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절 다섯 번 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올해 들어 요한일서를 읽고 있는데,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성경 구절부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은 “속죄”로서의 십자가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신앙의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는 용서받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신앙의 이해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속죄론이라고 합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 희생되었다는 것은 알기 쉽고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기독교에서는 예로부터 이 속죄론이 신앙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다만 이 속죄론은 알기 쉬운 것 같지만, 진정한 의미로 이해하기에는 사실 매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희생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희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속죄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희생을 용인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좋은 일이라든가, 불합리하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당신이 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든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하는것이 미덕인듯 여겨져 버립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거나 참는다거나 그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속죄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속죄라는 것은 십자가에 있어서의 일회성 희생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되거나 그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고 죽으셨다는 사실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희생의 아픔을 다시는 이 세상에서 절대 일으켜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님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큰 희생이었고, 더 이상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 희생이 그곳에서 바쳐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누군가 희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속죄되고 죄 용서받았다는 것과 함께 더 이상의 희생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42절에 “집권자들”이라고 쓰여 있는데, 아마 로마 황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로마 황제는 유대인, 세계인을 군사력, 폭력으로 지배하고 희생을 강요하며 그 위에 군림했습니다. “고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고관들”은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착취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43절 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자신만의 편리함, 쾌적함, 저렴함, 이익을 쫓는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위대한 자는 “섬기는 자”(4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섬긴다”는 말은 음식을 나르는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만든 음식을 나르는 것, 자신에게 있는 음식을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 음식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나누는 것, 그것이 “섬긴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억지로 사람에게 식사를 나르게 하고, 빼앗고 희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종”(44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희생하라는 게 아닙니다. 당신들은 함께 나누고 서로 짊어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45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희생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함께 나누고 함께 짊어지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하는 것은 자신이 마지막이다, 내가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된다, 내 십자가로 모든 희생을 마지막으로 했으면 하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고 그렇게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희생하는 것, 그것은 이 일회성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희생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이 한 번으로 우리는 누구도 우리를 위해 아프고 고통 받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짊어지고 도와 주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구조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회구조라든가, 법률이라든가, 또 관습이라든가, 그런 것들 중에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구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 사순절 때에 나의 죄가 속죄되었는가의 여부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의 희생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는가 보다는 그 아픔을 알고 그 희생을 다시는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
2023年3月2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ガラテヤ(갈라디아서) 3章 13~14節
〇讃 頌 讃頌歌 26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8 (四旬節 ⑤ )
〇讃 頌 讃頌歌 151
〇聖書奉読 マルコによる福音書(마가복음) 3章 1~10節
〇説 教 「十字架の贖罪(십자가의 속죄)」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45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3月 2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十字架の贖罪」 マルコ福音書 10章 42~45節
四旬節第五主日を迎えました。主イエス・キリストの受難、十字架に近づいて来ました。そこで、今年になって、ヨハネの手紙を読んでおりますが、今週と来週は主の十字架に関連する聖書箇所からお話をしたいと思います。
さて、主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というのは、「贖罪」としての十字架として理解されます。「イエスさまは私の罪の身代わりとして十字架にかかり、私のために死んだ」という信仰理解ですね。「イエスさまが私のために十字架で犠牲の献げ物となってくれたことによって、私の罪は赦されている。そして、そのために神さまの愛を知ることができる」という信仰理解です。このような理解を贖罪論と言います。
私のために誰かが犠牲になったというのは、分かりやすいですし、強烈な印象を与えます。キリスト教では古くからこの贖罪論が信仰の中心として受け入れられてきました。
ただ、この贖罪論は分かりやすいようで、本当の意味で理解するのは、実は大変難しいところがあ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が私のために犠牲を払ってくださった。イエスさまは人間のために犠牲の死を選ばれた。それがイエスさまの愛である。だから、私たちも誰かを愛そうとする時、犠牲になる必要がある、と考えてしまいます。贖罪論を強調しすぎると、犠牲を容認することにつながってしまうのです。
たとえば、お国のために死ぬことは良いことだとか、理不尽でも誰かのためにあなたが我慢するのはしょうがないことだとか、誰かの犠牲になることが美徳とされてしまうんですね。ヨハネに手紙の中で、ヨハネが「互いに愛し合う」ということが語られていますが、この「愛し合う」と言う時にも、誰かのために犠牲になるとか、我慢するとか、そのように捉えてしまいます。
では、この贖罪論をどのように受けとめたら良いのかと言いますと、イエスさまの贖罪というのは、十字架における一回限りの犠牲として受けとめる必要があるかと思います。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おける犠牲によって、私たちの罪が清められるとか、それによって救われるとか言うのだけれども、それよりも私たちは、イエスさまが十字架の上で苦しんで死なれたことに目を向ける必要がるの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犠牲の痛みを、もう二度と、この世界で絶対に起こしてはいけないものとして受け止めなければならないのです。私たちは確かにイエスさまの十字架の犠牲によって神さまの愛を知ったかもしれません。しかし、それはとても大きな犠牲で、もうこれ以上必要がないほど大きな犠牲がそこでささげられたのです。ですから、だからもう誰かが犠牲になる必要なないのです。このイエスさまの十字架で十分なのです。
ですから、この四旬節の時に、私たちが覚え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私たちの罪はイエスさまの十字架によって贖われ、罪赦されたということと共に、もうこれ以上の犠牲はい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
42節に「支配者とみなされる人々」とあります。おそらくローマ皇帝の事でしょう。ローマ皇帝はユダヤの人々、世界の人々を軍事力、暴力によって支配し、犠牲にし、その上に君臨していました。「偉い人」も同じです。世に言う「偉い人」は権力を振りかざし、人々に犠牲を強いて、巻き上げ、生きていました。
そんな世界の中でイエスさまはこう語っています。43節です。「しかし、あなた方の間ではそうではない。」(43節) あなた方はそれではいけないとイエスさまは語っています。誰かに犠牲を押し付けて、自分だけの便利さ、快適さ、安さ、利益を追いかける、あなた方はそうではないということです。
本当に偉大な人とは、誰かに犠牲を押し付けて、自分だけの利益を追いかけてゆくのではないのです。イエスさまは本当に偉い者とは「仕える者」(43節)なのだと語っています。この「仕える」とは食事を運ぶことに由来する言葉です。「仕える」という言葉それは、作った食事を運ぶ、自分のところにある食べ物を誰かに渡してゆくということです。その食べ物を自分だけのものとせず、分かち合ってゆくこと、それが「仕える」ということです。逆に仕えさせるとはどんなことでしょうか。無理やり人に食事を運ばせ、奪い、犠牲にすることです。
私たちはイエスさまに「仕える者となりなさい」と言われています。それは44節「すべての人の僕」となってゆくことです。それはあなたが犠牲になりなさいということではありません。あなたたちは共に分かち合い、お互いに担って行き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
45節に「人の子は仕えられるためではなく、仕えるために・・・来た」(45節)とあります。イエスさまは誰かを犠牲にするために来たのではありません。人々に、神さまに仕えるため、共に分かち合い、共に担い合うために来たのです。
そして、イエスさまは「自分の命」を献げると言いました。イエスさまは犠牲となるのは自分が最後だ。私がすべての人の犠牲の身代金となる。私の十字架で、すべての犠牲を最後としてほしい、誰かを犠牲にすることがあなたがたの間ではあってはならないと、そう願ったのです。
イエスさまは人々が犠牲になること、それはこの一回限りの十字架で最後としなくてはならないと語ったのです。だから、犠牲はもうイエスさまの十字架で十分なのです。この一回で私たちは誰も私たちのために痛み、苦しむことはもう二度とあってはいけないと知ったのです。これ以上の犠牲はいらないと知ったのです。誰かを犠牲にするのではなく、互いに担い合い、支え合い、仕え合わなくてはいけないと知ったのです。
私たちの周りには、まだ誰かを犠牲にする仕組みがたくさんあります。この世の中の社会構造だとか、法律だとか、また、慣習だとか、そういったものの中に、誰かを犠牲にする仕組みがたくさんあるのです。私たちは、そこに目を向けなければなりません。
皆さん、この四旬節の時に、私たちは私の罪が贖われたかどうかより、イエスさまの十字架が苦しいものであったことを覚えなければなりません。また、十字架の血によって清められたということよりも、その痛みを知り、その犠牲をもう二度と起こさない、そのことを覚えたいのです。
【2023년 3월 26일 주일예배(요약판)】
“십자가의 속죄” 마가복음 10장 42~45절
사순절 다섯 번 째 주일을 맞이했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수난, 십자가에 가까이 다가왔습니다. 그래서 올해 들어 요한일서를 읽고 있는데, 이번 주와 다음 주에는 주님의 십자가와 관련된 성경 구절부터 이야기를 나누고자 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라는 것은 “속죄”로서의 십자가로 이해됩니다. “예수님은 내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나를 위해 죽으셨다”는 신앙의 이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의 제물이 되어 주신 것으로 말미암아 나의 죄는 용서받았다. 그리고 그 때문에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다”는 신앙의 이해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속죄론이라고 합니다.
나 때문에 누군가 희생되었다는 것은 알기 쉽고 강렬한 인상을 줍니다. 기독교에서는 예로부터 이 속죄론이 신앙의 중심으로 받아들여져 왔습니다.
다만 이 속죄론은 알기 쉬운 것 같지만, 진정한 의미로 이해하기에는 사실 매우 어려운 점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위해 희생을 치르셨습니다. 예수님은 인간을 위해 희생의 죽음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할 때 희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속죄론을 지나치게 강조하면 희생을 용인하는 것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예를 들어,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은 좋은 일이라든가, 불합리하더라도 누군가를 위해 당신이 참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든가, 누군가를 위해 희생을 하는것이 미덕인듯 여겨져 버립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이 “서로 사랑한다”는 말이 나오는데, 이 “사랑한다”고 말할 때도 누군가를 위해 희생한다거나 참는다거나 그렇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렇다면 이 속죄론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느냐 하면 예수님의 속죄라는 것은 십자가에 있어서의 일회성 희생으로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우리의 죄가 깨끗하게 되거나 그로 인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하지만, 그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고통 받고 죽으셨다는 사실에 눈을 돌릴 필요가 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 십자가 희생의 아픔을 다시는 이 세상에서 절대 일으켜서는 안 되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우리는 분명 예수님 십자가의 희생으로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나 큰 희생이었고, 더 이상 필요가 없을 정도로 큰 희생이 그곳에서 바쳐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더 이상 누군가 희생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그러므로 이 사순절 때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의 죄는 예수님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속죄되고 죄 용서받았다는 것과 함께 더 이상의 희생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42절에 “집권자들”이라고 쓰여 있는데, 아마 로마 황제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로마 황제는 유대인, 세계인을 군사력, 폭력으로 지배하고 희생을 강요하며 그 위에 군림했습니다. “고관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말하는 “고관들”은 권력을 휘두르고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착취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세계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43절 입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을지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모든 사람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라고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고 자신만의 편리함, 쾌적함, 저렴함, 이익을 쫓는다,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진정으로 위대한 사람은 누군가에게 희생을 강요하여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정말로 위대한 자는 “섬기는 자”(43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섬긴다”는 말은 음식을 나르는 데서 유래한 말입니다. “섬긴다”는 말은 만든 음식을 나르는 것, 자신에게 있는 음식을 누군가에게 건네주는 것입니다. 그 음식을 나만의 것으로 만들지 않고 나누는 것, 그것이 “섬긴다”는 것입니다. 반대로 섬김을 받는다는 것은 어떤 것일까요? 억지로 사람에게 식사를 나르게 하고, 빼앗고 희생하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섬기는 자가 되라고 합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의 종”(44절)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이 희생하라는 게 아닙니다. 당신들은 함께 나누고 서로 짊어지고 가라는 것입니다.
45절에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45절) 라고 쓰여 있습니다. 예수님은 누군가를 희생하기 위해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을 그리고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함께 나누고 함께 짊어지기 위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자기 목숨”을 준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희생하는 것은 자신이 마지막이다, 내가 모든 사람의 대속물이 된다, 내 십자가로 모든 희생을 마지막으로 했으면 하는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다”고 그렇게 원하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이 희생하는 것, 그것은 이 일회성 십자가에서 마지막으로 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따라서 희생은 이제 예수님의 십자가로 충분합니다. 이 한 번으로 우리는 누구도 우리를 위해 아프고 고통 받는 일이 다시는 없어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더 이상의 희생은 필요 없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누군가를 희생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짊어지고 도와 주고 섬겨야 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아직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구조가 많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사회구조라든가, 법률이라든가, 또 관습이라든가, 그런 것들 중에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구조가 많이 있습니다. 우리는 그곳으로 눈을 돌려야 합니다.
여러분, 이 사순절 때에 나의 죄가 속죄되었는가의 여부보다 예수님의 십자가가 고통의 희생이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깨끗하게 되었는가 보다는 그 아픔을 알고 그 희생을 다시는 일으키지 않는다는 것을 기억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