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12~14절에서 “자녀들아(아이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 라는 말로 교회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 구성이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의 영적 성장 단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가족 중에는 신앙적으로 어린이 같은 사람, 젊은이 같은 사람, 그리고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연령적인 것이나 교회 생활이 길다 짧다의 차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적인 영적 성장을 단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12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12절) 또 14절에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1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주 예수님의 속죄로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 “아이들아” 라는 호소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속죄 받은 자이고 아버지를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일방적으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구원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모든 크리스천의 토대입니다.
그러나 속죄 받은 크리스천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부터 영적으로 한걸음 더 내딛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다음 “청년들”이라는 단계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3절b)
여기서 “청년들”이라는 표현은 “흉악한 자를 이긴”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4절)
청년들의 힘의 근원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청년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하고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광야의 시험을 상기해 본다면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11절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귀에게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는 40일간을 금식하여 몹시 배고픈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해보라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을 떡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기 위해 끝까지 우리와 똑같은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마귀의 유혹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아비들” 말인데요, 1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13절)
“아버지들”의 특질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이 표현은 14절에서도 반복해서 아이들에 대해서도 쓰였습니다. 그럼 아이들과 아비들은 뭐가 다를까요? 앞에서 “청년들”이 마귀의 유혹을 자기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다고 얘기했는데, 마귀의 유혹만이 아니라 여러 신앙적 체험을 통해서 더 깊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깊이 교제한 결과 예수님을 닮은 자로 바뀐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며 좋은 행실을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기 위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예수 님처럼 됨으로써 야기되어집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 어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 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5-17절)
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정욕도 지나쳐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네 인생을 생각해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욕심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지배자인 마귀는 잠시 번영을 줄 수는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세상을 이겨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유혹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로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며 도와주십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하시며 도와주신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유혹에 승리하도록 합시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해 주신 주님을 사랑합시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어갑시다.
2023年3月5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4章 4節
〇讃 頌 讃頌歌 20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5 (四旬節 ② )
〇讃 頌 讃頌歌 267
〇聖書奉読 ヨハネの手紙一(요한 1서) 2章 12~17節
〇説 教 「新世を愛してはならない(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88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3月 5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世を愛してはならない」ヨハネ一 2章 12~17節
ヨハネは12~14節において「子たちよ(子供たちよ)」「父たちよ」「若者たちよ」という言葉で教会の人々に呼び掛けています。恐らくこれは、神の家族の構成というか、クリスチャンの霊的成長段階を表しているのではないかと思われます。つまり、神の家族には信仰的に子どものような人がいれば、若者のような人、そして父のような人がい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単に年齢的なことや教会生活が長い短いといった違いではなくて、その人の信仰的な霊的成長を段階的に表しているようです。
では、子供たちというのは、どういう人たちのことでしょうか。12節をご覧ください。「子たち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書いているのは、イエスの名によって/あなたがたの罪が赦されているからである。」(12節) また、14節に「子供たち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書いているのは、あなたがたが御父を知っているからである。」(14節)とあります。 主イエスによって父なる神さまを知り、主イエスの贖いによって罪赦された人たち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これが信仰の出発点です。
この「子たちよ」という呼び掛けは、私たちにも呼び掛けられています。なぜなら、私たちもイエスの名によって罪を赦されている者であり、御父を知っている者だからです。
ここに「イエスの名によって」(12節)とあるように、それは自分の努力や決心によってではなく、主イエスの御名を信じることによって一方的に与えられた恵みです。イエスさまが十字架にかかって死なれ、三日目に死からよみがえってくださったことによって救いの御業は完成しました。この救いは、主イエスの御名を信じるすべての人にもたらされたのです。これがすべてのクリスチャンの土台です。
しかし、罪赦されたクリスチャンはいつまでもそれだけにとどまっていてはいけません。そこから霊的にステップアップし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それが次の「若者たち」という段階です。13節をご覧ください。「若者たち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書いているのは、あなたがたが悪い者に打ち勝ったからである。」(13節b)
この「若い者たち」というのは、「悪い者に打ち勝った」人たちのことです。それは霊の戦いにおいて勝利した人たちのことを指しています。
しかし、それは、彼ら自身の力によるのではありません。ヨハネは14節でこう言っています。「あなたがたは強く、神の言葉があなたがたの内にいつもあり、あなたがたが悪い者に打ち勝ったからである。」(14節)
若者たちの強さの源、それは彼らの内にいつもある神の言葉にあるのです。若者たちの内に、神の言葉がいつもあるがゆえに、彼らは強く、悪魔に打ち勝つことができるのです。このことは、イエスさまがお受けになった荒野の誘惑のことを思い起こすならば、よく分かると思います。マタイによる福音書4章1~11節にそのことが記されています。
イエスさまは、御自分の内にある神の言葉によって、悪魔の誘惑を退け、悪魔に勝利されたのです。悪魔は、40日間断食して空腹なイエスさまに、「神の子なら、これらの石がパンになるように命じたらどうだ」(マタイ4:3)と誘惑し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神の子として石をパンに変えることも出来たでしょう。しかし、イエスさまは私たちを救うために、私たちの身代わりとなるために、どこまでも私たちと同じ立場に身を置かれたのです。イエスさまは私たちと同じ人間として、悪魔の誘惑を自分の内にある神の言葉によって退けたのです。ということは、私たちも私たちの内に神の言葉があるならば、悪魔の誘惑を退けることが出来るということです。ですから、私たちも悪魔の誘惑を退けるために、神の言葉を心の内に蓄えなくてはなりません。
それから、「父たち」のことですが、13節をご覧下さい。「父たちよ、わたしがあなたがたに書いているのは、あなたがたが、初めから存在なさる方を/知っているからである。」(13節)
「父たち」の特質としては、「初めから存在なさる方を知っている」ということです。「初めから存在なさる方」というのは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ですが、これは14節でも繰り返され、子どもたちに対しても語られていることです。じゃ、子どもたちと父たちは何が違うのかと言いますと、先程、「若者たち」が悪魔の誘惑を自分の内にある神の言葉によって退けたという話しをしましたが、悪魔の誘惑だけではなく、様々な信仰的な体験を通して、さらに深く主イエス・キリストのことを知った人のことを指しているのです。それは、ただ、知識的に知ったということではなく、体験的にイエスさまのことを知り、イエスさまと深く交わり、その結果イエスさまのように変えられた人たちであるということです。
これがクリスチャンの目標でもあります。私たちは神の作品であって、良い行いをするためにキリスト・イエスにあって造られました。良い行いをすることによって救われるのではなく、良い行いをするために救われたのです。それはイエスさまに似ることによって、イエスさまのようになることによってもたらされます。
イエスさまのような人は誰の目にも明らかです。色々な困難や苦しみがあっても動じません。誰もがそのようになりたいと思うような魅力をもっています。それが霊的大人です。言い換えますと、そのような人はイエスだけで十分ですという人です。イエスさまを、そして神さまを愛する人です。世にあるものに目が向きません。
15節をご覧下さい。「世も世にあるものも、愛してはいけません。世を愛する人がいれば、御父への愛はその人の内にありません。なぜなら、すべて世にあるもの、肉の欲、目の欲、生活のおごりは、御父から出ないで、世から出るからです。世も世にある欲も、過ぎ去って行きます。しかし、神の御心を行う人は永遠に生き続けます。」(15-17節)
ヨハネが「世も世にあるものも愛してはいけません」と語るのは、世も世にある欲も過ぎ去って行くからです。このことは、私たちの人生のことを考えても分かります。世も世にある欲も、私たちがこの地上に生きている限りのことです。この世の支配者である悪魔は、束の間の繁栄を与えることはできても、永遠の命を与えることはできないのです。なぜなら、イエス・キリストは、既に世に勝っている御方であるからです。
私たちの信仰生活の目標はイエスさまのようになることです。しかし、その過程にはそれを妨げるものが何と多いことでしょう。様々な誘惑があります。だからヨハネは、私たちが罪を犯さないためにどうしたらいいのかを教えているのです。それはイエス・キリストです。私たちには御父の前で弁護してくださる義なるイエス・キリストがおられるのです。
このイエスさまが、いつも私たちとともにいて、助けてくださいます。あなたは決して一人ではありません。主がいつも共にいて助けてくださることをどうぞ忘れないでください。そして、この主にあって悪魔の誘惑に勝利させていただきましょう。世と世にあるものを愛するのではなく、あなたのために命を捨てるほど愛してくださった主を愛しましょう。そのようにして少しずつでもイエスさまのような者に変えられていきたいと願います。
【2023년 3월 5일 주일예배(요약판)】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 요한1서 2장 12~17절
요한은 12~14절에서 “자녀들아(아이들아)”, “청년들아”, “아비들아” 라는 말로 교회 사람들에게 호소하고 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하나님의 가족 구성이라기보다는 크리스천의 영적 성장 단계를 나타내는 표현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다시 말하자면, 하나님의 가족 중에는 신앙적으로 어린이 같은 사람, 젊은이 같은 사람, 그리고 아버지 같은 사람이 있다는 말입니다. 그것은 단순히 연령적인 것이나 교회 생활이 길다 짧다의 차이가 아니라 그 사람의 신앙적인 영적 성장을 단계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아이들이란 어떤 사람들을 가리키는 것일까요? 12절을 보십시오. “자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가 그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사함을 받았음이요”(12절) 또 14절에 “아이들아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너희가 아버지를 알았음이요”(14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아 아버지 하나님을 알게 되고 주 예수님의 속죄로 죄를 용서받은 사람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이것이 신앙의 출발점입니다.
이 “아이들아” 라는 호소는 우리에게도 적용이 됩니다. 왜냐하면 우리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속죄 받은 자이고 아버지를 아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여기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그것은 자신의 노력이나 결심에 의해서가 아니라 주 예수님의 이름을 믿음으로써 일방적으로 주어진 은혜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시고 사흘 만에 죽음에서 부활하심으로써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습니다. 이 구원은 주 예수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사람에게 주어졌습니다. 이것이 모든 크리스천의 토대입니다.
그러나 속죄 받은 크리스천은 언제까지나 그 자리에만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됩니다. 거기서부터 영적으로 한걸음 더 내딛어야만 합니다. 그것이 다음 “청년들”이라는 단계입니다. 13절을 보십시오. “청년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3절b)
여기서 “청년들”이라는 표현은 “흉악한 자를 이긴”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것은 영적인 싸움에서 승리한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들 자신의 힘으로 이긴 것이 아닙니다. 요한은 14절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강하고 하나님의 말씀이 너희 안에 거하시며 너희가 흉악한 자를 이기었음이라”(14절)
청년들의 힘의 근원은 그들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있습니다. 청년들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항상 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하고 마귀를 이길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받으신 광야의 시험을 상기해 본다면 금방 이해하실 것입니다. 마태복음 4장 1~11절에 그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고 마귀에게 승리하셨습니다. 마귀는 40일간을 금식하여 몹시 배고픈 예수님께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 돌들을 떡덩이가 되게 해보라고 유혹했습니다(마태 4:3).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의 아들로서 돌을 떡으로 바꿀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우리를 대신하기 위해 끝까지 우리와 똑같은 입장을 취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인간으로서 마귀의 유혹을 자기 안에 있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물리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면 마귀의 유혹을 물리칠 수 있다는 말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마귀의 유혹을 물리치기 위해 하나님의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아비들” 말인데요, 13절을 보십시오. “아버지들아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알았음이요”(13절)
“아버지들”의 특질은 “태초부터 계신 이를 안다”는 것입니다. “태초부터 계신 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데, 이 표현은 14절에서도 반복해서 아이들에 대해서도 쓰였습니다. 그럼 아이들과 아비들은 뭐가 다를까요? 앞에서 “청년들”이 마귀의 유혹을 자기 안에 거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겼다고 얘기했는데, 마귀의 유혹만이 아니라 여러 신앙적 체험을 통해서 더 깊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을 가리킵니다. 그것은 단지 지식적으로 알았다는 것이 아니라 체험적으로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과 깊이 교제한 결과 예수님을 닮은 자로 바뀐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천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작품이며 좋은 행실을 하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만들어졌습니다. 선한 일을 행함으로써 구원을 받는 것이 아니라 선한 일을 하기 위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님을 닮음으로써 예수 님처럼 됨으로써 야기되어집니다.
예수님 같은 사람은 누구의 눈에도 뚜렷하게 보입니다. 여러 가지 어려움이나 괴로움이 있어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누구나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매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이 영적 어른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그런 사람은 예수님 만으로도 충분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을,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세상에 있는 것들에 눈길을 주지 않습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15-17절)
요한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것은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정욕도 지나쳐가기 때문입니다. 이 말은 우리네 인생을 생각해 보면 금세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욕심도 우리가 이 세상에 살아 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이 세상의 지배자인 마귀는 잠시 번영을 줄 수는 있어도 영원한 생명을 줄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세상을 이겨낸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생활의 목표는 예수님처럼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그것을 방해하는 것들이 수없이 많습니다. 여러 가지 유혹이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기 위해 어떻게 해야만 하는지를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에게는 아버지 앞에서 대언자로서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가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해 주시며 도와주십니다. 여러분들은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주님께서 늘 함께하시며 도와주신다는 것을 부디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주님으로 말미암아 마귀의 유혹에 승리하도록 합시다. 세상과 세상에 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지 말고 당신을 위해 목숨을 버릴 만큼 사랑해 주신 주님을 사랑합시다. 그렇게 해서 조금씩이라도 예수님을 닮은 자가 되어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