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5-6절)
이 “하나님은 빛이시라” 라는 빛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이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요, 길을 밝히는 등불이요, 사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는 빛이었다는 것은 어둠에 대한 빛이며, 그것은 더러움에 대한 깨끗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빛이지 우리 인간과 같은 “어둠”, 즉 죄나 더러움 따위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면서 어둠 속을 걷고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진리를 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8절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8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10절) 이라고 우리에게 스스로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고 점검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교제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으로 걷고 싶다고 바라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노력하지만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이지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여기서 틀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그래서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편지에서 크리스천이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들이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은 바싹바싹 말라 예배는 의식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지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절)
여기에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면 죄에서 해방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안은 우리가 그래도 빛 가운데 걷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한다면 우리의 죄는 깨끗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도 일상생활에 있어서 깨끗하게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십자가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어 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약속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는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마음 속에 배어 있는 완고한 더러움도, 스스로는 어쩔 수 없다는 나쁜 습관으로부터도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깨끗하다”는 것은 단순히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편지를 쓴 요한은 예전에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사랑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빛 가운데 걷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짐으로써 그런 사람으로 바꿔져 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나이를 먹고 나서도 언제든지 우리가 십자가 아래로 간다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처럼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빛에 비춰질 때 자신의 죄와 더러움,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침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는 역시 별수없는 인간이구나” 라며 계속 자책해야 할까요?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9절)
자신에게 죄가 없다거나 범죄하지 않았다거나 해서 속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피에 의지하면 됩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 잠자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겼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들키지 않도록 이번에는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싸움의 최전선에 내세워 전사시켰습니다. 이걸로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단에게 질책을 받았고 다윗의 죄는 밧세바가 낳은 다윗의 아이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말하며 찬양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2)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것은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만, 만약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시니 그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악에서 께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또 했느냐? 이런 어리석은 놈 같으니!” 라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한다면 그 죄를 용서하고 모든 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인 죄, 부족함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죄 고백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용서하심과 깨끗하게 하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와 마주할 때 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은 속죄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걷는다는 것입니다.
2023年2月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詩編(시편) 32編 1-2節
〇讃 頌 讃頌歌 14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9 (詩編15編)
〇讃 頌 讃頌歌 270
〇聖書奉読 ヨハネの手紙一(요한 1서) 1章 5~10節
〇説 教 「光の中を歩むために(빛 가운데 걷기 위하여)」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45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2月 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光の中を歩むために」 ヨハネの手紙一 1章 5~10節
「わたしたちがイエスから既に聞いていて、あなたがたに伝える知らせとは、神は光であり、神には闇が全くないということです。わたしたちが、神との交わりを持っていると言いながら、闇の中を歩むなら、それはうそをついているのであり、真理を行っていません。」(5-6節)
この「神は光である」という光は、キリストを指しているわけですが、このキリストが命であり、道を照らす灯であり、生きる希望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しかし、ここでキリストは光であったというのは闇に対する光のことであり、それは汚れに対するきよさを表しています。ですから神さまは光であって、私たち人間のような「闇」、すなわち罪や汚れなどは一つもないということです。それなのに、もし私たちが神さまと交わりがあると言いながら闇の中を歩んでいるとしたらどうでしょうか。私たちは偽りを言っているのであって、真理を行ってはいない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
ここでヨハネは、8節10節で「自分に罪がないというなら」(8節)、「罪を犯したことがないと言うなら」(10節)と、私たちに自らの信仰生活を振り返り点検するように勧めています。それは、私たちは神さまとの交わりを持っていると言いながら、交わりを持っているとは思えない行動をしていることがあるということです。もちろん、神さまの御心に歩みたいと願い、そのようにしたいと努めていますが、闇の中を歩んでいることがあります。もしそういうことがあるなら、神さまと交わりがあるとは言っても、それは偽りであって、真理を行っていないというのです。
ただ、ここで間違えないでいただきたいことは、だからだめだと言っているの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ヨハネはこの手紙の中で、クリスチャンが永遠の命であられる神さまとの交わりを持ってほしいと言っているのです。もしあなたが神さまと交わりがあると言いながら、闇の中を歩んでいるとしたら神さまとの交わりは断絶し、神さまのご臨在を感じることができなくなるばかりか、自分の魂はカラカラに乾ききり、礼拝は儀式的なものとなってしまいます。
じゃ、どうすれば善いのかと言いますと、7節をご覧下さい。「しかし、神が光の中におられるように、わたしたちが光の中を歩むなら、互いに交わりを持ち、御子イエスの血によってあらゆる罪から清められます。」(7節)
ここに「わたしたちが光の中を歩むなら」とあります。私たちが聖なる者になったら、罪から解放されると言っているのではないのです。罪を抱えた私たちが、それでも光の中を歩もうとするなら、具体的にはイエスさまの教えに従い、その教え通りに生きようとするならば、私たちの罪は清められると言うのです。
私たちの罪は、主イエス・キリストの贖いにより赦されました。それでも、私たちは日々罪を犯し続けています。そんな私たちが、今も日々の生活において清められ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絶えず、十字架の主の血によって清められていることによって、聖なる神さまと私たちが一つとな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
これはすばらしい約束ではないでしょうか。御子イエスさまの血はすべての罪から私たちを清めてくださいます。心の中に染み付いている頑固な汚れも、自分ではどうしようもないという悪しき習慣からも、すべての罪から私たちを清めてくださるのです。
この「清める」というのは、単に汚れを取り除くというだけでなく、神さまの前に出ることができるように変えられることを意味しています。この手紙を書いたヨハネは以前「雷の子」とあだ名が付けられるほど短気な者でしたが、後に「愛の人」と呼ばれるほどに変えられました。私たちも光の中を歩み、神さまと交わりを持つことによって、そのような者に変えられていくのです。つまり、キリストを信じて救われた時だけでなく、救われた後も、年を老いてからも、いつでも、私たちが十字架のもとに行くなら、御子イエスさまの血が、あなたをすべての罪から清め、キリストのように変えてくださるということです。
ただ、私たちは神さまの光に照らされる時、自分の罪や汚れ、自分の弱さや愚かさに気付かされて落ち込むことがあります。その時、私たちは「私はやっぱり駄目な人間なんだ」と自分を責め続ければよいのでしょうか。
9節をご覧下さい。「自分の罪を公に言い表すなら、神は真実で正しい方ですから、罪を赦し、あらゆる不義からわたしたちを清めてくださいます。」(9節)
自分には罪がないとか、罪を犯したことがないとか言って誤魔化そうとするのではなく、素直に自分の罪を認めて、御子イエスさまの血にお頼りすればいいのです。そして罪をきよめていただき、この神さまとの交わりに入れて頂けばいいのです。
ダビデはバト・シェバと姦淫の罪を犯したとき、黙って自分の心の奥に隠しました。するとそれがバレないようにと今度は彼女の夫を戦いの最前線に立たせて戦死させました。これでバレないだろうと思っていましたが、ナタンに叱責され、ダビデの罪はバト・シェバが産んだダビデの子に死をもたらしました。
しかし、ダビデが自分の罪を神さまに告白したとき、神さまはダビデの罪を赦してくださいました。そのときダビデはこう言って賛美しました。「いかに幸いなことでしょう。背きを赦され 罪を覆っていただいた者は。いかに幸いなことでしょう。主に咎を数えられず、心に欺きのない人は。」(詩編32:1-2)
私たちも同じです。私たちもイエスさまを信じて罪赦された者ですが、それは罪がな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日々罪を犯すような者ですが、もし私たちがその罪を言い表すなら、神さまは真実で正しいお方ですから、その罪を赦し、すべての悪からきよめてくださるのです。神さまは決して「またやったのか。愚か者めが」とは言われません。私たちがその罪を認めて神さまの前に立ち、悔い改めるなら、その罪を赦し、すべての悪から私たちをきよめてくださるのです。
皆さん、自分自身を受け入れるというのは、自分を良い者とす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内なる罪、欠けを事実として認めることなのです。そこには罪の告白が必要です。ヨハネは「自分の罪を公に言い表すなら、神は真実で正しい方ですから、罪を赦し、あらゆる不義から私たちを清めてくださいます」(9節)と言っています。主イエスの十字架と復活はこの「赦し」と「清め」なのです。
私たちは自分の罪と向かい合うとき、主イエスの十字架の血による贖いを自分自身のこととして受け止めることができます。神さまの光の中を歩むというのは、神さまの愛の中を歩むということなのです。
【2023년 2월 5일 주일예배(요약판)】
“빛 가운데 걷기 위하여” 요한 1서 1장 5~10절
“우리가 그에게서 듣고 너희에게 전하는 소식은 이것이니 곧 하나님은 빛이시라 그에게는 어둠이 조금도 없으시다는 것이니라 만일 우리가 하나님과 사귐이 있다 하고 어둠에 행하면 거짓말을 하고 진리를 행하지 아니함이거니와” (5-6절)
이 “하나님은 빛이시라” 라는 빛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것입니다만, 이 그리스도께서 생명이요, 길을 밝히는 등불이요, 사는 소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그리스도는 빛이었다는 것은 어둠에 대한 빛이며, 그것은 더러움에 대한 깨끗함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빛이지 우리 인간과 같은 “어둠”, 즉 죄나 더러움 따위는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도 만약 우리가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면서 어둠 속을 걷고 있다면 어떨까요? 우리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지 진리를 행하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요한은 8절 10절에서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8절),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10절) 이라고 우리에게 스스로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고 점검할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고 있다고 말하면서 교제를 가지고 있다고는 생각되지 않는 행동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의 마음으로 걷고 싶다고 바라고 그렇게 하고 싶다고 노력하지만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만약 그런 일이 있다면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해도 그것은 거짓이지 진리를 행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단, 여기서 틀리지 않았으면 하는 것은 그래서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 편지에서 크리스천이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과의 교제를 가지길 바란다고 말합니다. 만약 당신들이 하나님과 교제가 있다고 말하면서 어둠 속을 걷고 있다면 하나님과의 교제는 단절되고 하나님의 임재하심을 느낄 수 없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영혼은 바싹바싹 말라 예배는 의식적인 것이 되어 버립니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은지 7절을 보십시오. “그가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7절)
여기에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이라고 쓰여 있습니다. 우리가 거룩한 자가 되면 죄에서 해방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죄를 안은 우리가 그래도 빛 가운데 걷고자 한다면, 구체적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따르고 그 가르침대로 살려고 한다면 우리의 죄는 깨끗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용서받았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날마다 죄를 짓고 있습니다. 그런 우리가 지금도 일상생활에 있어서 깨끗하게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끊임없이 십자가 주님의 피로 말미암아 깨끗하게 되어 있음으로 거룩하신 하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굉장한 약속이 아닐까요?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의 피는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십니다. 마음 속에 배어 있는 완고한 더러움도, 스스로는 어쩔 수 없다는 나쁜 습관으로부터도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이 “깨끗하다”는 것은 단순히 더러움을 제거하는 것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나올 수 있도록 바꾸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편지를 쓴 요한은 예전에 “우레의 아들”이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성격이 급한 사람이었지만 나중에 “사랑의 사람”이라고 불릴 정도로 바뀌었습니다. 우리도 빛 가운데 걷고 하나님과 교제를 가짐으로써 그런 사람으로 바꿔져 가는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를 믿고 구원받았을 때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후에도, 나이를 먹고 나서도 언제든지 우리가 십자가 아래로 간다면, 예수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해 주시고 그리스도처럼 바꾸어 주신다는 것입니다.
다만 우리는 하나님의 빛에 비춰질 때 자신의 죄와 더러움, 자신의 나약함과 어리석음을 깨닫고 침울해질 때가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나는 역시 별수없는 인간이구나” 라며 계속 자책해야 할까요?
9절을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9절)
자신에게 죄가 없다거나 범죄하지 않았다거나 해서 속이려고 하는 게 아니라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예수님의 피에 의지하면 됩니다. 그리고 죄사함을 받고 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가면 되는 것입니다.
다윗은 밧세바와 간음죄를 저질렀을 때 잠자코 자신의 마음속 깊이 숨겼습니다. 그러자 그것이 들키지 않도록 이번에는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싸움의 최전선에 내세워 전사시켰습니다. 이걸로 들키지 않을 줄 알았는데 나단에게 질책을 받았고 다윗의 죄는 밧세바가 낳은 다윗의 아이에게 죽음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이 자신의 죄를 하나님께 고백했을 때 하나님은 다윗의 죄를 용서해 주셨습니다. 그때 다윗은 이렇게 말하며 찬양했습니다. “허물의 사함을 받고 자신의 죄가 가려진 자는 복이 있도다 마음에 간사함이 없고 여호와께 정죄를 당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시편 32:1-2)
저희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믿고 죄사함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것은 죄가 없다는 것은 아닙니다. 날마다 죄를 짓는 사람입니다만, 만약 우리가 그 죄를 자백한다면 하나님께서는 미쁘시고 의로우시니 그 죄를 용서하시고 모든 악에서 께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결코 “또 했느냐? 이런 어리석은 놈 같으니!” 라고는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그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 앞에 서서 회개한다면 그 죄를 용서하고 모든 악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기자신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나를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내면인 죄, 부족함을 사실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죄 고백이 필요합니다. 요한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라고 말합니다. 주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이 용서하심과 깨끗하게 하심인 것입니다.
우리는 자신의 죄와 마주할 때 주 예수님의 십자가 피로 말미암은 속죄를 우리 자신의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빛 가운데 걷는다는 것은 하나님의 사랑 가운데 걷는다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