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장 13절) 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라는 것은 주님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며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입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10장 9절) 라고 바울이 이미 말한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16절) 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고난 받는 종”에 대해서 쓰여 있습니다. 구약 성서의 메시아 예언 중의 하나입니다만, 여기에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도저히 메시아라고 생각되지 않는 주님의 종의 비참한 모습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3-6절 참조)
이스라엘은 이사야가 말하는 메시아에게 실족했습니다. 이 복음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부터 바울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메시아상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버림받는 메시아였습니다. 당연히 이 남자의 어디가 메시아인가 하는 이 이사야 시대에 이러한 비참한 메시아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약 600년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이사야의 예언대로 고난 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생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듯이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신앙임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사야를 인용해서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의 현실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복음의 구세주가 바로 십자가의 주님이시며 게다가 복음 선교를 섬기는 바울들 자신도 이 세상적으로는 아무 쓸모 없는 가난한 자이며 교회도 작은 것이 때문입니다. 이 비참한 바울들이 비참한 구세주를 선교할 때에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라는 현실이 들이닥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우리의 신앙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아무런 핸디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절) 라고 나와 있는 것 같이 신앙은 우리의 가난함이나 교회의 작음이나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설교라는 것은 어느 성경 말씀이 주어져도 반드시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거절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신명기 32장 21절에 있는 모세의 말씀을 인용해서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19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바로 이것이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식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우상 숭배에 빠질 때 시기하십니다. 반대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다른 백성들을 친자식처럼 기르시면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시기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모와 자식이라면 그러한 마음이 강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인 이상 그렇게 있어 주었으면 한다고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기해서라도 돌아오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정상이면 그 사랑은 시기조차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이사야는 매우 대담하게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라고 말하였다”(20절) 라고 이사야 65장 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구원의 예언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찾고 물어야 할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것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구원이 향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자기들을 향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들을 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것을 시기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돌아와 주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복음을 듣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 결과 구원은 이방인들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21절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21절)
이것은 마찬가지로 이사야 65장 2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라고. 여기에는 계속 반항해 온 이스라엘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의 구원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끝까지 자신의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 방탕한 자식(눅15:11~24)의 비유의 구약판입니다. “하루 종일 손을 별렸다”, 이것은 죄인의 돌아옴을 그날도 그다음 날도 먼 곳을 바라보고 계속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그 대상이 불순종으로 반항하는 백성입니다.
즉 우리는 올바르지 않아도 좋은 것입니다. 죄도 허물도 있는 채로 회개하고 하루 종일 손을 벌려 주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 곁에 돌아오면 됩니다. 우리의 죄는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모두 다 씻어 흘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갚지 않아도 좋습니다. 단지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구원받았습니다. 게다가 이 남자가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눅23:39~43)
우리의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가 구원받을 날을 벌써 수십년째 계속 기도해 왔는데 상황은 일절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가 혹은 그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루 종일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도 일절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상에서 앞으로 한 시간밖에 살 수 없다고 해도 거기서 회개하면 만만세입니다.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최후까지 소중한 사람의 구원을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쓰이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와 같은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하루 종일 손을 내밀고 계시는 주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너무 서먹서먹하고, 차갑고, 둔감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루 종일, 매일매일, 손을 내밀고 계시는 주님께 단 하루라도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이런 우리야말로 불순종으로 반항하는 백성입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는 그 어리석은 우리를 시기할 만큼 사랑해 주십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기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부모, 형제가 시기할 정도로 우리가 주님이신 하나님,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이나 친구가 시기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을 가지지 않는 가족이나 소중한 친구에 대하여 최고의 간증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나 형제를 소중히 여겨 아끼고 시기할 정도로 사랑하듯이, 그 부모나 형제가 시기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사랑이 진짜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
2022年8月2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65章 1~2節
〇讃 頌 讃頌歌 531(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0章 14~21節
〇説 教 「手を差し伸べられる神(손을 내밀어 주시는 하나님)」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19(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8月 2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手を差し伸べられる神」 ローマ書 10章 14~21節
先週、「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はだれでも救われる」(10章13節)という御言葉を聞きました。「主の名を呼び求める者」というのは、主なる神さまを信じということであり、「口でイエスを主であると公に言い表し、心で神がイエスを死者の中から復活させられたと信じるなら、あなたは救われる」(10章9節)とパウロがすでに述べた通りです。
しかし、「すべての人が福音に従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16節)と、パウロは指摘しております。イザヤ書53章には「受難の僕」について語られています。旧約聖書におけるメシア預言の一つですが、ここにはイスラエルにとって、とてもメシアとは思われないような主の僕の惨めな姿が預言されているのです。(イザヤ53章3-6節 参照)
イスラエルはイザヤが語るメシアに躓きました。この福音に背を向けたのです。
イザヤの時代からパウロの時代に至るまで、イスラエルのメシア像は、人々から軽蔑され、見捨てられるメシアでした。当然、この男のどこがメシアなのか、とこのイザヤの時代に、このような惨めなメシアを信じる者は誰一人いませんでした。しかし、それがおよそ600年後に、キリストの十字架で実現したのです。キリストは、確かにイザヤの預言通り、受難の僕として神の民の犠牲となって十字架で死なれたのです。
パウロは旧約のイスラエルが信じなかったように、いつの時代でも神の民が不信仰であることを痛烈に批判しているのです。
そして、パウロがイザヤ書を引用して「主よ、だれがわたしたちから聞いたことを信じましたか」と語るのは、教会の現実を想定しております。教会が語る福音の救い主というのが、まさに十字架の主であり、しかも、福音宣教に仕えるパウロたち自身も、この世的には何の取り柄のない貧しい者であり、教会も小さな場所だからです。この惨めなパウロたちが、惨めな救い主を宣教する時に、「主よ、だれがわたしたちから聞いたことを信じましたか」という現実が突き付けられていたのです。それは今の私たちの教会の現実でもあります。
しかし、この現実は、信仰が生み出されるためには何らハンディにはなりません。むしろ、この惨めな現実の中で信仰は始まるのです。17節に「実に、信仰は聞くことにより、しかも、キリストの言葉を聞くことによって始まるのです」(17節)とありますように、信仰は、私たちの貧しさや、教会の小ささ、そういうものとは無関係に与えられるのです。「信仰は聞くことにより、しかも、キリストの言葉を聞くことによって始まる」、これが信仰の始まりなのです。ここで言われていますキリストの言葉とは、端的に言えば、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です。ですから、教会における説教というのは、どの聖書個所が与えられても、必ず主イエスの十字架が語られることなのです。
それからパウロは福音を拒んだイスラエルについて申命記32章21節のモーセの言葉を引用して「わたしは、わたしの民でない者のことであなたがたにねたみを起こさせ、愚かな民のことであなたがたを怒らせよう」(19節)と言っています。
「ねたむ」ということが、分かりづらいのですが、まさにこれが親子関係ではないかと言うことです。イスラエルの父なる神さまは、我が子イスラエルを愛するがゆえに、彼らが偶像崇拝に陥る時、妬むのです。逆に、父なる神さまが、我が子イスラエルではなく、他の民を実の子のように養えば、今度はイスラエルが妬むということです。本当の親子であればそういう思いが強いはずです。神さまは親である以上そうあってほしいと願っているのです。妬んででも立ち帰って欲しいのです。親子の愛が正常であれば、その愛は妬みさえ生み出すのです。
さらにパウロは「イザヤも大胆に、『わたしは、わたしを探さなかった者たちに見いだされ、わたしを尋ねなかった者たちに自分を現した』と言っています。」(20節)、とイザヤ書65章1節を引用しています。これは異邦人の救いの預言です。本来であるならば、私を探し、尋ねるはずの民であるイスラエルが、それを放棄してしまったから、異邦人に救いが向け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神さまの思いとしては、自分たちに向けられるはずの神さまの愛が異邦人に向けられたのだからユダヤ人たちはそれを妬んで、もう一度神さまのところに戻って来て欲しいということなのです。
イスラエルは、確かに福音を聞いて理解しました。ところが、福音を無視したのです。その結果、救いは異邦人に向けられました。しかし、まだ終わりではないのです。21節です。「わたしは、不従順で反抗する民に、一日中手を差し伸べた。」(21節)
これは同じくイザヤ書65章の2節からの引用です。「不従順で反抗する民に、一日中手を差し伸べた」と。ここには、反抗し続けて来たイスラエルではありますが、それでも尚、イスラエルの救いが残されていることが示されるのです。神さまは最後の最後までご自身の民の立ち帰りを待っておられるということです。
これは、あの放蕩息子のたとえ(ルカ15:11~24)の旧約版なのです。「一日中手を差し伸べた」、これは、罪人の立ち帰りを、来る日も来る日も遠くを眺めて待ち続けてくださる神さまの姿です。しかも、その対象が、「不従順で反抗する民」なのです。
つまり、私たちは正しくなくてもいいのです。罪も咎もあるまま、悔い改めて一日中手を差し伸べて待ってくださる父なる神さまの許に帰ればいいのです。私たちの罪は、主イエスさまが十字架で全て洗い流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だから何も償わなくて良いのです。ただ立ち帰ること、これが福音です。
主イエスさまの隣で十字架につけられた強盗は、息を引き取る直前に救われました。しかも、この男が最初のキリスト者になったのです。最初にキリストの十字架を信じて救われたからです。(ルカ23:39~43)
私たちの大切な家族や友人が救われる日を、もう何十年も祈り続けてきたのに状況は一切変わらない。しかし、それでも尚、彼が或いは彼女が神の民にされるのなら、主なる神さまは、一日中手を差し伸べておられるのです。この神さまの救いの約束も一切変わらないのです。地上であと一時間しか生きられなくても、そこで悔い改めれば万々歳です。そこから永遠の命が始まるから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最後の最後まで、大切な人の救いを願い続け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死の床でキリストを信じるために用いられる方もおられるからです。
それから、皆さん。私たちのような役に立たない罪人のために、一日中手を差し伸べておられる主なる神さまに対して、私たちは、あまりにもよそよそしくて、冷たく、鈍感ではないでしょうか。私たちは、こんな私たちのために、一日中、毎日毎日、手を差し伸べておられる主なる神さまに対して、たった一日でも手を差し伸べ続けたことがあるでしょうか。皆さん。この私たちこそ、不従順で反抗する民なのです。しかし、主なる神さまは、その愚かな私たちを妬むほど愛してくださるのです。そして、神さまは、私たちが神の子として妬むほどに神さまを愛することを求めておられるのです。
ですから、大切なのは、私たちの親、兄弟が妬むくらいに、私たちが主なる神さま、十字架の主イエスさまを愛することではないでしょうか。家族や親友が嫉妬するくらいキリストを愛する、これがキリスト者の務めです。
そしてそれが、信仰を持たない家族や大切な友人に対して、最高の信仰の証にな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親や兄弟を大切に思って嫉妬するくらい愛するように、その親や兄弟に嫉妬されるくらいキリストを愛す時、初めてその愛が本物であることが証明されるのです。
【2022년 8월 21일 주일예배(요약판)】
“손을 내밀어 주시는 하나님” 로마서 10장 14~21절
지난주,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10장 13절) 라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 라는 것은 주님이신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이며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입으로 믿으면 구원을 받으리라”(10장 9절) 라고 바울이 이미 말한대로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다 복음을 순종하지 아니하였도다”(16절) 라고 바울은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사야 53장에는 “고난 받는 종”에 대해서 쓰여 있습니다. 구약 성서의 메시아 예언 중의 하나입니다만, 여기에는 이스라엘에 있어서 도저히 메시아라고 생각되지 않는 주님의 종의 비참한 모습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이사야 53장 3-6절 참조)
이스라엘은 이사야가 말하는 메시아에게 실족했습니다. 이 복음을 거절한 것입니다.
이사야 시대부터 바울 시대에 이르기까지 이스라엘의 메시아상은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받고 버림받는 메시아였습니다. 당연히 이 남자의 어디가 메시아인가 하는 이 이사야 시대에 이러한 비참한 메시아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약 600년 후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실현되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확실히 이사야의 예언대로 고난 받는 종으로서 하나님의 백성들의 희생이 되어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바울은 구약의 이스라엘이 믿지 않았듯이 어느 시대에나 하나님의 백성들이 불신앙임을 통렬히 비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이사야를 인용해서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의 현실을 상정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말하는 복음의 구세주가 바로 십자가의 주님이시며 게다가 복음 선교를 섬기는 바울들 자신도 이 세상적으로는 아무 쓸모 없는 가난한 자이며 교회도 작은 것이 때문입니다. 이 비참한 바울들이 비참한 구세주를 선교할 때에 “주여 우리가 전한 것을 누가 믿었나이까” 라는 현실이 들이닥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지금 우리 교회의 현실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 현실은 우리의 신앙이 만들어지기 위해서는 아무런 핸디가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 비참한 현실 가운데서 신앙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17절에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7절) 라고 나와 있는 것 같이 신앙은 우리의 가난함이나 교회의 작음이나 그런 것과는 무관하게 주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이것이 신앙의 시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말씀이란 단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에서의 설교라는 것은 어느 성경 말씀이 주어져도 반드시 주 예수님의 십자가를 말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복음을 거절한 이스라엘에 대해서 신명기 32장 21절에 있는 모세의 말씀을 인용해서 “내가 백성 아닌 자로써 너희를 시기하게 하며 미련한 백성으로써 너희를 노엽게 하리라”(19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시기한다”는 것이 이해하기 어렵습니다만, 바로 이것이 부모와 자식 관계가 아닌가 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는 자식 이스라엘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그들이 우상 숭배에 빠질 때 시기하십니다. 반대로 아버지이신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이 아니라 다른 백성들을 친자식처럼 기르시면 이번에는 이스라엘이 시기한다는 것입니다. 진정한 부모와 자식이라면 그러한 마음이 강해질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부모인 이상 그렇게 있어 주었으면 한다고 원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시기해서라도 돌아오는 것을 원하고 계십니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 정상이면 그 사랑은 시기조차 만드는 것입니다.
또한 바울은 “이사야는 매우 대담하게 [내가 나를 찾지 아니한 자들에게 찾은 바 되고 내게 묻지 아니한 자들에게 나타났노라] 라고 말하였다”(20절) 라고 이사야 65장 1절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방인의 구원의 예언입니다. 본래 하나님을 찾고 물어야 할 백성인 이스라엘이 그것을 포기해 버렸기 때문에 이방인에게 구원이 향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생각으로는 자기들을 향해야 할 하나님의 사랑이 이방인들을 향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은 그것을 시기하고 다시 한번 하나님께 돌아와 주었으면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분명 복음을 듣고 이해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복음을 무시한 것입니다. 그 결과 구원은 이방인들을 향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아직 끝이 아닙니다. 21절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21절)
이것은 마찬가지로 이사야 65장 2절에서 인용한 것입니다. “순종하지 아니하고 거슬러 말하는 백성에게 내가 종일 내 손을 벌렸노라” 라고. 여기에는 계속 반항해 온 이스라엘이긴 하지만 여전히 이스라엘의 구원이 남아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마지막 끝까지 자신의 백성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저 방탕한 자식(눅15:11~24)의 비유의 구약판입니다. “하루 종일 손을 별렸다”, 이것은 죄인의 돌아옴을 그날도 그다음 날도 먼 곳을 바라보고 계속 기다려 주시는 하나님의 모습입니다. 게다가 그 대상이 불순종으로 반항하는 백성입니다.
즉 우리는 올바르지 않아도 좋은 것입니다. 죄도 허물도 있는 채로 회개하고 하루 종일 손을 벌려 주시는 아버지이신 하나님 곁에 돌아오면 됩니다. 우리의 죄는 주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모두 다 씻어 흘려 주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갚지 않아도 좋습니다. 단지 돌아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주 예수님 옆에서 십자가에 못박힌 강도는 숨을 거두기 직전에 구원받았습니다. 게다가 이 남자가 최초의 그리스도인이 된 것입니다. 제일 먼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고 구원받았기 때문입니다. (눅23:39~43)
우리의 소중한 가족이나 친구가 구원받을 날을 벌써 수십년째 계속 기도해 왔는데 상황은 일절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래도 그가 혹은 그녀가 하나님의 백성이 된다면 주님이신 하나님께서는 하루 종일 손을 내밀고 계십니다. 이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도 일절 바뀌지 않았습니다. 지상에서 앞으로 한 시간밖에 살 수 없다고 해도 거기서 회개하면 만만세입니다. 거기에서 영원한 생명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지막 최후까지 소중한 사람의 구원을 계속 기도해야 합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그리스도를 믿기 위해서 쓰이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우리와 같은 쓸모없는 죄인을 위해서, 하루 종일 손을 내밀고 계시는 주 하나님에 대해, 우리는, 너무 서먹서먹하고, 차갑고, 둔감하지 않을까요? 우리는, 이런 우리를 위해서, 하루 종일, 매일매일, 손을 내밀고 계시는 주님께 단 하루라도 손을 내밀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이런 우리야말로 불순종으로 반항하는 백성입니다. 그러나, 주 하나님께서는 그 어리석은 우리를 시기할 만큼 사랑해 주십니다.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로서 시기할 정도로 하나님을 사랑하기를 원하십니다 .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우리의 부모, 형제가 시기할 정도로 우리가 주님이신 하나님, 십자가의 주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닐까요? 가족이나 친구가 시기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사랑하는 것,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책무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신앙을 가지지 않는 가족이나 소중한 친구에 대하여 최고의 간증이 되는 것이 아닐까요? 부모나 형제를 소중히 여겨 아끼고 시기할 정도로 사랑하듯이, 그 부모나 형제가 시기할 정도로 그리스도를 사랑할 때 비로소 그 사랑이 진짜임이 증명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