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경말씀은 이 바울의 말로부터 비롯됩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지배자나 권위를 가지는 자에 대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세상의 지배자나 권위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바울이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그 이유로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절) 라고 말합니다.
성경 말씀은 어떤 부분의 한 말씀만을 꺼낼 경우 자의적으로 읽힐 위험성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사상이나 가치관의 뒷받침을 위해서 성경 말씀이 인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류를 막기 위해서 성경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과 13장은 하나의 테마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자로서 어떻게 사느냐?” 라는 것입니다. 1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로서 세상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12:18-19) 또 오늘의 성경 말씀의 13장 8절 후반에도 바울은 “사람들과 다투지 말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기”(13:10)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라면 “이 세상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면 전쟁을 포함한 악에도 복종하라”는 생각은 나올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속의 가르침을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에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가 12:17)
바울은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13:7)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양심 때문에 세상의 질서에 복종하고 그 때문에 조세나 관세나 노역도 세상에 지불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라고.
우리는 이웃이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나의 형제나 자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이웃이란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는 이웃이 될 수 없다” 고 우리는 저항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에게 욕을 하는 사람이나 까닭 없는 공격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러나 그 싫은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습니다. 그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너를 위해서 죽어 주었기 때문에 너는 새 생명을 받았던 게 아니냐? 그런데도 왜 싫은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없느냐? 바울은 그 네로마저 이웃으로서 사랑하라고 쓰지 않았느냐?” 라고. 이웃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여도 보복하지 말라.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그 사람들은 이웃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힘을 끝까지 믿으라. 살해당해도 끝까지 믿으라고 그렇게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삶이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을 가지고 복종하라”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과연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박해를 체험하면서도 이 세상의 권력이라는 것을 절대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4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로마 황제라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복종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유나 억지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지배하에서 이 세상의 권력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선을 행하는 계기로서 파악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돌연 이웃사랑의 이야기로 바뀐 것처럼 생각됩니다만, 같은 문맥 속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한다는 의무를 완수하는 것보다 사랑을 가지고 빚을 갚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크나큰 빚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어서 나타난 사랑에 대해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속죄라는 말은 빚을 대신 갚는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노예였던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속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갚지 못하는 사랑의 부채를 지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서는 빚을 내지 않도록 할 수 있어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사랑의 부채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이해할 때 우리는 조금씩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단지 정감적인 것이 아닙니다. 막연히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의 실천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권력자에 대해서 선을 행하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에 대해서도 우리는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자를 따르는 것보다 이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바치셔서 우리를 위해 선을 행하신 그리스도께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볼 때에 이웃과도 서로 사랑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도 아니, 때로는 너무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랑의 빚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그 빚을 늘려 갈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를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지배 가운데 있는 우리는 사랑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진정한 권위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겸손하게 하면서, 주님과 함께 걸어 가는 가운데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져 갑시다.
2022年10月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5章 46~48節
〇讃 頌 讃頌歌 290(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3章 1~10節
〇説 教 「愛は隣人に悪を行わない(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52(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0月 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愛は隣人に悪を行わない」 ローマ書 13章 1~10節
「人は皆、上に立つ権威に従うべきです。」(1節)
今日の御言葉は、このパウロの言葉から始まっています。この世の支配者、権威をもつ者に対して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とパウロは言っているわけですが、この世の支配者、権威から迫害されてきたパウロが語る言葉だと思うと不思議な気がします。パウロはその理由として、「神に由来しない権威ははく、今ある権威はすべて神によって立てられたものだからです」(1節)と語ります。
聖書の言葉は、ある言葉だけを取り出した場合、恣意的に読まれる危険性があります。つまり、自分の思想や価値観の裏付けのために聖書が引用されるのです。その過ちを防ぐためには、聖書は文脈の中で読まなければなりません。
12章と13章は、一つのテーマで語られています。それは「キリスト者としてどのように生きるのか?」と言うことです。12章では、パウロは、キリストに召された者として、世の人々と平和に暮らすことを勧めています。「すべての人と平和に暮らしなさい。愛する人たち、自分で復讐せず、神の怒りに任せなさい。」(12:18-19)
また、今日の御言葉の13章8節後半でもパウロは「人々と争うな」と勧めます。何故ならば、「愛は隣人に悪を行わない」(13:10)からです。
このような文脈の中で「この世の秩序維持のためであれば戦争も含めた悪にも従いなさい」という考えは出て来ません。パウロは、イエスさまが言われた従属の教えをここで考えているのです。「皇帝のものは皇帝に、神のものは神に返しなさい。」(マルコ12:17)
パウロは、「すべての人々に対して自分の義務を果たしなさい。貢を納めるべき人には貢を納め、税を納めるべき人には税を納め、恐るべき人は恐れ、敬うべき人は敬いなさい。」(13:7)と言っています。キリスト者は良心の故に世の秩序に服従し、そのために貢や税や労役も世に支払うのです。そして、同時に神さまのものは神さまに納めます。だから、パウロは言います。「世に倣ってはいけない・・・何が神の御心であり、何が良いことで、神に喜ばれ、また完全であるかをわきまえなさい」(12:2)と。
私たちは、隣人とは自分を愛してくれる人、自分の兄弟姉妹だと思っています。しかし、聖書が教えるのは、隣人とは自分を憎む人、自分に危害を加える人です。「そういう人とは隣人になれない」と私たちは抵抗しますが、イエスさまはその私たちに問われているのです。「あなたの信仰はどこにあるのだ」と。
私たちの周りには、私たちの悪口を言う人、言われなき攻撃をする人が必ずいます。私たちはその人たちが嫌いです。しかし、その嫌いな人のためにキリストは死なれた。その嫌いな人を愛することが神さまを愛することだと告げられます。「イエスが罪人のあなたのために死んでくれたから、あなたは新しい命をもらったではないか。それなのに何故嫌いな人のために死ねないのか。パウロはあのネロをさえ隣人として愛せと書いたではないか」と。隣人が私たちに悪を働いても報復するな、裁くのは神さまであって私たちではない。私たちがするべきは自分を憎む者のために祈ることです。その祈りを通して、その人は隣人になっていきます。「神さまの力を信じ通しなさい。殺されても信じ通しなさい」、そう命じられています。とは言っても、私たちは納得できません。でも、聖書が教える生き方というのは、理性的に納得でき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信仰を持って従え」と語られているものなのです。
「誰がこんなことが可能なのか」と私たちは正直に思ってしまいます。しかし、パウロは迫害を体験しながらも、この世の権力というものを絶対的なものだとは全く思っていなかったのです。「権威者は、あなたに善をおこなわせるために、神に仕える者なのです」(4節)とパウロは言っています。たとえ皇帝であっても神さまの御計画の中で神さまに仕える神さまの僕に過ぎない、だから従ってやろうではないかと言っているのです。それは皮肉や負け惜しみで言っているのではありません。本当に恐るべきお方は神さまであり、本当に恐るべきものは神さまの裁きだと考えているからです。その神さまの御支配のもとで、この世の権力を含め、すべてのことを、善をおこなう契機としてとらえようと言っているのです。
さらにパウロは、「互いに愛し合うということのほかは、誰に対しても借りがあってはなりません」(8節)と言っています。突然、隣人愛の話に変わっているように思われますが、同じ文脈の中でパウロは語っているのです。それは、上に立つ権威に従うという義務を果たすことよりも愛をもって借りを返すことの方がずっと難しいと語っているのです。
私たちには愛の借金があるのです。大きな大きな借りがあるのです。私たちには、キリストの十字架において示された愛に対して借りがあるのです。キリストは私たちの罪を贖われました。贖いという言葉は文字通り、借金を代わりに支払うということです。罪のために奴隷となっていた私たちのためにキリストは十字架にご自分を捧げられました。キリストの命によって私たちは贖われました。私たちはキリストに支払いきれない愛の負債を負っているのです。
上に立つ権威に対しては借りを造らないようにできても、私たちには永遠の愛の負債が残っています。私たちは、とんでもない金額の愛の負債を負っているのです。そのことを聖霊によって、ほんとうに理解するとき、私たちは少しずつ、隣人を愛す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なります。愛はただ情感的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なんとなく仲良くす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愛は愛の実践を伴うものです。愛するということは端的に相手に善をなすことです。
権力者に対して、善をなしなさいとパウロは語りました。同様に、隣人に対しても私たちは悪ではなく、善をなすのです。しかし、権力者に従うことよりも隣人と愛し合うことの方が私たちにははるかに難しいのです。
私たちはすべてを捧げて、私たちのために善をなしてくださったキリストへの愛の借金を返すことができません。そして自分たちの現実を見る時、隣人とも愛し合うことがなかなかできない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ごく身近な人に対しても、いえ、時には身近な人であるがゆえに十分に愛することができません。私たちの愛の借金は日々増えているようにも思います。私たちはこの地上を去るその日までその借金を増やしていくかもしれません。だからこそ私たちは祈り求めなければなりません。愛する者と私たちを変えてくださるように祈るのです。その時、神さまの御支配の中にある私たちは愛をまっとうすることができます。
皆さん、今も生きて働いてくださっている真の権威者である主イエス・キリストに依り頼みながら、主の御言葉を心に刻み、へりくだりながら、主と共に歩んでいく中で、私たちもまた善をもって、愛する者へと変えられ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
【2022년 10월 2일 주일예배(요약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는다” 로마서 13장 1~10절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1절)
오늘의 성경말씀은 이 바울의 말로부터 비롯됩니다. 바울은 이 세상의 지배자나 권위를 가지는 자에 대해 따라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데 이 세상의 지배자나 권위로부터 박해를 받아온 바울이 하는 말이라고 하기엔 어딘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바울은 그 이유로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 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바라”(1절) 라고 말합니다.
성경 말씀은 어떤 부분의 한 말씀만을 꺼낼 경우 자의적으로 읽힐 위험성이 있습니다. 즉 자신의 사상이나 가치관의 뒷받침을 위해서 성경 말씀이 인용되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오류를 막기 위해서 성경은 전체의 문맥 속에서 읽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과 13장은 하나의 테마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자로서 어떻게 사느냐?” 라는 것입니다. 12장에서 바울은 그리스도께 선택받은 자로서 세상의 사람들과 평화롭게 살아가기를 권하고 있습니다.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목하라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12:18-19) 또 오늘의 성경 말씀의 13장 8절 후반에도 바울은 “사람들과 다투지 말라”고 권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않기”(13:10) 때문입니다.
이러한 문맥 속에서라면 “이 세상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라면 전쟁을 포함한 악에도 복종하라”는 생각은 나올 수 없습니다. 바울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종속의 가르침을 여기서 생각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이사에 것은 가이사에게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바치라”(마가 12:17)
바울은 “모든 자에게 줄 것을 주되 조세를 받을 자에게 조세를 바치고 관세를 받을 자에게 관세를 바치고 두려워할 자를 두려워하며 존경할 자를 존경하라”(13:7) 라고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양심 때문에 세상의 질서에 복종하고 그 때문에 조세나 관세나 노역도 세상에 지불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하나님의 것은 하나님께 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말합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12:2) 라고.
우리는 이웃이란 나를 사랑해 주는 사람, 나의 형제나 자매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이웃이란 나를 미워하는 사람, 나에게 위해를 가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과는 이웃이 될 수 없다” 고 우리는 저항합니다만, 예수님께서는 그런 우리에게 물으시는 것입니다. “당신의 신앙은 어디에 있느냐” 라고.
우리 주변에는 우리에게 욕을 하는 사람이나 까닭 없는 공격을 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들이 싫습니다. 그러나 그 싫은 사람을 위해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습니다. 그 싫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알리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죄인의 너를 위해서 죽어 주었기 때문에 너는 새 생명을 받았던 게 아니냐? 그런데도 왜 싫은 사람을 위해서 죽을 수 없느냐? 바울은 그 네로마저 이웃으로서 사랑하라고 쓰지 않았느냐?” 라고. 이웃이 우리에게 악을 행하여도 보복하지 말라. 심판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이지 우리가 아니다.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은 우리를 미워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기도를 통해서 그 사람들은 이웃이 되어 갑니다. “하나님의 힘을 끝까지 믿으라. 살해당해도 끝까지 믿으라고 그렇게 명령을 받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우리는 납득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성경이 가르치는 삶이란 이성적으로 납득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신앙을 가지고 복종하라” 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솔직히 우리는 과연 누가 이렇게 할 수 있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박해를 체험하면서도 이 세상의 권력이라는 것을 절대적인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4절)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비록 로마 황제라도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의 종에 불과합니다. 그러니까 복종하자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은 야유나 억지로 말하고 있는 게 아닙니다.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며 정말로 두려워해야 하는 일은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 하나님의 지배하에서 이 세상의 권력을 포함하여 모든 것을 선을 행하는 계기로서 파악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은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돌연 이웃사랑의 이야기로 바뀐 것처럼 생각됩니다만, 같은 문맥 속에서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한다는 의무를 완수하는 것보다 사랑을 가지고 빚을 갚는 것이 훨씬 어렵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사랑의 빚이 있습니다. 크나큰 빚이 있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있어서 나타난 사랑에 대해 빚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죄를 속죄하셨습니다. 속죄라는 말은 빚을 대신 갚는다는 것입니다. 죄 때문에 노예였던 우리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십자가에 자신을 바치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속죄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갚지 못하는 사랑의 부채를 지고 있습니다.
위에 있는 권세에 대해서는 빚을 내지 않도록 할 수 있어도 우리에게는 영원한 사랑의 부채가 남아 있습니다. 우리는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엄청난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성령으로 말미암아 정말로 이해할 때 우리는 조금씩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랑은 단지 정감적인 것이 아닙니다. 막연히 사이좋게 지내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은 사랑의 실천을 따르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단적으로 상대방에게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권력자에 대해서 선을 행하라고 바울은 말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웃에 대해서도 우리는 악이 아니라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권력자를 따르는 것보다 이웃과 서로 사랑하는 것이 우리에게는 훨씬 어렵습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바치셔서 우리를 위해 선을 행하신 그리스도께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을 볼 때에 이웃과도 서로 사랑하기가 좀처럼 쉽지가 않습니다. 아주 가까운 사람에 대해서도 아니, 때로는 너무 가까운 사람이기 때문에 충분히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사랑의 빚은 나날이 늘어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이 지상을 떠나는 그 날까지 그 빚을 늘려 갈지도 모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우리를 바꾸어 주시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지배 가운데 있는 우리는 사랑을 완수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지금도 살아 계시고 우리를 인도하시는 진정한 권위자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 의지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 겸손하게 하면서, 주님과 함께 걸어 가는 가운데 우리도 선을 행하면서 사랑하는 사람으로 바뀌어져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