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우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1절)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로마 교회에는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생각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먹어도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바울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고집하는 것이 “연약한 믿음”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약한 믿음”이니까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이 강하다거나 약하다거나 하는 것은 어떻게 잴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강하다거니 연약하다거니 하는 말들을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믿는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 그것만이 신앙일까요?
NHK에서 통일협회 문제로 종교인들이 모여 좌담회를 하는 방송을 봤는데, 거기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 컬트와 종교의 차이의 기준으로 컬트는 “공포로 사람을 속박한다”, “착취한다. 착취당하는 곳에는 자유가 없다”, “구속한다(신앙에 사람을 얽매려고 한다)” 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구속”이라는 것은 신앙을 계속 지킨다는 것은 본래 어려운 것이며 누구나 신앙에는 망설임과 의심이 있기 마련이지만 컬트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사람은 믿음의 자유뿐만 아니라 망설일 자유가 있다. 의심하면서 신앙을 탐구한다는 것을 종교가 사람으로부터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으로 사람을 얽맨다는 측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의 신앙을 의심하거나 신앙이 연약하다고 판단하거나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은 우리가 신앙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이전에 십자가의 구원이 있는 셈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있지만, 믿는다고 해서 한 번도 아무런 의심 없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의심하는 사람, 소위 신앙이 연약한 사람에 대해서 그러면 안 된다, 구원받지 못한다며 마치 공포심을 부추기면서 사람을 얽매는 것은 전통적인 종교에 있어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나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을 자유도 있고 의심할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다고 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근간에 관계되는 교리나 교회의 자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밀했습니다. 엄밀히 갖추어 왔습니다. 다양한 이단적인 생각은 엄격하게 부정되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잘못을 범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교회로서 계속 유지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는 의심하고 헤매는 일도 많은 줄 압니다만, 바울은 그 판단을 5절에서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면 된다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확신”에 따라 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을 묻는 것입니다.
“왠지 싫고 망설여진다면 먹지 않는 게 좋고, 이것은 문제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먹어도 된다”라고요.
바울은 원래 이러한 문제에 관해 신앙의 근간에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기를 먹어도 먹지 않아도 그로 인해 교회가 구원받지 못하거나 뒤집힐 문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먹는다 먹지 않는다는 것으로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서 서로 상대를 업신여기거나 심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게 더 문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분열이나 분쟁이라는 것은 종종 먹는다 먹지 않는다는 그런 수준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간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철저하게 논의를 하면 됩니다만, 하찮은 문제로 논의 이전의 시시한 다툼이 일어나고 맙니다. 논의 이전의 분쟁으로 공동체가 피폐해지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근간에 관계되지 않는 일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신앙의 근간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또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주의 것” 임을 잊어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곳에 무익한 분쟁이 일어납니다. 조금 전의 4절로 돌아옵니다만,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라고 쓰여 있습니다. 먹는다 먹지 않는다고 싸우는 상대도 또한 “주의 것”입니다. 주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않을 때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다름아닌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셨다는 의식이 희박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셨다는 감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주의 것”이라는 의식이 없으면 저 사람도 이 사람도 “주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분쟁의 근원이 있습니다.
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가야 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뭔가를 향하여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살 때도 죽을 때도, 그러므로 그 방향이 확실하지 않으면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가야 하는 곳이 뚜렷하다면 도중에 망설인다고 해도 그것조차 즐기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 모를 때에는 중간을 즐길 여유조차 없습니다. 사람들만 보고 있다, 남의 시선만 신경 쓴다는 것은 진정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시고 제자들에게는 먼저 배로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한 바람이 불고 거친 물결 때문에 제자들이 두려워 걱정하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처음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겁에 질려 두려워하지만 예수님이신 줄 알고 크게 안심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그쪽에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바다 위를 걸어 예수님께 다가갑니다만, 강한 바람을 보고 두려워지자 그대로 가라앉아 물에 빠져 버립니다. 예수님을 똑바로 보고 있을 때는 거친 바다 위도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만,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고 사납게 놀치는 파도를 보고 겁에 질려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버리자 이내 파도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초대 교회의 사람들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만 똑바로 보고 눈을 떼지 않는 한 인간은 날뛰는 인생 가운데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정신을 빼앗겨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떼면 파도에 휩쓸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물에 빠지는 우리를 예수님 쪽에서 손을 내밀어 주시고 붙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한눈을 파는 것입니다. 그것을 잡아 주시는 주님께서 안 계시면 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계속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론 헤매고, 또 때론 물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가 물에 빠질 때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구원해 주십니다.
2022年10月1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45章 22~23節
〇讃 頌 讃頌歌 75(1, 2, 5節)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4章 1~12節
〇説 教 「主のために生きる(주를 위하여 산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25(全節)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0月 1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主のために生きる」 ローマ書 14章 1~12節
パウロはまず、「信仰の弱い人を受け入れなさい。その考えを批判してはなりません。」(1節)と語ります。ここで「信仰の弱い人」とありますが、ローマの教会に偶像に献げられたものを食べないという人がいたようです。
パウロ自身の考えを結論的に言えば、食べて良いという考えでした。ただ、パウロにとってそれは、人間の救いにおいて大して重要ではないという考えだったのです。食べたくなければ食べなくて良いという考えでした。むしろ、そういったことに固執するのは、「弱い信仰」であると見ていたようです。でも、それは「弱い信仰」だからいけない、というのではなく、「信仰の弱い人を受け入れなさい」と言うのです。
そもそも信仰の強さ、弱さというのは、どうやって計るのでしょう。教会の中でも信仰が強くとか弱いとか言われます。信仰というのは、迷うことなく信じるということを求めているようにも思えます。揺るぎない信仰、それだけが信仰なんでしょうか?
NHKで統一協会の問題で、宗教家が集まり座談会をする番組を見たのですが、その中で言われていたのが、カルトと宗教の違いの目安として、カルトは「恐怖で人を縛る」「搾取する。搾取されるところには自由がない」「拘束する(信仰に人を押し込めようとする)」ということです。最後の「拘束」というのは、信仰を守り続けるというのは本来難しいもので、誰でも信仰には迷いがあるものだけれども、カルトはそれを赦さない。人は信じる自由だけではなく、迷う自由がある。迷いながら探求するということを宗教が人から奪っ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が言われていました。
教会の中でも信仰によって人を縛るという側面があるかと思います。教会から離れてしまっている人の信仰を疑ったり、信仰が弱いと判断したりするかと思うのですが、よくよく考えますと、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る救いというのは、信仰があるから救われると言うのではないわけですね。私たちの信仰以前に十字架の救いがあるわけです。それを私たちが信じるか、信じないかということはありますが、信じたからと言って、迷いなく信仰生活を送る人なんていないのです。それなのに、迷っている人、いわゆる信仰が弱い人に対して、それではいけない、救われませんよ、とまるで恐怖を煽りながら人を縛るのは、伝統的宗教においてもあり得ることだし、それをし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には信じる自由もあれば、迷う自由もあるのです。
ただ、自由だから何でもありと言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教会の根幹にかかわる教理や教会のあり方については極めて厳密であったのです。厳密に整えられてきたのです。さまざまな異端的な考えは厳しく否定されてきました。それでも、教会は過ちを犯すことだってあったのです。しかし、教会がそれに気づいた時に、悔い改め、神さまの御旨を探し求めてきたのです。そうやって教会は教会であり続けたと言えます。
私たちの信仰というのは、迷うことが多いと思いますが、パウロはその判断を5節で「各自が自分の心の確信に基づいて決めることです」と言っています。これは単純に自分で考えて勝手にやればいいと言っているわけではありません。「心の確信」に基づいて決めるのです。信仰において、自分の確信を問うのです。
「何となく嫌で迷うようなら食べない方が良い。これは問題はないと確信を持てるのなら食べたらいい」と。
パウロはそもそもこのような問題に関して、信仰の根幹にかかわる問題ではないと考えていました。肉を食べようが食べまいが、それによって救いから切り離されたり、教会がひっくり返るような問題ではない。それよりも、食べる食べないということで教会の中に分裂が起こり、相互に、相手を見下したり、裁くようなことが起こることの方が問題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
逆にいいますと、分裂や争いというのは、往々にして、食べる食べないのレベルの問題で起こるのです。信仰の根幹にかかわることなら徹底的に議論をしたらいいのですが、些末の問題で、議論以前のくだらない争いが起きてしまうのです。議論以前の争いで共同体が疲弊してしまうことが往々にしてあるのです。
そして、信仰の根幹に関わらないことで争いが起こるのは、信仰の根幹が見失われているからだとパウロは語っています。6節です。「食べる人は主のために食べる。」また「食べない人も主のために食べない。」
どちらも主に感謝をしているのなら良いではないかと語っています。私たちの行いが「主のため」であるならば、それで良いのです。なぜならば、私たちは「主のもの」だからです。
私たちが、自分が「主のもの」であることを忘れ、「自分のために」「自分の考え」を主張しているところに不毛な争いが起こります。少し前の節に戻りますが、4節に「他人の召し使いを裁くとは、いったいあなたは何者ですか」とあります。食べる食べないで争う相手もまた「主のもの」なのです。主に仕えている人なのです。そのことをわきまえないとき、争いが起こります。その人のためにも主イエス・キリストは血を流し、肉を裂かれたのです。
しかし、そもそも主イエス・キリストは私のために、他ならぬ私のために血を流し、肉を裂かれたという意識が希薄な時、他の人のためにキリストが血を流し、肉を裂かれたという感覚を持つことはできません。自分自身が「主のもの」である、という意識がなければ、あの人も、この人も「主のもの」であるとは思えません。そこに争いの源があります。
7-8節に「だれ一人自分のために生きる人はなく、だれ一人自分のために死ぬ人もいません。わたしたちは、生きるとすれば主のために生き、死ぬとすれば主のために死ぬのです。従って、生きるにしても、死ぬにしても、わたしたちは主のものです。」とあります。人間は皆、行くべき方向を持っているのです。必ず何かに向かって歩む続けるのです。生きる時も、死ぬ時も、だからその方向がはっきりしないと、平安を得ることが出来ません。行くべきところが、はっきりしていれば、途中迷ったとしても、それさえも楽しみながら、前に進むことが出来ます。でも、どこに向かってゆくのか分からない時には、途中を楽しむ余裕すらありません。人ばかり見ている、人の目ばかり気にしているというのは、本当の目標を持っていないからです。
マタイによる福音書14章に、イエスさまが祈るために山に登り、弟子たちには、先に船でガリラヤ湖を渡らせる場面があります。しかし、ひどい風が吹いて弟子たちがこぎ悩んでいるのを知って、イエスさまは海の上を歩いて、弟子たちに近づかれました。最初弟子たちは幽霊だと思い怯えますが、イエスさまだと知って大いに安心します。ペトロはイエスさまを見て、そっちに行かせてくれと懇願すし、海の上を歩いてイエスさまに近づきますが、強い風に気がついて怖くなり、沈みかけ、溺れてしまいます。イエスさまをまっすぐに見ているうちは、荒れた海の上も自由に歩けました。しかし、イエスさまから目をそらし、荒れ狂う波に恐れおののき、心をとらわれてしまうと、とたんに波に飲み込まれてしまったのです。
この物語は、初代教会の人々の体験が反映していると思われます。イエスさまだけをまっすぐに見て、目をそらさない限りは、人間は荒れ狂う人生の中を自由に歩めます。しかし、周囲に気を取られ、イエスさまから目をそらせば、波に飲み込まれるのです。
この物語で大切なことは、溺れかける私たちをイエスさまの方から手を伸ばして下さり、がっしり掴んで下さると言うことです。それほど私たちはよそ見をするのです。それを掴んで下さる主がいなければ、私たちはイエスさまを目指しては、とうてい歩むことが出来ないのです。
皆さん、「主のために生きる」というのは、主イエス・キリストを見つめながら、追い続けることです。それでも、私たちは迷い、溺れるかも知れません。それでも大丈夫です。私たちが溺れるとき、主なる神さまが私たちの手をしっかりと掴んで救い出して下さいます。
【2022년 10월 16일 주일예배(요약판)】
“주를 위하여 산다” 로마서 14장 1~12절
바울은 우선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1절) 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믿음이 연약한 자”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로마 교회에는 우상에게 바친 것을 먹지 않는다는 사람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의 생각을 결론적으로 말하면 먹어도 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구원에 있어서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바울은 생각했던 것입니다. 먹고 싶지 않으면 먹지 않아도 좋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오히려 그런 것을 고집하는 것이 “연약한 믿음”이라고 본 것 같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연약한 믿음”이니까 안 된다는 게 아니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받아들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원래 신앙이 강하다거나 약하다거나 하는 것은 어떻게 잴 수 있을까요? 교회 안에서도 신앙이 강하다거니 연약하다거니 하는 말들을 합니다. 신앙이라는 것은 의심하지 않고 망설임 없이 믿는다는 것을 요구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흔들리지 않는 신앙, 그것만이 신앙일까요?
NHK에서 통일협회 문제로 종교인들이 모여 좌담회를 하는 방송을 봤는데, 거기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 컬트와 종교의 차이의 기준으로 컬트는 “공포로 사람을 속박한다”, “착취한다. 착취당하는 곳에는 자유가 없다”, “구속한다(신앙에 사람을 얽매려고 한다)” 라는 것입니다. 마지막의 “구속”이라는 것은 신앙을 계속 지킨다는 것은 본래 어려운 것이며 누구나 신앙에는 망설임과 의심이 있기 마련이지만 컬트는 그것을 용서하지 않는다. 사람은 믿음의 자유뿐만 아니라 망설일 자유가 있다. 의심하면서 신앙을 탐구한다는 것을 종교가 사람으로부터 빼앗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신앙으로 사람을 얽맨다는 측면이 있을 것 같습니다. 교회를 떠나는 사람의 신앙을 의심하거나 신앙이 연약하다고 판단하거나 하는데, 곰곰이 생각해보면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은 구원은 우리가 신앙이 있기 때문에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이전에 십자가의 구원이 있는 셈입니다. 그것을 우리가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은 있지만, 믿는다고 해서 한 번도 아무런 의심 없이 신앙 생활을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도 의심하는 사람, 소위 신앙이 연약한 사람에 대해서 그러면 안 된다, 구원받지 못한다며 마치 공포심을 부추기면서 사람을 얽매는 것은 전통적인 종교에 있어서도 있을 수 있는 것이나 그것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믿을 자유도 있고 의심할 자유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유롭다고 해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의 근간에 관계되는 교리나 교회의 자세에 대해서는 지극히 엄밀했습니다. 엄밀히 갖추어 왔습니다. 다양한 이단적인 생각은 엄격하게 부정되어 왔습니다. 그런데도 교회는 잘못을 범하는 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회가 그것을 깨달았을 때 회개하고 하나님의 뜻을 찾아왔습니다. 그렇게 해서 교회는 교회로서 계속 유지해 왔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신앙이 때로는 의심하고 헤매는 일도 많은 줄 압니다만, 바울은 그 판단을 5절에서 “각각 자기 마음으로 확정할지니라” 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스스로 생각하고 마음대로 하면 된다는 게 아닙니다. “마음의 확신”에 따라 정하는 것입니다. 신앙으로 말미암아 자신의 마음을 묻는 것입니다.
“왠지 싫고 망설여진다면 먹지 않는 게 좋고, 이것은 문제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면 먹어도 된다”라고요.
바울은 원래 이러한 문제에 관해 신앙의 근간에 관계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고기를 먹어도 먹지 않아도 그로 인해 교회가 구원받지 못하거나 뒤집힐 문제가 아니다. 그것보다는 먹는다 먹지 않는다는 것으로 교회 안에 분열이 일어나서 서로 상대를 업신여기거나 심판하는 일이 일어나는 게 더 문제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반대로 말하자면, 분열이나 분쟁이라는 것은 종종 먹는다 먹지 않는다는 그런 수준의 문제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신앙의 근간에 관계되는 것이라면 철저하게 논의를 하면 됩니다만, 하찮은 문제로 논의 이전의 시시한 다툼이 일어나고 맙니다. 논의 이전의 분쟁으로 공동체가 피폐해지는 일이 왕왕 있습니다.
그리고 신앙의 근간에 관계되지 않는 일로 분쟁이 일어나는 것은 신앙의 근간이 상실되었기 때문이라고 바울은 말하고 있습니다. 6절입니다. 먹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고, 또 먹지 않는 자도 주를 위하여 먹지 아니하는 것입니다.
어느 쪽도 하나님께 감사하고 있다면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행동이 “주를 위하여” 하는 것이라면 그것으로 좋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주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신이 “주의 것” 임을 잊어버리고 “자기를 위하여” 자신의 생각을 주장하는 곳에 무익한 분쟁이 일어납니다. 조금 전의 4절로 돌아옵니다만, “남의 하인을 비판하는 너는 누구냐” 라고 쓰여 있습니다. 먹는다 먹지 않는다고 싸우는 상대도 또한 “주의 것”입니다. 주를 섬기는 사람입니다. 그것을 분별하지 않을 때 분쟁이 일어납니다. 그 사람을 위해서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원래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다름아닌 나를 위하여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셨다는 의식이 희박할 때 다른 사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서 피를 흘리시고 몸을 찢으셨다는 감각을 가질 수 없습니다. 자기 자신이 “주의 것”이라는 의식이 없으면 저 사람도 이 사람도 “주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거기에 분쟁의 근원이 있습니다.
7-8절에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라고 쓰여 있습니다. 인간은 모두 다 가야 하는 방향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반드시 뭔가를 향하여 계속 걸어가는 것입니다. 살 때도 죽을 때도, 그러므로 그 방향이 확실하지 않으면 평안을 얻을 수 없습니다. 가야 하는 곳이 뚜렷하다면 도중에 망설인다고 해도 그것조차 즐기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어디를 향하여 가는지 모를 때에는 중간을 즐길 여유조차 없습니다. 사람들만 보고 있다, 남의 시선만 신경 쓴다는 것은 진정한 목표를 갖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마태복음 14장에 예수님께서 기도하기 위하여 산에 올라가시고 제자들에게는 먼저 배로 갈릴리 호수를 건너가게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러나 심한 바람이 불고 거친 물결 때문에 제자들이 두려워 걱정하는 것을 아시고 예수님께서는 바다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다가가셨습니다. 처음 제자들은 유령이라고 생각해서 겁에 질려 두려워하지만 예수님이신 줄 알고 크게 안심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보고 그쪽에 가게 해 달라고 간청하고 바다 위를 걸어 예수님께 다가갑니다만, 강한 바람을 보고 두려워지자 그대로 가라앉아 물에 빠져 버립니다. 예수님을 똑바로 보고 있을 때는 거친 바다 위도 자유롭게 걸을 수 있었습니다만, 예수님에게서 눈을 떼고 사납게 놀치는 파도를 보고 겁에 질려 두려운 마음에 사로잡혀 버리자 이내 파도에 휩쓸려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이야기는 초대 교회의 사람들의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고 생각됩니다. 예수님만 똑바로 보고 눈을 떼지 않는 한 인간은 날뛰는 인생 가운데를 자유롭게 걸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주위에 정신을 빼앗겨 예수님으로부터 눈을 떼면 파도에 휩쓸려 버리는 것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중요한 것은 물에 빠지는 우리를 예수님 쪽에서 손을 내밀어 주시고 붙잡아 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만큼 우리는 한눈을 파는 것입니다. 그것을 잡아 주시는 주님께서 안 계시면 우리는 예수님을 향하여 도저히 걸어갈 수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를 위해 산다”는 것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계속 쫓아가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때론 헤매고, 또 때론 물에 빠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괜찮습니다. 우리가 물에 빠질 때 주님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손을 단단히 붙잡아 구원해 주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