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5절에서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하여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이 노예 상태에 있었던 애굽에서 탈출하고나서 일년에서 이년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율법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는 커녕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립니다. 그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 광야를 헤매게 됩니다. 결국 지도자인 모세조차 이 세대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라고 약속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6~8절에서 신명기 30장 11~1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앙 의인”과 “행위 의인”을 대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와 신명기 사이에는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며(신명기 1:3 참조), 신명기는 40년 후의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에게 말한 모세의 고별 설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5절에서 레위기를 인용하여, 애굽을 탈출한 세대가 누구 하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이대면서 이번에는 신명기를 인용하여 신앙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8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즉 주님이신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고한 백성들이었습니다. 4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로 그 완고함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켜 인도해 주셨고(신명기8:4-5 참조)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신명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말씀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너희들을 하나님께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인도해 주시고 결코 너희들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까이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라는 말을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시는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9절에서 말하고 있는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는다”(9절)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에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절)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 고백이라는 것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의에 이르러 “해피 엔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나서야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 고백을 마음의 문제로서 마음 속에 숨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이 신앙 고백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성령의 하나님이시며(고전 12:3 참조), 이 성령의 힘을 마음 속에서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인을 인도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집단 행위가 되어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라는 이 신앙 고백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토대입니다. 신앙 고백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법입니다.
또한 이 신앙 고백의 특징이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태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절)
신앙 고백은 인종이나 젠더 혹은 신분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구별이나 차별을 모두 다 없애고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여기에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은 “그를 부르는”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신앙 고백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만큼 얻기 쉬운 자격이 또 있을까요? 우리들은 아무런 공적도 없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죄와 부패투성이인체로 단지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고 외치며 모여들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은혜를 바울은 구약 성서의 말씀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이 말씀은 요엘 2장 32절로부터 인용했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사도 베드로도 말한 말씀입니다. (행 2:21 참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말한 바울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말한 이상, 거기에는 이미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지금의 박해 같은 것을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도 평안을 주는 말씀입니다만, 이 말씀이 최초로 언급되기 시작한 시대는 순교와 표리 관계에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기”는커녕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오히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살해당한다”는 그런 살벌한 현실 속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고 그곳에 모이는 교회의 성도들은 이 말씀에 실족하기는커녕 이 말에 의지했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그 밖의 많은 훌륭한 전도자도 모두 다 살해당했습니다. 그 이후의 교회사도 순교와 박해의 역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을 빼앗기고 또 어떤 사람은 팔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신앙 고백은 조금도 변함없이 계승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아니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평안해지고 싶고, 건강해 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야말로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라는 신앙 고백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구원을 얻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고 구원은 가까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쳐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외침은 결코 헛되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간절한 기도가 되고 우리를 살리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2022年8月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エル書(요엘) 3(2)章 5(32)節
〇讃 頌 讃頌歌 190(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로마서) 10章 5~13節
〇説 教 「救い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ます(구원은 당신 가까이 있습니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86(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8月 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救い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ます」 ローマ書 10章5~13節
パウロは5節で、レビ記18章5節を引用し、「モーセは、律法による義について、『掟を守る人は掟によって生きる』と記しています。」と、このように語り始めています。
レビ記というのは、イスラエルが奴隷状態にあったエジプトから脱出して、1年から2年の間に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戒めの記録です。しかし、イスラエルの人々は神さまの戒めを守るどころか、神さまから離れてしまうのです。そのため、約束の地カナンに入ることが出来ず、40年間荒れ野をさまようことになります。結局、指導者であるモーセでさえこの世代の者たちはカナンに入ることが出来なかったのです。ですから、「掟を守る人は掟によって生きる」、と約束されますが、歴史的事実として、掟によって生きた者は、一人もいなかったのです。
それからパウロは、6~8節で申命記30章11~14節の御言葉を引用しながら「信仰義認」と「行い義認」を対比的に説明しているのです。
先のレビ記と申命記の間には40年の歳月が流れていて(申命記1:3参照)、申命記は40年後の新しい世代の人々に語られているモーセの告別説教なのです。ここで大切なことは、前の5節でレビ記を引用して、エジプトを脱出した世代が、誰一人律法によって命を得なかったという歴史的事実を突き付けながら、今度は申命記を引用して、信仰による義についてキリストとの関係で説明しているのです。そして、その結論が、「御言葉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あなたの心にある。」(8節)ということです。
この御言葉とは、神さまの言葉であり、すなわち主なる神さまそのものです。主なる神さまが御言葉によって、イスラエルの只中に宿っ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です。
でも、イスラエルの人々は頑なな民でした。40年たっても、やはりその頑なさは一向に治りませんでした。それでも、その最初から最後まで、主なる神さまはイスラエルを守り導いてくださり(申命記8:4、5参照)、見捨てられることがなかったのです。
この申命記で語られておりますことをパウロはキリストとの関係で「御言葉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あなたの心にある。」と語っているのです。御言葉、すなわち主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入れないあなたを神さまは忍耐強く導かれている、決してあなたを見捨てることはないと語っているのです。しかも、主イエス・キリストは近くにおられるのだというのです。
パウロは「御言葉はあなたの近くにあり、あなたの口、あなたの心にある」というこの言葉を「これは、わたしたちが宣べ伝えている信仰の言葉なのです。」と語っています。律法の完成者であられる主イエス・キリストが聖霊によって、私たちと共におられる、インマヌエル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ですから、私たちに必要なことは、信仰の行いではなく、私たちのすぐ近くにおられる御言葉、すなわち主イエス・キリストを受け入れることです。このイエスさまを信じるということだけなのです。そして、この信じるということの具体的な内容が、9節で言われております「口でイエスを主であると公に言い表し、心で神が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られたと信じる」(9節)ということなのです。
「口で公に言い表し、心で信じる」、これこそ私たちの信仰告白です。この信仰告白を最も簡潔に言いますと、「イエスは主である」ということと「神さまがこのイエスさま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そして、さらにパウロは「実に、人は心で信じて義とされ、口で公に言い表して救われるのです。」(10節)と語ります。これは信仰告白というものが、心の問題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心で信じて義とされて、「めでたしめでたし」、で終わりではなく、それを口で公に言い表して始めて信仰告白となるのです。そもそも、信仰告白を心の問題として、内側に秘めておくことは出来ないはずなのです。「イエスは主である」、この信仰告白に導かれるのは聖霊なる神さまあり(Ⅰコリント12:3参照)、この聖霊の力を内側にコントロールすることなど出来ないからです。
そして、さらに大切なのは、口で公に言い表して救われる者たちの群れが、教会という信仰共同体を形成していくということです。信仰告白とは、一人一人の罪人を導かれる聖霊の働きでありますが、同時にそれは集団行為となり、「イエスは主である」というこの信仰告白が、キリストの教会を形成していく土台であるのです。信仰告白は、必然的に教会を形成していくものなのです。
また、この信仰告白の特質が12節で示されています。「ユダヤ人とギリシア人の区別はなく、すべての人に同じ主がおられ、御自分を呼び求めるすべての人を豊かにお恵みになるからです。」(12節)
信仰告白は、人種や、ジェンダー、或いは、身分と言ったこの世における区別や差別をすべて取り除き、一つの民族共同体を形成していき、それが神の民であり、キリストの教会なのです。
ここに「御自分を呼び求めるすべての人」とありますが、神の民の資格は「御自分を呼び求める」すなわち、「イエスは主である」と信仰を告白するだけで十分なのです。これほど得やすい資格があるでしょうか。私たちは、何の功績もなく、何も持たず、むしろ罪と腐敗にまみれて、ただ「イエスは主である」と集まってくるだけです。しかし、そこに神さまは計り知れない恵みを与えてくださるのです。
そして、この救いの恵みをパウロは旧約聖書の御言葉によって結論づけています。「『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のです。」(13節)
この御言葉は、ヨエル書3章5節からの引用です。ペンテコステの時、使徒ペトロも語った御言葉です。(使徒2:21参照)
ユダヤ人に福音を伝えたペトロも、異邦人に福音を語ったパウロも、「主の御名を呼ぶ者は皆、救われる」、この御言葉によって救いを語ったのです。「主の御名を呼ぶ者は皆」という以上、そこにはもはやユダヤ人も異邦人もないのです。
「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この御言葉は、今の迫害などよく知らない私たちにとって、平安を与える御言葉であるわけですが、この御言葉が最初に語られ始めた時代というのは、殉教と背中合わせにあったのです。「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どころか、「イエスは主である」と信仰告白したばかりに殺されてしまった時代なのです。むしろ、「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殺される」、そのような殺伐とした現実の中で、「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この御言葉が語られたのです。
初代教会、そしてそれに続く教会の信徒たちは、この御言葉に躓くどころか、この御言葉にすがったのです。パウロもペトロも、他の多くの立派な伝道者も全て殺されていきました。それ以降の教会史も殉教と迫害の歴史でした。ある者は、目を奪われ、他の者は腕を奪われました。それでもこの信仰告白は何ら変わることなく継承されていったのです。それは、「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これが真理であるからです。
キリスト者であっても、いえ、信仰を持つからこそ、いつも平安でありたい、健康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しかし、それが叶わなかった時にこそ、この「イエスは主である」という信仰告白によって、私たちは救いを得るものでありたいと願います。
皆さん、キリストは、救いは、近くにあるのです。「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のです。私たちは呼び求めさえしたらよいのです。私たちの呼びかけは決して虚しくは終わりません。キリストが近くにおられることを信じて祈るとき、その祈りは切実な祈りとなり、私たちを生かす祈りとなるのです。
【2022년 8월 7일 주일예배(요약판)】
“구원은 당신 가까이 있습니다” 로마서 10장 5~13절
바울은 5절에서 레위기 18장 5절을 인용하여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 라고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레위기는 이스라엘이 노예 상태에 있었던 애굽에서 탈출하고나서 일년에서 이년 사이에 하나님으로부터 부여받은 율법의 기록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사람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기는 커녕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버립니다. 그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하고 40년간 광야를 헤매게 됩니다. 결국 지도자인 모세조차 이 세대의 사람들은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라고 약속되지만, 역사적 사실로서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자는 한 사람도 없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6~8절에서 신명기 30장 11~14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신앙 의인”과 “행위 의인”을 대비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레위기와 신명기 사이에는 40년의 세월이 흘렀으며(신명기 1:3 참조), 신명기는 40년 후의 새로운 세대의 사람들에게 말한 모세의 고별 설교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5절에서 레위기를 인용하여, 애굽을 탈출한 세대가 누구 하나 율법으로 말미암아 생명을 얻지 못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들이대면서 이번에는 신명기를 인용하여 신앙으로 말미암는 의에 대해서 그리스도와의 관계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결론이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는 것입니다. (8절)
이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자, 즉 주님이신 하나님 그 자체입니다.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말미암아 이스라엘의 한가운데에 머물러 계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사람들은 완고한 백성들이었습니다. 40년이 지나도 마찬가지로 그 완고함은 전혀 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을 지켜 인도해 주셨고(신명기8:4-5 참조) 버리지 않으셨습니다.
이 신명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바울은 그리스도와의 관계에서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라고 했습니다. 말씀 즉,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는 너희들을 하나님께서는 인내심을 가지고 인도해 주시고 결코 너희들을 버리지 않으신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가까이 계신다고 말했습니다.
바울은 “말씀이 네게 가까워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라는 말을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율법의 완성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은 신앙의 행위가 아니라 우리 가까이 계시는 말씀 즉,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이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이 믿는다는 것의 구체적인 내용이 9절에서 말하고 있는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는다”(9절)는 것입니다.
“입으로 시인하고 마음에 믿는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신앙 고백입니다. 이 신앙 고백을 가장 간결하게 표현하자면,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라는 것과 “하나님께서 이 예수님을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한 바울은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10절)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신앙 고백이라는 것이 마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으로 믿고 의에 이르러 “해피 엔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입으로 시인하고 나서야 신앙 고백이 되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 고백을 마음의 문제로서 마음 속에 숨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이 신앙 고백으로 인도하시는 것은 성령의 하나님이시며(고전 12:3 참조), 이 성령의 힘을 마음 속에서 컨트롤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더욱 중요한 것은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받는 사람들의 무리가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를 형성해 간다는 것입니다. 신앙 고백이란 한 사람 한 사람의 죄인을 인도해 주시는 성령의 역사입니다만, 동시에 그것은 집단 행위가 되어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라는 이 신앙 고백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토대입니다. 신앙 고백은 필연적으로 교회를 형성해 나가는 법입니다.
또한 이 신앙 고백의 특징이 12절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유태인이나 헬라인이나 차별이 없음이라 한 분이신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12절)
신앙 고백은 인종이나 젠더 혹은 신분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구별이나 차별을 모두 다 없애고 하나의 민족 공동체를 형성해 나가며, 그것이 하나님의 백성들이며 그리스도의 교회입니다.
여기에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들에게”라는 구절이 있습니다만, 하나님의 백성의 자격은 “그를 부르는” 즉 “예수님을 주님으로 시인한다”는 신앙 고백을 하는 것만으로 충분합니다. 이만큼 얻기 쉬운 자격이 또 있을까요? 우리들은 아무런 공적도 없고 아무것도 가지지 않았으며, 오히려 죄와 부패투성이인체로 단지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고 외치며 모여들뿐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하나님께서는 헤아릴 수 없는 은혜를 내려 주십니다.
그리고 이 구원의 은혜를 바울은 구약 성서의 말씀으로 결론짓고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3절)
이 말씀은 요엘 2장 32절로부터 인용했습니다. 성령강림절에 사도 베드로도 말한 말씀입니다. (행 2:21 참조)
유대인들에게 복음을 전한 베드로도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말한 바울도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 이 말씀을 가지고 구원을 말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라고 말한 이상, 거기에는 이미 유대인도 이방인도 없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이 말씀은 지금의 박해 같은 것을 잘 모르는 우리들에게도 평안을 주는 말씀입니다만, 이 말씀이 최초로 언급되기 시작한 시대는 순교와 표리 관계에 있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기”는커녕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신앙 고백을 했기 때문에 살해당하는 시대였습니다. 오히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살해당한다”는 그런 살벌한 현실 속에서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이 전해졌습니다.
초대 교회 그리고 그곳에 모이는 교회의 성도들은 이 말씀에 실족하기는커녕 이 말에 의지했습니다. 바울도 베드로도 그 밖의 많은 훌륭한 전도자도 모두 다 살해당했습니다. 그 이후의 교회사도 순교와 박해의 역사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눈을 빼앗기고 또 어떤 사람은 팔을 빼앗겼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이 신앙 고백은 조금도 변함없이 계승되어 갔습니다. 그것은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는 이 말씀이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이라도, 아니 신앙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평안해지고 싶고, 건강해 지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에야말로 “예수님께서는 주님이시다” 라는 신앙 고백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이 구원을 얻는 자가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여러분, 그리스도께서는, 그리고 구원은 가까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외쳐 구하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외침은 결코 헛되게 끝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께서 가까이 계신다는 것을 믿고 기도할 때, 그 기도는 간절한 기도가 되고 우리를 살리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