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1-12절)
바로 이제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종말, 영광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끝을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도 그렇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또한 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 이라고 말할 때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파멸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서의 세상의 끝은 파멸이 아닙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에는 종말 전에 천재지변이나 대규모 전쟁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인류가 멸망해 버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완전한 구원의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이 세계 전체로 완전히 완성될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진정한 소망의 때입니다.
그러한 종말을 바울은 극히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2000년 이상이나 넘었음으로 이 종말이 온다는 것을 경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히 종말이 오는 것, 그리고 세계가 완전히 구원받는 날이 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서라도 종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로 평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12장에서13장 전반에 걸쳐서 말하고 있는 이웃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종말에 대한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가 관계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을 생각하는 일 없이 그저 멍하고 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생활도 불안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깜깜한 밤이지만 새지 않는 날은 없다, 반드시 아침이 온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밤을 참고 견디면 아침이 오기 때문에 그때까지 열심히 노력하자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단순히 새지 않는 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아침이 와도 또 다시 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시간이란 일직선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순환하고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밤을 가로질러서 아침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제자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새벽의 물가에서 기다리셨듯이 우리의 신앙도 똑바로 새벽을 향하여 그리스도와 마주치는 빛의 아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신앙, 빛을 기다리는 신앙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입니다.
시편 130편에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5-6)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시인이 밤에 파수를 보는 사람처럼 절실히 아침을 고대하는 것 같이 우리도 확실한 빛의 아침이 오는 것을 믿고 주님을 만나 뵐 때를 고대합니다. 그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그 아침이 오늘의 성경 말씀에 있는 구원의 때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깜깜한 밤 가운데 무서워하면서 아침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무서워하면서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왜냐하면, 이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밤이라도 깜깜하지 않습니다.크리스마스의 탄생 때 어둠 속에 빛이 빛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의 어둠은 확실히 아침으로 향하고 있는 어둠입니다. 먼 저편에 빛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 가운데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침이 온 사람으로서 산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침이 와서 잠을 깨는 게 아닙니다. 이미 빛 가운데 있도록 눈을 뜨고 산다는 것입니다. 아니,신앙에 있어서 이미 아침은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일이란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빛이 비치고 있는 낮에는 나름대로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도 있습니다. 낮에는 제대로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낮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던 샐러리맨이 술에 취해 볼썽사나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우리도 지금은 밤이라고 생각하면, 즉 아직 종말이 멀다고 생각하면 자기 본위의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거나 음란 하거나 호색하거나 다투거나 시기하거나”(13절) 하는 것은 매우 심한 일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런 심한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여기에 계시는 분은 하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도 볼 수 없다면 어둠을 틈타 어둠의 일을 행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죄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얻은 사람이라도 죄의 성질이 오래된 인간의 부분이 있습니다. 그 옛 사람의 부분은 어둠을 틈타 어둠을 행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눈을 뜨고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의 날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금세 어둠에, 죄에 몸을 붙잡혀 버립니다. 그만큼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14절)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약한 우리의 빛의 갑옷입니다. 우리는 어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때에 빛을 발하여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극히 당연한 신앙 생활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끊임없이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옷을 갈아 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들 때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며 우리가 주를 따르는 사람일 때 정말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빛의 갑옷이 되어 주십니다. 그때 그리스도 자신의 품위가 우리로부터 자아내어져 나옵니다. 품위라고 하면 쑥스러운 것 같고 나는 도저히 그러지 못한다고 여길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품위입니다. 우리는 생애를 걸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품위가 주어져 걸어 가는 것입니다. 영원의 아침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에 가득 차 걸어 나아 갑시다.
여러분, 이미 아침의 빛이 보입니다. 주님의 빛나는 아침을 향하여 앞으로도 함께 걸어 갑시다.
2022年10月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130章 5~6節
〇讃 頌 讃頌歌 363(全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3章 11~14節
〇説 教 「キリストを身にまとう(그리스도를 옷 입는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178(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0月 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キリストを身にまとう」 ローマ書 13章 11~14節
「更に、あなたがたは、今がどんな時であるかを知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が眠りから覚めるべき時が既に来ています。今や、わたしたちが信仰に入ったころよりも、救いは近づいているからです。夜は更け、日が近づいた。だから、闇の行いを脱ぎ捨てて光の武具を身に着けましょう。」(11-12節)
まさに今、ヨハネの黙示録に記されている終末、栄光の時が近づいているのです。はじめがあって終わりがある、それが神さまがお造りになった私たちの世界です。私たちの時間は終わりに向かって進んでいます。それは世界もそうですし、私たち一人一人の人生もまた終わりへと向かっています。「世界の終わり」というとき、聖書を知らない人たちは、世界の破滅のようなことを考えてしまいます。しかし、聖書における世界の終わりは破滅ではありません。もちろん、ヨハネの黙示録には、終わりの時の前に、天変地異や大規模な戦争といった恐ろしいことが起こると記されています。しかし、それで人類が滅びてしまう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終わりの時は、神さまの裁きの時、つまり審判の時です。そして、同時にそれは完全な救いの時です。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なされた救いが世界全体で、完全に完成するときです。キリストを信じる者にとっては、それはまことの希望の時であります。
そのような終わりの時を、パウロはごく近いものと考えていたようですが、現実的には終わりの時はまだ来ていません。すでに2000年以上も経っていますので、この終わりの日が来るということを軽んじる人々もいます。
しかし、私たちは明確に終わりの日が来ること、そして世界が完全に救われる日が来ることを、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なぜなら、私たちが今日一日を生きるにも、終わりの日をはっきりと覚えていなければ、本当の意味での平安は得られないからです。
パウロは「あなたがたは、今、眠りから覚めるべき時であることを知っているでしょう」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この言葉は、12章から13章前半において語られていた隣人愛とつながっているのです。つまり、私たちが互いに愛し合う生活をすることにおいても、終わりの日への意識が目覚めているかどうかということが関わってくると言うのです。終わりの日を考えることなく、ただぼんやりとしているようでは、キリストにあって互いに愛し合う生活もおぼつかない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
今は真っ暗な夜だけれども、明けない夜はない、必ず朝が来ると、よく言われます。でも、それは今の夜を辛抱したら朝が来るから、それまで頑張ろうということだけではありません。単に、明けない夜はない、と言うだけであれば、朝が来てもまた再び夜が来るのです。しかし、聖書において、神さまの時間というのは、一直線に進んでいます。循環し、繰り返され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夜を貫いて朝へと向っているのです。夜通しガリラヤ湖で漁をしていた弟子たちを、復活されたキリストが夜明けの岸辺で待っておられたように、私たちの信仰もまっすぐに夜明けに向かって、キリストとあいまみえる光の朝へと進んでいるのです。朝を待つ信仰、光を待つ信仰こそが、聖書で語られている信仰です。
詩編130編に「わたしは主に望みをおき/わたしたの魂は望みをおき/御言葉を待ち望みます。わたしの魂は主を待ち望みます/見張りが朝をまつにもまして/見張りが朝をまつにもまして」(詩130:5-6)とあります。詩編の詩人が、夜、見張りをする人のように切実に朝を待ち望んでいたように、私たちもまた、確かなる光の朝が来ることを信じて、主とあいまみえる時を待ち望むのです。その朝は必ず来ます。その朝が今日の聖書箇所にある救いの時なのです。
旧約時代においては、真っ暗な夜の中で、恐れ怯えながら、朝が来るのを待っていたことでしょう。でも私たちは怯えながら救いの朝を待つのではありません。なぜなら、既に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が来られたからです。今は夜であっても真っ暗闇ではないのです。クリスマスの降誕のとき闇の中に光が輝きました。そしてまた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によって救いの業はすでになされました。ですから、今現在の闇は、確実に朝に向かっている闇なのです。遠い彼方に光の気配を感じることが出来ます。
ですから、私たちは闇の中に生きるように生きるのではありません。すでに朝が来ている者として生きるのだと聖書は語ります。朝が来て目覚めるのではありません。もうすでに光の中にあるように目覚めて生きるのだと言うのです。いえ信仰においてすでに朝は来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もう眠りから目覚めるべき時が来ているのです。
12節をご覧下さい。「夜は更け、日は近づいた。だから、闇の行いを脱ぎ捨てて光の武具を身につけましょう」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闇の行いというのは、一般的に良く考えられることです。私たちは光が当たっている昼間は、それなりにしっかりと生きるのです。世間の目もあります。昼日中、きちんとして生きていきます。しかし、夜になると、昼間はバリバリ仕事をしていたサラリーマンが酔っぱらって、みっともない姿をさらしたりします。私たちも、今は夜だと思うと、つまり、まだ主の終わりの時が遠いと思っていると、自分本位な勝手なことをして生きていくのです。
「酒宴と酩酊(めいてい)、淫乱と好色、争いとねたみ」(13節)と言うと、とてもひどいことのように感じ、私はそんなひどいことはしないと思われるかもしれません。実際、ここにおられる方はなさらないと思います。しかし、人間は誰にも見られていなければ、闇に乗じて闇の行いをなす性質を持っています。つまり、罪の性質を持っています。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罪を赦された者であっても、罪の性質の古い人間の部分があります。その古い部分は闇に乗じていくのです。ですから、私たちは意識的に目覚めて生きていかねばなりません。救いの日はまだまだ遠い、と思っていたら、たちまち闇に、罪に身を囚われてしまいます。それほど私たちは弱いのです。
だから、パウロは「主イエス・キリストを身にまといなさい」(14節)と言います。キリストこそが弱い私たちの光の武具です。私たちは闇に勝つことはできません。しかし、キリストを身にまとうとき、光を放ち、闇に打ち勝つことができます。キリストを身にまとうと言うのは、特別なことをする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ごく当たり前の信仰生活を送るということです。御言葉を聞き、たえず祈りの生活をするのです。
皆さん、服を着替える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を身にまとうのではありません。気に入ったときだけイエス・キリストを身にまとうということではないのです。キリストが主であり、私たちが従う者である時、まことにキリストは私たちの光の武具となってくださいます。その時、キリストご自身の品位が私たちから醸し出されてきます。品位というとこそばゆいような、自分には到底無理と感じてしまいますが、これはキリストにある品位です。私たちは生涯をかけてキリストによってキリストの品位を与えられて歩んでいくのです。永遠の朝へ向かって、怖れることなく、喜びに満ちて歩んでいくのです。皆さん、すでに朝の光が見えています。主の光輝く朝に向かって、これからも共に歩んでいきましょう。
【2022년 10월 9일 주일예배(요약판)】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 로마서 13장 11~14절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1-12절)
바로 이제 요한계시록에 기록되어 있는 종말, 영광의 때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처음이 있고 끝이 있다, 그것이 하나님께서 만드신 우리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시간은 끝을 향해 흐르고 있습니다. 그것은 세계도 그렇고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삶 또한 끝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끝” 이라고 말할 때 성경을 모르는 사람들은 세상의 파멸 같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서의 세상의 끝은 파멸이 아닙니다. 물론 요한계시록에는 종말 전에 천재지변이나 대규모 전쟁 같은 끔찍한 일이 일어난다고 쓰여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으로 인류가 멸망해 버린다는 것은 아닙니다. 종말은 하나님의 심판 때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완전한 구원의 때입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구원이 세계 전체로 완전히 완성될 때입니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에게 있어서는 그것은 진정한 소망의 때입니다.
그러한 종말을 바울은 극히 가까운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만, 현실적으로는 종말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미 2000년 이상이나 넘었음으로 이 종말이 온다는 것을 경시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명확히 종말이 오는 것, 그리고 세계가 완전히 구원받는 날이 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살기 위해서라도 종말을 분명히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 진정한 의미로 평안은 얻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12장에서13장 전반에 걸쳐서 말하고 있는 이웃사랑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즉 우리가 서로 사랑하는 생활을 하는 것에 있어서도 종말에 대한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가 관계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종말을 생각하는 일 없이 그저 멍하고 있으면 그리스도 안에서 서로 사랑하는 생활도 불안하다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깜깜한 밤이지만 새지 않는 날은 없다, 반드시 아침이 온다고 흔히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지금의 밤을 참고 견디면 아침이 오기 때문에 그때까지 열심히 노력하자는 것뿐만이 아닙니다. 단순히 새지 않는 날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라면 아침이 와도 또 다시 밤이 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 있어서 하나님의 시간이란 일직선으로 흐르고 있습니다. 순환하고 반복되고 있는 게 아닙니다. 밤을 가로질러서 아침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밤새도록 갈릴리 호수에서 고기잡이를 하고 있었던 제자들을 부활하신 그리스도께서 새벽의 물가에서 기다리셨듯이 우리의 신앙도 똑바로 새벽을 향하여 그리스도와 마주치는 빛의 아침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아침을 기다리는 신앙, 빛을 기다리는 신앙이야말로 성경에서 말하는 신앙입니다.
시편 130편에 “나 곧 내 영혼은 여호와를 기다리며 나는 주의 말씀을 바라는도다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내 영혼이 주를 더 기다리나니 참으로 파수꾼이 아침을 기다림보다 더하도다”(시 130:5-6) 라고 되어 있습니다. 시편의 시인이 밤에 파수를 보는 사람처럼 절실히 아침을 고대하는 것 같이 우리도 확실한 빛의 아침이 오는 것을 믿고 주님을 만나 뵐 때를 고대합니다. 그 아침은 반드시 옵니다. 그 아침이 오늘의 성경 말씀에 있는 구원의 때입니다.
구약 시대에는 깜깜한 밤 가운데 무서워하면서 아침이 오는 것을 기다리고 있었겠지요. 그러나 우리는 무서워하면서 구원의 아침을 기다리는 게 아닙니다.왜냐하면, 이미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셨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밤이라도 깜깜하지 않습니다.크리스마스의 탄생 때 어둠 속에 빛이 빛났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말미암아 구원의 역사는 이미 일어났습니다. 그래서 지금 현재의 어둠은 확실히 아침으로 향하고 있는 어둠입니다. 먼 저편에 빛의 기운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둠 가운데 사는 것처럼 사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아침이 온 사람으로서 산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침이 와서 잠을 깨는 게 아닙니다. 이미 빛 가운데 있도록 눈을 뜨고 산다는 것입니다. 아니,신앙에 있어서 이미 아침은 와 있습니다. 그래서 이미 잠에서 깨어나야 할 때가 온 것입니다.
12절을 보십시오.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둠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어둠의 일이란 일반적으로 흔히 생각할 수 있는 일입니다. 우리는 빛이 비치고 있는 낮에는 나름대로 제대로 사는 것입니다. 세상의 눈도 있습니다. 낮에는 제대로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밤이 되면 낮에 열심히 일을 하고 있었던 샐러리맨이 술에 취해 볼썽사나운 모습을 드러내기도 합니다. 우리도 지금은 밤이라고 생각하면, 즉 아직 종말이 멀다고 생각하면 자기 본위의 제멋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방탕하거나 술 취하거나 음란 하거나 호색하거나 다투거나 시기하거나”(13절) 하는 것은 매우 심한 일처럼 느껴져서 나는 그런 심한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여기에 계시는 분은 하지 않으시는 줄 압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무도 볼 수 없다면 어둠을 틈타 어둠의 일을 행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죄의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죄사함을 얻은 사람이라도 죄의 성질이 오래된 인간의 부분이 있습니다. 그 옛 사람의 부분은 어둠을 틈타 어둠을 행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의식적으로 눈을 뜨고 살아가야 합니다. 구원의 날은 아직 멀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면 금세 어둠에, 죄에 몸을 붙잡혀 버립니다. 그만큼 우리는 약합니다.
그러니까 바울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14절) 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야말로 약한 우리의 빛의 갑옷입니다. 우리는 어둠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옷을 입을 때에 빛을 발하여 어둠을 이길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은 특별한 일을 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극히 당연한 신앙 생활을 보낸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고 끊임없이 기도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옷을 갈아 입는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입는다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에 들 때만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는다는 것도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주님이시며 우리가 주를 따르는 사람일 때 정말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빛의 갑옷이 되어 주십니다. 그때 그리스도 자신의 품위가 우리로부터 자아내어져 나옵니다. 품위라고 하면 쑥스러운 것 같고 나는 도저히 그러지 못한다고 여길수도 있지만, 이것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품위입니다. 우리는 생애를 걸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리스도의 품위가 주어져 걸어 가는 것입니다. 영원의 아침을 향하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에 가득 차 걸어 나아 갑시다.
여러분, 이미 아침의 빛이 보입니다. 주님의 빛나는 아침을 향하여 앞으로도 함께 걸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