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울은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절) 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란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그 생활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믿음이 약한 사람”이란 “약하다기보다 강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중 어느 쪽에 문제가 많이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믿음이 약한 사람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강한 사람 쪽이 문제를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믿음이 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복음의 자유를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약한 사람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교회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교회로서 형성해 나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 즉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핑계삼아 자기를 기쁘게 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5:2)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기쁘게 한다” 라기보다는 오히려,“기쁘게 하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 “이웃을 기쁘게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이웃”이라는 말은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뜻했습니다. 외국인(이방인)은 이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이 되자 외국인은 물론 적조차도 이웃과 똑같이 사랑하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듯이(눅10:36-37) 모두가 꺼리고 피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동족의 이웃과 똑같이 친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옆에 있기 때문에 이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속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10:36) 라고 나와 있듯이 우리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과 사귀고 그를 기쁘게 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성경은 거기에 분명한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조차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은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15:3)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어도, 그리스도께서만은 자기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그 때문에 오직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을 피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마4:3),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마27:46), 또 십자가 위에서 크게 소리 지르심(마27:46) 등은 모두 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똑같이 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시편 69편 10절에서 예언되고 있었습니다.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라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믿고 있다면 우리도 주님께서 하셨던 것 같이 해야 합니다.
4~6절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15:4-6) 라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약한 이웃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는 생활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망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먹는 음식 따위는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도 십자가의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의 길이지 결코 중심에서 전혀 벗어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소망을 잃어 몇 번이나 성경에 도움을 구했을까요? 그때마다 성경이 보여주시는 주님의 인내와 위로가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확신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는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를 때마다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 끝에 무서운 심판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마지막 날까지 참아 주십니다. 이것을 인간 측에서 말하면 인간은 죄를 저지를 때마다 이 하나님의 인내를 알고, 헤아릴 수 없는 위로를 반복해서 받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까지 오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없습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15:5-6) 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교회에 평화와 일치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뜻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께서 갖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7절 이후 바울은 다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장 서로 담당할 수 없는 존재였던 유대인과 이방인, 그 쌍방에게 바울은 말을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으로서 태어나셨습니다. 유대인을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이방인의 소망의 근원이셨습니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5:12)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소망의 근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베어 넘어뜨려지고 죽은 것 같았던 이새의 그루터기의 뿌리로부터 주 예수님께서 이 세계에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치유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미 죽어 버렸던 딸의 손을 잡고 예수님께서는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먼 옛날의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달리다굼”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에도 넘어져 있는 사람을 일어서게 합니다. 힘이 다하여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다시 그 다리로 걷게 해 주십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죄에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 “달리다굼”이라는 말씀을 받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생명 속으로 일어났습니다. 인내와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다시 일어서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달리다굼”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일어난 우리이기 때문에 “같은 뜻”을 품어 “한마음과 한 입으로” 서로를 담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다굼” 이 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에, 또 힘 때문에, 우리는 일어서서 서로 담당합니다. 그때 단순한 정감적인 공감이나 열광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 앞에 있어서 우리는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2022年10月30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ローマ(로마서) 5章 2~5節
〇讃 頌 讃頌歌 391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聖書奉読 ローマの信徒への手紙(로마서) 15章 1~13節
〇説 教 「心を合わせて(한 마음으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1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0月 30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心を合わせて」 ローマ書 15章 1~13節
パウロは今日の御言葉の中で、「わたしたち強い者は、強くない者の弱さを担うべきであり、自分の満足を求めるべきではありません。」(15:1)と言います。「強い者」というのは、信仰の確信をもって、その生活を貫くことの出来る人のことです。また、「弱い者」というのは、「弱い」というより「強くなることが出来ない」ということです。
さて、強い人と弱い人とは、どちらに多くの問題があるのでしょうか。普通に考えれば、弱い人の方が、問題があると思います。しかし、聖書は、強い人の方が、問題を感じなければいけないと言うのです。なぜなら、教会は、強い人も弱い人も共に生きていかねばならないところだからです。
強い人は福音の自由を知っている者であるはずです。それだけ福音をよく理解している人であるはずです。それならば、弱い人に対して、誰よりも多くの愛を持つことができるのでなければならないと言うのです。
教会には、強い者も弱い者もいるのです。その教会が、主の愛を表す教会として形成していくためには、強い者、すなわち出来る者たちが、出来ない者たちの弱さを担うことです。出来る者たちは、自分の立場が正しいと言って誇らないことです。自分の方が正しいと言って、それを口実にして、自分を喜ばせやすいからです。そうではなく、「善を行って隣人を喜ばせ、互いの向上に努めるべきです」(15:2)と、パウロは言うのです。「喜ばせる」というよりは、むしろ、「喜ばせなさい」という命令なのです。
ここに「隣人を喜ばせる」とありますが、この「隣人」という言葉は、旧約時代においては、イスラエル民族のことでした。外国人(異邦人)は隣人ではありません。ところが、新約になると、外国人どころか敵までも、隣人と同じ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になりました。良いサマリヤ人の話が示すように(ルカ10:36-37)、忌み嫌うサマリヤ人が一番近い隣人になったのです。それは、逆にいえば、イスラエル人、異邦人、関係なく、すべての人が同族の隣人と同じように親しい関係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
私たちは、深い責任をもって、自分たちの隣人に接し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傍らにいるから隣人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大事なことは、良いサマリヤ人の話の中に、「だれが追いはぎ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と思うか」(ルカ10:36)とありますように、私たちが隣人になることです。
このように隣人と交わって、彼を喜ばせなさい、というのが、私たちに与えられた命令なのです。聖書は、それに明らかな理由を挙げています。それは、キリストさえ、ご自分を喜ばせることはなさらなかった、という事実です。
3節です。「キリストも御自分の満足はお求めになりませんでした。『あなたをそしる者のそしりが、わたしにふりかかった』と書いてあるとおりです。」(15:3)
他の者にはできなくても、キリストだけは、ご自分を喜ばせることはなさらなかったばかりか、弱い者の重荷を負われたのです。そのために、ひたすらに自分を喜ばせることを避けられました。荒野の誘惑から(マタイ4:3)、ゲッセマネの園における祈り(マタイ26:39)、さらには、十字架の上の悲痛な叫び(マタイ27:46)などは、皆、キリストがご自身を喜ばせなかったことを示すもので、それは、イエスさまのご生涯を一貫しているものでした。この主イエス・キリストによって救われた私たちは、同じように、この道を歩むのです。これが、弱い者のために、自分を喜ばせることをしない理由なのです。
このことは詩編69編10節で預言されておりました。「あなたを嘲(あざけ)る者の嘲りが/わたしのうえにふりかかっています。」というのがそれです。主イエスさまがすべてを担ってくださいました。こうして、私たちは救われました。だからこそ、私たちが福音を信じているなら、私たちも主がなさったようにすべきなのです。
4~6節に「かつて書かれた事柄は、すべてわたしたちを教え導くためのものです。それでわたしたちは、聖書から忍耐と慰めを学んで希望を持ち続け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忍耐と慰めの源である神が、あなたがたに、キリスト・イエスに倣って互いに同じ思いを抱かせ、心を合わせ声をそろえて、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をたたえ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15:4-6)とあるのは、そのことなのです。
そうであるならば、強い者が弱い隣り人の弱さをになう生活は、救いに至らせる望みを得る道である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食べ物のことなど、大した問題ではありません。でも、これも十字架の救いをもたらす一つの道であって、決して、中心から全く離れたような問題ではないのです。
それでも私たちは、隣り人を愛することができずに、希望を失い、何度、聖書に助けを求めたことでしょうか。その都度、聖書が示します主の忍耐と慰めとが、私たちに救いの希望を確信させてくれたのです。
皆さん、キリストを私たちにお与えになった神さまは、忍耐の神さまです。私たちが罪を犯す度に忍耐に忍耐を重ねられました。そして、忍耐の末に恐ろしい裁きを与えられたのではなく、キリストによる救いを与えられたのです。神さまは人間を救うために、終わりの日まで耐え忍んで下さるのです。これを人間の側から言えば、人間は罪を犯すたびに、この神さまの忍耐を知り、計り知れない慰めを繰り返し受けるのです。
もうここまで来ますと、私たちに出来ることは祈り以外にありません。「キリスト・イエスに倣って互いに同じ思いを抱かせ、心を合わせ声をそろえて、わたしたちの主イエス・キリストの神であり、父である方をたたえさせてくださいますように。」(15:5-6)とパウロが言うのは、いくら説明したとしても、それが教会に平和と一致をもたらすものではないからです。神学的な説明ではなく、共に祈り、神さまに礼拝を献げる中で、キリストの思いを共にするのです。心を合わせ声をそろえて忍耐と慰めの源である神さまに祈るのです。私たちの信仰の生活というのは、神さまが整えて下さるものです。ですから、人間に出来ることは、ただ、祈ることだけなのです。パウロはそのことをよく知っておりました。
7節以降、パウロは再びユダヤ人と異邦人について語っています。当時、もっとも互いに担い合えない存在であったユダヤ人と異邦人、その双方にパウロは語りかけます。キリストはユダヤ人として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ユダヤ人に仕えられました。しかしまた同時に異邦人の希望の源でもありました。「エッサイの根から芽から現れ、異邦人を治めるために立ち上がる。異邦人は彼に望みをかける。」(15:12) キリストはユダヤ人にも異邦人にも希望の源となってくださいました。切り倒されて死んだかのようだったエッサイの切り株の根から主イエスさまがこの世界に命をもって来られました。
マルコによる福音書5章に会堂長ヤイロの娘が癒される話があります。すでに死んでいた娘の手を取って、イエスさまは「タリタ、クム」、「少女よ、起きなさい。」とおっしゃいました。すると、少女はすぐに起き上がったのです。
これらは単なる大昔の奇跡物語ではありません。「タリタ、クム」というイエスさまの言葉は今日においても、倒れている人を立ち上がらせるのです。力尽きてうずくまる人をふたたびその足で歩ませてくださいます。「タリタ、クム」「起き上がりなさい」イエスさまの言葉は、私たちを立ちあがらせてくださいます。
私たちは罪に死んでいました。しかし、十字架と復活の主から「タリタ、クム」という言葉を与えられ起こしていただきました。命の中へと起こしていただきました。忍耐と慰めの源である神さまに、私たちは力を与えられ立ち上がらせていただきました。まさに「タリタ、クム」というイエスさまの言葉によって立たせていただいた私たちであるがゆえに「同じ思い」をいだかせていただき、「心を合わせ」「声をそろえて」互いを担い合うことが出来るのです。
「タリタ、クム」このキリストの言葉のゆえに、また力のゆえに、私たちは立ち上がり、互いに担い合います。そのとき、単なる情感的な共感や熱狂ではなく、真に神さまの前にあって私たちは一つの心とな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2022년 10월 30일 주일예배(요약판)】
“한 마음으로” 로마서 15장 1~13절
바울은 오늘의 성경 말씀에서 “믿음이 강한 우리는 마땅히 믿음이 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1절) 라고 말합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이란 신앙의 확신을 가지고 그 생활을 관철할 수 있는 사람입니다. 또 “믿음이 약한 사람”이란 “약하다기보다 강해질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믿음이 강한 사람과 약한 사람 중 어느 쪽에 문제가 많이 있을까요?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믿음이 약한 사람 쪽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은 믿음이 강한 사람 쪽이 문제를 느껴야 한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믿음이 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함께 살아가야 하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이 강한 사람은 복음의 자유를 알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만큼 복음을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약한 사람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많은 사랑을 가질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회에는 믿음이 강한 사람도 약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 교회가 주님의 사랑을 나타내는 교회로서 형성해 나가기 위해서는 믿음이 강한 사람, 즉 할 수 있는 사람들은 할 수 없는 사람들의 연약함을 담당하는 것입니다.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이 옳다고 자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이 올바르다고 말하면서 그것을 핑계삼아 자기를 기쁘게 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그렇지 않고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15:2) 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기쁘게 한다” 라기보다는 오히려,“기쁘게 하라”라는 명령입니다.
여기에 “이웃을 기쁘게 한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 “이웃”이라는 말은 구약 시대에는 이스라엘 민족을 뜻했습니다. 외국인(이방인)은 이웃이 아닙니다. 그런데, 신약이 되자 외국인은 물론 적조차도 이웃과 똑같이 사랑하라고 말하게 되었습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에 나타나 있듯이(눅10:36-37) 모두가 꺼리고 피하는 사마리아 사람이 가장 가까운 이웃이 된 것입니다. 그것은 반대로 말하면, 이스라엘인이나 이방인 관계없이 모든 사람이 동족의 이웃과 똑같이 친한 관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깊은 책임감을 가지고 우리 이웃을 대해야 합니다. 옆에 있기 때문에 이웃이라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속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눅10:36) 라고 나와 있듯이 우리가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이웃과 사귀고 그를 기쁘게 하라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명령입니다. 성경은 거기에 분명한 이유를 들고 있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조차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은 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입니다.
3절입니다. “그리스도께서도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15:3)
다른 사람은 할 수 없어도, 그리스도께서만은 자기을 기쁘게 하지 않으셨을 뿐만 아니라 연약한 사람들의 무거운 짐을 짊어지셨습니다. 그 때문에 오직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을 피하셨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심(마4:3),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심(마27:46), 또 십자가 위에서 크게 소리 지르심(마27:46) 등은 모두 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으셨던 것을 나타내는 것이며 그것은 예수님의 생애를 일관하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이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우리는 똑같이 이 길을 걷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이 약한 사람을 위해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않는 이유입니다.
이것은 시편 69편 10절에서 예언되고 있었습니다. “주를 비방하는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라고 있는 것이 그것입니다. 주 예수님께서 모든 것을 담당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구원받았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복음을 믿고 있다면 우리도 주님께서 하셨던 것 같이 해야 합니다.
4~6절에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위로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15:4-6) 라고 있는 것은 바로 그것입니다.
그렇다면, 믿음이 강한 사람이 약한 이웃 사람의 약점을 담당하는 생활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소망을 얻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먹는 음식 따위는 대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이것도 십자가의 구원을 가져오는 하나의 길이지 결코 중심에서 전혀 벗어난 문제가 아닙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웃을 사랑하지 못하고 소망을 잃어 몇 번이나 성경에 도움을 구했을까요? 그때마다 성경이 보여주시는 주님의 인내와 위로가 우리에게 구원의 소망을 확신하게 해 주셨습니다.
여러분,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께서는 인내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가 죄를 저지를 때마다 인내에 인내를 거듭하셨습니다. 그리고 인내 끝에 무서운 심판을 주신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우리에게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 마지막 날까지 참아 주십니다. 이것을 인간 측에서 말하면 인간은 죄를 저지를 때마다 이 하나님의 인내를 알고, 헤아릴 수 없는 위로를 반복해서 받는 것입니다.
이제 여기까지 오면 우리에게 할 수 있는 것은 기도 이외에 없습니다. “이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이 너희로 그리스도 예수를 본받아 서로 뜻이 같게 하여 주사 한마음과 한 입으로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하노라”(15:5-6) 라고 바울이 말하는 것은 아무리 설명한다고 해도 그것이 교회에 평화와 일치를 가져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신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함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뜻을 함께 하는 것입니다. 한마음과 한 입으로 인내와 위로의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 생활이란 하나님께서 갖추어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에게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7절 이후 바울은 다시 유대인과 이방인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당시 가장 서로 담당할 수 없는 존재였던 유대인과 이방인, 그 쌍방에게 바울은 말을 겁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으로서 태어나셨습니다. 유대인을 섬기셨습니다. 그러나 또 동시에 이방인의 소망의 근원이셨습니다. “이새의 뿌리 곧 열방을 다스리기 위하여 일어나시는 이가 있으리니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15:12)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에게도 이방인에게도 소망의 근원이 되어 주셨습니다. 베어 넘어뜨려지고 죽은 것 같았던 이새의 그루터기의 뿌리로부터 주 예수님께서 이 세계에 생명을 가지고 오셨습니다.
마가복음 5장에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치유받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이미 죽어 버렸던 딸의 손을 잡고 예수님께서는 “달리다굼”, “소녀야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곧 일어났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먼 옛날의 기적 이야기가 아닙니다. “달리다굼”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오늘에도 넘어져 있는 사람을 일어서게 합니다. 힘이 다하여 웅크리고 앉아 있는 사람을 다시 그 다리로 걷게 해 주십니다. “달리다굼” “일어나라”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일어서게 해 주십니다.
우리는 죄에 죽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께 “달리다굼”이라는 말씀을 받고 다시 일어났습니다. 생명 속으로 일어났습니다. 인내와 위로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시고 다시 일어서게 해 주셨습니다. 바로 “달리다굼”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다시 일어난 우리이기 때문에 “같은 뜻”을 품어 “한마음과 한 입으로” 서로를 담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달리다굼” 이 그리스도의 말씀 때문에, 또 힘 때문에, 우리는 일어서서 서로 담당합니다. 그때 단순한 정감적인 공감이나 열광이 아니라 참으로 하나님 앞에 있어서 우리는 한 마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