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32-34절)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믿고 따르려는 하나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통받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장면에서 고통을 겪고 죽을 듯이 슬퍼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잠들어서 함께 기도해 주지 않기 때문에 슬프다는 것은 이 후37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들이 잠들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 전부터 이미 고통받고 슬픔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나약함이 슬펐다, 괴로웠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역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 슬펐을까요? 그것도 물론 있겠죠. 이 후 십자가에 의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매우 무서웠을 것입니다. 몇 번이나 나는 죽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 운명을 알았다 하더라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몸부림칠 정도로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은 단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나 고독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슬픔은 개인의 아픔뿐만 아니라 더 깊은 아픔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깊은 슬픔은 이 죽음이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죽음은 하나님께 가장 사랑받은 사람의 죽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의 죽음이요, 구세주로 지상에 보내진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죽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다가온 지금,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죽이려는 겁니다. 인간이란 그런 일까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도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두려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한다거나 제자들이 기도해주지 않는다는 것 이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구세주조차도 죽이려 하는 그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기심, 참혹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게 아닐까요? 사람은 이렇게 참혹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조차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무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 인간의 죄의 크기를 느끼시고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께서 무섭다고 느끼신 게 이런 상황이 와도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섭게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계속 침묵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36절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자주 주목받는 것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인 줄도 아셨습니다. 그래도 이 잔을 내게서 옮기게 하고 싶었던 것 또한 예수님의 진심이었던 셈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 필사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신 채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침묵을 이어가십니다. 그 침묵은 십자가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라고 그렇게 외치셨을 때도 하나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 침묵을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요? 큰 어려움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을 걸거나 구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래도 되나요? 이게 정녕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그 물음에 하나님께서는 대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입니까? 어디에 계셨을까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받고 죽어가는 것으로 십자가 한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거기 십자가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할 때, 두려워할 때, 아플 때, 목소리는 내지 않아도 함께하는 그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고통 한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기도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피하고 죽음을 피해가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향해 그 고통 한가운데 계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괴롭고 힘들지만 고통받는 사람에게 눈을 돌리고, 깨어 기도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함께 가자”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함께 가자, 그것은 함께 고통의 길을 걷자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눈을 돌려 기도한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서 십자가에 가자고 재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주 예수님을 따라 깨어서 계속 기도해 갑시다.
2023年4月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ルコ(마가복음) 8章 32節
〇讃 頌 讃頌歌 31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29 (棕櫚の主日)
〇讃 頌 讃頌歌 150
〇聖書奉読 マルコによる福音書(마가복음) 14章 32~42節
〇説 教 「十字架に向かう神(십자가를 향하시는 하나님)」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94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4月 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十字架に向かう神」 マルコ福音書 14章 32~42節
「一同がゲツセマネという所に来ると、イエスは弟子たちに、『わたしが祈っている間、ここに座っていなさい』と言われた。そして、ペトロ、ヤコブ、ヨハネを伴われたが、イエスはひどく恐れてもだえ始め、彼らに言われた。『わたしは死ぬばかりに悲しい。ここを離れず、目を覚ましていなさい。』」(32-34節)
イエスさまはここで、ひどく恐れてもだえ始め、死ぬばかりに悲しいと語っています。私たちが救い主と信じ、従おうとする神さまが苦しんでおられるのです。神さまはこのように苦しむお方なのです。でも、なぜイエスさまはこの場面で苦しみもだえ、死ぬばかりに悲しむのでしょうか。実はその理由ははっきりしません。
弟子たちが眠っていて、一緒に祈ってくれないから悲しいというのは、この後の37節の出来事です。弟子たちが眠ってしまい祈っていないということの前から、すでに苦しみ、悲しみを持っているのです。ですから弟子たちの弱さが、悲しかった、苦しかったのではありません。
ではやはり、自分が死ぬということが悲しかったのでしょうか。それももちろんあるでしょう。この後の十字架によって自分が死ぬということはとても怖かったのでしょう。何度も自分は死ななければならないと語り、その運命を知っていたとしても、それは近づけば近づくほど、もだえ、苦しむほど恐ろしかったでしょう。
しかし、イエスさまの苦しみは、ただ自らの死の恐怖や、孤独だけではないと思います。その悲しみは個人の痛みということだけではなくて、もっと深い痛みがあったように思います。
恐らく、イエスさまの深い悲しみは、この死が一人の人間の死ではないということと関係していると思います。これから起こる死は、神さまに最も愛された人の死であり、御心にかなう人の死であり、救い主として地上に遣わされた人が殺される死です。それは神の子の死です。すなわち、神ご自身の死でした。
十字架が目前に迫っている今、人間は神の子を殺そうとしています。神さまを殺そうとしているのです。人間にはそのようなことが出来るのです。人間は神さまをも残酷な十字架につけ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そのことに恐怖を感じたでしょう。自分が殺される、仲間は祈ってくれないということ以上に、人間が神の子さえも、救い主さえも殺そうとしている、その人間に恐怖を感じたでしょう。
イエスさまは人間の身勝手さ、残酷さに恐怖を感じてい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人はこのように残酷になることが出来るのです。人間は神さまですら殺すことが出来るのです。人間とはそのように、恐ろしい存在です。イエスさまはその人間の罪の大きさを感じ、ひどく恐れてもだえ始め、死ぬばかりに悲しんだのでしょう。
そして、もう一つイエスさまが恐ろしいと感じたことが、このような状況になっても、神さまが何も語らないということです。恐ろしいことに神さまはイエスさまの祈りに対して、ずっと沈黙をしているのです。
イエスさまは36節で苦しみを取り除いて欲しい、でも御心が叶うようにと祈っています。この聖書箇所でよく注目されるのが「この杯をわたしから取りのけて下さい。しかし、わたしが願うことではなく、御心に適うことが行われますように」(36節)というイエスさまの祈りです。イエスさまは御自分が人間を救うためには十字架に架からなければならないことはよく分かっていました。それが神さまの御心だと分かっていたわけですね。それでも、この杯が取りのけられることが、イエスさまの本心であったわけです。イエスさまは地面にひれ伏して必死に祈りました。でも、神さまは沈黙されたままです。神さまはひたすら沈黙を続けてゆきます。その沈黙は十字架までずっと続きました。イエスさまが「わが神、わが神、なぜあなたは私を見捨てるのか」と、そう叫んだときも、神さまの声は聞こえませんでした。
イエスさまがもっとも恐ろしかったのは、神さまがずっと沈黙をしていることだった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大きな困難が迫っている。でも私に向けて神さまは直接話しかけたり、救い出したりしてくれないのです。
神さまこれでいいのでしょうか。これが御心なのでしょうか? その問いに神さまは答えてくれないのです。
それでは、神さまはいないのでしょうか。どこにいたというのでしょうか。
私たちは知っています。神さまは十字架の上にいたということを知っています。神さまはもだえ苦しみ、死んでゆくものとして、十字架の真ん中におられたのです。
皆さん、神さまは確かにそこに、十字架にいたのです。それが私たちの神さまです。私たちの神さまは苦難の時、恐怖の時、痛むとき、声はしなくても、共にいる、その苦しみの真ん中に共にいるのが神さまなのです。十字架はそれを表しています。
皆さん、私たちの神さまは苦しみの只中におられる神さまです。私たちの神さまは、苦しみもだえ、祈る神さまなのです。神さまは苦しみを避け、死を避けてゆくのではありません。十字架に向けて、ご自身から向かい、その只中におられるのが、私たちの神さまなのです。
神さまは私たちと共におられます。だからこそ、私たちは自分も苦しく大変だけれども、苦しんでいる人に目を向けてゆく、目を覚まし祈っていく者になりたいのです。
今日の御言葉の最後42節で、イエスさまは「立て、さあ行こう」と言っておられます。イエスさまの目的地は十字架です。「十字架にさあ行こう」と、イエスさまは弟子たちに、そして私たちに語っています。十字架に行こう、それは共に苦しみの道を歩もうということでしょう。そして苦しみを感じている人に目を向け祈るということでしょう。イエスさまは立って、十字架に行こうと促しています。私たちはその主イエスに従い、目を覚まし、祈り続けましょう。お祈りします。
【2023년 4월 2일 주일예배(요약판)】
“십자가를 향하시는 하나님” 마가복음 14장 32~42절
“그들이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매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기도할 동안에 너희는 여기 앉아 있으라 하시고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을 데리고 가실새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 너희는 여기 머물러 깨어 있으라” (32-34절)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구세주라고 믿고 따르려는 하나님께서 힘들어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고통받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이 장면에서 고통을 겪고 죽을 듯이 슬퍼하시는 것일까요? 사실 그 이유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잠들어서 함께 기도해 주지 않기 때문에 슬프다는 것은 이 후37절에 일어난 일입니다. 제자들이 잠들어서 기도하지 않는다는 것 전부터 이미 고통받고 슬픔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의 나약함이 슬펐다, 괴로웠다는 게 아닙니다.
그럼 역시 자신이 죽는다는 것이 슬펐을까요? 그것도 물론 있겠죠. 이 후 십자가에 의해 자신이 죽는다는 것은 매우 무서웠을 것입니다. 몇 번이나 나는 죽어야 한다고 말했고, 그 운명을 알았다 하더라도 가까이 다가갈수록 몸부림칠 정도로 무서웠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통은 단지 자신의 죽음에 대한 공포나 고독만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 슬픔은 개인의 아픔뿐만 아니라 더 깊은 아픔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도 예수님의 깊은 슬픔은 이 죽음이 한 인간의 죽음이 아니라는 것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일어날 죽음은 하나님께 가장 사랑받은 사람의 죽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에 맞는 사람의 죽음이요, 구세주로 지상에 보내진 사람이 죽임을 당하는 죽음입니다. 그것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입니다. 즉 하나님 자신의 죽음이었습니다.
십자가가 눈앞에 다가온 지금, 인간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나님을 죽이려는 겁니다. 인간이란 그런 일까지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도 참혹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일에 두려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자신이 죽임을 당한다거나 제자들이 기도해주지 않는다는 것 이상으로 인간이 하나님의 아들조차도, 구세주조차도 죽이려 하는 그 인간에게 두려움을 느끼셨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이기심, 참혹함에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게 아닐까요? 사람은 이렇게 참혹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조차도 죽일 수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란 그렇게 무서운 존재입니다. 예수님은 그 인간의 죄의 크기를 느끼시고 심히 놀라시며 슬퍼하사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셨을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예수님께서 무섭다고 느끼신 게 이런 상황이 와도 하나님께서 아무 말씀도 안 하신다는 것입니다. 무섭게도 하나님께서는 예수님의 기도에 대해 계속 침묵을 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36절에서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이 성경 구절에서 자주 주목받는 것이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 라는 예수님의 기도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에 못박혀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게 하나님의 마음인 줄도 아셨습니다. 그래도 이 잔을 내게서 옮기게 하고 싶었던 것 또한 예수님의 진심이었던 셈입니다. 예수님은 땅에 엎드려 필사적으로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침묵하신 채로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오직 침묵을 이어가십니다. 그 침묵은 십자가까지 계속 이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막15:34) 라고 그렇게 외치셨을 때도 하나님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가장 무서웠던 것은 하나님께서 계속 침묵을 하고 계셨던 것이 아닐까요? 큰 어려움이 다가오고 있습니다. 하지만 나를 향해 하나님께서는 직접 말을 걸거나 구해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 이래도 되나요? 이게 정녕 하나님의 마음인가요? 그 물음에 하나님께서는 대답해 주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없는 것입니까? 어디에 계셨을까요?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 위에 계셨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받고 죽어가는 것으로 십자가 한가운데 계셨던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분명히 거기 십자가에 계셨던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고난당할 때, 두려워할 때, 아플 때, 목소리는 내지 않아도 함께하는 그 고통 가운데 함께 계시는 것이 하나님이십니다. 십자가는 그것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하나님께서는 고통 한가운데 계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겪고 기도하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고통을 피하고 죽음을 피해가지 않으십니다. 스스로 십자가를 향해 그 고통 한가운데 계시는 분이 우리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자신도 괴롭고 힘들지만 고통받는 사람에게 눈을 돌리고, 깨어 기도하는 자가 되고 싶습니다.
오늘 말씀의 마지막 42절에서 예수님께서는 “일어나라 함께 가자” 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목적지는 십자가입니다. “십자가에 함께 가자”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리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십자가에 함께 가자, 그것은 함께 고통의 길을 걷자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고통을 느끼고 있는 사람에게 눈을 돌려 기도한다는 것이겠지요. 예수님께서는 일어서서 십자가에 가자고 재촉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그 주 예수님을 따라 깨어서 계속 기도해 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