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떠한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으리라.’
지난 주 말씀 내용입니다만, 바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온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이 사랑을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특별한 신앙인이었기때문이었을까요? 특별한 성인이라든지 신앙인이 아니어도 하나님과의 교감이 깊어질 때, 그러한 감각은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감을 추구해 가는 것이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사와 기쁨으로 넘치는 신앙의 발걸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2절입니다.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2절)
바울은 동포들의 구원 문제로 속을 썩이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인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 메시아라고 인정하지 않고, 율법을 계속 지키면서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아직 구원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도 못하고, 심판의 날을 맞게 될 동포들을 생각하면 바울은 쑤실 만큼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울은 동포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근심과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전도사로서의 사랑의 깊이가 있습니다. 더우기 바울은 3절에서‘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때문에 맨 먼저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선조 대대로 혈통에 의해 부여받은 권리와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특권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다른 민족보다도 우월한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이 특권의식, 자부심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유대인이 특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6절 이하에 쓰여진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유대인들의 선조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 이삭에게는 두 명의 자녀, 야곱과 에서가 있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동생 야곱을 선택하고, 형 에서는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뭔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했다거나, 야곱이 에서보다 신앙심이 깊은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선택은 인간 측의 어떠한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1절 후반에 쓰여있는 것처럼‘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라 어떤 자를 선택하고, 어떤 자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시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을 진행해 나가신다는 것이 야곱과 에서의 예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저희들은 형 에서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15절, 출33:19)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절망하고, 하나님께서 너무하시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에서가 너무 가엾지 않냐? 나도 에서처럼 취급 받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가엾게 여겨 사랑해 주시는 분이 아니었던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편애하시는 분이었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선택받지 못한 쪽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여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선택받을리가 없는 인간이 선택되어 가엾게 여겨지고 사랑받고 있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선택받을 요소가 전혀 없는 인간을 선택하여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우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해서 파멸시켰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에서도 하나의 큰 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아람인입니다. 에서의 자손도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큰 구원의 말씀 중에 선택받은 것이 야곱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은 우리의 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또한 야곱처럼 선택되어 그 구원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의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와 비교해서 많고 적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사랑받는다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동안에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다든지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선택함에 있어서 사랑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지 않고, 옆에 있는 저 사람은 어떻지? 하고 옆의 사람만 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선택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일대일로 마주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만을 쳐다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18절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시었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관 하에 사랑의 선택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선택하시고 자유롭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는 인간 측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정한 안심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시는 이유, 구원해 주시는 이유가 우리 측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스스로 그것을 쟁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거기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관, 사랑에 있어서의 주관 때문에 우리들은 그 사랑을 은혜로서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해야만 하는 것은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우리 인간이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지 않냐?’는 의문에 설득력 있는 회답을 할 수 없으시겠죠. 그러나 성경의 회답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이상, 이 세상의 모든 불공평은 공평하게 돼 있어야만 합니다. 가장 공평하신 분이 가장 불공평한 것을 견디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에 의해 처음으로 우리들은 모든 의문으로부터 해방되고, 이러한 우리가 ‘긍휼의 그릇’(9:23)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럴 때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믿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철저하게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선택한 그릇’으로서 써 주십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2:10)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릇으로서, 우리들은 이 사랑을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해 나갑시다.
2022年7月1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エフェソ(에베소서) 11章 28~30節
〇讃 頌 讃頌歌 539(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로마서) 9章 1~18節
〇説 教 「神あなたを選ばれる神(당신을 택하시는 하나님)」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82(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7月 1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を選ばれる神」 ローマ書 9章 1~18節
「どのようなものも、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示された神の愛から、わたしたちを引き離す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
先週のお話した内容ですが、パウロほど神さまの愛を感じながら生きた人はいないかと思います。自分は神さまに愛されている。この愛を誰も奪うことは出来ない。パウロは神さまとの深い交わりをいつも持っていました。
これはパウロが特別な信仰者であったからそうだったのでしょうか? 別に聖人とか特別の信仰者ではなくても、神さまとの交わりが深くなる時、そのような感覚は誰でも持つことが出来るの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そのような神との親密な交わりを求めていくのが信仰者の歩みであるとも言えます。そして、それが感謝と喜びに満ちた歩みになるのだろうと思います。
ただ、 そのパウロにも憂いていることがありました。2節です。「わたしには深い悲しみがあり、わたしのこころには絶え間ない痛みがあります。」(2節)
パウロは同胞の人々の救いのことで心を痛めていたのです。ユダヤ教徒であるイスラエルの人々は、イエス・キリストを救い主、メシアとは認めていません。律法を守り続けながら、メシアの到来を待ち続けているのです。つまり彼らにはまだ救いが来ていないのです。現実には、イエス・キリストが来られたのに、それを受け入れないがために、救いを得ることなく、裁きの日を迎えることになる同胞を思うとき、パウロにはうずくような心の痛みがありました。
パウロはその同胞から激しい迫害をされていました。しかしなおその同胞のことを思うと悲しみがあり痛みがあるというのです。ここにパウロの伝道者としての愛の深さがあります。さらにパウロは3節で「肉による同胞のためならば、キリストから離され、神から見捨てられた者となってもよいとさえ思っています」と語っています。
そもそもイスラエルの民は、特別に神さまから選ばれていた民です。本来であれば、真っ先にイエスさまの救いを受け入れるべき人々です。それなのにイエスさまを信じず、イエスさま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神さまの救いを受け入れないのです。
それはユダヤ人たちが、自分たちはイスラエルの民、神さまに選ばれた民であるということを、先祖代々の血のつながりによって与えられている権利のように思っていたからです。彼らは、神さまに選ばれた民であることを、神さまの大いなる恵みとしてよりも、自分たちの特権のように受け止めており、それによって自分たちが他の民よりも優れているように思っているのです。彼らが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る救いを受け入れないのも、この特権意識、誇りによるものです。彼らは、自分たちが、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の死によって罪を赦していただかなければ救われない罪人であるということを受け入れないのです。パウロは、神さまの選びをユダヤ人の特権のように思うことは大きな間違い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それが6節以降で語られている内容です。
パウロはこのことを、ユダヤ人たちの祖先の例をあげて説明しています。アブラハムの息子イサクには、二人の息子、ヤコブとエサウがおりました。ヤコブとエサウは双子です。神さまは二人が生まれる前から、弟ヤコブを選び、兄エサウは選ばれなかったのです。それはエサウが何か神さまの御心に適わないことをしたからとか、ヤコブがエサウより信心深い立派な人だったからではありません。つまりこの選びは、人間の側の何等の条件による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11節後半にあるように「自由な選びによる神の計画が人の行いにはよらず、お召しになる方によって進められるため」だったのです。神さまはご自分の自由によって、ある者を選び、ある者を選ばないことがおできになる、そういう神の選びによって神さまの御計画が進められていく、ということをヤコブとエサウの例は示しているのです。
ただ、私たちは兄エサウがかわいそうな気もします。また「わたしは自分が憐れもうと思う者を憐み、慈しもうと思う者を慈しむ」(15節, 出33:19)とあります。私たちはこういうところで、躓いてしまいます。神さまってひどくないかと思うのです。エサウはかわいそうではないか? 私もエサウのように扱われるのではないか? 神さまはすべての人間を憐れみ慈しんでくださるのではないか? 神さまはそんな依怙贔屓をなさる方なのか? そんな疑問がわいてきます。
しかし、ここで私たちが注目しないといけないのは、選ばれない側のことではありません。神さまが憐れまず慈しまれない人間がいる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パウロはむしろ選ばれるはずのない人間が選ばれ、憐れまれ慈しまれているということをここで語っているのです。神さまが本来選ばれる要素が全くない人間を選び慈しまれる、そのことを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それに、そもそも神さまはエサウを憎んで滅ぼされたかという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エサウも、一つの大きな部族とされたのです。それがアラム人です。エサウの子孫も大きな民族とされました。ただ、神さまの大きな救いの物語の中に選ばれたのがヤコブであっ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
皆さん、この救いの物語は私たちの上にも及んでいるのです。私たちもまたヤコブのように選ばれ、その救いの物語に入れられているのです。
神さまの選びにおける愛というのは、誰かと比べて、多い少な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私たちのすべてを満たされる、それが神さまの愛です。あの人の方が私より愛されているとか、他の人を愛するその手の空いた合間にちょっとだけ神さまは私を愛されるつか、そう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神さまは私たちのすべてをその選びにおいて愛しておられるのです。
それなのに、私たちが神さまの愛の方を向かずに、隣のこの人はどうなんだ?とその人を見ていたらどうでしょう。そういう姿勢では神さまの本当の愛と選びを感じることは出来ません。神さまは私たちを選び、一対一で向き合ってくださる方です。だから私たちも神さまだけを見上げ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
18節に「神は御自分が憐れみたいと思う者を憐れみ、かたくなにしたいと思う者をかたくなにされるのです。」とあります。この神さまが「かたくなにされた」というのはどういうことでしょうか。
それは人間が神さまに逆らうことさえも神さまの主権の下にある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の主権の下で、愛の選びがなされるのです。神さまは自由に選び自由に愛される。神さまの愛の理由は人間の側にないということです。全くないのです。しかし、そのことのゆえに私たちは真の安心を得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もし、愛される理由、救われる理由が私たちの側にあるとしたら、私たちは自分でそれを勝ち取らねばなければなりません。そこには恵みはないのです。神さまの主権、愛における主権のゆえに私たちはその愛を恵みとして受け取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のすべきことは、その恵みを喜び、感謝するだけなのです。神さまの選びを全て私たち人間が理解することは出来ないでしょう。神さまは「不公平ではないか」という疑問に説得力のある回答は出せないでしょう。しかし、聖書の回答は、御子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です。神の御子が私たちのために十字架についた以上、この世の全ての不公平は公平にされるはずです。最も公平なお方が最たる不公平を忍ばれたからです。そして、この十字架によって初めて私たちはすべての疑問から解放されて、この私が「憐れみの器」(9:23)に他ならないことを知るのです。
しかし、それでも頑なに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を信じないこの世の多くの方がいます。では、私たちはどうすれば良いでしょうか。その時、私たちのすべきことは、信じさせ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この私が信じることです。大切なのは、この私が徹底的に信じることなのです。
皆さん、私たちは生まれる前から神さまに選ばれた者なのです。私たちがこの神さまの恵みを喜び、感謝するならば、神さまが私たちを「選んだ器」として用いて下さいます。エフェソの信徒への手紙2章10節にこうあります。「なぜなら、わたしたちは神に造られたものであり、しかも、神が前もって準備してくださった善い業の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おいて造られたからです、わたしはその善い業を行って歩むのです。」(エフェソ2:10)
皆さん、神さまの愛を信じ、神さまが選んだ器として、私たちはこの愛を一人でも多くの人に伝えていきましょう。
【2022년 7월 10일 주일예배(요약판)】
“당신을 택하시는 하나님” 로마서 9장 1~18절
‘어떠한 것도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끊을 수 없으리라.’
지난 주 말씀 내용입니다만, 바울만큼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면서 살아온 사람도 없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자신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고, 이 사랑을 그 누구도 뺏을 수 없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감을 항상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바울이 특별한 신앙인이었기때문이었을까요? 특별한 성인이라든지 신앙인이 아니어도 하나님과의 교감이 깊어질 때, 그러한 감각은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한 하나님과의 친밀한 교감을 추구해 가는 것이 신앙인이 걸어가야 할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감사와 기쁨으로 넘치는 신앙의 발걸음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런 바울에게도 걱정거리가 있었습니다. 2절입니다.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2절)
바울은 동포들의 구원 문제로 속을 썩이고 있었습니다. 유대교인인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의 주, 메시아라고 인정하지 않고, 율법을 계속 지키면서 메시아의 도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즉 그들에게는 아직 구원이 찾아오지 않았던 것입니다. 현실적으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구원을 얻지도 못하고, 심판의 날을 맞게 될 동포들을 생각하면 바울은 쑤실 만큼 마음이 아팠습니다.
바울은 동포들로부터 심한 박해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동포들을 생각하면 할수록 근심과 고통이 밀려왔습니다. 여기에 바울의 전도사로서의 사랑의 깊이가 있습니다. 더우기 바울은 3절에서‘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라고 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 백성들은 특별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민족이었습니다. 때문에 맨 먼저 예수님의 구원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믿지 않고, 예수님께서 가져오신 하나님의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입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이 자신들은 이스라엘 백성, 즉 하나님께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선조 대대로 혈통에 의해 부여받은 권리와 같은 것으로 여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백성이라는 것을, 하나님의 크나큰 은혜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특권과 같은 것으로 받아들임으로 인해서 자신들이 다른 민족보다도 우월한 것처럼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들이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도 이 특권의식, 자부심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죽음에 의해 죄사함을 받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하는 죄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선택을 유대인이 특권과 같이 생각하는 것은 큰 잘못이라고 말했습니다. 그것이 6절 이하에 쓰여진 내용입니다.
바울은 이것을 유대인들의 선조의 예를 들어 설명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녀 이삭에게는 두 명의 자녀, 야곱과 에서가 있었습니다. 야곱과 에서는 쌍둥이입니다. 하나님은 이 두 사람이 태어나기 전부터 동생 야곱을 선택하고, 형 에서는 선택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에서가 뭔가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했다거나, 야곱이 에서보다 신앙심이 깊은 훌륭한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닙니다. 다시 말해서 이 선택은 인간 측의 어떠한 조건에 의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1절 후반에 쓰여있는 것처럼‘하나님의 뜻이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오직 부르시는 이로 말미암아 서게 하려 하사’였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자유 의사에 따라 어떤 자를 선택하고, 어떤 자를 선택하지 않는 것이 가능하시고, 그러한 하나님의 선택에 의해 하나님의 계획을 진행해 나가신다는 것이 야곱과 에서의 예에 나타나 있습니다.
다만, 저희들은 형 에서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15절, 출33:19) 하셨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들은 절망하고, 하나님께서 너무하시는 것 아니냐고 생각하게 됩니다. 에서가 너무 가엾지 않냐? 나도 에서처럼 취급 받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간을 가엾게 여겨 사랑해 주시는 분이 아니었던가? 하나님께서 그렇게 편애하시는 분이었다는 말인가? 이런 의문들이 생깁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만 하는 것은, 선택받지 못한 쪽의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가여워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도 아닙니다. 바울은 오히려 선택받을리가 없는 인간이 선택되어 가엾게 여겨지고 사랑받고 있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래 선택받을 요소가 전혀 없는 인간을 선택하여 사랑하시는 것에 대해서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더우기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에서를 미워해서 파멸시켰는가 하면 그것은 아닙니다. 에서도 하나의 큰 부족을 이루었습니다. 그것이 아람인입니다. 에서의 자손도 큰 민족을 이루었습니다. 단지 하나님의 큰 구원의 말씀 중에 선택받은 것이 야곱이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구원의 말씀은 우리의 위에까지 이르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또한 야곱처럼 선택되어 그 구원의 말씀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에 있어서의 사랑이라는 것은 누구와 비교해서 많고 적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들의 모든 것을 채워주시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저 사람이 나보다 사랑받는다든지, 다른 사람을 사랑해 주시는 동안에 잠시 한가한 틈을 타서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해 주신다든지 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모든 것을 선택함에 있어서 사랑해 주십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향하지 않고, 옆에 있는 저 사람은 어떻지? 하고 옆의 사람만 보고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그런 자세로는 하나님의 진정한 사랑과 선택을 느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선택하시고 일대일로 마주해 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하나님만을 쳐다보아야만 하는 것입니다.
18절에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고자 하시는 자를 완악하게 하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이 하나님께서 ‘완악하게 하시었다’는 것은 어떤 것이었을까요?
그것은 인간이 하나님께 거역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주관 하에 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관 하에 사랑의 선택이 행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유롭게 선택하시고 자유롭게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이유는 인간 측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니 전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우리들은 진정한 안심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하시는 이유, 구원해 주시는 이유가 우리 측에 있다고 한다면, 우리들은 스스로 그것을 쟁취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거기에는 은혜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주관, 사랑에 있어서의 주관 때문에 우리들은 그 사랑을 은혜로서 받을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들이 해야만 하는 것은 그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택을 우리 인간이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겠죠. 하나님께서 ‘불공평하지 않냐?’는 의문에 설득력 있는 회답을 할 수 없으시겠죠. 그러나 성경의 회답은,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독생자가 우리들을 위하여 십자가에 매달린 이상, 이 세상의 모든 불공평은 공평하게 돼 있어야만 합니다. 가장 공평하신 분이 가장 불공평한 것을 견디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십자가에 의해 처음으로 우리들은 모든 의문으로부터 해방되고, 이러한 우리가 ‘긍휼의 그릇’(9:23)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고집스럽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지 않는 이 세상의 많은 분들이 계십니다. 그렇다면 우리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이럴 때 우리들이 해야 하는 것은, 그들을 믿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로 내가 믿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바로 내가 철저하게 믿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태어나기 전부터 하나님께 선택받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들이 이러한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하고 감사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들을‘선택한 그릇’으로서 써 주십니다. 에베소서 2장 10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에베소서2:10)
여러분,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그릇으로서, 우리들은 이 사랑을 한 사람이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전도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