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어드벤트(강림절)에 들어갔습니다. 준비한 4개의 크리스마스 캔들에 불을 밝히며 예수님의 탄생을 고대하는 때를 갖습니다. 오늘 주어진 성경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구약 성서에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언된 말씀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 탄생 700여년 전의 시대입니다.
9장 1절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라고 쓰여 있는 것은 스불론이나 납달리라고 불리는 지역이 당시 세계 제국인 앗수르에게 점령당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앗수르의 포로로서 아무 관련도 없는 곳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아무 상관도 없는 곳에서 납달리나 스불론 땅으로 끌려온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납달리나 스불론이 나중에 예수님 시대에는 갈릴리라고 불리게 됩니다.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는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으로서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스불론이나 납달리의 사람들은 괴로움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이사야는 “흑암”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에 덮여 있었고 이사야는 그 어둠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사람들을 가리는 어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어둠 속에 빛나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을 걷고 있었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2절) 라고 말합니다. 그 어둠 속에 빛이 빛나는 사건은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약 700년 후에 실현되었습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어둠 속에 빛이 온 것입니다.
근데 신약 성서를 보면,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는 모두 밤이라는 시간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방 박사” 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면서 여행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밤 시간에 태어나셨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구세주 탄생의 소식을 들은 것도 밤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무대는 낮의 밝은 시간이 아니라 어두운 밤 시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크리스마스가 어둠을 전제로 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려진 크리스마스는 단순한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단순한 축하가 아닙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을 전제로 한 사건입니다. 세상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 우리의 마음 속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비춰지는 빛에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며 축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 사람들은 어둠에 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현실은 현재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어둠 속에 빛은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는 사람들이 “큰 빛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 큰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닙니다. 위대한 빛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서에 그려진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를 보는 한 그 빛은 어디서나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이 난리를 치는 그런 빛이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오늘 밝힌 촛불처럼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계의 중심은 로마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로마는 빛나고 있었습니다. 영광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의 황제야말로 신이요, 구세주요, 큰 빛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한 지역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게다가 본래 사람이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큰 빛이 빛났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광대한 로마 제국의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로마 중심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하찮은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이사야는 사람들이 위대한 빛을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큰 빛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위대한 빛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훌륭한 유화라고 해도 그 그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냥 훌륭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빛, 그것은 결코 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주 작은 빛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위대한 빛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로 인하여 우리 마음 속에 생긴 어둠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죄인인 우리가 만들어 내는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빛으로도 어쩔 수도 없는 죄의 문제에 해결의 길을 열어주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빛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우리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께서 와 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축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음을 알고, 그런 우리를 위해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서 예수님께서 태어나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바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요? 마음 속에 깊은 어둠이 버티고 눌러 앉아 있는 건 아닐까요? 혹은 어둠 속에 있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에는 많은 큰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빛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죄인인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뿐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생명을 바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뿐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떤 깊은 어둠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춰 줍니다. 우리의 걸음을 이끌어 줍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시작되는 어드벤트 기간에 어둠의 깊이를 피부로 느끼면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시다. 예수님의 위대한 빛을 누리면서 크게 기뻐합시다.
2022年11月27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64章 5(4), 9(8)節
〇讃 頌 讃頌歌 2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15 (待降節 ①)
〇讃 頌 讃頌歌 101
〇聖書奉読 イザヤ書(이사야) 8章 23節(9章1節)~9章6(7)節
〇説 教 「大いなる光を見る(위대한 빛을 본다)」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8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1月 27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大いなる光を見る」イザヤ書 8章23節~9章6節
今日からアドベント(待光節)に入りました。今日からクリスマス・キャンドルに火を灯しながら、イエスさまの御降誕を待ち望む時を持ちます。今日、与えられた御言葉は、イザヤ書の御言葉です。旧約聖書には、救い主イエス・キリストの誕生が預言された御言葉がいくつかありますが、今日の御言葉もその中の一つです。イエスさまの誕生の七百年ぐらい前の時代です。
8章22節に、ゼブルンの地やナフタリの地が「辱めを受けた」とあるのは、ゼブルンやナフタリと呼ばれる地域が、当時の世界帝国であるアッシリアに占領されてしまったことを示しています。中には、アッシリアの捕虜として、何の関係のない所に連れて行かれた人々もいました。反対に、何の関係もない所から、ナフタリやゼブルンの地に連れて来られた外国人たちもいました。そして、そのナフタリやゼブルンが、後にイエスさまの時代には、ガリラヤと呼ばれることになります。外国人の血が混じっているガリラヤの人々は、ユダヤ人たちから「異邦の民」として軽蔑されることにもなりました。
ゼブルンやナフタリの人々は、苦しみの中にありました。そして、その苦しみを、イザヤは「闇」という言葉で表現しています。人々は闇に覆われていたのであり、イザヤはその闇を見つめていました。
しかし、イザヤが見つめていたのは、人々を覆う闇だけではありませんでした。イザヤは、闇の中に輝く光を見つめていたのです。闇の中を歩んでいた人々が、大いなる光を見るのだと言っています。「死の陰の地に住む者の上に、光が輝いた」(9:1(2))と言っています。そして、その闇の中に光が輝く出来事は、イザヤの預言から約七百年後に実現しました。それが、クリスマスの出来事です。「ひとりのみどりご」が生まれたことによって、闇の中に光がもたらされたのです。
ちなみに、新約聖書を見ると、クリスマスの物語は、すべて夜という時間の中で進んでいます。例えば、「東方の博士」と呼ばれる人々は、夜空に輝く星を見上げながら旅をしました。イエスさまは夜の時間に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羊飼いたちが、天使から救い主誕生の知らせを聞いたのも、夜の時間でした。
クリスマス物語の舞台は、昼間の明るい時間ではなくて、暗い夜の時間に設定されています。そして、それは、クリスマスが、闇を前提とした出来事だったということです。聖書に描かれたクリスマスというのは、単なる喜ばしい出来事ではありません。単なるお祝い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深い闇を前提とした出来事です。世界が闇の中にあるということ、私たちが闇の中にあるということ、私たちの心の中に闇があるということを前提とした出来事です。そして、その闇を前提としているからこそ、そこに照らされる光に、私たちが喜んで、感謝して、祝うことのできる出来事だということです。
預言者イザヤの時代、そして、イエスさまの時代、人々は闇に覆われていました。そして、その闇の現実は、現在も変わりがありません。しかし、その深い闇の中に、光は輝いているのです。
預言者イザヤは、闇の中を歩む人々が、「大いなる光を見る」と言っています。ただの光ではありません。大いなる光です。しかし、新約聖書に描かれたクリスマスの物語を見るかぎり、その光はどこにいても気づくような、人々が大騒ぎをするような光ではなく、むしろ、とても小さな、今日灯しましたロウソクの火のように、とても小さなものであ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の時代、世界の中心はローマ帝国の都でした。ローマは、光輝いていました。栄光に包まれていました。ローマ皇帝こそが、神であり、救い主であり、大きな光でした。イエスさまは、そのローマ帝国が支配する一つの地域で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しかも、本来、人がいるべき場所ではない、家畜小屋でお生まれになりました。それは、決して大きな光が照り輝いたと言えるような出来事ではないのです。広大なローマ帝国の片隅で起こった、小さな出来事に過ぎませんでした。ごくわずかな人々に影響を与えはしましたが、ローマ中心の世界に生きる人々の目には、取るに足りない出来事に過ぎませんでした。
しかし、そのイエスさまの誕生について、イザヤは、人々が大いなる光を見るのだと言っているのです。
ここで、イザヤが言います「大いなる光」というのは、単純に「大きな光」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偉大な」ということです。人々は、大いなる光、偉大な光を見るのだということです。
大きな光というのは、たくさんの人がすぐに気づきます。しかし、大いなる光、偉大な光というのは、分かる人には分かるという類のものです。例えば、どのような素晴らしい油絵であるとしても、絵の価値が分からない人間の目には、素晴らしくとも何ともないわけです。しかし、だからと言って、その価値がなくなるというわけではありません。
イエスさまによってもたらされた光、それは、決して大きなものではありません。むしろ、その反対に、とても小さな光です。しかし、本当に大いなる光です。そして、それは、私たちが神さまから離れた罪によって、私たちの心の中に生まれた闇を照らす光だからです。神さまなしに生きる罪人の私たちが作り出す世界の闇を照らす光だからです。他のどのような光によっても、どうすることもできない罪の問題に、解決の道を開く光だからです。だからこそ、大いなる光だということです。
クリスマスというのは、まさに私たちが闇の中にあるからこそ、光であるイエスさまが来てくださった出来事なのです。
ですから、本当の意味で私たちがクリスマスを喜び祝うためには、私たちが闇の中にあることに気づかされることから始まります。私たちが闇の中にあることを知り、その上で、私たちのために、闇を照らす光として、イエスさまが生まれてくださった恵みを覚えて喜ぶのです。
私たちはどうでしょうか。まさに、出口の見えない闇の中を歩いているという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心の中に深い闇が居座っているという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あるいは、闇の中にあることにも、気づいていないということはないでしょうか。
この世界にはたくさんの大きな光があります。しかし、大いなる光はたった一つです。私たちを愛し、私たちと共に生きることを願っておられる神さまから顔を背ける罪人の私たちに、救いの道を開いてくださった御子イエス・キリストの光だけです。私たちが生きるために、命をささげてくださった御子イエス・キリストの愛の光だけです。そして、その光は、どのような深い闇の中でも、決して消えることなく、私たちの進む道を照らしてくれます。私たちの歩みを導いてくれます。
皆さん、今日から始まるアドベントの時、闇の深さを肌で感じながら、クリスマスを待ち望みたい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の大いなる光に照らされて、大いに喜びたいと願っております。
【2022년 11월 27일 주일예배(요약판)】
“위대한 빛을 본다” 이사야 9장 1절~7절
오늘부터 어드벤트(강림절)에 들어갔습니다. 준비한 4개의 크리스마스 캔들에 불을 밝히며 예수님의 탄생을 고대하는 때를 갖습니다. 오늘 주어진 성경 말씀은 이사야서의 말씀입니다. 구약 성서에는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이 예언된 말씀이 몇 가지 있습니다만, 오늘 말씀도 그 중 하나입니다. 예수님 탄생 700여년 전의 시대입니다.
9장 1절에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이 “멸시를 당하게 하셨더니” 라고 쓰여 있는 것은 스불론이나 납달리라고 불리는 지역이 당시 세계 제국인 앗수르에게 점령당했음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앗수르의 포로로서 아무 관련도 없는 곳으로 끌려간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반대로 아무 상관도 없는 곳에서 납달리나 스불론 땅으로 끌려온 외국인들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납달리나 스불론이 나중에 예수님 시대에는 갈릴리라고 불리게 됩니다. 외국인의 피가 섞여 있는 갈릴리 사람들은 유대인들로부터 “이방인”으로서 멸시를 당하기도 했습니다.
스불론이나 납달리의 사람들은 괴로움 속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괴로움을, 이사야는 “흑암”이라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어둠에 덮여 있었고 이사야는 그 어둠을 보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사야가 바라보고 있던 것은 사람들을 가리는 어둠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이사야는 어둠 속에 빛나는 빛을 바라보고 있었습니다. 어둠 속을 걷고 있었던 사람들이 큰 빛을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망의 그늘 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2절) 라고 말합니다. 그 어둠 속에 빛이 빛나는 사건은 이사야의 예언으로부터 약 700년 후에 실현되었습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사건입니다. “한 아이”가 태어남으로써 어둠 속에 빛이 온 것입니다.
근데 신약 성서를 보면,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는 모두 밤이라는 시간 속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동방 박사” 라고 불리는 사람들은 밤하늘에 빛나는 별을 올려다보면서 여행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밤 시간에 태어나셨습니다. 목자들이 천사로부터 구세주 탄생의 소식을 들은 것도 밤이었습니다.
크리스마스 이야기의 무대는 낮의 밝은 시간이 아니라 어두운 밤 시간으로 설정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크리스마스가 어둠을 전제로 한 사건이었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려진 크리스마스는 단순한 기쁜 소식이 아닙니다. 단순한 축하가 아닙니다. 그것은 깊은 어둠을 전제로 한 사건입니다. 세상이 어둠 속에 있다는 것,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 우리의 마음 속에 어둠이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 일입니다. 그리고 그 어둠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 비춰지는 빛에 우리가 기뻐하고 감사하며 축하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의 시대 그리고 예수님의 시대, 사람들은 어둠에 덮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어둠의 현실은 현재도 변함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 깊은 어둠 속에 빛은 빛나고 있는 것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어둠 속을 걷는 사람들이 “큰 빛을 본다”고 말합니다. 이 큰 빛은 단순한 빛이 아닙니다. 위대한 빛입니다. 그러나 신약 성서에 그려진 크리스마스의 이야기를 보는 한 그 빛은 어디서나 알아차릴 수 있는, 사람들이 난리를 치는 그런 빛이라기보다는 아주 작은, 오늘 밝힌 촛불처럼 아주 작은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시대, 세계의 중심은 로마 제국의 수도였습니다. 로마는 빛나고 있었습니다. 영광에 싸여 있었습니다. 그런 로마의 황제야말로 신이요, 구세주요, 큰 빛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한 지역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게다가 본래 사람이 있어야 할 장소가 아닌 마구간에서 태어나셨습니다. 그것은 결코 큰 빛이 빛났다고 말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광대한 로마 제국의 어느 한 구석에서 일어난 아주 작은 일에 불과했습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로마 중심의 세계에 사는 사람들의 눈에는 보잘것없는 하찮은 사건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그 예수님의 탄생에 대해서 이사야는 사람들이 위대한 빛을 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큰 빛이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금방 알아차립니다. 그러나 위대한 빛이라는 것은 아는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종류의 것입니다. 예를 들면, 아무리 훌륭한 유화라고 해도 그 그림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의 눈에는 그냥 훌륭하지도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가치가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빛, 그것은 결코 큰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로 아주 작은 빛입니다. 하지만 정말로 위대한 빛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진 죄로 인하여 우리 마음 속에 생긴 어둠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없이 사는 죄인인 우리가 만들어 내는 세상의 어둠을 비추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어떤 빛으로도 어쩔 수도 없는 죄의 문제에 해결의 길을 열어주는 빛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위대한 빛이라는 것입니다.
크리스마스는 바로 우리가 어둠 속에 있기 때문에 빛이신 예수님께서 와 주신 사건인 것입니다.
그래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가 크리스마스를 기뻐하고 축하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어둠 속에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으로부터 시작됩니다. 우리가 어둠 속에 있음을 알고, 그런 우리를 위해 어둠을 비추는 빛으로서 예수님께서 태어나 주신 은혜를 기억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어떨까요? 바로 출구가 보이지 않는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게 아닐까요? 마음 속에 깊은 어둠이 버티고 눌러 앉아 있는 건 아닐까요? 혹은 어둠 속에 있는 것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 세상에는 많은 큰 빛이 있습니다. 그러나 위대한 빛은 단 하나입니다.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와 함께 살기를 원하시는 하나님을 외면하는 죄인인 우리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빛뿐입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생명을 바쳐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의 빛뿐입니다. 그리고 그 빛은 어떤 깊은 어둠 속에서도 결코 사라지지 않고 우리가 나아갈 길을 비춰 줍니다. 우리의 걸음을 이끌어 줍니다.
여러분, 오늘부터 시작되는 어드벤트 기간에 어둠의 깊이를 피부로 느끼면서 크리스마스를 고대합시다. 예수님의 위대한 빛을 누리면서 크게 기뻐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