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목자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만, 크리스마스의 기쁨이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노숙을 하면서 밤새도록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는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되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보냈습니다. 양에게 먹일 목초를 찾아 전전하느라 정주할 집도 갖지 못했고, 사회에서 떠나 살아서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인 사회에서는 어엿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재판에서도 증인이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목자들에게 최초로 크리스마스의 기쁨이 주의 사자를 통해 알려졌던 것입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이렇게 고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구세주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뉘어 있다. 그것이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초라한 “표적”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뭐야, 바보같다. 구세주가 구유에 뉘어 있을 리가 없잖아” 라며 천사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있을 수 없는 비상식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신다는데 과연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거스르고 죄에 푹 빠져 멸망을 향해 걷고 있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말인가?
인간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인간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사람이 되어 내려오신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와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신다. 이렇게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사건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목자들은 이 “구유”라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만약 구세주가 훌륭한 저택이나 궁전에 태어나셨다면 자기들과 같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땀과 먼지와 양의 냄새로 얼룩진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어가려고 해도 “여기는 너희들이 올 곳이 아니야”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유가 있는 마구간이라면 자기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구유의 냄새는 그들의 옷과 같은 냄새였기 때문입니다.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면 자기들이라도 경배하러 갈 수 있다. 그래서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구유의 예수님을 예배했습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있던 목자들이 기뻐하며 일어선 것입니다. 그것은 목자들이 이 천사의 소식을 자신을 위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위해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약하고 가장 가난하며 가장 작은 자의 모습을 취하여 구유에 태어나셨다. 당신을 위해서.
이 말씀을 목자들처럼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서 받아들일지 어떨지 거기에 크리스마스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을지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마음의 가난함이나 더러움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십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11절) 이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 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고 계십니다. "오늘 너를 위해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구유처럼 가난하고 더러운 네 마음에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이 천사의 말씀을 자신의 사건으로 들을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진정한 은혜의 시간이 됩니다.
단지, 여기서 하나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이 있는 마구간을 찾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목자들이 예수님 부모와 자식이 있는 마구간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찾으면서 큰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천사의 신탁이 있고 오늘 밤 베들레헴의 어떤 마구간에서 구세주가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르십니까?” 라고 외치면서 찾았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7절에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17-18절) 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양 떼도 들판에 남겨둘 수 없기 때문에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큰 소동이 일어나 놀란 마을 주민들도 집집마다 나와서 목자들과 함께 마을에 있는 마구간을 구석구석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여관에 병설하는 마구간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 구유에 뉘어 있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은 것은 목자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구유의 예수님을 찾아내고도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습니다. 마리아만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19절)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눈치채셨나요? 목자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목자들도 문제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마을 사람들과는 교제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목자들은 한밤중에 마을에서 큰 소란이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구세주를 만날 수 있다는 소망과 기쁨이 그들을 바꾼 것입니다. 천사가 말한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절) 라는 말씀이 그들을 바꾼 것입니다. 아니요, 이 천사의 말씀을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꿔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의 목자로서의 삶과 나날의 생활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석에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날들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결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사는 삶으로 바뀌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천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이 말씀을 믿고 자신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서로 나누시기를 바랍니다.
2022年12月18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10章 11節
〇讃 頌 讃頌歌 3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18 (待降節 ④)
〇讃 頌 讃頌歌 123
〇聖書奉読 ルカ福音書(누가복음) 2章 8~20節
〇説 教 「あなたのために(당신을 위하여)」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30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3
〇祝 祷
【 2022年 12月 18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あなたのために」 ルカ 2章 8~20節
今日は、羊飼いのクリスマス物語を御一緒に考えたいと思いますが、クリスマスの喜びが最初に知らされたのは、野宿をしながら、夜通し羊の群れの番をしていた羊飼いでした。
羊飼いというのは、当時、ユダヤ人社会から疎外され、人間扱いされていなかったのです。彼らは、経済的には、最下層に属する人たちで、殆どの者が、貧しいために結婚もできず、生涯独身で過ごしました。羊に食べさせる牧草を探して、転々と移動するために、定住する居場所も持てず、社会から離れて住み、安息日に礼拝に行くこともできませんでした。そのため、ユダヤ人社会では、一人前の人間として認められず、裁判でも証人にはなれなかった、と言われています。
そのような羊飼いたちに最初にクリスマスの喜びが主の天使を通して知らされたのです。天使は、羊飼いたちに、こう告げました。「あなたがたは、布にくるまって飼い葉桶の中に寝ている乳飲み子を見つけるであろう。これがあなたがたへのしるしである。」(12節)
救い主が、ベツレヘムの家畜小屋に生まれ、飼い葉桶に寝かされている。それが「しるし」だというのです。何ともみすぼらしい「しるし」です。この言葉を聞いた途端に、殆どの人が、「何だ、馬鹿らしい。救い主が、飼い葉桶に寝ている筈がないじゃないか」と言って、天使の言葉を、真剣に受け止めようとしないでしょう。
常識で考えれば、その通りです。しかし、クリスマスは、常識では理解できない出来事なのです。私たち、人間社会の物差しで測れば、あり得ないような、非常識な出来事なのです。神さまが、人となって、この世に降って来られる。何のために。ご自身に背いて、罪の中にどっぷりと浸かり、滅びに向かって歩んでいる人間を救うために。
人間の罪を、一身に背負って、身代わりとなって、十字架にかかられるために、人となって降って来られる。神の御座から降りて、最も貧しい、最も惨めな者となられる。このような人間の常識を超えた出来事を、私たちが受け入れることができるでしょうか。
でも、羊飼いたちは、この「飼い葉桶」という言葉を聞いて、大いに喜びました。もし、救い主が、立派なお屋敷や宮殿に、お生まれになったのなら、自分たちのような者は、とても入れてもらえないと思ったでしょう。なぜなら、彼らは、汗と埃と羊の匂いが染み付いた、ボロボロの服を着ていたからです。もし、入って行こうとしても、「ここはお前たちの来る場所じゃない」、と言われるに違いありませんでした。ですから、初めから、行こうとしなかったと思います。
でも、飼い葉桶のある家畜小屋なら、自分たちは、ありのままの姿で、入っていける。なぜなら、飼い葉桶の匂いは、彼らの服と同じ匂いだったからです。飼い葉桶に寝ている赤ちゃんなら、自分たちでも拝みに行ける。それで、羊飼いたちは、急いで行って、飼い葉桶のイエスさまを礼拝しました。
安息日も守らずに、神さまから離れていた羊飼いたちが、喜んで立ち上がったのです。それは、羊飼いたちが、この天使の知らせを、自分のための言葉だと受け止めたからです。あなたのため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あなたのために、神さまが、最も弱く、最も貧しく、最も小さな者の姿を取って、飼い葉桶に生まれてくださった。あなたのために。
この言葉を、羊飼いたちのように、自分への言葉として、受け入れるかどうか。そこに、クリスマスの恵みを、自分のものとすることができるかどうか、が掛かっています。もし、私たちが、自分の心の貧しさや汚れを、自覚しているなら、神さまは、私たちに、救い主を送ってくださいます。
「今日ダビデの町で、あなたがたのため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11節) この愛のメッセージを、送ってくださいます。今も、神さまは、私たち一人一人の心に、呼び掛けておられます。「今日、あなたのため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飼い葉桶のように、貧しく、汚れた、あなたの心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
この天使の言葉を、自分の出来事として、聞くことができるなら、クリスマスは、私たちにとって、まことの恵みの時となります。
ただ、ここで一つ不思議に思うことがあります。それは、羊飼いたちはどうやってイエスさまがいる家畜小屋を見つけることができたのかということです。
私が思いますに、羊飼いたちがイエスさま親子がいる家畜小屋を見つけられたのは、探しながら大声を出していたからではないかと思います。「天使のお告げがあって、今夜ベツレヘムのどこかの家畜小屋で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そうです。皆さん、知りませんか?」と叫びながら、探し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聖書には記されていませんので、想像の域を脱しませんが、あながち大きく外れてはいないと思います。なぜなら、17節に「羊飼いたちは、この幼子について天使が話してくれたことを人々に知らせた。聞いた者は皆、羊飼いたちの話を不思議に思った」(17-18節)と書いてあるからです。羊の群れも野原に残しておけませんから、連れてきていたでしょう。夜中に、大変な騒ぎとなり、驚いた町の住民も家々から出て羊飼いたちとともに、町にある家畜小屋を片っ端から探したのだろうと思います。そして、一つの宿屋に併設する家畜小屋がそれだったのです。
そして、問題は、その飼い葉桶に寝かされているイエスさまを救い主と信じたのは、羊飼いたちだけだったということなのです。町の人々は飼い葉桶のイエスさまを探し出しても、ただ不思議に思うだけでした。マリアだけは「これらの出来事をすべて心に納めて、思い巡らしていた」(19節)と言います。
皆さん、お気づきでしょうか? 羊飼いは、町の人たちから軽蔑される存在でした。羊飼いたちも問題が起こるのを怖れて、町の人たちとは交わりを避けていました。それなのに、羊飼いたちは、真夜中に町で大騒ぎになるようなことをしたのです。救い主に会うことが出来るという希望、喜びが彼らを変えたのです。天使が語った「今日ダビデの町で、あなたがたのため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この方こそメシアである」(11節)という言葉が彼らを変えたのです。いえ、この天使の言葉を自分たちに語られた言葉として受け取り、信じたからこそ、彼らは変えられたのです。
幼子イエスさまと出会った後の彼らの人生というのは、羊飼いとしての日々の暮らしは何も変わらなかったでしょう。依然として、社会の片隅で、人々から疎外される日々は続いたでしょう。しかし、「私は、どんな時も、あなたと共にいる。決して、あなたを見捨てることはない」という主の愛を感じながら生きる人生に変えられたと信じます。
皆さん、私たちも天使の言葉を聞きました。「あなたのために救い主がお生まれになった。」この御言葉を信じ、自分の心の中にイエスさまを迎え入れ、クリスマスの喜びを分かち合いたいと願います。
【2022년 12월 18일 주일예배(요약판)】
“당신을 위하여” 누가복음 2장 8~20절
오늘은 목자들의 크리스마스 이야기를 함께 생각하고자 합니다만, 크리스마스의 기쁨이 가장 먼저 알려진 것은 노숙을 하면서 밤새도록 양 떼를 지키던 목자들이었습니다.
목자는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소외되어 인간 취급을 받지 못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경제적으로는 최하층에 속하는 사람들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결혼도 못하고 평생 독신으로 보냈습니다. 양에게 먹일 목초를 찾아 전전하느라 정주할 집도 갖지 못했고, 사회에서 떠나 살아서 안식일에 예배를 드리지도 못했습니다. 그 때문에 유대인 사회에서는 어엿한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재판에서도 증인이 될 수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목자들에게 최초로 크리스마스의 기쁨이 주의 사자를 통해 알려졌던 것입니다. 천사는 목자들에게 이렇게 고했습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절)
구세주가 베들레헴의 마구간에서 태어나서 구유에 뉘어 있다. 그것이 “표적”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정말 초라한 “표적”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대부분의 사람들이 “뭐야, 바보같다. 구세주가 구유에 뉘어 있을 리가 없잖아” 라며 천사의 말씀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을 것입니다.
상식으로 생각하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크리스마스는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사건입니다. 우리 인간 사회의 기준으로 판단하면 있을 수 없는 비상식적인 사건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내려오신다는데 과연 무엇을 위해서 자신을 거스르고 죄에 푹 빠져 멸망을 향해 걷고 있는 인간을 구하기 위해서 오신다는 말인가?
인간의 죄를 한 몸에 짊어지고 인간 대신 십자가에 못박히기 위해 사람이 되어 내려오신다. 하나님의 보좌에서 내려와 가장 가난하고 가장 비참한 사람이 되신다. 이렇게 인간의 상식을 초월한 사건을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을까요?
그러나 목자들은 이 “구유”라는 말을 듣고 대단히 기뻐했습니다. 만약 구세주가 훌륭한 저택이나 궁전에 태어나셨다면 자기들과 같은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고 생각했겠지요. 왜냐하면 그들은 땀과 먼지와 양의 냄새로 얼룩진 너덜너덜한 옷을 입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만약 들어가려고 해도 “여기는 너희들이 올 곳이 아니야”라고 말할 것이 틀림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아예 처음부터 가려고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구유가 있는 마구간이라면 자기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들어갈 수 있다. 왜냐하면 구유의 냄새는 그들의 옷과 같은 냄새였기 때문입니다. 구유에 뉘어 있는 아기라면 자기들이라도 경배하러 갈 수 있다. 그래서 목자들은 서둘러 가서 구유의 예수님을 예배했습니다.
안식일도 지키지 않고 하나님을 떠나 있던 목자들이 기뻐하며 일어선 것입니다. 그것은 목자들이 이 천사의 소식을 자신을 위한 말씀이라고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위해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당신을 위해 하나님께서 가장 약하고 가장 가난하며 가장 작은 자의 모습을 취하여 구유에 태어나셨다. 당신을 위해서.
이 말씀을 목자들처럼 자신을 향한 말씀으로서 받아들일지 어떨지 거기에 크리스마스의 은혜를 자신의 것으로 할 수 있을지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자신의 마음의 가난함이나 더러움을 자각한다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구세주를 보내 주십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다"(11절) 이 사랑의 메시지를 보내 주십니다. 지금도 하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마음에 호소하고 계십니다. "오늘 너를 위해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구유처럼 가난하고 더러운 네 마음에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이 천사의 말씀을 자신의 사건으로 들을 수 있다면 크리스마스는 우리에게 진정한 은혜의 시간이 됩니다.
단지, 여기서 하나 신기한 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목자들이 어떻게 예수님이 있는 마구간을 찾을 수 있었느냐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목자들이 예수님 부모와 자식이 있는 마구간을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은 찾으면서 큰 소리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천사의 신탁이 있고 오늘 밤 베들레헴의 어떤 마구간에서 구세주가 태어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 모르십니까?” 라고 외치면서 찾았을 것 같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상상할 수밖에 없지만 크게 벗어나지 않을 거라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17절에 “보고 천사가 자기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을 전하니 듣는 자가 다 목자들이 그들에게 말한 것들을 놀랍게 여기되”(17-18절) 라고 쓰여 있기 때문입니다. 양 떼도 들판에 남겨둘 수 없기 때문에 데리고 왔을 것입니다. 한밤중에 큰 소동이 일어나 놀란 마을 주민들도 집집마다 나와서 목자들과 함께 마을에 있는 마구간을 구석구석 찾았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한 여관에 병설하는 마구간이 그것이었습니다.
그리고 문제는 그 구유에 뉘어 있는 예수님을 구세주라고 믿은 것은 목자들뿐이었다는 것입니다. 마을 사람들은 구유의 예수님을 찾아내고도 그저 신기해할 뿐이었습니다. 마리아만은 “이 모든 말을 마음에 새기어 생각하니라”(19절) 라고 말합니다.
여러분, 눈치채셨나요? 목자는 마을 사람들로부터 경멸을 받는 존재였습니다. 목자들도 문제가 일어날 것을 두려워하여 마을 사람들과는 교제를 피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도 목자들은 한밤중에 마을에서 큰 소란이 되는 일을 한 것입니다. 구세주를 만날 수 있다는 소망과 기쁨이 그들을 바꾼 것입니다. 천사가 말한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1절) 라는 말씀이 그들을 바꾼 것입니다. 아니요, 이 천사의 말씀을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으로 받아들이고 믿었기 때문에 그들은 바꿔진 것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만난 후 그들의 목자로서의 삶과 나날의 생활은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여전히 사회의 한 구석에서 사람들로부터 소외되는 날들은 계속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다. 결코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라는 주님의 사랑을 느끼며 사는 삶으로 바뀌었다고 믿습니다.
여러분, 우리도 천사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당신을 위해 구세주가 태어나셨다.” 이 말씀을 믿고 자신의 마음 속에 예수님을 맞아들이고 크리스마스의 기쁨을 서로 나누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