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은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의를 행하고 있느냐 없느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를 행하는 생활이란 하나님의 규칙에 따른 생활이며, 특히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11절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절) 라고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4-35)
요한은 이 “서로 사랑할 것”을 권함에 있어 “가인 같이 하지 말라”'(12절)고 말합니다.
가인에 대해서는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아들이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지상을 떠도는 자가 되고 맙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창세기 4장을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쉽게 말해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 아벨은 양을 치는 자로 성장하는데 각각 주님께 바칠 것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만,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에게는 축복을 주셨지만 가인에게는 축복을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났는지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단히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상의 제물을 드리려는 아벨의 마음을 보시고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하나님의 대응에 납득하지 못하고 심하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향해야 할 그 분노를 아벨에게 돌려 아벨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가인은 마귀의 자녀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 중 첫 번째 사람입니다. 요한은 가인이 형제를 죽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12절)
악한 자는 의로운 자를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는 의로운 자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행실이 악하고 예수님의 행실이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항상 행하시는 예수님이 악한 자에 속하는 자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이와 같은 말을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13절)고 말합니다. 설령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받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 14절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4-15절) 라고 말합니다.
영생이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제이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게 영생이 머물러 있지 않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서 16~17절에서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나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 20: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동생이자 여동생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려 주셨습니다. 그 일로 인해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형이자 친구이신 에수님의 큰사랑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반드시 실제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버리는 방법은 생명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거죠. 그건 사랑하는 데 쓰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부끄러워집니다. 나는 안 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놓인 자리가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작은 목표를 세우고, 예를 들면 매일 기도할 때 꼭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든가, 싫은 소리를 들어도 대꾸하지 않는다든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해 조금의 돈을 바칠 수 있다든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실로써 성실히 실천해 나갑시다.
2023年4月16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ヨハネ(요한복음) 13章 34~35節
〇讃 頌 讃頌歌 3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15 (詩編27編)
〇讃 頌 讃頌歌 538
〇聖書奉読 ヨハネの手紙一(요한일서) 3章 11~18節
〇説 教 「誠実に愛し合おう(성실하게 서로 사랑하자)」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4月 16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誠実に愛し合おう」 ヨハネの手紙一 3章 11~18節
ヨハネは、この世界には「神の子たち」と「悪魔の子たち」しかいないと言います。そして、神の子たちと悪魔の子たちを区別する基準は、正しい生活をしているかどうかであると言います。ここで言う正しい生活とは、神さまの掟に従った生活であり、とりわけ、自分の兄弟を愛することを意味します。
そこでヨハネは11節で、「なぜなら、互いに愛し合うこと、これがあなたがたの初めから聞いている教えだからです。」(11節)と言っています。「互いに愛し合うこと」、この教えはイエスさまが新しい掟として、弟子たちに語られた教えです。「あなたがたに新しい掟を与える。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あなたがたも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互いに愛し合うならば、それによってあなたがたがわたしの弟子であることを、皆が知るようになる。」(ヨハネ13:34-35)
ヨハネはこの「互いに愛し合うこと」を勧めるにあたって、「カインのようになってはいけません」(12節)と言います。
カインについては、創世記4章に記されています。カインは、アダムとエバの最初の息子であり、カインは弟のアベルを殺して、地上をさまよう者となってしまいます。なぜ、そのようになってしまったのかは、創世記4章をお読み頂ければ解りますが、簡単に言いますと、カインは土を耕す者に、アベルは羊を飼う者に成長するわけですが、それぞれ主のもとに献げ物を持ってきます。カインは土の実りを、アベルは羊の群れの中から肥えた初子を持って来ました。ところが、主なる神さまは、アベルとその献げ物に目を留められましたが、カインとその献げ物には目を留められませんでした。
ここで献げ物を持ってくるというのは、礼拝を献げるということです。カインとアベルは同じように神さまに礼拝を献げたのです。神さまはアベルには祝福を与えましたが、カインには祝福を与えなかったということです。
なぜ、そのような違いになったのかと言いますと、ここで詳しくは説明する時間がありませんので、一言で言うならば、神さまはこの礼拝を献げる者の心をご覧になったということです。神さまは最上の物を献げようとするアベルの心ををご覧になって祝福を与えられたということです。
しかし、カインは神さまの対応に納得出来ず、激しく怒りました。そして、神さまに向けられるべきその怒りをアベルに向け、アベルを殺してしまうのです。
ヨハネによれば、カインは悪魔の子たち、自分の兄弟を愛さない者たちの最初の人であるです。ヨハネは、カインが自分の兄弟を殺した理由について、こう記しています。12節です。「なぜ殺したのか。自分の行いが悪く、兄弟の行いが正しかったからです。」(12節)
悪い者は、正しい者に我慢ができないのです。それで、悪い者は正しい者を殺してしまうのです。同じことが、イエスさまを殺したユダヤ人たちにおいても言えます。ユダヤ人たちは、イエスさまを殺してしまいました。それは、ユダヤ人たちの行いが悪く、イエスさまの行いが正しかったからです。神の御心をいつも行うイエスさまに、悪い者に属する者たちは我慢ができないのです。
そして、同じことが、イエスさまを信じる私たちにも言えるのです。それゆえ、ヨハネは、「だから、世があなたがたを憎んでも、驚くことはありません」(13節)と記すのです。たとえ、世の人々から憎まれても、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る信仰を捨ててはいけないということです。
ヨハネはさらに14節で「わたしたちは、自分が死から命へと移ったことを知っています。兄弟を愛しているからです。愛することのない者は、死にとどまったままです。兄弟を憎む者は皆、人殺しです。あなたがたの知っているとおり、すべて人殺しには永遠の命がとどまっていません。」(14-15節)と言っています。
永遠の命とは、御父と御子イエス・キリストとの交わりですから、兄弟を憎む者に、永遠の命がとどまっていないことは明かであるわけです。
ヨハネは、兄弟を愛する者として、16~17節でイエスさまのことを語っています。十字架の死から復活されたイエス・キリストは、弟子たちのことを「わたしの兄弟たち」と呼ばれました。(ヨハネ20:17参照)
イエスさまは、弟であり、妹である私たちのために、命を捨ててくださいました。そのことによって、私たちは愛を知ったのです。私たちの兄であり、友であるイエスさまの大きな愛が、聖霊において私たちの内にとどまっているのです。
それゆえ、私たちも兄弟のために命を捨てるべきであるのです。イエスさまは、「わたしがあなたがたを愛したように、互いに愛し合いなさい」とお命じになりました。イエスさまが私たちを愛してくださったように、互いに愛し合うとは、兄弟姉妹のために命を捨てることであるのです。
命を捨てるというのは、必ずしも実際に命を捨てることではありません。命の捨て方は命の使い方です。どのように使うのかということです。それは、愛することに使い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ね。
「子たちよ、言葉や口先だけではなく、行いをもって誠実に愛し合おう。」(18節)
この言葉を聞きますと、私たちは恥ずかしくなります。自分はダメだと感じたりします。でも、そう考える必要はありません。私たちにも、できることがあります。自分が置かれた場所があります。人間関係があります。その中で、人を愛することを心がけ、“小さな目標”を立て、例えば、日々の祈りの中で必ず誰かのために祈るとか、嫌なことを言われても、言い返さないとか、困難を抱えている内外の人のために、少しのお金を献げるとか、私たちにできる小さなことはたくさんあります。もちろん、教会の中にだってたくさんあります。「互いに愛し合うこと」、このイエスさまの教えを、行いをもって誠実に実践していきましょう。
【2023년 4월 16일 주일예배(요약판)】
"성실하게 서로 사랑하자" 요한일서 3장 11~18절
요한은 이 세계에는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밖에 없다고 말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을 구별하는 기준은 의를 행하고 있느냐 없느냐라고 말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의를 행하는 생활이란 하나님의 규칙에 따른 생활이며, 특히 자신의 형제를 사랑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요한은 11절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할지니 이는 너희가 처음부터 들은 소식이라”(11절) 라고 말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 가르침은 예수님께서 새 계명으로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가르침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요13:34-35)
요한은 이 “서로 사랑할 것”을 권함에 있어 “가인 같이 하지 말라”'(12절)고 말합니다.
가인에 대해서는 창세기 4장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가인은 아담과 하와의 첫 번째 아들이고, 가인은 동생 아벨을 죽이고 지상을 떠도는 자가 되고 맙니다. 왜 그렇게 되었는지는 창세기 4장을 읽어 보시면 알겠지만 쉽게 말해 가인은 농사하는 자로, 아벨은 양을 치는 자로 성장하는데 각각 주님께 바칠 것을 가져옵니다. 가인은 땅의 소산으로 제물을,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드렸습니다. 그런데 주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만,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여기서 제물을 드린다는 것은 하나님께 예배를 드린다는 것입니다. 가인과 아벨은 똑같이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아벨에게는 축복을 주셨지만 가인에게는 축복을 주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왜 그런 차이가 났는지 여기서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기 때문에 간단히 한마디로 말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를 드리는 자의 마음을 보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최상의 제물을 드리려는 아벨의 마음을 보시고 축복을 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인은 이 하나님의 대응에 납득하지 못하고 심하게 화를 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향해야 할 그 분노를 아벨에게 돌려 아벨을 죽여버리는 것입니다.
요한에 따르면 가인은 마귀의 자녀들,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들 중 첫 번째 사람입니다. 요한은 가인이 형제를 죽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적고 있습니다. 12절입니다. “어떤 이유로 죽였느냐 자기의 행위는 악하고 그의 아우의 행위는 의로움이라”(12절)
악한 자는 의로운 자를 참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악한 자는 의로운 자를 죽여 버리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말은 예수님을 죽인 유대인들에게도 할 수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여버렸습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의 행실이 악하고 예수님의 행실이 의로웠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항상 행하시는 예수님이 악한 자에 속하는 자들로서는 참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역시 이와 같은 말을 예수님을 믿는 우리에게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여도 이상히 여기지 말라”(13절)고 말합니다. 설령 세상 사람들의 미움을 받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려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요한은 이어 14절에서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사망에 머물러 있느니라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14-15절) 라고 말합니다.
영생이란 아버지와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교제이기 때문에 형제를 미워하는 자에게 영생이 머물러 있지 않음은 분명한 것입니다.
요한은 형제를 사랑하는 자로서 16~17절에서 예수님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나의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 20:17 참조)
예수님께서는 동생이자 여동생인 우리를 위해 목숨을 버려 주셨습니다. 그 일로 인해 우리는 사랑을 알게 된 것입니다. 우리 형이자 친구이신 에수님의 큰사랑이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우리 안에 머물러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형제를 위해 목숨을 버려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사랑해 주신 것 같이 서로 사랑한다는 것은 형제자매를 위해 목숨을 버리는 것입니다.
목숨을 버린다는 것이 반드시 실제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아닙니다. 목숨을 버리는 방법은 생명을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어떻게 사용하느냐는 거죠. 그건 사랑하는 데 쓰라는 것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18절)
이 말씀을 들으면 우리는 부끄러워집니다. 나는 안 된다고 느끼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다. 자기가 놓인 자리가 있습니다. 인간관계가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사람을 사랑하기로 마음먹고 작은 목표를 세우고, 예를 들면 매일 기도할 때 꼭 누군가를 위해 기도한다든가, 싫은 소리를 들어도 대꾸하지 않는다든가,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분들을 위해 조금의 돈을 바칠 수 있다든가,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물론 교회 안에도 많이 있습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이 예수님의 가르침을 행실로써 성실히 실천해 나갑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