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태복음은 구약 성서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성취되었음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 예수님의 탄생이 이사야 7장에 예언된 것의 성취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절)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분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임마누엘 예언의 성취인 것은 신약 성서 안에서는 마태복음만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이 말 자체는 이 1장 23절에 단 한 번만 이사야 7장 14절의 인용으로서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이“임마누엘”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을 관철하는 주제로서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을 요셉에게 알리는 장면입니다만, 요셉에게 있어서는 절망이 수반된 대단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혼자인 마리아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위로 요셉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마리아뿐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이유를 모릅니다. 결혼을 앞둔,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하는 날들에 요셉은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 일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고 마리아와 조용히 헤어지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괴로운 결단이었습니다. 요셉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 ”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따르면 요셉의 아이가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가진 마리아는 간음죄로 심판 받아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요셉은 마리아를 가만히 끊어내고자 한 것입니다. 고민하면서 고뇌 끝에 요셉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요셉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요셉의 신앙으로도 따를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우리도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아니 이미 시작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요셉이 바뀌었습니다. 20절에“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천사의 꿈의 신탁 후에 요셉은 곧바로 마리아를 맞아들입니다. 요셉의 태도는 일변했습니다. 꿈으로 천사의 신탁을 들은 정도로 인간은 바뀔 수 있을까요?
이 천사의 신탁을 들은 요셉은 잔학한 헤롯 왕으로부터 어린 아이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애굽으로 도망갔다가 그 후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어린 아이를 안고 힘든 여정을 훌륭하게도 젊은 아버지로서, 그리고 일가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합니다. 거기에는 고민하던 모습은 없습니다. 천사의 신탁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면 그 후 요셉의 주저함 없는 행동과 아버지다운 태도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근본에는 천사로부터의 말씀에 의해 요셉 자신이 바꿔졌기 때문입니다.
천사는“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먼저 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석타형으로 죽는 것도, 그리고 자기가 이해하기 어려운 힘 든 삶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천사는 고한 것입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0-21절)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는 것을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통해서 징표로서 요셉에게 준 것입니다.
요셉은 고민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어떻게든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의 아귀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요셉은 구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요셉의 모습은 괴로움 속에서 또 고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고한 것은 마리아의 태속의 아이는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에 당신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를 기르면 당신에게는 훌륭한 보답이 있을거라는 신탁도 아닙니다. 단지 그 아이는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는 징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 주신다는 것의 굉장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로 고통받는 나날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일 그 자체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로부터 길게 계속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의 역사, 암흑의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계에 보내는 방식으로 개입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세계의 괴로움의 어둠 속에 아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꿔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고 요셉에게 고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변함없는 혼돈과 시련의 연속인 날들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십니다.이제 우린 그 어떤 날들도 힘차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
2022年12月11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イザヤ書(이사야) 7章 13~14節
〇讃 頌 讃頌歌 34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17 (待降節 ③)
〇讃 頌 讃頌歌 104
〇聖書奉読 マタイ福音書(마태복음) 1章 18~25節
〇説 教 「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93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2月 11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 マタイ 1章 18~23節
マタイ福音書は旧約聖書の預言がイエス・キリストにおいて成就したことを繰り返し記しています。今日の御言葉においても主イエスさまの誕生がイザヤ書7章に預言をされていたことの成就であることが明示されています。「『見よ、おとめが身ごもって男の子を産む。その名はインマヌエルと呼ばれる。』この名は、『神は我々と共におられる』という意味である。」(23節)
イエスさまはインマヌエル、「神われらと共にいます」という名で呼ばれるお方であるということを明らかにしています。救い主イエスさまの誕生がインマヌエル預言の成就であることは新約聖書の中ではマタイ福音書だけが伝えていることなのですが、この言葉自体はこの1章23節にただ一度だけイザヤ書7章14節の引用として出てくるだけです。しかし、この「インマヌエル」という言葉は、マタイによる福音書を貫く主題として重要なキーワードになっています。
さて、今日の御言葉は、イエスさまの誕生がヨセフに知らされる場面でありますが、ヨセフにとっては、絶望を伴った大変な出来事であったわけです。なぜなら、自分のいいなづけであるマリアが何者かによって子供を身ごもったことを知ったからです。どのような経緯でヨセフはそのことを知ったのかは記されていません。「聖霊によって身ごもった」とマタイは記していますが、そのことを知っていたのはマリアだけだったはずです。
ヨセフはマリアが身ごもった理由を知りません。結婚を前にした、ある意味、人生で一番幸せであるべき日々に、ヨセフはどん底に落とされました。
それでも、ヨセフはマリアのことを表沙汰にするのを望まず、マリアを密かに離縁しようとします。それは苦渋の決断でした。ヨセフは律法を守る「正しい人」であったと言います。でも、律法に従えば、ヨセフの子どもでない子を宿したマリアは姦淫の罪に問われて石打ちの刑で殺されてしまいます。そうしたくはありません。かと言って、自分の子どもではない子どもを受け入れることは出来ません。「聖霊によって身ごもった」ということも信じられないのです。そのため、ヨセフはマリアを密かに離縁しようとしました。思い悩みながら、苦悩の末に、ヨセフは自分に出来る最善の方法を考えたのです。
このヨセフの姿は、私たちの姿でもあります。ヨセフは「正しい人」として神さまの前に立たされますが、神さまの導きにヨセフの信仰をもってしても従う自信が持てないのです。自分の置かれた状況に悩み苦しみます。私たちも自分が置かれた状況を受け入れられず、そこから新たな救いの御業が始まることが、いえ、すでに始まっていることが分からないのです。
しかし、そのヨセフが変えられました。20節に「このように考えていると、主の天使が夢に現れて言った」とあります。この天使の夢のお告げの後、ヨセフはすぐにマリアを迎え入れます。ヨセフの態度は一変しました。夢で天使のお告げを聞いたぐらいで人間は変わることが出来るのでしょうか。
この天使のお告げを聞いたヨセフは、残虐なヘロデ王から幼子イエスさまを守るためにエジプトへ逃亡し、その後、イスラエルへ帰還するという幼子を抱えての困難な旅を、立派に若い父親として、そして一家の長として全うしています。そこには思い悩んだ姿はありません。天使のお告げを、逆らい得ないものと考え、仕方なく受け入れたのであれば、これから後のヨセフのてきぱきとした父らしい態度は生まれなかったでしょう。その根本には天使からの言葉でヨセフ自身が変えられたということがあったからです。
天使は「恐れず妻マリアを迎え入れなさい」とまず告げます。そうです、ヨセフは恐れていたのです。マリアが石打の刑で死ぬことも、そして自分が不可解で困難な人生を受け入れることも。しかし、恐れる必要はないと天使は告げたのです。「マリアの胎の子は聖霊によって宿ったのである。マリアは男の子を産む。その子をイエスと名付けなさい。この子は自分の民を罪から救うからである。」(20-21節) イエスという名前は「神は救い」という意味があります。そして、冒頭に申し上げましたように「インマヌエル(神が共におられる)」ということを、これから生まれる子どもを通して、しるしとしてヨセフに与えられたのです。
ヨセフは、悩み苦しみました。自分の力ではどうしようもない現実の中で、自分の力でどうにか解決しようともがいていたのです。聖霊によって宿った、などというとんでもない神さまの介入の前に、どうにか自分なりに自分の力で自分の人生のつじつまを合わせようとしたのです。その中で、ヨセフは救いを知らされました。それは自分の罪を知らされたことでもありました。ヨセフの姿は、苦しみの中で悩みの中で神さまと出会う人間の姿そのものでもあります。
そして、天使が告げたのは、マリアの胎の中の子どもは、神さまが守るからあなたは安心して良いというようなことではありません。その子を育てたらあなたには素晴らしい報いがあるというようなお告げでもありません。ただ、その子は「インマヌエル(神は共におられる)」というしるしでした。
しかし、それで十分だったのです。ヨセフは自分の人生に神さまが共にい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の素晴らしさを知ったからです。罪に苦しむ日々の中から自分を救い上げて下さると知ったからです。
それがクリスマスの出来事そのものなのです。旧約聖書の時代から長く続く、どうしようもない人間の罪の歴史、暗黒の歴史の中に、神さまは介入され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をこの世界に送るというやり方で介入されました。この神さまから離れた世界の苦しみの暗闇の中に、幼子がやってきました。そして世界は変えられました。
皆さん、私たちは罪から救われました。罪から救って下さった神さまが私たちと共にいてくださいます。「怖れるな」とヨセフに告げられたように、私たちも、もう恐れることはないのです。代わり映えのしない混沌とした、試練の連続であるような日々を、もう恐れる必要はないのです。神さまが共にいてくださいます。どのような日々をも、力強く生き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2022년 12월 11일 주일예배(요약판)】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 마태복음 1장 18~23절
마태복음은 구약 성서의 예언이 예수 그리스도에 있어서 성취되었음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서도 주 예수님의 탄생이 이사야 7장에 예언된 것의 성취임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하면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23절)
예수님께서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분이라는 것을 밝히고 있습니다. 구세주 예수님의 탄생이 임마누엘 예언의 성취인 것은 신약 성서 안에서는 마태복음만이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만, 이 말 자체는 이 1장 23절에 단 한 번만 이사야 7장 14절의 인용으로서 나올 뿐입니다. 그러나 이“임마누엘”이라는 말은 마태복음을 관철하는 주제로서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의 성경 말씀은 예수님의 탄생을 요셉에게 알리는 장면입니다만, 요셉에게 있어서는 절망이 수반된 대단한 사건이었던 것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약혼자인 마리아가 다른 사람의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어떤 경위로 요셉이 그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는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고 마태는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을 알고 있었던 것은 마리아뿐이었을 것입니다.
요셉은 마리아가 잉태한 이유를 모릅니다. 결혼을 앞둔, 어떤 의미에서 인생에서 가장 행복해야 하는 날들에 요셉은 구렁텅이에 빠졌습니다.
그런데도 요셉은 그 일을 드러내길 원하지 않고 마리아와 조용히 헤어지려고 했습니다. 그것은 괴로운 결단이었습니다. 요셉은 율법을 지키는 “의로운 사람 ”이었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율법에 따르면 요셉의 아이가 아닌 다른 이의 아이를 가진 마리아는 간음죄로 심판 받아 돌로 쳐 죽임을 당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의 아이가 아닌 아이를 받아들일 수도 없습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 ”는 것도 믿을 수 없습니다. 그 때문에 요셉은 마리아를 가만히 끊어내고자 한 것입니다. 고민하면서 고뇌 끝에 요셉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을 생각한 것입니다.
이 요셉의 모습은 우리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요셉은 “의로운 사람”으로서 하나님 앞에 서게 됩니다만,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요셉의 신앙으로도 따를 자신이 없는 것입니다. 자신이 처한 상황에 고민하고 괴로워합니다. 우리도 자기가 처한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거기서부터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시작되는 것을, 아니 이미 시작된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그 요셉이 바뀌었습니다. 20절에“이 일을 생각할 때에 주의 사자가 현몽하여”라고 쓰여 있습니다. 이 천사의 꿈의 신탁 후에 요셉은 곧바로 마리아를 맞아들입니다. 요셉의 태도는 일변했습니다. 꿈으로 천사의 신탁을 들은 정도로 인간은 바뀔 수 있을까요?
이 천사의 신탁을 들은 요셉은 잔학한 헤롯 왕으로부터 어린 아이 예수님을 지키기 위해서 애굽으로 도망갔다가 그 후 이스라엘로 귀환하는 어린 아이를 안고 힘든 여정을 훌륭하게도 젊은 아버지로서, 그리고 일가의 가장으로서의 역할을 완수합니다. 거기에는 고민하던 모습은 없습니다. 천사의 신탁을 거역할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다면 그 후 요셉의 주저함 없는 행동과 아버지다운 태도는 생기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근본에는 천사로부터의 말씀에 의해 요셉 자신이 바꿔졌기 때문입니다.
천사는“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먼저 고합니다. 그렇습니다. 요셉은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마리아가 석타형으로 죽는 것도, 그리고 자기가 이해하기 어려운 힘 든 삶을 받아들이는 것도. 그러나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천사는 고한 것입니다. “그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20-21절) 예수라는 이름은 “하나님은 구원”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그리고 서두에 말씀드린 것처럼 “임마누엘(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는 것을 앞으로 태어날 아이를 통해서 징표로서 요셉에게 준 것입니다.
요셉은 고민하고 괴로워했습니다. 자신의 힘으로는 어쩔 수 없는 현실 속에서 자신의 힘으로 어떻게든 해결하려고 발버둥 치고 있었던 것입니다.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는 등의 터무니없는 하나님의 개입하심에 어떻게든 자기 나름대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삶의 아귀를 맞추려고 했습니다. 그 가운데 요셉은 구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죄를 알게 된 것이기도 했습니다. 요셉의 모습은 괴로움 속에서 또 고민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인간의 모습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천사가 고한 것은 마리아의 태속의 아이는 하나님이 지키시기 때문에 당신은 안심해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아이를 기르면 당신에게는 훌륭한 보답이 있을거라는 신탁도 아닙니다. 단지 그 아이는 “임마누엘(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이라는 징표였습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했습니다. 요셉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이 함께 계셔 주신다는 것의 굉장함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죄로 고통받는 나날 속에서 자신을 구원해 주신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크리스마스에 일어난 일 그 자체인 것입니다. 구약 시대로부터 길게 계속되는 어쩔 수 없는 인간의 죄의 역사, 암흑의 역사 속에 하나님께서는 개입하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이 세계에 보내는 방식으로 개입하셨습니다. 이 하나님으로부터 떨어진 세계의 괴로움의 어둠 속에 아기 예수님께서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세상은 바꿔졌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죄에서 구원해 주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라” 고 요셉에게 고하신 것처럼 우리도 이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변함없는 혼돈과 시련의 연속인 날들을 더 이상 두려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해 주십니다.이제 우린 그 어떤 날들도 힘차게 살아 갈 수 있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