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고보는 1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절) 고 말합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이 차별에 대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성경이 명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8-9절)
이 글로 미루어 보아 교회 사람들은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자신들이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 부자를 소중히 여기고 가난한 사람을 우습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은 이웃사랑을 권하는 계명을 어기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율법을 지키면 플러스 1, 지키지 못하면 마이너스 1, 이런 식으로 율법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지키지 못하는 일이 조금 있더라도 개의치 않고 최종적으로 플러스가 마이너스를 웃돌면, 그것으로 자신의 행실은 합격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아마 우리들 자신도 납득이 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율법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겉모습으로 차별하는 일이 있어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사람의 힘으로 지키려면 모든 것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킨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10-11절)
율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율법을 인간이 제멋대로 판단해서 가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계명은 지키되 이 계명은 지키지 않는다’고 선별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법에서도 사람이 하나의 법을 어기면 범죄자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에 있어서도 한 가지 잘못이 있으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교회나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대한 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다시 8절을 보면 야고보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라는 계명을 가장 고귀한 율법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 기준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나라에 사는 자에게 어울리는 규칙, 사는 길,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살릴 수는 없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씨의 에세이에 ‘인생(人生)’은 ‘사람을 살린다’고 쓴다. 즉, 자신을 살리고 주위의 인간을 살리는 것이 인생이다. 그게 진짜 인생이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지 않는다면 자신도 정말 살리지 않는다는 거죠. 남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과 남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라는 계명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라는 계명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살아야 그것을 진정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살아감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도 거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기 속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속죄 받은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여겨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하시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내 존재의 크기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이웃 존재의 크기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13절) 라고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여 가난한 자나 고아, 과부 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사람은 그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아무리 충실하게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킨 사람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 속에서 율법에 산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온전히 지켜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미 완전히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율법으로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자로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에 힘입어 담대히 나아간다면 그걸로 족한 것입니다.
2023年7月23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マタイ(마태복음) 22章 37~40節
〇讃 頌 讃頌歌 1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37 (詩編91編)
〇讃 頌 讃頌歌 314
〇聖書奉読 ヤコブの手紙(야고보서) 2章 1~13節
〇説 教 「人を分け隔てるな(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299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7月 23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人を分け隔てるな」 ヤコブの手紙 2章 1~13節
ヤコブは1節で「主イエス・キリストを信じながら、人を分け隔てしてはなりません」(1節)と言っています。実際に教会の中で、「人を分け隔てる(差別)」という問題があったようです。
ところが、教会の人々は、自分たちの誤りを素直に認めようとはしなかったようです。それどころか、「自分たちは聖書が命じている隣人への愛を実行している」と、考えていたようなのです。8節です。「もしあなたがたが、聖書に従って、『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最も尊い律法を実行しているなら、それは結構なことです。しかし、人を分け隔てするなら、あなたがたは罪を犯すことになり、律法によって違反者と断定されます。」(8-9節)
この文章から察すると、教会の人々は、「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律法を、自分たちは実行していると思っていたようです。なぜ、富んだ人を大事にして、貧しい人を軽んじるようなことをしていても、隣人愛を勧める戒めに背いていないと、思っていたかと言いますと、彼らの律法理解が影響していました。
彼らの律法理解では、ある律法を守ることについて、ある律法を守ればプラス1、守れなかったらマイナス1という仕方で、彼らは律法を守ることを考えていました。守れないことが少々あっても構わない。最終的にプラスがマイナスを上回っていれば、それで自分の行いは合格と見なしていたのです。このような考え方は、ついつい私たちも納得してしまいます。彼らはこのような律法観を持っていたので、人を見た目で分け隔てするようなことがあっても、彼らは深刻には受けとめなかったのです。
しかし、ヤコブはそうは考えません。律法を人の力で守ろうとするなら、すべてを完全に守らなくてはならない。そうでなければ守ったことにはならないと言うのです。
10節をご覧下さい。「律法全体を守ったとしても、一つの点でおちどがあるなら、すべての点について有罪になるからです。『姦淫するな』と言われた方は、『殺すな』とも言われました。そこで、たとえ姦淫はしなくても、人殺しをすれば、あなたは律法の違反者になるのです。」(10-11節)
律法は神さまが神の民にお与えになった戒めです。そこには神さまの御心が込められています。その律法を、人間が自分勝手な判断で選り好みすることは許されません。「この戒めは守るが、この戒めは守らない」と選別することはできません。この世の法律でも、人が一つの法律を犯せば、犯罪者となります。それと同じように、律法においても一つの落ち度があれば、律法の違反者になるのです。
それにしても、ヤコブは「人を分け隔てすること」を、教会やキリスト者にとって極めて重大なことと見なしています。それはどうしてなのでしょうか?
もう一度8節を見ますと、ヤコブは「『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教えを最も尊い律法」と言っています。人が生きる基準は、「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ことです。「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のが、神の国、神が支配される国に生きる者にふさわしい定め、生きる道、人生の指針なのです。
私たちの人生において、最も大切なことは、自分のために生き、自分を生かすことです。自分を愛せず、自分を生かすことのできない者が、他の人を愛し、生かすことはできません。三浦綾子さんは書かれたエッセーの中で、「『人生』は、人を生かすと書く。即ち、自分を生かし、まわりの人間を生かすのが人生である。それが本当の『人生』だ」と言いました。
人を生かしていないなら、自分をも本当に生かしていないと言うことです。人を愛していないなら、自分をも愛していないのです。自分を愛していないのに、人を愛することは出来ません。イエスさまが教えてくださった道は、自分のために生きるということと、人のために生きることが、一つになることなのです。
また、さらに大切なことは、「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掟が、「心を尽くし、精神を尽くし、思い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マタイ22:37)という掟と、結び合わされていることです。
「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戒めは、「心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という戒めに生きることによってしか、それを本当に行うことはできません。反対に、「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しなさい」という戒めに生きることによって、「心を尽くして、あなたの神である主を愛しなさい」という戒めが、いかに恵み深いものであるかを、人は悟ることができます。
ただ、私たちはこの「隣人を自分のように愛する」ということが、どれほど難しいことであるかを知っています。隣人を愛そうと願っても、そこで気づかされるのは、自分の愛の無さです。自分の罪深さなのです。
しかし、イエス・キリストの十字架による罪の贖いによって、私たちは神さまの前に義なる者(正しい者)とされ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が私たちの代わりに律法の要求を完全に満たし、律法を守らなければ救われないという重荷から私たちを解放してくださったのです。私たちは律法から自由な者となりました。律法ではなく、神さまの愛の中で生きる者になったのです。それは神さまの愛の中にいる自分の存在の大きさを知ったということです。そして、それと同時に、神さまの愛の中にある隣人の存在の大きさにも気づかされました。まさに、「隣人を愛する」ということと「神を愛する」ということは、結びついているのです。
最後にヤコブは「人に憐れみをかけない者には、憐みのない裁きが下されます。憐みは裁きに打ち勝つのです」(13節)と言います。「人に憐れみをかけない者」とは、人を見かけで判断し、貧しい者やみなしご、やもめなどを顧みない人のことですね。
終わりの日に、人はその為してきたことに応じて、裁きを受けることになります。その際に、どんなに忠実に自分の力で律法を守った人も、キリストの愛と憐れみの中で律法に生きた人に打ち勝つことはできません。なぜなら、人はどんなに律法を守ろうと努力しても、完全に守り通すことが出来ないからです。しかし、キリストの憐れみを受けた人は、キリストが律法の要求をすでに完全に満たして下さっています。
このキリストの十字架の恵みと憐みに与った私たちは、キリストの戒めである「神を愛し、隣人を愛する」という律法に生きていけば、それでよいのです。自分の救いを得るためでない。イエス・キリストに救われた者として、喜びと感謝をもってキリストの愛と憐れみに押し出されていけば、それでよいのです。
【2023년 7월 23일 주일예배(요약판)】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 야고보서 2장 1~13절
야고보는 1절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너희가 가졌으니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지 말라”(1절) 고 말합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 이 차별에 대한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교회 사람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솔직하게 인정하려 하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오히려 ‘자신들은 성경이 명하는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8절입니다. “너희가 만일 성경에 기록된 대로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하신 최고의 법을 지키면 잘하는 것이거니와 만일 너희가 사람을 차별하여 대하면 죄를 짓는 것이니 율법이 너희를 범법자로 정죄하리라”(8-9절)
이 글로 미루어 보아 교회 사람들은 ‘네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라’는 율법을 자신들이 실행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어째서 부자를 소중히 여기고 가난한 사람을 우습게 여기면서도 자신들은 이웃사랑을 권하는 계명을 어기지 않고 있다고 생각했는지 그들의 율법에 대한 이해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들은 어떤 율법을 지키면 플러스 1, 지키지 못하면 마이너스 1, 이런 식으로 율법에 대한 이해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기에 지키지 못하는 일이 조금 있더라도 개의치 않고 최종적으로 플러스가 마이너스를 웃돌면, 그것으로 자신의 행실은 합격이라고 간주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런 생각은 아마 우리들 자신도 납득이 갈 때가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이런 율법관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겉모습으로 차별하는 일이 있어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야고보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사람의 힘으로 지키려면 모든 것을 완전히 지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킨 것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10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 간음하지 말라 하신 이가 또한 살인하지 말라 하셨은즉 네가 간음하지 아니하여도 살인하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느니라”(10-11절)
율법은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에게 주신 계명입니다. 거기에는 하나님의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그 율법을 인간이 제멋대로 판단해서 가리는 것은 허용되지 않습니다. ‘이 계명은 지키되 이 계명은 지키지 않는다’고 선별할 수는 없습니다. 이 세상 법에서도 사람이 하나의 법을 어기면 범죄자가 됩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율법에 있어서도 한 가지 잘못이 있으면 율법을 범한 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 치더라도 야고보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을 교회나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대한 일로 간주하고 있습니다. 그건 왜 그럴까요?
다시 8절을 보면 야고보는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라는 계명을 가장 고귀한 율법이라고 합니다. 사람이 사는 기준이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이 지배하시는 나라에 사는 자에게 어울리는 규칙, 사는 길, 삶의 지침인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을 위해 살고 자신을 살리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고 자신을 살리지 못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고 살릴 수는 없습니다. 미우라 아야코 씨의 에세이에 ‘인생(人生)’은 ‘사람을 살린다’고 쓴다. 즉, 자신을 살리고 주위의 인간을 살리는 것이 인생이다. 그게 진짜 인생이다’ 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사람을 살리지 않는다면 자신도 정말 살리지 않는다는 거죠. 남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자신도 사랑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길은 자신을 위해 산다는 것과 남을 위해 사는 것이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또한 더욱 중요한 것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 라는 계명이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22:37) 라는 계명과 결부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은 ‘마음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살아야 그것을 진정으로 행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계명으로 살아감으로써 ‘마음을 다하여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는 계명이 얼마나 은혜로운 것인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다만 우리는 이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고 있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려고 해도 거기서 깨닫게 되는 것은 자기 속에 사랑이 없다는 것입니다. 바로 나의 죄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속죄 받은 것으로 우리는 하나님 앞에 의로운 자로 여겨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대신 율법의 요구를 온전히 충족하시고 율법을 지키지 않으면 구원받지 못한다는 무거운 짐에서 우리를 해방시켜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율법으로부터 자유롭게 되었습니다. 율법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사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내 존재의 크기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하나님의 사랑 안에 있는 이웃 존재의 크기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과 ‘하나님을 사랑한다’는 것은 연결되어 있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야고보는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에게는 긍휼 없는 심판이 있으리라 긍휼은 심판을 이기고 자랑하느니라”(13절) 라고 말합니다. ‘긍휼을 행하지 아니하는 자’란 사람을 겉모습으로 판단하여 가난한 자나 고아, 과부 등을 돌아보지 않는 사람을 말합니다.
마지막 날에 사람은 그 행한 것에 따라 심판을 받게 됩니다. 그 때 아무리 충실하게 자신의 힘으로 율법을 지킨 사람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 속에서 율법에 산 사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아무리 율법을 지키려고 노력해도 온전히 지켜낼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긍휼을 받은 사람은 예수님께서 율법의 요구를 이미 완전히 충족시켜 주셨습니다.
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와 긍휼을 받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계명인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한다’는 율법으로 살아가면 그만입니다. 자신의 구원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받은 자로서 기쁨과 감사를 가지고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에 힘입어 담대히 나아간다면 그걸로 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