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먼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1절) 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은 지금까지 로마서에서 말해 온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라는 말은 “이미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있는 너희들에게” 라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로서 또 은혜 가운데 있는 자로서 너희가 이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맨 처음에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1절)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그리고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치신 것같이 우리 또한 자신을 바칩니다. 일요일 아침, 각각의 장소에서의 일이나 활동을 그만두고 교회에 모입니다. 자신의 힘과 시간과 노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단순히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 현실의 육체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현실 생활 가운데서 살아가는 일상의 시간 가운데 예배에 자기 자신의 육체로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형식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또 거기서 뭔가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그런 시간을 얻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2절에서 분명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 안에서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자신에게 뭔가 플러스가 된다거나 뭔가 좋은 것을 받는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는 것이 예배입니다. 물론 매주 매주 예배에 왔다고 해서 딴 사람이 되어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희가 드리고 있는 예배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배에 나왔다고 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자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배 생활을 계속해 가는 사이에 확실히 누구나 바뀌어 갑니다. 성격이 바뀌거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 방식의 근본에 관한 부분이 어느새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왠지 모르게 변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누구나 “극적”으로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정감적인 공감이나 이지적인 이해를 넘어 자기가 바뀌어 간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자신을 바쳐 순순히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린다고 말해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로 기꺼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2절) 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다”라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또 교회도 이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가치관에 따르지 않으면 실제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 이 세상의 가치관이 반드시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보다 더 잘 살고 싶어 하고, 이 세상의 가치관도 그런 소원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쫓는다든지 자기 실현을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이 세상의 가치관도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분명 그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만, 우리가 단지 이 세상을 본떠 세속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사실은 진정한 자신의 꿈이나 실현해야 할 일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는 못다 이룬 꿈을 계속 꾸거나 아무리 해도 실현할 수 없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무한히 헤매게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았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우리는 예배를 보거나 혹은 매일의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들고 또 묻습니다. 물론 거기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꿔 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에 우리는 진정 있어야 할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에게 바울이 권하고 있는 것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3절)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기를 과대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당히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을 과대 평가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과대 평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와 능력을 마치 자기 자신의 자질이나 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들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바울 시대의 교회 중에도 여러가지로 열심히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에 너무 뜨거워져서 앞뒤 안 가리고 저돌맹진해 버리는 곳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이렇게 하고 있다고 들떠 버리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것은 이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신앙에 의하여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훌륭한 은사, 재능이나 스킬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특별한 재능을 그 재능의 높이 때문에 이 세상적인 평가로 때문에 자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난 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평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왕왕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굉장하다” 라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적인 평가로 칭찬을 합니다. 반대로 그 뒤에서 나 같은 것은 대단한 재능도 없어서 안 된다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판단하고 잘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모습과도 근본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
교회에 연결되는 사람들은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은 뭔가 교회의 일체감을 나타내는 기분 좋은 말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 지체이고 각각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살려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역할 분담을 해 가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되기 이전에 우선 서로 지체라는 것을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이 지체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정도에 따라 지혜롭게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 변화를 받아 진정한 자신의 은사와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각각의 은사를 살려서 생활을 해 갈 때, 이 세상적인 평가는 끼어들지 못합니다. 이 세상적인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그러나, 정말로 여유롭고 풍요로운 사람으로서 우리는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공동체 안에서도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사람으로서 더 풍요로워지고 공동체에도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
2022年9月18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27編 21節
〇讃 頌 讃頌歌 207(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2章 1~8節
〇説 教 「主にある一つの体(주에 있는 하나의 몸)」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65(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9月 1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主にある一つの体」 ローマ書 12章 1~8節
パウロはまず「こういうわけで、兄弟たち、神の憐みによってあなたがたに勧めます。」(1節)と語りはじめています。「こういうわけ」というのは、これまで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の中で語られてきた神さまの愛の御計画を踏まえ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神の憐みによって」というのは、すでに神さまの憐みの中にあるあなたがたに、ということです。すでに神さまによって、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救われた者として、また恵みにある者として、このように生きることができるはず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
そこで最初に語られていることは、「自分の体を神さまに喜ばれる聖なるいけにえとして献げなさい」(1節)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罪赦された者として、神さまを礼拝するために教会にきます。そして、かつてキリストがご自身を捧げ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また、自分を捧げます。日曜日の朝、それぞれの場所での働き、活動をやめて、教会に集います。自分の力と時間と労力を捧げて神さまを礼拝をするのです。まさに自分の体を献げるのです。聖書の神さまを信じる信仰というのは、単に心の中で神さまを思ったり、頭の中で神さまを信じたりするのではなく、自分たちの現実の体、肉体を伴うものです。現実の生活の中で、生きていく日々の時間の中で、礼拝に、自分自身の肉体をもって出席するのです。
そして、その礼拝は形式的な儀式ではありません。また、そこで何か良いお話を聞いたり、人生を豊かにするような時間を得るということでもありません。パウロは2節ではっきりと「心を新たにして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と語っています。私たちは礼拝において自分を変えていただくのです。礼拝において自分に何かプラスになるものとか、何かを良いものを頂くというのではなく、自分自身が変えられるのが礼拝です。もちろん毎週毎週、礼拝に来たときとは別人のようになって帰って行くということはないでしょう。でも、礼拝では、神さまの御言葉を聞き、聖霊によって、自分を変えていただくのです。それが私たちが献げている礼拝です。
とは言っても、礼拝に出たからと言って、劇的に変わったと自覚をすることはほとんどない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礼拝生活を続けていくうちに、確実に、どなたも変えられていきます。性格が変わったり、考え方が根本的に変わったりすることはないでしょう。でも、生き方の根本にかかわる部分がいつのまにか変えられていくのです。ある日、ふと気付くと、自分でもそういえば何となく変わったなあと感じることがあるでしょう。でも、実際には誰でも、「劇的」に変えられているのです。情感的な共感や理知的な理解を越えて、自分が変えられていく、それが礼拝です。自分をささげ、素直に神さまの御前に立つ時、神さまが、私たちを変えてくださるのです。
ところで、「自分の体を神さまに喜ばれる聖なるいけにえとして献げる」と言っても、私たちは、どこまでいっても罪人です。神さまが私たちを変えてくださらなければ、私たちは「神に喜ばれる聖なる生けるいけにえ」にはなり得ないのです。それでも、神さまは私たちを「聖なる」ものとして喜んで受け取ってくださるのです。そのように憐れみ深い神さまであられるからこそ、私たちは礼拝を献げ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そして、パウロは「あなたがたはこの世に倣ってはなりません」(2節)と言います。「世に倣う」というのは、世の価値観に従うということです。ただ、私たちは、私たち一人一人も、また教会もこの世の中にあるがゆえにこの世の価値観に従わなければ、実際のところ生きてはいけません。
また、この世の価値観があながち間違いであるとも言えません。誰しもがより良く生きたいと思っていますが、この世の価値観もそういった願いに基づいたものでもあるのです。自分の夢を追うとか、自己実現をするという、この世の価値観もあります。自分の夢をかなえるために努力する姿というのは、素晴らしいもののように思えます。確かにそれは大変素晴らしいものですが、私たちがただこの世に倣って生きている時、実は本当の自分の夢や実現すべきことというものは見えていないのです。自分自身の思いにいっぱいいっぱいになって、私たちは見果てぬ夢を見つづけるか、どこまでいっても実現できない自分の本来のあり方を見つけるために無限にさまようこと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
神さまに「心を新たにして自分を変えていただいた」とき、はじめて私たちは、本当の自分のあり方を見つけることが出来ます。「何が神の御心であるか、何が善いことで、神に喜ばれ、また完全なことであるかをわきまえるようになりなさい。」(2節)
私たちは礼拝において、あるいは日々の祈りにおいて、神さまの御心を聞き、また問います。勿論、そこで示されることもあります。しかし何より、神さまが私たちを変えてくださることによって、私たちが神さまの御心や神さまが善しとされることを理解できるようにしてくださるのです。そして、この世に倣うのではなく、神さまに自分を変えていただき、御心を知るとき、私たちはほんとうにあるべき自分の姿で生き始め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それから、その新しい生き方をはじめた人間に対して、パウロが勧めているのが、「自分を過大評価してはなりません」(3節)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よほどうぬぼれの強い人間でなければ、自分を過大評価などはあまりしないと思っています。しかし、ここでいう過大評価と言うのは、神さまが一人一人に与えられている賜物、能力をあたかも自分自身の資質であったり力であるかのように思うことを指しています。
そしてまた、「過大評価してはならない」ということは、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恵みに対して必要以上に舞い上がっ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す。おそらくパウロの時代の教会の中にも、様々にがんばって教会のために働く人がいたのでしょう。そういう人たちは信仰に熱くなりすぎて、猪突猛進してしまうようなところもあったのでしょう。結果的に自分はこんなにやっていると舞い上がってしまうような人々に対して言っているのです。
ですからパウロは、神が各自に分け与えてくださった信仰の度合いに応じて慎み深く評価しなさいと語っています。「信仰の度合いに応じて」とは、この世の判断ではなく、信仰によって判断をしなさいと言うことです。
たとえば、多くの人にはできないすばらしい賜物、才能やスキルをもって、教会に仕える人がいたとして、その人が、特別な才能をその才能の高さのゆえに、この世的な評価ゆえに誇っているとしたらそれは思い上が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慎み深い評価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教会の中においても往々にしてそれは起こり得ることです。特別な才能を持った人に対して「あの人はすごいね」と羨望の的になったりします。この世的な評価でもてはやします。逆に、その陰で自分なんて大した才能もなくだめだと思ってしまう人が出てくるということが起きてきます。ですから、信仰をもって判断する。ちゃんとわきまえるのです。
これは、教会という共同体のあり方とも根本的にかかわっております。パウロは5節でこう語っています。「わたしたちも数は多いが、キリストに結ばれて一つの体を形づくっており、各自は互いに部分なのです。」(5節)
教会につながる人々は一つの体を形成しているという言葉は、何か教会の一体感を現す心地よい言葉のようにも聞こえます。そして、互いに部分であって、それぞれに神さまから与えられた賜物を生かして、お互いを尊重して役割分担をしてやっていきましょうというように思えます。
しかし、ここで大事なことは、一つになると以前に、まず、それぞれが部分である、ということをわきまえ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それぞれが部分以上のも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つまり「信仰の度合いに応じて慎み深く自分を評価することを徹底する」ということなのです。
そもそも神さまによって変えられ、本当の自分の賜物、恵みに気づいた者がそれぞれの賜物を生かして生活をしていく時、この世的な評価は入り込んできません。この世的な評価から自由に、しかし、本当に豊かな者として私たちは用いられていきます。そして自然な形で共同体の中でも役割を果たしていくことが出来るのです。その時、私たちはキリストに結ばれた者としてさらに豊かにされ、共同体にも喜びが満ちあふれるのです。
【2022년 9월 18일 주일예배(요약판)】
“주에 있는 하나의 몸” 로마서 12장 1~8절
바울은 먼저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1절) 라고 말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므로” 라는 말은 지금까지 로마서에서 말해 온 하나님의 사랑의 계획을 근거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하심으로” 라는 말은 “이미 하나님의 자비하심 가운데 있는 너희들에게” 라는 뜻입니다. 이미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자로서 또 은혜 가운데 있는 자로서 너희가 이렇게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거기서 맨 처음에 말하고 있는 것은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리라”(1절) 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사함을 받은 자로서 하나님을 예배하기 위해서 교회에 옵니다. 그리고 일찍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을 바치신 것같이 우리 또한 자신을 바칩니다. 일요일 아침, 각각의 장소에서의 일이나 활동을 그만두고 교회에 모입니다. 자신의 힘과 시간과 노력을 바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바로 자신의 몸을 드리는 것입니다. 성경의 하나님을 믿는 신앙이란 단순히 마음 속에서 하나님을 생각하거나 머리로만 하나님을 믿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신의 몸, 현실의 육체를 동반하는 것입니다. 현실 생활 가운데서 살아가는 일상의 시간 가운데 예배에 자기 자신의 육체로 출석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예배는 형식적인 의식이 아닙니다. 또 거기서 뭔가 좋은 이야기를 듣거나 인생을 풍요롭게 하는 그런 시간을 얻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바울은 2절에서 분명히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예배 안에서 자신이 바뀌는 것입니다. 예배를 통해 자신에게 뭔가 플러스가 된다거나 뭔가 좋은 것을 받는다거나 하는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이 바뀌는 것이 예배입니다. 물론 매주 매주 예배에 왔다고 해서 딴 사람이 되어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신을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저희가 드리고 있는 예배입니다.
그렇다고 해도 예배에 나왔다고 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고 자각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예배 생활을 계속해 가는 사이에 확실히 누구나 바뀌어 갑니다. 성격이 바뀌거나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뀌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생활 방식의 근본에 관한 부분이 어느새 바뀌어 가는 것입니다. 어느 날, 문득 정신을 차리고 보면, 왠지 모르게 변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누구나 “극적”으로 바뀌어 있는 것입니다. 정감적인 공감이나 이지적인 이해를 넘어 자기가 바뀌어 간다, 그것이 예배입니다. 자신을 바쳐 순순히 하나님 앞에 설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내 몸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거룩한 제물로 드린다고 말해도 우리는 어디까지나 죄인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제물”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거룩한 산 제물”로 기꺼이 받아 주시는 것입니다. 그렇게 자비하신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우리는 예배를 드릴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2절) 라고 말합니다. “이 세대를 본받는다”라는 것은 이 세상의 가치관에 따른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도 또 교회도 이 세상 속에 있기 때문에 이 세상의 가치관에 따르지 않으면 실제로는 살아갈 수 없습니다.
또 이 세상의 가치관이 반드시 틀렸다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누구나 보다 더 잘 살고 싶어 하고, 이 세상의 가치관도 그런 소원에 바탕을 둔 것입니다. 자신의 꿈을 쫓는다든지 자기 실현을 한다든지 하는 그러한 이 세상의 가치관도 있습니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은 보기 좋습니다. 분명 그것은 아주 훌륭한 일입니다만, 우리가 단지 이 세상을 본떠 세속적으로 살아가고 있을 때 사실은 진정한 자신의 꿈이나 실현해야 할 일이란 보이지 않습니다. 자기 자신의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우리는 못다 이룬 꿈을 계속 꾸거나 아무리 해도 실현할 수 없는 자신의 본연의 모습을 찾아내기 위해 무한히 헤매게 되어 버립니다.
하나님께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았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2절)
우리는 예배를 보거나 혹은 매일의 기도 중에 하나님의 마음을 들고 또 묻습니다. 물론 거기서 나타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꾸어 주시는 것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하나님의 마음이나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따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를 바꿔 주시고 하나님의 마음을 알 때에 우리는 진정 있어야 할 자신의 모습으로 살기 시작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새로운 삶을 시작한 사람에게 바울이 권하고 있는 것이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3절) 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것은 자기를 과대 평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상당히 자만심이 강한 사람이 아니라면 자신을 과대 평가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여기서 말하는 과대 평가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주시는 은사와 능력을 마치 자기 자신의 자질이나 힘인 것처럼 생각하는 것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과대 평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에 대해서 필요 이상으로 들떠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아마 바울 시대의 교회 중에도 여러가지로 열심히 교회를 위해 일하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신앙에 너무 뜨거워져서 앞뒤 안 가리고 저돌맹진해 버리는 곳도 있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자신은 이렇게 하고 있다고 들떠 버리는 사람들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고 합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라는 것은 이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신앙에 의하여 판단하라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많은 사람에게는 할 수 없는 훌륭한 은사, 재능이나 스킬을 가지고 교회를 섬기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그 사람이 특별한 재능을 그 재능의 높이 때문에 이 세상적인 평가로 때문에 자랑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난 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혜로운 평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도 왕왕 그런 일은 일어날 수 있습니다. 특별한 재능을 가진 사람에 대해서 “저 사람은 굉장하다” 라며 선망의 대상이 되기도 합니다. 이 세상적인 평가로 칭찬을 합니다. 반대로 그 뒤에서 나 같은 것은 대단한 재능도 없어서 안 된다고 생각해 버리는 사람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을 가지고 판단하고 잘 분별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교회라는 공동체의 모습과도 근본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바울은 5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이 우리 많은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이 되어 서로 지체가 되었느니라”(5절)
교회에 연결되는 사람들은 하나의 몸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은 뭔가 교회의 일체감을 나타내는 기분 좋은 말 같기도 합니다. 그리고 서로 지체이고 각각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를 살려서 서로를 존중하면서 역할 분담을 해 가자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가 되기 이전에 우선 서로 지체라는 것을 분별한다는 것입니다. 각각이 지체 이상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정도에 따라 지혜롭게 자신을 평가하는 것을 철저히 하는 것입니다.
원래 하나님께 변화를 받아 진정한 자신의 은사와 은혜를 깨달은 사람이 각각의 은사를 살려서 생활을 해 갈 때, 이 세상적인 평가는 끼어들지 못합니다. 이 세상적인 평가로부터 자유롭게, 그러나, 정말로 여유롭고 풍요로운 사람으로서 우리는 사용될 것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공동체 안에서도 역할을 해 나갈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들은 그리스도에게 연결된 사람으로서 더 풍요로워지고 공동체에도 기쁨이 넘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