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7절)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옛 계명”이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이렇게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구약의 율법을 대신하는 새로운 계명입니다만, 요한이 여기서 굳이 “옛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에 혼란을 초래한 거짓 사도들이 교회에 전해온 가르침을 “오래된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거짓 사도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이미 오래된 과거의 것이니 이제 버려도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낡았다고 물리치고 자기들의 가르침을 새로운 것이자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 안에 대립이 일어나고 교회의 교제가 깨지고 증오가 일어났습니다. 그 가르침은 “사랑”이 결여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괴롭힌 거짓 사도들을 “자랑하는 자, 자기를 칭찬하는 자”(고후10:17-18)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요한의 교회에 나타난 거짓 사도들에게도 같은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를 칭찬하는 것, 자기 자신이 빛을 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빛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빛을 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형제를 미워한다”, 즉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은 없습니다.
요한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9절) 라고 말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빛 가운데 있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을 안다”(4절)고 했고, “하나님의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은 “하나님을 안다”거나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께서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2장4-6절 참조)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의거하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며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자신의 행함을 따를 것을 제자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끈질기게 몇 번이나 이 세상에 육체의 몸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의 발걸음에 눈을 돌리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이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행함을 바로 옆에서 듣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은 특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항상 곁에 두고 행동을 같이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도 말했지만 요한은 “우뢰의 아들” 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급하고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고자 노력한 결과 “사랑의 사람”으로 불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신앙을 가지면 사람이 바뀌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스스로도 걸어가려고 하는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사람의 발을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는 열심이 되어도 남을 사랑하는 것은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몇 번이나 예수님의 걸으심에 눈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 걸으려고 하다가 몇 번이나 실패했을 것입니다. 자기한테는 무리라고. 그때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행함을 상기시키며 자기가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상기시킨 것입니다. 자기도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싶다고.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역사 가운데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눈을 돌린다면 예수님께서 사랑을 제일로 하고 행동하셨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걸을 수 없는 인간의 현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아 걷고자 하는 자는 우리에게 쏟아진 하나님 사랑의 고귀함을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점을 잃었을 때,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바로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하면 먼저 하나님(의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도에게 습격 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 멸시하던 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가 이 상처를 받고 고통받는 사람의 이웃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이 사마리아인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사람을 돕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강도에게 습격당한 사람의 이웃이 된 것이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라면 그 하나님과 교제할 때 우리도 빛이 됩니다. 그 걸음이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아 걷는 것이며, 오늘 성경 말씀에 있듯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봤을 때, 혹은 어려운 사람을 봤을 때 실제로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갑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함께 그 빛 가운데로 걸어갑시다.
2023年2月19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13章 34節
〇讃 頌 讃頌歌 19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3 (詩編23編)
〇讃 頌 讃頌歌 218
〇聖書奉読 ヨハネの手紙一(요한 1서) 2章 7~11節
〇説 教 「新しい掟(새 계명)」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2月 19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新しい掟」ヨハネの手紙一 2章7~11節
「愛する者たち、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書いているのは、新しい掟ではなく、あなたがたが初めから受けていた古い掟です。この古い掟とはあなたがたがすでに聞いたことのある言葉です。」(7節)
ヨハネがここで語っている「古い掟」とは、イエスさまが弟子たちに語られた掟です。ヨハネによる福音書13章34節にこうあります。「あなたがたに新しい掟を与える。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ヨハネ13:34)
これは、イエスさまが教えられた旧約の律法に代わる新しい掟なのですが、ヨハネがここで敢えて「古い掟」と言っているのは、教会に混乱をもたらした偽教師たちが、教会に伝えられてきた教えを「古いもの」と言っていたからです。つまり、偽教師たちは「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という教えはすでに古くなった過去のものだからもう捨てても構わないと教えたのです。
偽教師たちはイエスさまの教えを古くなったと退け、自分たちの教えを新しいものであり価値のあるものだと教えました。そして、その教えによって教会の中に対立が起こり、教会の交わりが壊れ、憎しみが起こりました。その教えは「愛」を欠くものだったのです。
パウロはコリントの教会を悩ませた偽教師たちを「誇る者、自己推薦する者」(Ⅱコリント10:17-18)と指摘していますが、ヨハネの教会に現れた偽教師たちにも同じ傾向にあったようです。彼らの関心は、自分を推薦すること、自分自身で光り輝くことでした。
私たちも「光り輝きたい」「認められたい」「愛されたい」という思いを持っています。しかし、自分自身が光り輝くために他者を否定するということは許されないのです。偽教師たちは「兄弟を憎む」、つまり他者を人格的に否定したのです。ここにはイエスさまが教えられた愛はありません。
ヨハネは「『光の中にいる』と言いながら、その兄弟を憎む者は、今なお闇の中にいます」(9節)と言います。偽教師たちは「私たちは光の中にいる」と主張していたのでしょう。そして、偽教師たちは「神を知っている」(4節)と言い、「神の内にいる」(6節)と言いました。偽教師たちは自分たちこそ神さまのことを知っている者であり、神さまにに属していると主張したのです。これに対してヨハネは、「神を知っている」、「神の内にいる」という者は、神の掟を守り、「イエスが歩まれたように自らも歩まなければならない」(2章4-6節参照)と言っています。
ヨハネの福音書によれば、イエスさまは最後の晩餐の前に弟子たちの足を洗い、「主であり、師であるわたしが、あなたがたの足を洗ったのだから、あなたがたも互いに足を洗い合わなければならない」(ヨハネ13:14)と言われました。イエスさまは行いによって神さまの御心を示し、ご自身の行いに倣うことを弟子に求められたのです。
ヨハネは、しつこく何度も、この世に肉の体を持ってこられたイエスさまの歩みに目を向けることの大切さを示しています。なぜなら、このヨハネはイエスさまの言葉、イエスさまの行いをすぐ側で聞き、見たからです。
イエスさまの弟子たちの中でも、ペトロとヤコブとヨハネは特別でした。イエスさまはこの三人をいつも側において行動を共にされました。先週も言いましたが、ヨハネは「雷の子」と呼ばれるくらい、短気で暴力的な性格を持っていました。それが、イエスさまの側で、イエスさまの言葉を聞き、イエスさまの行動を見ながら、イエスさまに倣う者になろうと努力した結果、「愛の人」と呼ばれる者になったのです。「雷の子」から「愛の人」に変えられました。それは信仰がそうさせたとも言えますが、信仰を持てば人が変わるのかと言いますと、そうではありません。イエスさまが歩まれたように自らも歩もうとする継続的な努力が必要なのです。
私たち人間は元来、人の足を洗えるものではありません。愛すると言ったって、自分を愛することには一生懸命になっても、人を愛することはすぐに放棄してしまいます。だからこそ、ヨハネは何度もイエスさまの歩みに目を向けるように言うのです。ヨハネ自身、イエスさまに倣って歩もうとして、何度も躓いたことでしょう。自分には無理だと。その時、ヨハネはイエスさまの言葉、イエスさまの行いを思い起こし、自分がどれ程イエスさまに愛されていたのかを思い起こしたのです。自分もイエスさまの愛に応えたいと。
しかし、偽教師たちは歴史の中を歩まれたイエスさまの姿を見ようとしませんでした。もし、イエスさまの地上の生涯に目を向けるなら、イエスさまが愛を第一にして行動していたことがわかるでしょう。イエスさまのようには歩めない人間の現実、しかし、イエスさまに倣って歩もうとする者は、私たちに注がれた神さまの愛の尊さを知る者になるのです。
原点を見失ったとき、人は自分がどこにいるのかも、どこに向かっているのかもわからなくなってしまいます。まさに闇の中を歩んでいるのです。「光の中にいる」と言いながら、兄弟を憎む者になってしまうのです。
それでは、どうしたら兄弟を愛することができるのか、と言いますと、まず、「神さま(の愛)を知る」ことです。そして「神さま(の愛)の内にいる」ことによって兄弟を愛することができるのです。
ルカによる福音書10章に「善いサマリヤ人」の話があります。強盗に襲われた人を助けてくれたのは神さまに仕えていた祭司でも、レビ人でもありませんでした。それはユダヤ人が蔑視していた一人のサマリヤ人でした。彼がこの傷つき、苦しんでいる人の隣人になったのです。神さまの愛を知るというのは、神さまをどれだけ知っているかということではなくて、このサマリヤ人と同じように具体的に人を助ける、人を愛することです。そのような人こそ強盗に襲われた人の隣人になったのであり、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という神さまの御言葉に生きる人なのです。
神さまが光であるなら、その神さまと交わる時、私たちも光となります。その歩みとは自分の罪を告白し、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って罪をきよめられて歩むことであり、今日の御言葉にありますように、兄弟を愛することです。傷つき、苦しんでいる人を見た時、あるいは、困っている人を見た時、実際に助けを与える人です。そのような人こそ隣人となるのです。
私たちもこの神さまとの交わりに入れていただきましょう。そして、神さまが光の中におられるように、私たちも共に光の中を歩ませて頂きましょう。
【2023년 2월 19일 주일예배(요약판)】
“새 계명” 요한 1서 2장 7~11절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새 계명을 너희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너희가 처음부터 가진 옛 계명이니 이 옛 계명은 너희가 들은 바 말씀이거니와”(7절)
요한이 여기서 말하고 있는 “옛 계명”이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계명입니다. 요한복음 13장 34절에 이렇게 있습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13:34)
이것은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구약의 율법을 대신하는 새로운 계명입니다만, 요한이 여기서 굳이 “옛 계명”이라고 말하는 것은 교회에 혼란을 초래한 거짓 사도들이 교회에 전해온 가르침을 “오래된 것”이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즉 거짓 사도들은 “서로 사랑하라”는 가르침은 이미 오래된 과거의 것이니 이제 버려도 된다고 가르친 것입니다.
거짓 사도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낡았다고 물리치고 자기들의 가르침을 새로운 것이자 가치 있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리고 그 가르침으로 인해 교회 안에 대립이 일어나고 교회의 교제가 깨지고 증오가 일어났습니다. 그 가르침은 “사랑”이 결여된 것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를 괴롭힌 거짓 사도들을 “자랑하는 자, 자기를 칭찬하는 자”(고후10:17-18) 라고 지적하고 있습니다만, 요한의 교회에 나타난 거짓 사도들에게도 같은 경향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자기를 칭찬하는 것, 자기 자신이 빛을 발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빛나고 싶다”, “인정받고 싶다”, “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이 빛을 발하기 위해 다른 사람을 부정하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형제를 미워한다”, 즉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부정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사랑은 없습니다.
요한은 “빛 가운데 있다 하면서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지금까지 어둠에 있는 자요” (9절) 라고 말합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 빛 가운데 있다고 주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짓 사도들은 “하나님을 안다”(4절)고 했고, “하나님의 안에 있다”고 말했습니다. 거짓 사도들은 자기들이야말로 하나님을 아는 자이며 하나님께 속해 있다고 주장한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 요한은 “하나님을 안다”거나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자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며 “예수께서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2장4-6절 참조)고 말합니다.
요한복음에 의거하면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만찬 전에 제자들의 발을 씻으며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13:14)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행함으로써 하나님의 마음을 나타내고 자신의 행함을 따를 것을 제자에게 요구하신 것입니다.
요한은 끈질기게 몇 번이나 이 세상에 육체의 몸을 가지고 오신 예수님의 발걸음에 눈을 돌리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줍니다. 왜냐하면 이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행함을 바로 옆에서 듣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중에서도 베드로와 야곱과 요한은 특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세 사람을 항상 곁에 두고 행동을 같이 하셨습니다. 지난주에도 말했지만 요한은 “우뢰의 아들” 이라고 불릴 정도로 성급하고 폭력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예수님의 행동을 보면서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고자 노력한 결과 “사랑의 사람”으로 불리는 자가 된 것입니다. “우뢰의 아들”에서 “사랑의 사람”으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 그렇게 만들었다고도 할 수 있지만 신앙을 가지면 사람이 바뀌느냐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것처럼 스스로도 걸어가려고 하는 계속적인 노력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 인간은 원래 사람의 발을 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한다고 해도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는 열심이 되어도 남을 사랑하는 것은 금방 포기해 버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요한은 몇 번이나 예수님의 걸으심에 눈을 돌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요한 자신이 예수님을 따라 걸으려고 하다가 몇 번이나 실패했을 것입니다. 자기한테는 무리라고. 그때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 예수님의 행함을 상기시키며 자기가 얼마나 예수님의 사랑을 받았는지를 상기시킨 것입니다. 자기도 예수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싶다고.
그러나 거짓 사도들은 역사 가운데 걸어가신 예수님의 모습을 보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예수님의 지상 생애에 눈을 돌린다면 예수님께서 사랑을 제일로 하고 행동하셨음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걸을 수 없는 인간의 현실, 그러나 예수님을 본받아 걷고자 하는 자는 우리에게 쏟아진 하나님 사랑의 고귀함을 아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원점을 잃었을 때,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도,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게 되어 버립니다. 바로 어둠 속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빛 가운데 있다”고 말하면서 형제를 미워하는 자가 되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면 형제를 사랑할 수 있을까라고 하면 먼저 하나님(의사랑)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다는 것으로 형제를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0장에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강도에게 습격 당한 사람을 도와준 것은 하나님을 섬기던 제사장도 레위인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유대인이 멸시하던 한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그가 이 상처를 받고 고통받는 사람의 이웃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얼마나 아느냐가 아니라 이 사마리아인과 마찬가지로 구체적으로 사람을 돕는 것, 사람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강도에게 습격당한 사람의 이웃이 된 것이고, 서로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사는 사람인 것입니다.
하나님이 빛이라면 그 하나님과 교제할 때 우리도 빛이 됩니다. 그 걸음이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죄사함을 받아 걷는 것이며, 오늘 성경 말씀에 있듯이 형제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상처받고 고통받는 사람을 봤을 때, 혹은 어려운 사람을 봤을 때 실제로 도움을 주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야말로 이웃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도 이 하나님과의 교제에 들어갑시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빛 가운데 계시는 것처럼 우리도 함께 그 빛 가운데로 걸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