러나 자기들을 둘러싼 현실을 보면 약하고 초라한 자기들이 어떻게 그 사명을 완수할 수 있을지 상상도 할 수 없습니다. 그들에게 할 수 있는 것은 모여서 기도하는 것뿐이었습니다. 그것은 모세라는 지도자를 잃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똑같습니다.
그러나 그 때 펜테코스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였습니다. 이 위대한 역사라는 것은 아브라함에게 주어진 축복이 그 하나님의 말씀대로 400년 후에 이루어졌다고 여호수아기에서 말하듯이 우리의 경험이나 상상을 훨씬 넘는 모습으로 신중하게 게다가 끈질기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완성하시고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하려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성령이 제자들 위에 임하셔서 교회라는 커뮤니티가 형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제자들에게 새 사명으로서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사명이 주어졌습니다. 제자들에게 있어서는 너무 큰 사명이자 현실 불가능했던 일이었습니다만 하나님께서는 “내가 모세와 함께 있었던 것 같이 너와 함께 있을 것임이니라 내가 너를 떠나지 아니하며 버리지 아니하리라”(여호수아 1:5) 라고 여호수아에게 약속의 말씀을 준 것 같이 제자들에게 성령으로 말미암은 약속을 주신 것입니다. 그 때문에 제자들은 새롭게 사도로서 일어나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려고 노력해 가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하나님의 나라 건설을 위하여 신앙 공동체를 만들어 갑니다. 모두 하나가 되어 함께 모든 것을 서로 나누고 떡을 떼어 함께 식사하면서 하나님을 찬미했습니다.(사2:43-47참조) 그런데 이것들은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과 생활을 함께 하고 있었을 때와 똑같이 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예수님께서는 안 계십니다. 그러나 성령의 약속을 받은 그들은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도록 예수님의 말씀에 따라 생활을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펜테코스트는 먼 옛날에 한 번만 일어난 것이 아니고 또 사도들 같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났다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세례를 받을 때, 또 모이고 기도할 때, 기도하면서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 그 때에 일어나는 일, 또 우리에게 이미 일어난 일이기도 합니다. 이것이 펜테코스테의 축복입니다.우리 히로시마 교회도, 이 하나님의 축복아래 교회가 탄생해, 하나님의 나라 건설의 사명이 주어지고 있는 것입니다.이 사명은, 이스라엘이 요르단강을 건넌 것과 마찬가지로, 처음부터 하나님의 축복의 약속을 그 기초에 두고 있습니다.그 축복에 기초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의 목적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공동체를 형성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히로시마 교회는 잘 하고 있을까요?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마음을 같이하여 은혜를 서로 나눈다는 것이 요구되는데 어떻습니까? 때로는 삐걱거리고 서로 나눔이 잘 안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삐걱거린다고 해도 이 하나님의 은혜를 빼앗기지는 않습니다. 아니요, 삐걱거리기 때문에 그 은혜의 깊음을 강하게 의식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 펜테코스트는 마음을 같이하는 곳에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가 아닙니다. 펜테코스트를 증언하고 있는 많은 사람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적으로 파악하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모두가 일치된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게 아니라 제각각의 상태였습니다. 거기에 펜테코스트가 일어난 것입니다.
왜냐하면, 일치란 우리가 하는 방법이 잘 되고 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인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우리가 열심히 손에 넣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며 이것을 서로 기뻐하고 서로 나누는 가운데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성령을 받은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께서 주신 것을 서로 나누고 현실이 어떻든 주 안에서 하나임을 믿고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시작이었습니다. 이 발걸음을 교회는 2000년 이상 지속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히로시마 교회는 말씀에 따라 주님께서 주신 은혜를 서로 나누면서 걸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