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에서는 “만일”이라고 가정한 것과 같은 말로 되어 있습니다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므로 아무도 우리에게 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순조롭고 소원이 이루어지며 행복한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소망이나 소원이 이루어지고 세상적으로 볼 때 행복한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지 않는 일이 있고, 반대로 불행의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되는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본문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신다” 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거나 도와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나 소원을 초월한 방법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소원에 대한 도우심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시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해 주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3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있어서만이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 독생자마저 아끼지 아니하시고 죽음에 내주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하실 의무나 의리는 전혀 없는데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 대신하여 독생자를 죽음에 내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등지고 이웃에게 상처만 주고 있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은 죄 사하심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선명하게 남은 상처,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선을 돌릴 때 거기에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근거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계속합니다. 여기로부터의 바울의 말은 한층 격렬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절)
바울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모든 것을 맛보았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이러한 고난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그는 공격받았습니다. 터무니없는 곤란이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두려워하여 의기소침해지기도 하면서도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붙잡아주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모든 것을 감싸고 계신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괴로움이나 슬픔 속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의 은혜를 믿고 산다면 그곳에서는 괴로움이나 슬픔이 반드시 위험한 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그 괴로움 속에서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괴로움과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였다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이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해 주시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괴로움이나 슬픔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으려고 하는 적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위험을 내다보고 여기서 어떤 괴로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중재의 은혜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38절에서 그 확신을 소리 높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절)
“사망이나 생명이나”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의 괴로움의 근본에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가장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죽음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도 우리의 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께서 죽음의 괴로움을 맛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승리하시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죽음의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초월한 저 편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바라보고 그것을 고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여기에 “생명이나” 가 있습니다. 죽음도 괴로움입니다만, 생명도 또한 괴로움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맛보아야 하는 다양한 괴로움이나 슬픔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떤 괴로움이나 슬픔이나 곤란이 있어도 그러한 모든 것이 주 예수님의 중재 가운데서 앞의 28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8:28)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 세계에 일하고 있는 다양한 인간을 초월한 영적인 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이 세계나 인생에 일어나는 것을 영적인 힘의 소행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점술이나 운세 판단 등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괴로움이나 불행의 원인을 확실히 하고 거기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소원이 그런 것을 낳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하에는 어떤 점술도 운세 판단이나 운명 감정도 필요 없습니다. 어떤 점술도 영적인 힘도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중재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를 동요시켜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근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아버지이신 하나님 곁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해 주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이 확신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사는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
2022年7月1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11章 28~30節
〇讃 頌 讃頌歌 66(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로마서) 8章 31~39節
〇説 教 「神の愛から引き離すものはない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97(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7月 1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神の愛から引き離すものはない」 ローマ書 8章31~39節
「もし神がわたしたちの味方であるならば、だれが私たちに敵対できますか。」(31節)
ここでは「もし」と仮定したような言葉になっていますが、パウロがここで語っているのは「神はわたしたちの味方であるのだから、誰も私たちに敵対できない」ということです。
「神がわたしたちの味方」、この神さまが味方であるというのは、私たちの人生が順風満帆で、願いが適い、幸せであることとは違います。自分の望みや願いが適っている世間的に見て幸せな人生においても、神さまが味方ではないということがあるし、逆に不幸のどん底にあると思われるような人生においても、神さまが味方であることがあるのです。
本文を原文のまま訳すと、「神さまが私たちのためにあって下さる」となります。神さまが私たちのためにあって下さる、それは私たちの願いを適えて下さるとか力を貸して下さ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は私たちの思いや願いを超えた仕方で私たちのための救いを与えて下さ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自分の願いへの手助けを神さまに求めるのではなくて、神さまが私たちのために何をして下さるのかを見つめていかなければなりません。
神さまが私たちのためにして下さっていることは何か、それが次の32節に語られています。「わたしたちすべてのために、その御子をさえ惜しまず死に渡された方は、御子と一緒にすべてのものをわたしたちに賜らないはずがありましょうか。」(32節)
神さまが味方であることは、神の独り子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においてこそ見つめられているのです。神さまが私たち全てのためにその御子をさえ惜しまず死に渡して下さった。パウロはここに神さまの大いなる恵みを見ているのです。神さまはそのようなことをする義務や義理は全くないのに、私たちの救いのために私たちに代って御子を死に渡して下さったのです。そのことによって、神さまに背き逆らい、隣人を傷つけてばかりいる私たちの罪を赦して下さったのです。御子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による罪の赦しこそがキリストの福音の根本です。それこそが「神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ことの具体的な内容なのです。
復活されたキリストの手とわき腹にくっきりと残った傷、それこそが神さまが私たちの味方であるということの根拠なのです。私たちがキリストの十字架へまなざしを向ける時、そこにはっきりと示された神さまの愛があります。その十字架に示された神さまの愛こそが、神さまが味方であるという根拠として理解できるのです。
さらにパウロは「だれが、キリストの愛からわたしたちを引き離すことができましょう」と続けます。ここからのパウロの言葉は、一段と激しいものです。「だれが、キリストの愛からわたしたちを引き離すことができましょう。艱難か、苦しみか、迫害か、飢えか、裸か、危険か、剣か。」(35節)
パウロはここで言っています「艱難、苦しみ、迫害、飢え・・」のすべてを味わいました。パウロにはいつもこれらの苦難があったのです。教会の内側からも、外側からも、彼は攻撃されました。とてつもない困難がありました。涙を流し、怖れおののき、意気消沈することもありながら、なお、自分たちはキリストの愛から引き離されない、と言うのです。それはキリストが捉えていてくださっているからです。パウロがキリストの愛にしがみつい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キリストが捉えてくださっている、キリストの愛がすべてを包み込んでくださっている、そのことをパウロは知っていたのです。
主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ために執り成していて下さるとは、私たちがキリストの愛の中に置か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そ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ができるものは何もないのです。
苦しみ悲しみの中においても、神さまが味方であられること、神さまの愛、主イエス・キリストの執り成しの恵みを信じて生きるなら、そこでは苦しみや悲しみは必ずしも危険な敵とはなりません。しかし、弱い私たちはその苦しみの中でしばしば、神さまが味方であることが分からなくなります。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苦しみと死が自分のための救いの御業であったことを見失います。イエスさまが復活して、今、父なる神の右に座っておられ、自分のために執り成して下さることが見えなくなります。そうなると、苦しみ悲しみによって私たちを神さまの恵みから引き離そうとする敵の思う壷なのです。パウロはそのような危険を見据えて、ここで、どのような苦しみも、私たちをキリストの愛、キリストの執り成しの恵みから引き離すことはできないのだ、と語っているのです。
さらにパウロは、38節でその確信を高らかに語っています。「わたしは確信しています。死も、命も、天使も、支配するものも、現在のものも、未来のものも、力あるものも、高い所にいるものも、低い所にいるものも、他のどんな被造物も、わたし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示された神の愛から、わたし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38-39節)
「死も命も」とあります。人間の苦しみの根本にあるのは死です。私たちを神さまの愛から引き離し、神さまが味方であることが一番見えなくなってしまうのが死の力なのです。しかしその死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示された神さま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と復活がその根拠です。神の子であるイエスさまご自身が死の苦しみを味わって下さったのです。そして父なる神さまはその死に勝利してイエスさまを復活させ、新しい命、永遠の命を与えて下さいました。そのことによって神さまは私たちにも、死の支配からの解放と新しい命、永遠の命を約束して下さったのです。ですから、イエスさまによる神さまの愛の中にいる私たちは、肉体の死を越えた彼方に、復活と永遠の命の希望を見つめ、それを待ち望むことができるのです。
また、ここに「命も」とあります。死も苦しみですが、命もまた苦しみなのです。生きているがゆえに味わわなければならない様々な苦しみ悲しみがあります。それ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示された神さま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ません。私たちの人生にどのような苦しみ悲しみ困難があっても、それらの全てが主イエスさまの執り成しの中で、先の28節で語られていたように、「万事が益となるように共に働く」ことを私たちは確信しているのです。「天使も、支配するものも、力あるものも、高い所にいるものも、低い所にいるものも」とあります。これらは皆、この世界に働いている様々な人間を越えた霊的な力を指しています。現代の私たちは、この世界や人生に起ることを霊の力の仕業と考えることはあまりなくなっていますが、それでも、様々な占いや運勢判断などは無くなりません。苦しみや不幸の原因をはっきりさせて、そこから抜け出したいという願いがそういうものを生んでいるのです。しかし、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示された神の愛を知るなら、その愛の下では、どのような占いも、運勢判断や運命鑑定も必要ないのです。どのような占いも霊の力も及ばない、神の子キリストによる執り成しが私たちには与えられているからです。
「現在のものも、未来のものも」とも言われています。現在起っていることが私たちを動揺させ、これから起ることへの不安があります。しかしどのようなことが起ろうとも、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示された神さま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私たちの主キリスト・イエスによって示された神さまの愛」これこそが福音の根本です。主イエス・キリストが今も、父なる神さまの御元で私たちのために執り成して下さっているがゆえに、この神さまの愛から私たちを引き離すことが出来るものは何一つない、この確信こそが、キリストの福音を信じて生きる私たちの信仰なのです。
【2022년 7월 10일 주일예배(요약판)】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로마서 8장 31~39절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31절)
여기에서는 “만일”이라고 가정한 것과 같은 말로 되어 있습니다만, 바울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므로 아무도 우리에게 적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 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순조롭고 소원이 이루어지며 행복한 것과는 다릅니다. 자신의 소망이나 소원이 이루어지고 세상적으로 볼 때 행복한 삶에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지 않는 일이 있고, 반대로 불행의 밑바닥에 있다고 생각되는 삶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시는 일이 있습니다.
본문을 원문대로 번역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신다” 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계신다, 그것은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신다거나 도와주신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생각이나 소원을 초월한 방법으로 우리를 위한 구원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신의 소원에 대한 도우심을 하나님께 요구하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무엇을 해 주시는지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해 주시는 것은 무엇인지를 32절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32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에 있어서만이 바라볼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를 위하여 그 독생자마저 아끼지 아니하시고 죽음에 내주셨습니다. 바울은 여기에 하나님의 크신 은혜를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일을 하실 의무나 의리는 전혀 없는데도 우리의 구원을 위하여 우리 대신하여 독생자를 죽음에 내주신 것입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등지고 이웃에게 상처만 주고 있는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 것입니다.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으로 말미암은 죄 사하심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의 근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입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손과 옆구리에 선명하게 남은 상처, 그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의 근거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선을 돌릴 때 거기에 분명히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 있습니다. 그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이야말로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근거로 이해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라고 계속합니다. 여기로부터의 바울의 말은 한층 격렬한 것입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35절)
바울은 여기서 말하고 있는 “환난, 곤고, 박해, 기근・・・” 모든 것을 맛보았습니다. 바울은 언제나 이러한 고난들이 있었습니다. 교회의 내부에서도 외부에서도 그는 공격받았습니다. 터무니없는 곤란이 있었습니다. 눈물을 흘리고 두려워하여 의기소침해지기도 하면서도 자신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붙잡아 주시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그리스도의 사랑에 매달리고 있는 게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붙잡아주신다, 그리스도의 사랑이 우리 모든 것을 감싸고 계신다는 것을 바울은 알고 있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해 주신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괴로움이나 슬픔 속에 있어서도 하나님께서 우리편이 되어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 하나님의 사랑, 주 예수 그리스도의 중재의 은혜를 믿고 산다면 그곳에서는 괴로움이나 슬픔이 반드시 위험한 적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연약한 우리는 그 괴로움 속에서 자주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모르게 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괴로움과 죽으심이 우리를 위한 구원의 역사였다는 것을 잃어버립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이제 아버지이신 하나님의 오른쪽에 앉아 계셔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해 주시는 것이 보이지 않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괴로움이나 슬픔으로 우리를 하나님의 은혜에서 끊으려고 하는 적의 계략에 빠지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위험을 내다보고 여기서 어떤 괴로움도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 그리스도의 중재의 은혜에서 끊을 수 없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38절에서 그 확신을 소리 높여 말하고 있습니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38-39절)
“사망이나 생명이나”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의 괴로움의 근본에 있는 것은 죽음입니다.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신다는 것을 가장 보이지 않게 하는 것이 죽음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 죽음도 우리의 주 그리스도 예수로 말미암아 나타난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이 그 근거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자신께서 죽음의 괴로움을 맛보아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죽음에 승리하시고 예수님을 부활시키시고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주셨습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죽음의 지배로부터의 해방과 새 생명, 영원한 생명을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우리는 육신의 죽음을 초월한 저 편에 부활과 영원한 생명의 소망을 바라보고 그것을 고대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여기에 “생명이나” 가 있습니다. 죽음도 괴로움입니다만, 생명도 또한 괴로움입니다. 살아 있기 때문에 맛보아야 하는 다양한 괴로움이나 슬픔이 있습니다. 그것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인생에 어떤 괴로움이나 슬픔이나 곤란이 있어도 그러한 모든 것이 주 예수님의 중재 가운데서 앞의 28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8:28)는 것을 우리는 확신하고 있습니다.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가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이 세계에 일하고 있는 다양한 인간을 초월한 영적인 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현대의 우리는 이 세계나 인생에 일어나는 것을 영적인 힘의 소행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다양한 점술이나 운세 판단 등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괴로움이나 불행의 원인을 확실히 하고 거기에서 빠져나가고 싶다는 소원이 그런 것을 낳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면 그 사랑하에는 어떤 점술도 운세 판단이나 운명 감정도 필요 없습니다. 어떤 점술도 영적인 힘도 미치지 못하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중재가 우리에게 주어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라고도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일어나고 있는 것이 우리를 동요시켜 이제부터 일어나는 일에 대한 불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우리의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타나신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우리를 끊을 수는 없는 것입니다. “우리의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 이것이야말로 복음의 근본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도 아버지이신 하나님 곁에서 우리를 위하여 중재해 주시기 때문에 이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는 이 확신이야말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고 사는 우리의 신앙인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