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신앙생활은 “기다리고 바라는 생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는가 하면 13절에 적혀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 시기는 5절에 나와있는 “말세”라고 불리는 장래를 말합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는 온전히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히 바라는 생활이란 그 때가 올 것을 의식하면서 일종의 긴장감을 가지고 지내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때가 오면 “어, 왔네” 하면서 맞이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온전히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있고, 때문에 의식하면서 온전히 바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대비하는 활기찬 삶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아기를 잉태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여성은 아기가 태어날 것을 고대하면서 희망을 품고 건강관리를 하고 태교에 좋은 음악을 듣고 뱃속의 아기에게 말을 거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것입니다. 때문에 온전히 바라는 생활이란 대비하는 생활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며 기다리는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대비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대비하는 생활이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13절) 생활하는 것, 또 15절 이하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거룩한 자”로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심하여 거룩한 생활을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성인군자와 같은 도덕적인 생활을 상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딱딱해 보이는 이미지를 갖기 마련이죠. “도저히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어. 지속되지 않을 거야” 라고 부정적인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라는 생활이란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인군자와 같은 도덕적인 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비하는 생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면서’하는 거룩한 생활이라는 점에서 저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적하신 두 가지 비유를 떠올립니다. 그 중 하나는 마태복음 22장에 있는 <혼인 잔치 비유>입니다. 천국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비유인데, 천국이란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었던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중간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비유의 마지막에 왕자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혼인 잔치에서 쫓겨났다는 내용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남의 결혼식에 청바지나 운동복을 입고 참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학생이 취직 활동하면서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갈 때는 반드시 정장을 입고 갑니다. 평소 학교생활에서는 캐주얼한 혹은 간편한 평상복을 입고 다니지만, 취업준비를 하게 되면 당연한 말이지만 정장을 입습니다. 이것은 TPO(시간, 장소, 경우)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면접할 때는 그에 걸맞은 복장이 필요합니다. 정장을 입지 않고 면접을 하면 회사에 취직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천국이라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면 그에 걸맞은 복장이라는 대비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비유는 마태복음서 25장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똑같이 천국의 비유이면서 상황은 혼인 잔치인데, 당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으며 신부에게 찾아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서 길을 훤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10명의 처녀가 나오는데 신랑의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10명 중 5명은 기름이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기름을 사러 가는데 그 사이에 신랑이 찾아와 버려서 늦게 돌아온 5명은 혼인 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했고 예비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던 나머지 5명만이 신랑을 맞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랑이 늦게 온 불의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그걸 생각하면 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대비가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등을 꺼지게 않게 하면서 기다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여기서 “등”이란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주어지는 은혜를 온전히 바라면서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잃지 않고 계속 유지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의 “예복”을 계속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는‘그리스도를 입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인이자 죽어 마땅한 인간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로 충만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희생해 주셨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때문에 종말에 이르러, 다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라는 예복을 계속 입고 있어야만 합니다. 예복을 계속 입고 있을 때만 “거룩한 자”로 있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로 구원을 받아 천국이라는 혼인 잔치, 파티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계속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는 생활이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대비하는 생활이며, 대비하는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계속 믿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뭐야! 의외로 간단한 일이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하긴 생각만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라는 것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라는 것은 5절에 나와 있듯이 “말세”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롭게 하늘나라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다시 찾아와 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만들어 완성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의 이해는 현대 우리에게 리얼리티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의 끝은 앞으로의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지만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때문에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이 끝날 때가 아닐까 합니다. 죽어서 우리는 다시 성령이신 그리스도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끝낼 때 끝내는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끝내는 방법을 소중히 여깁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목숨은 끝이 있습니다. 그렇게 의식할 때 그 끝을 위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대비하게 될 것이고. 삶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바라는 생활은 대비하는 생활입니다. 종말을 대비하고 죽음에 대비하고 그리스도와의 재회에 대비하면서 하늘에 대비하는 생활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은 살아 있는지, 소망을 품고 살고 있는지, 사랑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자신의 생활을 다시 재검토하고 대비해 나갑시다.
2023年10月22日 主日礼拝式順・説教
〇黙 祷
〇招 詞 Ⅰテサロニケ(데살로니가전서) 5章 16~22節
〇讃 頌 讃頌歌 32
〇信仰告白 使徒信条
〇祈 祷
〇交 読 文 交読文 63 (詩編145編)
〇讃 頌 讃頌歌 285
〇聖書奉読 ペトロの手紙一(베드로전서) 1章 10~16節
〇説 教 「待ち望む生活 (온전히 바라는 생활)」
〇祈 祷
〇讃 頌 讃頌歌 521
〇奉献祈祷
〇献 金
〇報 告
〇頌 栄 讃頌歌 2
〇祝 祷
【 2023年 10月 22日 主日礼拝説教(要約版)】
「待ち望む生活」 ペトロの手紙一 1章10~16節
私たちの信仰生活は、“待ち望む生活”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ます。何を待ち望むのかと言えば、13節に書かれているように、「イエス・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に与えられる恵み」を待ち望むのです。それは、5節に記されている「終わりの時」と呼ばれる将来の時です。そのときに、イエス・キリストが再び現れる。そのキリストから与えられる恵みを私たちは待ち望んでいるのです。
そして、待ち望む生活というのは、その時が来るのを意識して、一種の緊張感を持ちながら過ごす生活です。何も意識しないまま、その時が来たら、“あっ、来た来た”と言って迎えるような生活ではないのです。「恵み」を待ち望むのですから、そこには希望があります。楽しみがあります。そして、それを待ち望むという意識は、「イエス・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に備えるという張りのある生活を生み出します。
例えば、女性がお腹に赤ちゃんを宿したとします。すると、その女性は赤ちゃんが生まれ出る時を待ち望み、希望を抱き、健康管理をしたり、胎教に良い音楽を聞いたり、お腹の中の赤ちゃんに話しかけたり、様々な準備をしながら過ごすでしょう。私たちの信仰生活もそのようなものなのです。待ち望む生活とは、備える生活であると言うことができます。
キリストを待ち望む生活とは、キリストを迎えるために備える生活です。そして、備える生活とは、「いつでも心を引き締め、身を慎んで」(13節)生活すること、また15節以下の内容から言えば、「聖なる者」として生活するということです。
いつでも心を引き締め、身を慎んで、聖なる生活をする。そう言われると、何だか聖人君子のような、道徳的な生活を想像す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何だか堅苦しそうなイメージを抱きます。“そんな生活、できないよ。続かないよ”とネガティブな気持になるかも知れません。けれども、心を引き締め、身を慎んでする聖なる生活とは、そういうものではないと思われます。単に、聖人君子のような、道徳的な生活をするのではないのです。
備える生活、心を引き締め、身を慎んでする聖なる生活ということから、私は、聖書の中でイエス・キリストがなさった二つの譬え話を思い出します。その一つは、マタイによる福音書22章にある〈婚宴のたとえ〉です。天の国とはこういうものだ、という譬えですが、それは、ある王様が王子のために婚宴を催したようなものだ、と言うのです。途中の内容は省きますが、この譬えの最後に、王子の披露宴に招かれた人の中に「礼服」を着ていない人がいて、その人は披露宴の会場から追い出されるという結末になっています。
人の結婚式に、ジーパンやジャージで出席する人はいません。また、学生が就職活動をする時には、会社の面接等には必ずスーツを着て行きます。普段の学校生活では、カジュアルな、あるいはラフな普段着でいるのに、就職活動になったら、当たり前のようにスーツを着る。それは、TPO(時、場所、場合)をわきまえるからです。面接には、それにふさわしい服装がある。それを着なければ、会社にいれてもらえなくなる、と考えるからです。そのように、天の国という披露宴会場に入れてもらうには、それにふさわしい服装という備えが必要だということです。
更に、もう一つ思い起こす譬え話は、同じくマタイによる福音書25章にある〈十人のおとめのたとえ〉です。やはり天の国の譬えで、しかもシチュエーションは、結婚披露宴なのですが、当時のユダヤの披露宴は夜に行われ、花嫁のもとにやって来る花婿を迎えるために、ともし火を掲げる役割を持った女性たちがいました。この話には10人のおとめが出て来ますが、花婿の到着が遅れたために、10人のうちの5人は油が切れてしまいます。そこで夜中に油を買いに行くのですが、その間に花婿がやって来て、遅れて帰って来た5人は会場に入れてもらえなかった、予備の油を準備していた他の5人だけが花婿を迎えることができた、という話です。
花婿が遅れるという不測の事態が起こったのだから、それを考えたら、ちょっと厳しいんじゃない?という気もします。けれども、花婿を迎えるには、すなわちイエス・キリストを迎えるには、そのための備えが必要だということです。ともし火を消さないことが必要なのです。
この“ともし火”とは、信仰のことです。イエス・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に与えられる恵みを待ち望む信仰です。その信仰を捨てず、失わず、保ち続けるのです。
それは言い換えれば、信仰の「礼服」を着続けるということです。ガラテヤの信徒への手紙3章27節には、「キリストを着る」という表現があります。それは、罪人であり、死すべき人間である私たちが、キリストの愛と赦しに覆われるということです。私たちは、天国に入れてもらうにはふさわしくない罪人なのだけれど、キリストが私たちの罪のために十字架に架かって犠牲となってくださったので、罪を赦されて、天国に入れてもらうことができる。だから、「終わりの時」まで、再びキリストと出会う時まで、キリストの愛と赦しという礼服を着続けるのです。それを着続けることで、「聖なる者」としていただくのです。キリストの愛と赦しによって救われ、天国という宴会場、パーティー会場に入れていただけると信じ続けるのです。
だから、キリストを待ち望む生活とは、キリストに備える生活であり、備える生活とはキリストを信じ続ける生活だということになります。何だ、意外に簡単なことじゃないかと思われるのではないでしょうか。確かに、思ったほど難しいことではないように思われます。けれども、思っているよりも簡単ではないような気もします。それは、「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というものを、どのように捉えているか、に因ります。
「キリストが現れるとき」というのは、5節に記されているように「終わりの時」だとお話しました。当時のクリスチャンたちは、この世界が終わり、新たに天の国が始まる時だと信じました。イエス・キリストが天から再びやって来て、この世界を天の国に造りかえ、完成させる時だと信じていました。
けれども、その信仰の理解は、現代の私たちにとってリアリティーがありません。そのような世界の終わりは、この先の将来に起こるのかも知れませんが、いつ起こるのかわかりません。ですから、私たちにとってリアルなのは、自分自身の“命の終わりの時”ではないでしょうか。死によって私たちは再び、霊であるキリストと出会う。そして、天国に迎え入れられる。そう考え、信じる方がリアルなのです。
人は何かを終わらせる時、終わり方を考えます。終わり方を大切にします。人生もそうではないでしょうか。自分の命には終わりがある。そう意識した時、その終わりの時のために、私たちは本気で備えるようになると思います。生き方を考え直すと思います。
待ち望む生活は、備える生活です。終わりの時に備え、死に備え、キリストとの再会に備え、天に備える生活です。自分を省みて、信仰が生きているか、希望を抱いているか、愛をもって人と関わっているか、自分の生活を改めて見直し、備えていきましょう。
【2023년 10월 22일 주일예배(요약판)】
“온전히 바라는 생활” 베드로전서 1장 10~16절
우리의 신앙생활은 “기다리고 바라는 생활” 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무엇을 바라는가 하면 13절에 적혀 있듯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에 너희에게 가져다 주실 은혜”를 온전히 바라는 것입니다. 그 시기는 5절에 나와있는 “말세”라고 불리는 장래를 말합니다. 그때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은혜를 우리는 온전히 손꼽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온전히 바라는 생활이란 그 때가 올 것을 의식하면서 일종의 긴장감을 가지고 지내는 생활을 가리킵니다. 아무것도 의식하지 않은 채 그때가 오면 “어, 왔네” 하면서 맞이하는 생활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은혜”를 온전히 손꼽아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거기에는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즐거움이 있고, 때문에 의식하면서 온전히 바라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대비하는 활기찬 삶을 만들어 냅니다.
예를 들어, 여성이 아기를 잉태했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그 여성은 아기가 태어날 것을 고대하면서 희망을 품고 건강관리를 하고 태교에 좋은 음악을 듣고 뱃속의 아기에게 말을 거는 등 여러 가지 준비를 하면서 지낼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생활도 그런 것입니다. 때문에 온전히 바라는 생활이란 대비하는 생활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며 기다리는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 대비하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대비하는 생활이란,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13절) 생활하는 것, 또 15절 이하의 내용을 인용하자면, “거룩한 자”로서 생활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심하여 거룩한 생활을 한다, 그런 말을 들으면 성인군자와 같은 도덕적인 생활을 상상하실 지 모르겠습니다. 딱딱해 보이는 이미지를 갖기 마련이죠. “도저히 그런 생활을 할 수 없어. 지속되지 않을 거야” 라고 부정적인 기분이 들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여’라는 생활이란 그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성인군자와 같은 도덕적인 생활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대비하는 생활, ‘마음의 허리를 동이고 근신하면서’하는 거룩한 생활이라는 점에서 저는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적하신 두 가지 비유를 떠올립니다. 그 중 하나는 마태복음 22장에 있는 <혼인 잔치 비유>입니다. 천국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비유인데, 천국이란 어떤 임금이 아들을 위해 혼인 잔치를 베풀었던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중간 내용은 생략하겠습니다만, 이 비유의 마지막에 왕자의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사람 중에 “예복”을 입지 않은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혼인 잔치에서 쫓겨났다는 내용으로 결말을 맺고 있습니다.
남의 결혼식에 청바지나 운동복을 입고 참석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또, 학생이 취직 활동하면서 회사에 면접을 보러 갈 때는 반드시 정장을 입고 갑니다. 평소 학교생활에서는 캐주얼한 혹은 간편한 평상복을 입고 다니지만, 취업준비를 하게 되면 당연한 말이지만 정장을 입습니다. 이것은 TPO(시간, 장소, 경우)를 분별하기 때문입니다. 면접할 때는 그에 걸맞은 복장이 필요합니다. 정장을 입지 않고 면접을 하면 회사에 취직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처럼 천국이라는 혼인 잔치에 들어가려면 그에 걸맞은 복장이라는 대비가 필요하다는 말씀입니다.
또 하나 생각나는 비유는 마태복음서 25장에 있는 <열 처녀의 비유>입니다. 똑같이 천국의 비유이면서 상황은 혼인 잔치인데, 당시 유대인의 혼인 잔치는 밤에 열렸으며 신부에게 찾아오는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 등을 들고서 길을 훤하게 해주는 역할을 하는 여성들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에는 10명의 처녀가 나오는데 신랑의 도착이 늦어지는 바람에 10명 중 5명은 기름이 떨어져 버립니다. 그래서 한밤중에 기름을 사러 가는데 그 사이에 신랑이 찾아와 버려서 늦게 돌아온 5명은 혼인 잔치에도 들어가지 못했고 예비 기름을 준비하고 있었던 나머지 5명만이 신랑을 맞을 수 있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신랑이 늦게 온 불의의 사태가 벌어졌기 때문에, 그걸 생각하면 좀 너무 심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신랑을 맞이하기 위해서는,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를 맞이하기 위해서는 이를 위한 대비가 필요했다는 말입니다. 등을 꺼지게 않게 하면서 기다릴 필요가 있었던 것이죠.
여기서 “등”이란 신앙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주어지는 은혜를 온전히 바라면서 기다리는 신앙입니다. 그 믿음을 버리지 않고, 잃지 않고 계속 유지해야만 합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신앙의 “예복”을 계속 입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장 27절에는‘그리스도를 입다’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죄인이자 죽어 마땅한 인간인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로 충만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에 가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죄인이지만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매달려 희생해 주셨기 때문에 죄를 용서받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때문에 종말에 이르러, 다시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까지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라는 예복을 계속 입고 있어야만 합니다. 예복을 계속 입고 있을 때만 “거룩한 자”로 있게 해 주십니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용서로 구원을 받아 천국이라는 혼인 잔치, 파티장에 들어갈 수 있다고 계속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온전히 바라는 생활이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를 대비하는 생활이며, 대비하는 생활이란 그리스도를 계속 믿는 생활이라는 것입니다. ‘뭐야! 의외로 간단한 일이네’라는 생각이 들지 않으세요? 하긴 생각만큼 그렇게 어려운 일은 아닌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론 생각보다 쉽지 않은 것 같기도 합니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라는 것을 어떻게 파악하고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실 때” 라는 것은 5절에 나와 있듯이 “말세” 라고 말씀드렸습니다. 당시 기독교인들은 이 세상이 끝나고 새롭게 하늘나라가 시작될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늘에서 다시 찾아와 이 세상을 하늘나라로 만들어 완성해 주실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신앙의 이해는 현대 우리에게 리얼리티가 없습니다. 그런 세상의 끝은 앞으로의 미래에 일어날지 모르지만 언제 일어날지 모릅니다. 때문에 우리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우리 자신의 생명이 끝날 때가 아닐까 합니다. 죽어서 우리는 다시 성령이신 그리스도와 만나게 됩니다. 그리고 천국으로 인도됩니다. 그렇게 생각하고 믿는 편이 현실적입니다.
사람은 무언가를 끝낼 때 끝내는 방법을 생각하게 됩니다. 끝내는 방법을 소중히 여깁니다. 인생도 그렇지 않을까요? 자신의 목숨은 끝이 있습니다. 그렇게 의식할 때 그 끝을 위해서 우리는 진심으로 대비하게 될 것이고. 삶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온전히 바라는 생활은 대비하는 생활입니다. 종말을 대비하고 죽음에 대비하고 그리스도와의 재회에 대비하면서 하늘에 대비하는 생활입니다. 자신을 돌아보고 신앙은 살아 있는지, 소망을 품고 살고 있는지, 사랑으로 사람과의 관계를 맺고 있는지, 자신의 생활을 다시 재검토하고 대비해 나갑시다.